들려온 목소리는 여자의 것이었다.
그 여자. 쓰레기 더미 뒤에서 들었었던 바로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율리에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방심이라면, 설마 경비대장급 정도 되는 자가 한밤중에 지도자의 침실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는 정도였다.
뭐 '그렇게 된 이야기'인가 - 하고 율리에는 혀를 찼다.
"무기를 내려놔. 한 손으로."
내려놓을 수 없는 무기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방안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의지할 수 있는 달빛 '빛'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여렸다.
율리에는 그 말에 따르듯이 천천히 오른손을 아래로 내렸다. 무릎을 굽히면서 바닥에 손이 닿을 즈음,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반지를 눌렀다. 거의 들리지도 않는 소리와 함께 긴 부분이 반지로부터 깔끔하게 부러져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말하자면 무기를 내려놓은 것이다.
"양 손 모두 머리 뒤로 올려."
율리에는 그 말에 따랐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절도 있는 명령이었다.
그녀가 조금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불을 켜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리라. 율리에는 곁눈질로 그녀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와 함께 율리에는 자신의 예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완벽한 무장을 갖춘 - 모자와 두건까지 갖춰 쓴 - 경비복 차림이었다. '그렇게 된 이야기'에 의해 이 방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달칵. 스위치 소리와 함께 갈색 빛의 반등(半燈)이 켜졌다.
"으음?"
불빛이 들어오는 소리와 함께 침대 쪽에서 반응이 있었다.
그 순간, 율리에의 오른손이 휙 앞으로 뿌려졌다. 은빛의 침과 같은 물질이 빨려가듯 날아갔다.
"!"
고개를 든 아누파 조합장은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율리에를 향했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율리에는 몸을 날려 침대 옆쪽으로 굴렀다. 펑! 커다란 소리와 함께 침대의 일부분이 날아갔다. 여자가 들고 있던 총은 라이플이었던 것이다.
"경비병!!!"
철컥, 여자는 다시 장전을 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순간, 여자는 눈을 의심했다. 분명 침대 뒤로 돌아갔다고 생각한 암살자가 어느 사이엔가 자신의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피할 틈도 없다. 그대로 날카로운 흉기가 자신의 얼굴에 꽂힐 것이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총을 그쪽으로 향했다. 쾅!! 또 한번의 폭음이 울림과 동시에 그녀는 느꼈다. 빗나갔어! 죽는다!
그러나, 기다리던 차가운 금속의 느낌은 전해지지 않았다.
여자는 숨을 멈추었다. 눈은 감고 있지 않았다. 죽는 그 순간에도 눈은 감을 수 없다. 그렇지 않은 자는 보다 먼저 죽게된다. 숙련된 용병인 그녀에게 있어서, 이것은 이미 본능을 앞서는 또 하나의 본능이었다. 날카로운, 그래서 그 끝도 잘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무기가 자신의 코 바로 아래
에 멈춰있었다.
인중(人中)이다.
정확히 맞추는 것도, 뚫는 것도 어렵지만, 그곳의 신경을 파괴하게 되면 극도의 고통 때문에 당한 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게다가 지금 눈앞에 놓여있는 긴 침과 같은 무기는, 그대로 뼈를 관통해서 숨골에 이르러 희생자를 즉사에 이르게 할 것이다. 상대방의 움직임 하나로, 그녀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침대에 쓰러져 있는 아누파 조합장의 모습이 침침한 전구빛에 길게 늘어졌다.
총을 다시 장전하기 전에 상대가 먼저 움직일 것이다. 그것은 분명했다.
그녀는 상대가 어째서 자신을 죽이지 않고 지금과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온통 갈색의 천과 군복으로 뒤덮인 차림. 용병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만한 키에 일반적인 체형. 암살자의 정체는 보이는 것만으로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가려진 얼굴 사이로 보이는 무색(無色)에 가까운 눈동자는, 불빛에 의해 푸른색이라기보다는 회색에 가깝게 보였다.
조합장의 사체 밑으로 천천히 붉은 핏물이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여자가 외친 소리에 의해서 경비병들이 달려오는 발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켜 놓았던 불빛이 사라졌다.
"대장님?!"
벌컥 침실 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밖이야! 빨리 추적해라!"
"예?"
