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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예수의 통치의 특징 (두 번째 주): 이번 주 본문에는 지난주에 이어 예수의 통치의 본질적 특성(the nature of Jesus’ kingship)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지난주에는 예수가 창조된 질서, 즉 물질적 세계를 지배하는 통치자로 묘사되었다. 오늘의 본문에서 마가복음은 새로운 영역에 대한 예수의 지배권을 소개하면서 마가 특유의 기독론을 전개하고 있다. 예수의 통치의 본질적 특성과 예수의 통치권의 근거, 그리고 추종자들도 공유하는 권위, 즉 예수의 순종적인 믿음이 소개된다. 또한 우리는 그 권위가 예수의 왕국에서 어떻게 행사되는지도 (그의 왕국에서의 우선순위, 왕-백성의 관계 등) 배우게 된다. 예수가 왕이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두번째 답: 예수는 생명과 율법의 왕이다. 오늘 본문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 구조로 되어 있다. 두 이야기는 모두 치유에 관한 것이고, 둘 다 예수가 생명과 율법의 영역에서 통치권을 행사함을 드러낸다.
시작과 끝 부분에서는 야이로와 그의 딸의 이야기가 나온다. 야이로는 회당장이었고, 그의 권위는 그가 유대 공동체에서 행사하고 있었던 지도자의 위치, 율법을 엄정하게 지키는 생활, 그리고 (아마 더 중요하게)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분간하는 능력을 통해 표현된다.
그는 예수께 나오자마자 자신의 모든 권위가 예수의 권위에 종속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예수의 권위에 대한 그의 고백은 “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 살려 주십시오(23절)” 라는 요청 속에 암묵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야이로의 집으로 가던 이야기는 갑자기 등장한 혈루병을 앓던 여인 때문에 예기치 않게 중단된다. 이 여인의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의 내용은 신학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여인이 계속 혈루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부정하다는 것을, 이 여인이 의사를 찾아다니느라 재산을 다 없앴다는 것(가난)은 그녀가 권력에서 소외되었고 절대적 사회적 약자라는 것을 나타낸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 여인은 야이로(특권층, 권력층, 사회적 주류, 남성)와 모든 면에서 대조된다.
그러나 이 여인이 야이로와 공유하는 중요한 공통점은 예수의 권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는 것이다. 이 여인은 야이로와는 달리 아주 사적인 방식으로 고백한다. 자신의 천한 신분이 드러난다면 생명과 치유의 권한을 갖고 있는 예수에게 다가가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은밀하게 예수께 다가가 그의 옷에 손을 대었다.
이 대목에서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첫째, 예수의 능력은 이미 행사되어서 그 여인이 병고침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예수는 그 여인과 왕-백성의 관계성을 수립하기 원하신다. 예수의 생명과 치유의 능력이 이
여인에게 이미 전달되었지만, 예수의 권위가 완전하게 실현되기 위해서는 믿음(간절하게 예수를 만지기 원했던)을 가졌던 여인과 예수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이 여인이 예수에게 알려질 때까지 온 우주가 정지해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둘째, 예수의 왕국에서는 소외되고 약자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요구가 존경과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의 요구보다 먼저 받아들여진다. 예수와 같이 가던 무리들이 회당장의 안내를 받아 길을 가는 예수에게 일어난 의외의 사건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쉽게 상상이 된다. 이 여인은 율법에 의해 다시 건강이나, 안정, 사회에서의 자리를 회복할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예수의 통치권이 이루어지는 영역에서는 사회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 주님과 직접 관계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더욱이 예수는 율법의 영역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면서 율법이 아니고 믿음의 권위에 근거한 직접적인 만남을 이루기 위해 정결의 규정을 뛰어 넘으신다.
이 두 이야기의 중심축은 야이로와 이 여인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유일한 것, 즉 예수의 왕적인 권위에 대한 깊은 믿음이다. 이 여인은 두려워하며 떨면서 예수께 나왔다.
