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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1호 : 청원계산리오층석탑(淸原桂山里五層石塔) 1969.07.18 지정
계산리의 말미장터 남쪽 언덕의 밭 가운데에 서 있는 탑으로,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基壇)은 가운데돌이 서로 엇갈려 짜였으며 아무런 조각이 없다. 탑신(塔身)은 1층과 3층의 몸돌은 4장의 돌로 구성하였으며, 2층과 4·5층의 몸돌은 하나의 돌로 구성하였다. 지붕돌은 1·2층이 2장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3층 이상은 한 돌이다. 지붕돌 아래받침은 1·2층이 5단, 3·4층이 4단, 5층은 3단으로 줄어들었다. 지붕돌의 윗면(낙수면)은 경사가 심하며, 지붕돌 아래의 받침은 처마끝까지 나와 있어 둔중한 느낌이 들지만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잡히고 안정감이 있다.
이 탑은 고려 중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위아래 지붕돌의 체감률이 정연하여 전체적인 안정감이 느껴지는 우수한 작품이다.
제512호 :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忠州 丹湖寺 鐵造如來坐像)
단호사(丹湖寺) 법당의 주존불(主尊佛)로 봉안되어 있는 철불좌상으로 현 장소가 원 위치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성양식(造成樣式)이나 조각수법(彫刻手法)으로 보아 고려시대인 11세기경의 철불(鐵佛)로 추정된다. 불상의 크기는 좌고(坐高)가 1.3m, 두고(頭高)가 0.5m, 견폭(肩幅)이 0.6m이다.
제513호 : 영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永川 仙源洞 鐵造如來坐像)
이 불상은 현재 오른팔과 왼손이 없어져 임시로 만들어 붙여 놓았으며, 때움한 흔적이 곳곳에 있을 뿐 그 외에는 완전한 편의 철불상(鐵佛像)이다. 높직한 육계(肉계)에 중앙계주(中央계珠)가 뚜렷한 나발(螺髮)의 머리모양, 얼굴면적에 비해 눈꼬리가 올라간 긴 눈, 작은 코와 입, 짧고 융기된 인중을 나타낸 굳은 얼굴표정은 이 시대의 특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제514호 : 은해사 운부암 금동보살좌상 (銀海寺 雲浮庵 金銅菩薩坐像)
신라 헌덕왕 1년(809)에 혜철국사가 창건한 은해사의 운부암에 모셔진 보살상으로 불꽃무늬·꽃무늬·극락조(極樂鳥) 등으로 장식한 화려한 관(冠)을 쓰고 있는 높이 1.02m의 아담한 작품이다.
얼굴은 눈꼬리가 약간 올라간 갸름한 형태이며, 온 몸을 휘감은 구슬장식이 무척 화려한 모습이다. 신체 표현은 굴곡 없이 수평적이어서 형식적으로 처리된 느낌이지만 안정감을 주고 있다. 이런 표현은 영덕 장육사 건칠보살좌상(보물 제993호), 대승사 금동보살좌상(보물 제991호)과 비슷한 양식으로 지방적인 특색이 엿보인다. 목에 있는 띠 주름식의 삼도(三道), 가슴 아래 띠로 묶은 매듭 표현, 양 다리에 대칭적으로 흘러내린 옷주름 등은 조선 초기 보살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모습이다.
제515호 : 숙신옹주가대사급성문(淑愼翁主家垈賜給成文)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태조 이성계가 그의 후궁에게서 난 딸을 뒤에 숙신옹주로 봉하고 집을 하사한다는 내용의 분재기(分財記)이다.
8행으로 되어 있으며, 원문이 끝난 후 간격을 크게 비워 두고 ‘태상왕’이라 적었으며, 그 아래에 태조의 수결(지금의 서명)이 있다. 내용은 모두 이두문(吏讀文)으로 되어 있는데 집터, 집의 방향, 집을 짓는데 쓰이는 재목, 가옥의 배치, 건물의 칸수 등을 구체적으로 적고, 끝에는 자손이 영원히 거주할 것을 밝혀 두고 있다.