"뛰어내렸어! 암살자다!"
덧창은 활짝 열려있었고, 산지의 찬 바람이 방안을 침입해 들어오고 있었다. 불도 켜져 있지 않아, 라이플을 들고 있는 대장의 실루엣 외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경비병이 머뭇거리자, 그녀는 단호하게 명령했다.
"1부대는 산지 밑으로, 2부대와 3부대는 주변을 샅샅이 탐색해! 쥐새끼 하나 빠져나갈 수 없도록!"
"예, 옛!"
경비병들은 다시금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들이 나간 잠시 후, 문은 조용히 저절로 - 아니, 또 하나의 어두운 실루엣에 의해서 - 닫혔다.
"잘했어."
나직한 목소리가 가려져 있었던 문 뒤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라이플의 총알들은 이미 침입자에게 빼앗겼다. 그리고 목덜미에 꽂혀져 있는 바늘의 위협을 느끼면서, 그녀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엉뚱한 곳을 찾도록 명령한 것이다.
현재 그녀는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목덜미에 꽂은 바늘은 척추 아래로 약간의 움직임만 취해도 격통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동안, 정체를 알 수 없는 침입자는 침대로 다가가 조합장의 사망을 확인한 뒤, 자신의 무기를 회수하고 있었다.
"이제 됐잖나?"
그녀는 날카로우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만은 평소와 다름없이 낼 수 있었다. 다만, 소리를 지르기 위해서 숨을 들이쉬려고 하면 통증이 갈비뼈를 죄어온다는 것만 빼고는.
"살려두는 거나 감사하게 여기시지."
침입자의 목소리는 묘한 여운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친절한 목소리라고까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왜 날 살려둔 거냐?"
"경고를 위해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온 대답에 그녀는 숨을 삼켰다. 역시 길드가…! 그녀는 있는 힘껏 얼굴이 보이지 않는 침입자를 노려보았다. 그는 모든 것을 처리한 듯 소리 없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달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방안에서, 가까이 다가온다고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그러나,
눈 밑까지 얼굴을 가린 그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거의 색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연한 하늘색을 띠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오히려 떠오르듯이 보이는 그 색깔에 그녀는 조금은 신기하다고 느꼈다.
"이것은 길드로부터의 경고 메시지… 맞다. 이 광산은 당신들의 것이 아니야. 그렇다고, 셀레스티안의 것도 아니지."
"그럼 길드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파렴치한 자식들! 바실리스카, 아니 바쉬는 침을 뱉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일단은 길드의 것으로 해두는 쪽이 좋아."
바쉬의 눈섭이 꿈틀거렸다. 일단은? 무슨 소리야? 무언가 위화감이 있었다. 지금의 발언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일단 뭐라고 해도 길드에서 보낸 암살자가 할 말이 아니었다. 아니, 말은 그렇다 치고, 암살하러 온 자가 경비대장을 붙들어 두고 설득을 요구하고 있다는 자체도 웃긴 이야기다. 그러나 눈앞의 침입자는 아랑곳없이 빠른 속도로 말을 이었다.
"잘 들어. 칸린 채굴장의 주도권은 현재 길드 - '테라탁'에 소속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몬샤가 끝남과 동시에 셀레스티안이 이번 분쟁에 개입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조합측으로서도 길드측으로서도 결코 환영할만한 사태가 되지 못하는 건 자명하지."
"우리보고 굶어죽으라는 건가 그럼?!"
"욕심도 적당히 부리는 게 좋아. 칸린 채굴장의 노동자는 셀레스티안 평균 생활 수준보다 5% 정도는 초과한 임금을 받고 있다. 굶어죽는다는 건 설득력이 없어."
"웃기지 마, 절대 임금으로 비교하는 게 말이 될 것 같아? 돈은 많아도 살 게 없다는 걸 알기나 하는 거야?"
"그래서 정말로 굶어 죽나?"
색이 없는 눈동자가 똑바로 자신을 직시하였고, 바쉬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분명, 자신들의 싸움은 - 아니 조합의 싸움은 - 생존권의 문제를 따지는 것은 아니었다. '보다 더' 가지기 위해서. '보다 더' 얻어내기 위해서의 싸움이었다.
"셀레스티안의 확장 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
"……."