예수는 이 여인에게 말하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해주었다. 이 여인의 행동은 좀 돌발적이었고 무례했다고 비판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여인의 믿음은 순수하고 진지했다. 바로 그것에 근거해서 예수는 그 여인을 대신하여 왕적인 권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제 야이로가 다시 등장한다. 집에 가까이 갈 때 그이 딸이 이미 죽었다는 전갈이 온다. 예수는 배가 풍랑 때문에 가라앉을까봐 믿음 없이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 어찌하여 떠들고 울고 있느냐?” (39절)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도 예수의 절대적인
순종(예수의 왕적인 권위의 근원이 되는)과 주변 사람들의 불신앙(그들은 비웃었다, 40절)이 대조된다. 예수는 간단한 동작과 말씀으로 죽은 아이를 살렸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가 생명과 죽음에 대해 신과 같은 권능을 쉽게 행사하시는 것으로 묘사함으로 골고다 이후에도 그와 같은 권능이 행사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많은 기독론적인 주제와 연관된다. 예수가 왕이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예수는 생명과 율법을 주관하는 왕이다. 예수는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 정결과 부정 등에 대해 신적인 권위를 행사하시는 분이다. 그의 권위는 매우 부드러운 방식으로 행사된다.
믿음을 갖고 오는 사람들과 직접적인 인격적 관계를 맺으신다. 우선순위는 주변인, 국외자, 발언권이 없는 자들에게 먼저 주어진다. 그리고 그 믿음(예수의 절대적인 순종의 믿음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불완전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그의 왕적인 권위와 그를 믿는 자들을 위한 그 권위의 행사의 근원이 된다.
주석적 관점
▶ 치유 안의 치유: 오늘 막5:21-43은 마가가 한 이야기 속에 비슷한 다른 이야기를 삽입하여 서로 주제가 보충되도록 하는 본문 중의
하나이다(3:19-35;6:14-29;11:15-33참조). 오늘 본문에서는 부자 남자가 그의 딸을 예수가 고쳐주길 원할 때, 그는 절망적인 여인의 치유를 위해 기다려야만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 회당장의 요청(21-24): 4:35-36;5:1과 같이 예수는 호수를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모였고 바닷가에서 예수는 가르치셨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께 다가왔다. 그러한 지도자들은 크게 존경받고 대체로 부자들이다. 야이로는 예수를 치유자로 여겼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존경을 표했다.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 그의 딸이 죽어감으로 인해 방랑하는 설교자에게 흔치않은 경의를 표했다. 그는 예수에게 간곡히 청하기를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라고 했다. 그는 예수가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주고 살려줄 수 있다고 믿었다. 유대사회에서는 희생, 축복, 그리고 서임을 손을 얹는(안수하는) 것으로 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가 치유를 위해 여러 번 안수를 반복했다(6:5;8:25). ‘ 구원’ 과 ‘ 생명’ 은 육체적 건강과 영적 구원 둘 다 관계가 있다. 예수는 요청한 사람을 위해 함께 가셨다.
▶ 중단된 여행 - 혈루증 앓는 여인(25-29): 갑자기 비공개적인 형식으로 여인이 나타난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는 즉 생리현상에 문제가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고 고생도 많이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이런 중에 예수의 소식을 듣고 그를 찾은 것이다. 그녀는 예수의 치유의 능력에 대해 마술적으로 이해하여 “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나중에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구원했다고 말한다. 그녀가 마술로 생각했든 믿음을 가졌든지 간에, 본문에서는 “ 곧” (1:10,12,21,23,29,30 등을 보라) 출혈의 근원이 마르고 그 여자는 몸이 나은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 예수의 반응(30-34): 예수도 ‘ 곧’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몸으로 느끼셨다.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이 예수를 통해 여인에게 사용된 것이다. 이러한 능력의 교차는 대화의 기회를 만들었다. 예수는 청중들에게 “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라고 물었다.
대체로 통찰력이 부족한 제자들은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인은 많은 무리들에게 자신의 결사적이고 개인적인 치유의 추구를 밝혔다. 그녀는 혈루증으로 인해 의식적으로 불결한 사람이 되어 사회의 한 모퉁이에서 은둔했는데, 이제는 대중적
인물에게 피난처를 찾으려는 노력으로 공개화 된것이다. 그녀도 회당장처럼 예수께 엎드려 경의를 표하고, 그녀가 만짐으로써 예수를 의식적으로 불결하게 한(레15:19-33 참조) 것에 대해 사죄를 구했다. 예수는 불결하게 된 것보다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에 대해 더 관심을 두었다(막1:41). 그러기에 예수는 이 익명의 여인을 ” 딸“ 이라고 부르며 ”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고 말한다. 나아가 그녀가 안심하고 가도록 했는데 그녀의 믿음이 병에서 벗어나 건강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사적인 치유를 공적으로 인정하고 감사하도록 한 것이다.