조선조 최초의 가옥급여문서로 조선 전기 가옥과 토지 등 재산에 대한 법제도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제516호 : 대구무술명오작비(大邱戊戌銘塢作碑) 경북대학교박물관
1946년 대구시 대안동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가 7, 8년 동안이나 행방을 알 수 가 없었는데, 그 후 다시 경북대학교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비(碑)는 길쭉한 모양의 자연석으로, 아래는 직선으로 잘려 있고 윗부분은 원형으로 처리되어 있다. 아래부분의 모습으로 보아 본래 받침돌 위에 세웠거나 암반 위를 파고 세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비의 내용은 건립날짜와 저수지 축조내용 및 관계된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글자가 상당수 깎여나가 해석을 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으나, 신라시대 수리시설이나 사회사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제517호 : 영천청제비(永川菁堤碑)
이 비는 신라시대 청못이라는 저수지 수축과 관련이 있는 양면비(兩面碑)이다. 비는 화강암의 자연판석으로 장방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 114cm, 폭 94cm, 두께 16cm이다. 비면에는 행간이나 윤곽선은 없고 양면을 가공하여 글자를 새겼는데 그 양면의 비문(碑文)은 각기 다른 연대와 내용을 담고 있다. 비의 한 면은 병진년(丙辰年) (법흥왕((法興王) 23년, 536년) 의 간지(干支)가 적혀 있는 것으로 청못을 처음 축조한 기념으로 새긴 것이다. 다른 면은 정원(貞元) 14년 (원성왕((元聖王) 14년, 798년) 의 절대 연대가 적혀있는 것으로 청못의 일부 무너진 둑을 다시 수리한 사실이 적혀 있다.
이러한 비문 내용은 신라시대 벼농사 및 수리 시설과 관련이있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청제비 서쪽에 숙종(肅宗) 14년 (1688) 에 세워진 청제중립비가 있다. 비문에 의하면 효종(孝宗) 4년(1653) 에 비가 두 동강이 나서 땅 속에 매몰되어 그 고적(古蹟)이 전하지 못하게된 것을 안타깝게 여긴 3사람이 다시 세웠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위의 비문들은 1960년 12월 신라삼상학술조사단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오늘에 이르고있다.
제518호 : 해인사원당암다층석탑및석등(海印寺願堂庵多層石塔및石燈)
제519호 : 관룡사석조여래좌상(觀龍寺石造如來坐像) 창녕
신라시대 8대 사찰 중 하나였던 관룡사의 약사전에 모셔져 있는 불상이다. 표현기법에 있어 절의 서쪽 계곡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용선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을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머리에는 큼직하게 표현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고 이마 위쪽으로 반달 모양이 표현되어 고려시대 불상의 머리 형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까지 내려오고, 목에 있어야 할 3개의 주름은 가슴 윗부분에 표현되고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옷주름은 얕은 선을 이용해 형식적으로 표현하였다. 머리에 표현된 반달 모양과 형식화된 세부표현 기법 등에서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을 고려시대에 이 지방의 장인이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제520호 : 술정리서삼층석탑(述亭里西三層石塔) 창녕
이 탑은 신라식 일반형 석탑으로서 이중기단< 二重基壇 > 위에 세운 삼층석탑이다. 상층< 上層 > 기단 면석< 面石 > 가운데는 별석으로 문비< 門扉 >가 새겨져 있으며, 탑신< 塔身 >에는 양우주< 兩隅柱 >가 조각되고, 옥개< 屋蓋 >받침은 5단이다.
상륜부< 相輪部 >는 노반< 露盤 >과 보주< 寶珠 >가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나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술정리< 述亭里 > 동삼층석탑 보다 다소 떨어지며, 조성시기도 뒤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높이는 5.1m이다.