"분쟁의 씨앗도 돌파구도 결국은 무기와 식량이다. 살아남고 싶다면, 당신들이 다투어야 할 건 칸린 광산의 이권 따위가 아니라는 거야."
"뭘 말하고 싶은 거냐?"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든 것은 묘한 설득력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이 침입자의 말에 대꾸를 하게 만들고 있는 것도 같은 것이었다.
"이권 다툼은 전문가에게 맡겨. 그렇지 않으면 셀레스티안은 언제까지고 확장을 계속하게 된다. 칸린 광산의 철광석이 약간의 피흘림으로 손에 들어올 수 있다면 전쟁 장기화가 문제가 아니야. 결국은 셀레스티안의 승리가 되지."
"당신… 설마 '타노토스'인가?"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셀레스티안에 반항하는 자들, 거역하는 반역자들의 통칭.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암살 따위를?
"설마. 타노토스와 길드는 연관이 없어."
길드에서 보낸 자. 암살과 지금의 태도의 강한 위화감은 그녀의 머리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원하는 건 뭐야?"
"셀레스티안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의 성립이다."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의외의 발언이었다. 그녀는 갈라진 입술에 침을 묻혔다.
"그건 길드가 바라는 바인가?"
"정치적인 면에 한정해서라면."
"그럼?"
"독점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건강하지 못한 법이지. 권력에서건 경제에서건."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길드에서 훈련받은 협상(?) 방법일지, 아니면 저자가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는 길드의 이단 같은 존재일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침입자의 말에는 그녀의 흥미를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한테 바라는 게 뭐지?"
"조합원들을 설득하는 것, 그리고 가능한 빠른 시일 내로 길드와 재협상에 들어갈 것."
길드에서 보낸 자라면 당연한 요구사항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저런 협박(?)을 들으면 침을 뱉어주면서 '죽여라'라고 외치던가, 길드 쪽으로 전향하여 광산의 주요 시설 파괴를 돕던가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지만 저 자가 여태까지 말한 서론들 덕분에 지금의 말은 이상할 정도로 거부감 없이 들려왔다. 그리고, 마치 지금 이 자리가 협상을 할 수 있는 자리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가능할 거라고 봐? 조합원들은 길드를 원수로 생각해."
"가능한 전력을 보존하고, 길드와 손을 잡지 않으면 안돼. 당신들의 힘을 필요로 하는 곳이 곧 생긴다."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웃어넘기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당신들의 전력 보전 여부, 그리고 그들과의 협력 여하에 따라 아카사 산맥… 아니, 북동부 지역 전체의 생존이 좌우되게 될 테니."
바쉬의 표정이 굳었다. 저 자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나 있는 것인가? 목에 꽂혀있는 바늘의 이물감이 문득 느껴졌다.
"당신은… 대체 뭐지?"
침입자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크칼리[毒矢]."
"뭐?"
"이제 그만 바이바이 해야겠군."
그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
"당신 부하들이 돌아오고 있어. 빠른걸?"
그제서야 그녀도 지금이 그다지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큼성큼 그녀를 지나 창문을 향해 걸어가는 침입자를 향해 바쉬는 황급히 외쳤다.
"이거 빼 주고 가!"
목에 침이 꽂혀있는 상태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녀가 협박당해 거짓말을 했다는 것도 들통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녀의 입지도 위태로워지고 만다.
"걱정 마. 저들이 올 때쯤 되면 녹아있을 테니."
녹아…? 바쉬는 놀라서 창문을 쳐다보았다 - 정확히 말하면 고개만을 돌렸다. 그러나 이미 그 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키리오가 깨어난 것은 9시가 넘어서였다. 원래 같은 방에는 줄라이와 윤선생이 묵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눈을 떴을 때 방안에 있는 것은 윤선생뿐이었다.
"정신 들었습니까?"
윤선생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이마에 손을 댔다. 따듯하고
커다란 손이 이마에 닿자 키리오는 멍한 눈으로 윤선생 쪽을 쳐다보았다.
방에는 어두우나마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 윤선생의 금갈색 머리카락이 흐릿한 불빛에 비쳐서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따듯한 감촉이 이마를 쓰다듬었다.