▶ 다시 야이로의 딸에게로(35-36):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회당장 집의 메신저들은 삽입된 혈루증 여인 이야기의 제자들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들은 회당장이 집으로 돌아가 슬퍼해야 할 뿐 더 이상 선생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메신저들은 목수에 불과한 치유자 예수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인에게만 말했고 예수는 전해들었다. 예수는 여인에게 했던 것처럼 회당장에게도 “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해라” 고 말했다.
▶ 치유하러 가는 길(37-39): 이 여행을 시작했을 때 무리들이 따랐다(24). 예수는 이제 대중적 공간에서 사적 공간으로 이동한다. 예수는 가장 믿는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셋만 데리고 갔다. 그들이 야이로의 집에 이르렀을 때 고용된 애도자들이 울며 통곡하며 떠드는 것을 보셨다. 그들의 믿음 없음을 보시고 “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고 말씀하셨다. 죽음과 죽음의 완곡어법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아이가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예수는 죽음이 마지막 대답이 아니라고 충고하고 있다.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 앞에서 죽음조차도 강하게 버틸 수 없다. 희망이 없는 죽음과 비교하여 이 아이는 부활의 희망을 가졌기에 그녀는 단지 “ 자고 있는” 것이다.
▶ 은밀한 치유(40-43): 애도자들이 비웃었기에 그들을 다 내보낸 뒤에 예수는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 만을 데리고 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 회복이야기는. 예언자 엘리야(왕상17:17-24)와 엘리사(왕하4:32-37)의 비슷한 은밀한 치유를 생각나게 한다.
예수는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아람어로 “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거라)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소녀는 “ 곧 일어나서 걸어다녔다” 고 재차 강조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치유능력의 동시적 본질을 보여준다. 그녀는 12살이었고 혈루증 여인이 아픈 해 만큼 살았다. 이 은밀한 치유를 본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예수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1:25,33,44;3:12참조), 소녀의 장례식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래서 말은 금방 퍼졌고 마가의 독자들은 “ 메시야 비밀” 은 또다시 지켜지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는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하며 마지막 사랑의 행동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소녀가 진짜 살았고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러기에 예수는 버려진 여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소녀의 인간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목회적 관점
오늘 본문에서 하나로 묶여 있는 한 쌍의 치유 이야기는 구별되지만 공통적인 목회적 관심을 보여준다. 모든 치유 기적처럼 이 이야기들은 공통적으로 설교자와 청중 모두에게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 나는 치유될 것인가?" 치유에 대한 질문은 인류 모두가 가진 것이다. 우리들 거의 대부분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공동체 안에 육체적, 영적, 심리적으로 혹은 관계에 있어서 회복되어야 하는 통증을 가진 질병을 가지고 있다. 목사와 교인은 모두 어떤 사람은 낫고 어떤 사람은 낫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회당장의 딸은 살아났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죽는다. 여러 해 동안 질병으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면서 절망에 빠졌던 여인은 회복되었지만, 똑같이 절망에 빠진 남자들과 여인들은 그렇지 못하다. 목사는 여기에 대하여 정직해야만 한다. 비록 그가 설교하면서 격려하는 기도를 하고, 동일한 예배에서 아픈 여성들과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준다고 해도. 오늘 본문을 설교할 때, 치유를 요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치유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이 더 편할 지도 모른다.
신앙심이 깊은 친구가 있다. 그는 아직 50대일 때 파킨슨병에 걸렸다. 그와 그의 아내는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20년 후, 그의 병은 마지막 단계까지 진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기도가 응답받았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 나는 파킨슨병을 고침 받은 건 아니다. 그러나 나는 파킨슨병에 대한 두려움에서 고침 받았다.” 사람들을 예수께로 향하게 한 성경의 두 치유 이야기는 이 이야기를 듣는 많은 청중들을 의아하게 한다. “ 기도는 효과가 있는가?” 이 질문이 “ 당신이 기도한 것을 받았는가” 라는 뜻이라면 정직한 대답은 “ 때로는 그렇지만 항상은 아니다” 가 될 것이다. 회중이나 목회자 모두가 알듯이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기도가 응답받는 건 아니다.