제521호 : 숭렬당(崇烈堂) 영천
제522호 : 도산서원도(陶山書院圖)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 강세황(1712∼1791)이 도산서원의 실경을 그린 것으로, 크기는 가로 138.5㎝, 세로 57.7㎝이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풍경을 그린 것으로 중앙에 도산서원을 배치하고 앞쪽에는 흐르는 강물과 함께 탁영담·반타석 등을 그렸다. 왼쪽에는 곡류 위쪽으로 분천서원·애일당·분강촌 등을 그렸으며 본인이 직접 쓴 글이 적혀있다. 여기에는 성호 이익이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자신에게 도산서원을 그리도록 특별히 부탁하였다는 것과 자신의 소감, 현지답사 내용 및 제작시기 등을 비교적 자세히 적고 있다. 또한 이 글의 끝 부분에는 1927년 가을 최남선이 쓴 글도 적혀 있다. 서원의 배치, 건물의 크기와 방향 등이 실제와 부합되게 그려졌으며 건물의 이름도 함께 밝혔다.
영조 27년(1751)에 그려진 이 그림은 마의 올을 풀어서 늘어놓은 것같이 섬세하게 산과 계곡을 표현하였으며 나무들은 붓을 눕혀 점을 찍듯이 나타내어 당시 유행하던 남종화풍의 초기적 필치를 느낄 수 있다.
제523호 : 석보상절(釋譜詳節)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가 죽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후의 세조)이 김수온 등의 도움을 받아 석가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책이 언제 간행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수양대군의『석보상절 서(序)』가 세종 29년(1447)으로 되어있고, 또 9권의 표지의 기록으로 세종 29년(1447)에서 세종 31년(1449)사이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석보상절』이 발견된 것은 현재 마지막 권이 24권으로 30권에 가까운 방대한 것이라고 짐작되지만 이상의 것밖에는 발견된 것이 없으므로, 그 초간과 복간은 물론 문헌의 내용 자체만으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한글로 번역한 것이라서 당시 쓰던 국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제523-1호 : 석보상절<권6,9,13,19>(釋譜詳節<卷六,九,十三,十九>) 국립중앙도서관
제523-2호 : 석보상절<권23,24>(釋譜詳節<卷二十三,二十四>) 동국대학교
제523-3호 : 석보상절<권11>(釋譜詳節<卷十一>) 리움미술관
제524호 : 여주이씨옥산문중소장전적(驪州李氏玉山門中所藏典籍) 경주 옥산서원
제524-1호 : 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
이 방목은 조선 중종 8년(1513)에 실시한 사마시의 합격자 명단이다. 사마시는 생원시와 진사시로 구분되는데, 생원시 합격자 가운데 조선 전기의 대학자인 회재 이언적(1491∼1553)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것은 바로 그가 지니고 있던 것으로 책장머리에 ‘여성이씨’, ‘회재복고’의 두 도장이 찍혀있다. 구성을 보면 합격한 사람들의 자와 본관, 주소, 부의 이름을 적어놓았으며, 을해자 활자본이다.
제524-2호 : 여주이씨옥산문중소장전적(驪州李氏玉山門中所藏典籍)
제525호 : 삼국사기<권50>(三國史記<卷50>) 옥산서원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1145)경 김부식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정치적인 흥망과 변천을 중심으로 편찬한 역사서이다.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11명이 참여하여 편찬되었다. 이 책이 만들어진 12세기 전반의 상황은 고려 건국 후 200여년이 흘렀고 문벌귀족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유교와 불교가 서로 어우러져 고려 왕조가 안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기 역사의 확인 작업으로 전 시대의 역사정리가 필요하였다. 조정에서는 거란을 물리친 후 자신감에 차 있었고 여진의 위협에 대한 강렬한 국가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다. 또 한편 문벌귀족간의 갈등과 대립이 심각했는데, 분열과 갈등을 국가가 망할 수 있는 원인으로 강조함으로써 현실비판의 뜻과 역사의 교훈을 후세에 알리려 하였다.
현재 전하고 있는 이 책은 옥산서원 청분각에 보관되어 있는데 전 9책 50권이며, 종이의 질은 한지이다. 가로 22.4㎝, 세로 31.5㎝ 크기로 장마다 9행 18자로 짜여져 있다.