키리오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윤선생의 손이 머리에 닿아있는 것만으로, 힘이 빠진 듯이 움직일 기운이 나지 않았다.
"걱정마세요. 잘 해결되었으니까…."
윤선생의 목소리는 조금은 공허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잘…?"
"그래요, 잘."
"밀레…이나…"
"그녀는 잡니다. 저쪽 방이에요."
윤선생은 이마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침대 곁에 가져다 둔 의자에 앉아있는 상태였다.
"키리오…."
윤선생은 부드럽게 키리오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어린아이를 부르는 것과 같은 목소리였다. 키리오는 누운 상태로 고개를 돌려 윤선생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밀레이나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
키리오는 멍청한 표정으로 윤선생을 바라보았다.
술집은 꽤 떠들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슬란은 셀레스티안에 속하지 않은 도시 중에선 제법 번화한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용병들과 장사꾼들이 드나드는 도시이고, 상거래가 도시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이다. 평소보다 밤의 얼굴이 더욱 화려한 쪽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이러고 있으면 되는 거 맞아?"
줄라이는 술잔을 손에 든 채 나직하게 말했다. 질은 약간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줄라이를 쳐다보았다.
"한번만 더 물어보면 열 번이야."
"뭐가 벌써 열 번이야?"
"어쨌든."
"벌써 두 시간이나 그냥 이러고 있잖아!"
줄라이의 투덜거림은 왁자지껄한 소음에 간단하게 묻혀버렸다.
지금 그들은 종합 여관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술집에 앉아있었다. 질의 말에 의하면 '접선 장소'라고 하는 곳이었다.
사실 줄라이는 아슬아슬하게 미성년과 성년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므로 굳이 말하자면 술을 마실 수 없는 나이다. 하지만 그런 걸 따질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당장에 지금만 해도 질과 서로 딱딱한 육포 하나를 사이에 놓고 술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한두 잔 이상을 마실 생각은 질에게도 줄라이에게도 없었다. 술을 마시기 위해 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접선을 위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이지, 두 시간을 넘게 지루하게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줄라이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질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지 참을성이 좋은 것인지 가만히 있었지만.
질의 일침에 줄라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부루퉁한 입으로 씁쓸한 알콜을 조금 머금어 삼켰다.
그들은 현재 모호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들이 처한 사태는 더 이상 확실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들의 상태만큼은 정말로 모호했다.
우선 윤선생이 무언가 셀레스티안 - 아니, 헥스트론이라던가 노스미히라는 이상한 이름의 기관들과 갚은 관계에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수배당한 상태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 질은 상당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윤선생은 마법사다.
그가 말하지 않겠다면 누구라도 말하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줄라이와 질은 더 묻지도, 추궁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접선 상대를 만나기 위해서 여관을 나섰다.
"계속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진짜?"
"작작 좀 해라, 응?"
질이 드디어 화를 내기 직전에 이르렀을 때,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술 더 필요 없소?"
그건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바텐더 - 라기보단 이 녀석도 용병처럼 보였지만 - 였다. 줄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요."
"그럼 꽃은?"
웬 꽃? 줄라이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질이 대답했다.
"있으면 좋죠."
"새 종류, 한번 해볼 테요?"
"새 것보다는 늙은 것이 좋아요."
질의 말에 바텐더는 약간 눈썹을 모았다. 그리고 곧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예를 들면 어떤 거?"
"할미꽃이라던가."
"안에 들어가야 볼 수 있는데… 가겠소?"
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줄라이는 영문을 모르는 채 따라서 일어났다.
서거나 앉아서 떠들고 술을 마시는 인파들 사이로, 바텐더는 그들을 술집의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쪽에는 뒤쪽, 아니면 또 다른 안쪽으로 통하는 것으로 보이는 문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가는 질에게 줄라이가 물었다.
"할미꽃이 뭐야?"
"나도 몰라."
"엥?"
바텐더는 문을 열었다.
"이쪽으로."
내부는 어두컴컴한 복도였다. 칠을 새로 한지 얼마 안되었는지, 매캐한 페인트 냄새가 복도를 채우고 있었다. 군데군데 늘어선 등불만이 유일한 조명이었다.
"오른쪽 끝 방으로 들어가시오."