이러한 목회적 관심으로 치유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하면, 치유를 위한 기도가 단순히 실용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 나의 필요, 나의 희망들을 향하게 하기 위하여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다. 보다 깊은 의미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청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좀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든 바뀌지 않든, 나-나의 마음과 심장-은 변한다. 이 치유 이야기들 각각은 개별적으로 독특한 목회적 전망을 제공한다. 회당장의 딸의 치유 이야기는 회중들 가운데 많은 부모와 조부모가 그들의 자녀나 손자손녀들에게 가진 깊은 사랑과 그에 따른 두려움을 떠오르게 한다. 죽은 아이가 생명을 회복한 이야기는 모든 부모가 자녀들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을 일으킬 것이다. 사실 자녀나 손자손녀를 잃은 적이 있는 부모나 조부모라면 이 치유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정점은 예수가 절망에 빠진 부모와 그들의 작은 딸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을 담아 아람어로 달리다굼, “ 소녀야, 일어나라” 라고 다정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는 지혜롭게 부모와 그들의 자녀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또 하나의 치유 이야기는 소녀의 이야기에 둘러싸여 있는데, 마찬가지로 독특하고 깊은 목회적 관심을 일으킨다. 이 이야기는 질병이라는 현실 뿐 아니라, 고립과 사회적 소외라는 현실이 숨겨져 있다. 예수가 살던 시대에는 이 여인과 같은 상태에 있는 여인들은 사회에서 버림받았을 것이다. 그녀의 상태는 그녀를 제의적으로 부정하게 만들었고, 외톨이가 되어 그녀의 가족과 마을에서 고립된 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면, 그녀가 스치기라도 할까봐 두려워하면서 그녀로부터 멀리 떨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와 접촉하면 그들은, 특별히 남자들은 제의적으로 부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에서 그녀는 군중을 뚫고 길을 열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남성이며 잘 알려진 종교인인 예수를 만진다. 그녀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멀리서 예수를 불렀어야 했다. 예수의 반응은 한층 더 놀랍다. 마가는 그녀가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두려움에 떨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녀를 “ 부정하다” 고 하는 대신 야이로의 사랑스러운 딸만큼 소중하게, “ 딸” 이라고 부른다. 예수는 그녀가 불법적으로 침입한 것에 대해 훈계하는 대신, 그녀의 믿음을 칭찬한다. 정당한 분노 대신 예수는 그녀를 평화롭게 가게 한다.
이 이야기에는 서로 간에 사회적으로 아주 멀리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소중한 친밀함에 대한 통찰이 숨겨져 있다. 그들의 수치스러운 접촉은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분노와 소외를 야기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온전함과 치유와 평화를 가져왔다.
친밀함의 힘이 가진 부정적인 모습을 그려보자. 심리학자들은 인간관계가 철저하게 단절된 어린이들이 어떻게 성장하는 지에 관하여 오랫동안 관찰해왔다. 그들의 추측은 1980년대에 차우세스쿠가 실각한 이후 공산 루마니아의 많은 고아원들이 세계의 이목 앞에 개방되었을 때 비극적으로 확인되었다. 이 독재자가 명령한 기묘한 사회 정책 때문에 수많은 원치 않는 아이들이 태어나게 되었다. 그들 중 다수는 거대하고 예산이 부족한 정부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철저하게 고립된 채로, 사랑받지 못하고, 인간적인 손길이라고는 전혀 받아보지 못한 채 지내야 했다. 비극적이게도, 그 아이들은 육체적으로는 인간으로 자랐지만, 인간적인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말을 할 줄 몰랐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관계할 줄 몰랐다. 그들은 애착을 주고받을 수 없었다.
이 성경 이야기에 대한 목회적 결론은, 육체적 치유보다 받아들임, 친밀함, 그리고 접촉이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고 평화를 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되고 인간이 된다. 교회 안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그리고 결혼에서 우리의 관계들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고립된 채로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지만, 우리 인생에 기분전환과 즐거움을 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관계 혹은 “ 접촉” 은 우리를 온전한 인간이 되게 한다. 현대 스코틀랜드 철학자인 John Macmurray가 말한 것처럼, “ 나는 내 자신이 되기 위하여 ‘ 당신’ 이 필요하다.”
설교적 관점
-이 본문에 제목을 붙인다면 “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하는 예수” (Jesus the Multi-tasker) 뭐 이렇게 될 것이다. 오늘날 모든 것이 빠른 21세기에 이 이야기 속의 이야기 (story within a story)는 매우 이상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1세기 모든 것이 느린 상황에서 복음서의 이 이야기는 긴박한 느낌 심지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비롯된다.