제526호 : 여주이씨옥산문중소장유묵(驪州李氏玉山門中所藏遺墨) 경주
제526-1호 : 해동명적<상권20매 하권23매>(海東名蹟<上卷二十枚 下卷二十三枚>)
이 책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신공제(1469∼1536) 선생이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글씨가 돌에 새겨 있는 것을 탁본하여 상하 2책으로 묶은 것이다.
제526-2호 : 여주이씨옥산문중소장유묵(驪州李氏玉山門中所藏遺墨)
제527호 : 단원풍속도첩<25폭>(檀園風俗圖帖<二十五幅>)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의 화가인 김홍도가 그린 그림책 형태의 풍속화 25첩이다. 단원 김홍도(1745∼?)는 신선그림이나 초상화, 산수화 등 다양한 주제로 그림을 그렸지만, 풍속화가로 더 유명하다.
풍속화는 종이에 먹과 옅은 채색을 하여 그렸는데, 각 장의 크기는 가로 22.4㎝, 세로 26.6㎝ 정도이다. <씨름>, <대장간>, <글방> 등과 같이 서민사회의 일상생활 모습과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이 구수하고도 익살스럽게 표현된 그림들이 실려 있다. 풍속화의 대부분은 주변의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을 중심으로 그렸는데, 특히 인물은 웃음 띤 둥근 얼굴을 많이 그려 익살스러움을 한층 더하였다. 선이 굵고 힘찬 붓질과 짜임새있는 구도는 화면에 생동감이 넘치게 하는 한편 서민들의 생활감정과 한국적인 웃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영조 21년(1745)∼순조 16년(1816)에 그린 이 풍속화들은 활기차게 돌아가는 서민들의 일상생활의 사실성과 사회성을 그 생명으로 삼았고, 또한 서민의 일상생활을 주제로 한 것이어서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제528호 : 청풍한벽루(淸風寒碧樓)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제529호 : 금골산오층석탑(金骨山五層石塔) 진도군
이 석탑은 단층기단의 오층석탑이다. 정상에 보주< 寶珠 >를 갖추었으며 옥개석< 屋蓋石 >은 길고 넓게 처리한 이형탑< 異型塔 >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1층 탑신부를 구성한 수법은 정읍 은선리< 隱仙里 > 삼층석탑(보물 제167호, 고려시대)과 비슷하며 이와 같은 형식의 석탑양식이 남하하여 영향을 미친 듯하다. 또한 옥개석< 屋蓋石 >받침은 5단의 받침으로 평평하고 개석< 蓋石 >이 지나치게 광대하다. 각층의 탑신< 塔身 >도 매우 길게 조성되었다. 이로 보아 이 석탑은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과 서로 통하는 것으로 고려 하대에 조성된 것으로 본다.
제530호 : 가섭암지마애삼존불상(迦葉庵址磨崖三尊佛像) 거창
바위면 전체를 배(舟) 모양으로 파서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를 만들고 그 안에 삼존불(三尊佛) 입상을 얕게 새기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얼굴이 비교적 넙적하며, 얼굴에 비하여 작은 눈·코·입, 밋밋하고 긴 귀 등에서 둔중하고 토속적인 인상을 풍긴다. 신체의 표현은 각지게 처리된 어깨, 굴곡 없이 밋밋한 가슴, 막대 같은 다리와 좌우로 벌린 발 등에서 고려시대의 형식화된 면이 보인다. 좌·우 협시보살은 본존불과 거의 같은 형식으로 조각되었지만 어깨의 표현이 본존불보다는 부드러운 곡선을 하고 있다.
끝이 날카로워진 연꽃무늬 대좌(臺座)와 새의 날개깃처럼 좌우로 뻗친 옷자락 등은 삼국시대의 양식과 비슷하지만, 형식화되고 도식적인 요소가 보인다. 결국 이 불상은 삼국시대 불상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고려적인 요소가 반영된 마애불상임을 알 수 있다.