바텐더의 말과 함께 문이 닫혔다. 단 한 꺼풀의 벽에 의해 왁자지껄한 바깥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차단되고 있었다. 질은 한시름 놓은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모르는 데 어떻게 대답했어?"
질은 한심함과 경멸함을 반쯤 섞은 눈초리로 줄라이를 쳐다보았다. 암호란 말이다, 이 멍청아. 하지만 그녀가 단번에 말을 내뱉지 않은 것은, 그 정도의 양식과 참을성은 아직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질은 한 템포를 쉰 뒤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생각보다 진짜로 돌대가리야."
"뭐?"
줄라이는 즉각 발끈했다. 그러나 질이 줄라이의 반응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섰기 때문에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복도 양쪽으로는 꾀죄죄한 문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줄라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언가 묘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꽃이란 거… 설마…"
"이쪽 지방에서 쓰는 말이야. 셀레스티안에선 뭐라고 부르지? 도프(dope)라고 하나?"
마약이었다. 줄라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옛날에나 쓰던 말이야."
마약 같은 건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건 자기 능력으로 세상을 헤쳐나갈 힘이 없는 놈들이나 하는 덜떨어진 짓이다.
"설마 노시쿠란이라는 녀석들, 마약거래를 하는 거야?"
"몰라.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묘한 소리도 간혹 들려왔다. 그러니까 '꽃'을 취급하는 방에 남녀가 같이 있게 된다면 뻔히 벌어질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방 앞에서 질은 잠시 멈추어 섰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덜컥하고 가볍게 문은 열렸다.
"왜…?"
키리오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무언가에 반문을 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언제나 대부분의 대화는 목소리보다는 표정과 손짓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저 무뚝뚝하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목소리를 낸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있어서나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나 유쾌하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어나자마자 갑작스럽긴 하지만… 알고 싶어서… 아니, 알아야 해서입니다."
윤은 미소짓고 있지 않았다. 방안은 침침했는데, 그 때문인지 그의 얼굴도 그다지 밝아 보이진 않았다.
"당신은 밀레이나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는 조용히 키리오의 답을 기다렸다. 키리오는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윤선생을 마주보고 있었다.
"…힘."
키리오의 목소리는 낮고 작았다. 그리고 그는 그 외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더 하고 싶은 것 같지도 않았다.
윤선생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한숨이라고 하기엔 미미하고 작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어떤 실망감, 안도감, 그리고 무언가를 확인했다는 그런 빛이 감돌고 있었다.
"키리오."
윤의 말에 키리오의 눈동자가 그에게 초점을 맞췄다. 푸른 눈. 시리도록 푸른 눈이다. 윤선생은 슬픔을 느꼈다. 어째서, 저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들에 기쁨의 감정이 떠오르는 것을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인지. 몇 번을 똑같이 되풀이되는, 그러한 쳇바퀴 같은 상황을 맞이해야만 하는지.
"만약, 당신 자신과 그녀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윤선생은 조용히 물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 낡은 소파에 각각 앉아있는 한 명의 남자와, 그 뒤에 마치 보디가드처럼 서 있는 두 명의 남자였다. 뼈대가 드러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으로 보일 정도의 가구들이라, 가운데 놓여있는 테이블에 유리가 놓여있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어서들 오세요."
그들에게 인사를 한 것은, 앉아있는 금발의 남자였다. 목에 찰랑거릴 정도의 길이로 잘 정돈된 머리카락이었다. 그는 입 근처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웃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 보이는 가느다랗고 잘 다듬어진 손톱들은 분홍색의 펄로 칠해져 있었다. 줄라이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어머, 놀랐나요."
질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좀 벌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서둘러 평정을 가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조금 더 빨리 접촉해주실 줄 알았는데요."
"일이 좀 어긋난 게 아닌가 싶어서… 경계하고 있었죠. 게다가 두 명이라고는 들었지만 아가씨와 소년일 줄은 몰랐으니까…."
접선 예정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곳에는 윤선생과 질이 올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서로 연락이 안되고 있었어도 이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줄라이는 용케도 자신들이 접선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만났으니 되지 않았나요?"
그의 말에 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나, 줄라이가 잔뜩 굳어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내 정신 좀 봐, 앉으라고 권하지도 않았네. 자, 자, 앉아요."