절망적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한 두 사람[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여인] 모두에 대한 예수의 관심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바빠서 듣지 못하는 분이 아니고 또 놀랍고 예기치 않았던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는 분임을 기억하게 해준다.
-마가복음 이 부분에 기록된 기적들을 예수는 갈릴리 바다를 오가며 계속한다. 갈릴리 바다 저 편에서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한 후에 예수는 다시 유대인 지역으로 바다를 건너갔다. “큰 무리가 예수께로 모여들고 있던” (21절) 와중에 야이로라는 큰 믿음을 지닌 회당장이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예수께서 고쳐주실 것을 믿으며 죽음직전의 자기 딸을 방문해달라고 요청한다. 예수는 말로 대답하지 않고 야이로의 집을 향하여 즉시 따라가는 행동으로 자신의 동정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길에는 예수가 배에서 내렸을 때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군중들로 가득차있다.
-야이로의 딸이 거의 죽은 채로 누워있는 곳을 향하여 예수를 따라 가던 “큰 무리” (large crowd)가운데에서 또 다른 절망적 상황에 놓여있는 “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자” (25절)가 달려 나온다. 그래서 한 이야기 속의 이야기 형태 (story-within-a story
form)가 시작된다. 아이로의 딸의 상태가 위급하고 그리로 가기로 하였지만 예수는 자신의 치유능력을 이끌어 낼만한 믿음을 지닌 그 아픈 여인을 인정해준다. 여기서 병행적으로 나타나는 두 이야기의 공통요소는 이 이야기의 의미를 심화시켜준다. 두 환자 모두 여성이고 정결하지 않은데 한 명은 죽음으로 인해 다른 한 명은 혈루증으로 인해서이다. 둘 다 유대전통에서 12이라는 숫자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12년의 혈루증과 12살의 소녀). 그리고 둘 다 “딸 들” (야이로의 딸인 소녀와 예수가 딸이라고 부른 혈루증 여성)로 여겨지고 있다. 만지는 일(act of touch)이 두 여성 모두에게 (그들을 에워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새로운 삶을 회복시켜 준다.
-이 두 이야기는 설교자에게 재미있고도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한다. 하나의 질문은 오늘날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과 일에 대한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의 경우에는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지나치기 쉬운 사람들이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소녀-비록 아버지는 중요한 사람이었을지라도-와 병든 여인은 그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예수는 여기에서 자신의 사역을 이루기 위해 사회적, 종교적 장벽을 넘어서서 늘 그리했던 것처럼 행동한다. 두 여성 모두 힘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예수는 긍휼함으로 그들의 필요를 보고 어느 누구보다도 돌봄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
-본문이 제기하는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은 치유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혈루증 여인은 그녀가 손을 내밀어 예수의 옷을 만졌을 때, 그리고 죽은 소녀는 예수가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치유된다. 두 이야기 모두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모든 설교자가 알고 있듯이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설교할 때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가장 절실하게 요청하는 기도라도 늘 우리가 원하는 답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분명히 우리는 예수가 모든 일을 다스리시고 “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막 4:41)하는 분으로 선언한다. 이 이야기에서 설교자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이런 기적이 일어났는가 혹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고 기적들이 일어나지 않을 때 (when they do not occur) 어떻게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혈루증 여인과 죽어가는 어린 소녀를 둔 절망적인 부모들처럼 고통가운데 믿음을 지닌 모든 사람들은 기적적인 치유의 가능성을 위해 기도하고 또 대체로 믿는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육체적 치유는 이들의 기도에 드물게(rarely) 응답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치유를 덜
분명하고 덜 드라마틱한 차원에서(less obvious, less dramatic dimensions)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기대에 어긋나는 상황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평화를 누리는 것 그리고 절망적인 시간에서도 하나님의 지속적인 현존을 깨닫는 것으로 치유를 생각하는 것이다.
-연관된 질문은 치유에 있어서 믿음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혈루증 여인은 자신의 치유를 위해 수많은 사회적 관습을 넘어 허락도 받지 않고 예수의 옷을 만지는 대담함(audacity)을 보여준다. 믿음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리고 여기에 야이로가 있는데 그의 믿음은 그를 예수의 발 앞에 엎드러지게 한다. 이 사례들은 우리 자신의 믿음에 대해 성찰하도록 도전을 주고 있다. 즉 우리가 치유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얼마나 신뢰하는지에 대해 또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신뢰를 가지도록 하고 어느 정도로 하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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