질과 줄라이는 그가 권한대로 자리에 앉았다.
"나는 줄…"
줄라이의 말은 질이 발을 콱 밟으면서 끊겼다. 줄라이는 소리를 지르기 직전에 혀를 깨물었고, 질은 가볍게 말했다.
"소개 같은 건 필요 없겠죠. 미스터?"
"안전한 걸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그는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줄라이는 끔찍한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꽤나 노력해야 했다. 물론, 군대에서 있다보면 별별 녀석을 다 만날 수 있다. 그러니까 여장남자를 눈앞에 둔 것도 처음은 아니었다. 다만 그때에는 굳이 계속 상종할 필요도 없었거니와 눈앞에서 마구 얼굴을 구겨도 별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물론 카를로스는 '편견은 나쁜 것'이라던가 '게이 - 카를로스는 여장남자를 그렇게 불렀다 - 중에 나쁜 놈은 없다'라던가 하는 소리를 했었지만.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얼굴을 구겼다간 거래는 둘째치고, 저 금발 남자의 뒤쪽에 서 있는 두 명의 어깨들이 자신을 가만히 놔둘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저 소년에 대해 알고 싶군요. 아니, 긴장할 거 없어요. 우리가 연락 받은 것에는 아가씨 데이터 밖에 없었기 때문에… 거래 상대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은 찜찜하니까 말이죠. 그래서 그러는 것 뿐."
"밝힐 수 없다면요?"
"호호호."
표정관리라는 것은 꽤나 많은 노력을 요구했다. 빌어먹을. 줄라이는 왜 자신이 이곳에 따라왔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걱정 말아요, 걱정 말아. 미슬란의 할미꽃은 누구의 과거도 신경 쓰지 않아요. 알고자 하는 건 내 호기심일 뿐이니까."
질은 줄라이를 잠시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아르테마 용병단 소속의 질. 이쪽은 현재 협조해주고 있는 줄라이입니다."
"반가워요. 난 마빈이라고 해요."
그는 붙임성 좋게 인사했다. 몇 분이나 지났다고 어느새 적응이 되었는지,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렇게까지 역겹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근데 그 할미꽃이 뭡니까?"
줄라이! 질이 황급히 줄라이의 발을 밟으려는 순간, 마빈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꽃이죠. 아주 아름다운 꽃. 홀대받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나마 구해볼
수도 없는 걸요."
"하아?"
줄라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당신 의외로 귀여운 데가 있군요. 마음에 들었어요."
줄라이는 왠지 흠칫해서 경계하는 눈빛으로 마빈을 쳐다보았다. 마빈은 그런 그를 보면서 더욱 재미있어하며 웃었고, 심지어는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거한들도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질은 한심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꽤 노력하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오후의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고 윤선생의 상태가 이상하지만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녀는 줄라이를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줄라이가 뭘 알고 이곳에 따라온 것은 아니었다. 거래의 대부분은 질이 그 내용을 잡고 있었고, 윤선생이 그 상태만 아니라면 당연히 그가 이 자리에 왔을 것이다. 다시 말해 줄라이는 이 거래에서는 끊어진 팬벨트만큼이나 쓸 데 없는 존재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들이 거래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아는 순간만큼은, 줄라이도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연동통신(連動通信).
줄라이가 소리를 지르지 않았던 것은 질의 장화가 줄라이의 발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동통신은 셀레스티안 성립의 기초가 된 기술이자, 그들이 지금까지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요인이기도 했다. 유선통신도 전파 통신도 아닌, 방해가 불가능한 꿈의 기술.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방해할 수 있을만한 기술조차 가지지 못한 고대의 첨단 기술. 때문에 셀레스티안 군대에서도 높은 계급이 아니면 사용허가조차 나와있지 않은 - 그것이 바로 연동통신이었다.
그리고 지금 질과 마빈은 그 연동통신의 기술을 가지고 거래를 하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술 자체를 넘기는 계약은 아니었다. 줄라이가 얻어들은 바에 의하면, 질이 - 아니 아르테마 용병단이 - 제공하는 것은 기술의 핵심적인 부분인 블랙박스(black box)를 파는 것이었다.
연동통신이 발동되는 기작을 해명하는 것은 아직 이들에게 있어서도 무리였다. 하지만 몇 가지 요인에 의해서 아르테마 용병단은 연동통신에 이용되는 단말기 중 하나인 블랙박스를 얻어낼 수 있었고, 그것의 이용 방법, 심지어는 간이 블랙박스의 제조방법까지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요인에 윤선생이라던가, 그가 전에 말했던 '셀레스티안 내부의 협조자들'이 포함되어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요는, 연동통신의 단말기를 손에 넣은 이들이 그 기술의 원리를 알아내거나, 아니면 그걸 자신들 마음대로 사용하거나 하는 것은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것이 발각된다고 하더라도 아르테마 측은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후후후, 물어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마빈은 입을 손으로 가리면서 여자처럼 웃었다.
어차피 미슬란까지 셀레스티안이 쳐들어 올 일도 없을 것이고, 만약 불법으로 연동통신이 사용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거야말로 타노토스[反逆者]의 짓이라고 치부 받을 것이었다. 어떻게 이용해먹던 이래저래 들키면 책임을 지고 자시고 할 문제는 아니다.
거래는 약 1시간 가량 지속되었다. 어차피 할 이야기라고 해봐야 결국 가격흥정이고, 그 뒤엔 어떻게 서로가 돈과 물품을 전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줄라이는 입을 뻐끔거리지 않기 위해 상당히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이 현재 흥정한 가격은 금괴 50개. 즉, 돈으로 따지면 2500루토 상당의 금액이었다.
2500루토…. 줄라이가 용병으로서 받던 보수가 한 달에 150루토 남짓이었던 것을 생각해보자면, 1년 반 정도를 아무 것도 쓰지 않고 꼬박 모으면 구경할 수 있을 그런 돈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싸다고 해야 할지 비싸다고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했다. 제단이나 아르테마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바로 이러한 거래로 보충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사막 한 가운데에서 식물을 개발·재배한다는 일은 할 수 없었을 것이
다. 물론, 돈과는 관계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목민들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제단은 그것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번에 금괴 50개라면 상당한 양이다. 줄라이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자처럼 꾸민 마빈은 둘째치고, 두 명의 거대한(?) 장정의 위풍당당함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금액이 준비된다면 지금 물건을 받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지금은 아니지요. 하지만 준비된 것을 보여주신다면 즉시 가져올 수는 있습니다."
거래라는 것은 이렇게 한다는 것을 질은 잘 보여주고 있었다. 줄라이는 어째서 비리비리한 윤선생이 굳이 거래에 동참했어야 할 지 알 것도 같았다. 이런 식의 거래가 어떤 과정에 의해 서로 이루어지는 지 모르지만, 최소한 물건과 돈을 주고받을 때 두들겨 맞고 빼앗기거나 하지 않을 정도의
세력은 서로 보여줘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윤선생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아저씨는 일단 세이람[醫者]이 아닌가. 거기다가 마법사. 정체가 드러나서 좋을 게 없다고 해도, 어쨌든 한 개 부대보다 든든한 존재일 것은 확실했다.
"좋아요, 거래 시간과 장소를 결정하지요."
"가능하면 오늘밤으로 부탁합니다."
질의 말에 마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머물러 좋을 것 없겠죠… 좋아요. 겔?"
그가 손짓을 하자, 뒤쪽에 서 있던 중 한 명이 품속에서 두루말이 하나를 꺼내서 마빈에게 넘겨주었다. 마빈은 그것을 테이블 위에 펼쳤다. 미슬란의 시내 지도였다.
"이곳… 동쪽 게이트 옆에 있는 창고예요. 시에서 임대하는 것이라 가끔은 비어있기도 하죠."
"그 중에서?"
"오늘은 어디가 비어 있지?"
"7번과 12번입니다."
마빈의 물음에 아까의 남자가 대답했다.
"7번이 좋겠군요. 난 그 숫자가 좋아요."
마빈은 그렇게 말하고는 줄라이를 보고 생긋 웃었다. 줄라이는 눈을 부릅떴다. 마빈은 '호호호'하고 - 줄라이는 마음속으로 정정했다. 다시 들어도 소름끼쳤다 - 웃음을 터뜨렸다.
윤선생의 질문에, 키리오의 표정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당혹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왜 그런 걸 묻는가 -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한 키리오를 보면서도 윤선생은 가만히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택할 수… 있다면…."
키리오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두 개의 침대에 간이 침대를 꺼내 놓은 살풍경한 방 안. 따듯해야 할 램프의 불빛은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었다.
윤선생은 키리오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입니까."
"…당신이라…면…?"
키리오의 말에 윤선생의 얼굴에는 약간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저… 말입니까."
윤선생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존재인 것 같군요… 키리오."
그는 안경을 벗고는 다른 한 손으로 눈을 지그시 눌렀다.
"선택의 여지라는 게 주어지지 않았고, 설사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어차피 같은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 말입니다."
키리오는 말이 없었다.
"당신도, 벗어날 수는 없을까요…? 그 굴레에서."
"이제 된 거야?"
줄라이의 물음에 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접선장소에서 나와 다시 여관으로 향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금괴 50개라니… 그런 거 어디에다가 어떻게 옮길 거야?"
"랜드모빌이지. 당연하잖아."
"아, 그래서 창고에서…"
"여태까지 용케도 도망다녔다, 그 센스로."
"뭐?"
"하긴… 애초에 머리가 좋았으면 쫓기는 일부터 생기지 않았겠지."
질은 왠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줄라이는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거, 제단에 돌아가서 갖다 주지 않아도 되는 거야?"
"괜찮아. 다른 동료들에게 넘기면 되니까."
"다른 동료?"
"대피처가 필요하다고 말했잖아… 윤선생이."
질은 윤선생에 대해 말하면서 퉁명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줄라이는 문득 궁금해져서 말했다.
"윤선생님… 언제 아르테마와 합류하게 된 거야?"
"나도 몰라."
"?"
"나보다는 먼저 아르테마에 있었어."
질은 걸음을 늦추지 않으면서 말했다. 주변을 지나다니는 랜드모빌과 사람들의 수는 적은 편은 아니었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 약속시간까지는 2시간 남짓 남아있을 뿐이었다.
"들은 걸로는 5년 정도 되었다고 해."
"5년? 그럼, 아르테마는 언제 생겼는데?"
"10년도 넘었어."
"헤에?"
줄라이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10년이 넘게 유지되는 레지스탕스라는 건 들어본 일이 없었다. 아니, 용병단이라고 해도 비슷할까. 경비단이라던가 도시에 적을 두고 있는 조직이라면 그 정도 기간으로 유지되는 일도 많았지만, 이해관계에 의해 모여있는 용병단이라면 별개였다. 하긴, 아
르테마는 용병단과 비교하기엔 어색한 조직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셀레스티안이 생긴 다음에 생긴 게 아닌 거야? 그 콘라드라는 남자가 만든 건가? 하지만 대장은 마야잖아?"
"하나씩 물어봐 하나씩."
질은 줄라이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애초에는 마법사와 싸우는 조직이었던 것 같아."
"뭐?!"
줄라이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마법사와 싸운다니, 대체 무슨 마법사와?"
"자세한 내용은 나도 모른다니까. 하지만 마야와 콘라드, 류엔… 그 사람들은 예전부터 있던 사람들이고 - 그들만 아는 이야기가 있어. 마법사에 관해서는 특히 더."
"믿을 수 없어…"
"처음엔 다 믿기 힘들어. 하지만 어쨌든 내가 들어온 건 3년쯤 전이고, 난 그 전 일은 몰라. 정 궁금하면 선생님에게 직접 물어봐."
줄라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거친 질의 발걸음을 따라 조용히 걸었다.
"…그래서 화를 낸 거야?"
"응?"
줄라이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질은 고개를 돌렸다.
"따돌림당한 것 같아서 화 낸 거냐고."
"…누가."
질은 황당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옛날 이야기라는 거,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거야?"
"그런… 셈이지."
"역시."
줄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역시야?"
"아니, 아무 것도."
줄라이의 대답에 질은 눈살을 찌푸렸다.
"쓸 데 없는 소리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자. 어쨌든, 빨리 끝내고 뜰수록 좋을 테니까."
"예이."
줄라이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리고 질의 뒤통수를 보면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사람이라는 건 다 그런 것. 자신의 차점에 대해 오랫동안 화를 내고 있을 정도로 줄라이는 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의 차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