제531호 : 용문사정지국사부도및비(龍門寺正智國師浮屠및碑) 양평
용문사에서 약 300m 떨어진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지국사(1324∼1395)의 행적 등을 기록한 것이다. 정지국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황해도 재령 출신이며 중국 연경에서 수학하였다. 조선 태조 4년에 입적하였는데 찬연한 사리가 많이 나와 태조가 이를 듣고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부도와 비는 80m정도의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다. 부도는 조안(祖眼) 등이 세운 것이며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이 4각이고 윗받침돌과 탑몸이 8각으로 되어 있어 전체적인 모습이 8각을 이루고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기고, 북 모양의 가운데받침돌에는 장식없이 부드러운 곡선만 보인다. 탑몸에는 한쪽 면에만 형식적인 문짝 모양이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아래에 3단 받침이 있고, 처마 밑에는 모서리마다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돌 윗면에는 크게 두드러진 8각의 지붕선이 있고, 끝부분에는 꽃장식이 있는데 종래의 형태와는 달리 퇴화된 것이다. 꼭대기에는 연꽃 모양의 장식이 놓여 있다.
비는 작은 규모의 석비로 윗부분은 모서리를 양쪽 모두 접듯이 깎은 상태이고, 문자가 새겨진 주위에는 가는 선이 그어져 있다. 비문은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권근(權近)이 지었다. 처음에는 정지국사부도에서 20m 아래 자연석 바위에 세워 놓았는데, 빠져 나와 경내에 뒹굴고 있던 것을 1970년경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
제532호 : 영국사부도(寧國寺浮屠) 충북 영동
영국사는 통일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명종 때인 12세기에 원각국사에 의해 중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고종 때 안종필이 임금의 명을 받아 탑과 부도, 그리고 금당을 새로 지었다.
절 이름을 국청사(國淸寺)라 하였다가 후에 다시 공민왕에 의해 영국사로 불리게 되었다.
부도는 영국사 안에서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기단부·탑신부·머리장식부로 나뉘어지며 전체적으로 8각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기단의 아래받침돌은 바닥돌과 한 돌이고 가운데받침돌은 8각의 면마다 무늬를 조각하여 넣었다. 윗받침돌 옆면에는 한 겹의 연꽃잎을 위아래로 장식하였다. 탑신에는 한 면에 직사각형의 문짝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 모양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의 각 면에는 기왓골을 본떠 새겼는데 처마의 곡선과 잘 어울려서 경쾌한 인상을 준다. 머리장식으로는 복발(覆鉢)과 보주(寶珠)가 남아있다.
이 부도가 세워진 연도는 절 안의 원각국사비와 연관지어볼 때 고려 명종 10년(1180)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533호 : 영국사삼층석탑(寧國寺三層石塔) 영동
이 탑은 영국사 대웅전 앞에 서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완전한 형태이다.
위·아래층 기단의 네 면에는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특히 위층 기단의 무늬는 모서리까지 침범할 만큼 크고 넓다. 기단 맨윗돌에는 네 모서리 끝부분에서 약간의 치켜올림이 있어 주목된다. 탑신부는 각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겨 놓았으며, 1층 몸돌 정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까지 있는 문짝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윗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네 귀퉁이는 바짝 치켜올려진 상태이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각 4단씩이다.
이 탑은 기단과 탑신부가 간결하여, 조형 미술품의 규모가 작아지고 양식도 간략화되던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제534호 : 영국사원각국사비(寧國寺圓覺國師碑) 영동
이것은 고려(高麗) 원각국사(?∼1174)를 기념한 비로 명종(明宗) 10년(1180)에 세워진 것이다. 화강암(花崗岩) 1석으로 조성된 귀부(龜跌) 위에 점판암(粘板岩)으로 된 비신을 세우고, 이수(이首)를 얹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이래의 일반형 석비다.
귀두(龜頭)가 퇴화하고 귀갑(龜甲)과 비좌(碑座)의 각 층면 장식문양이 생략화(省略化)의 경향을 보이며, 이수의 용틀임도 다소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음은 시대적 특징의 반영이다. 전체적인 조화에서는 비신에 비하여 귀부가 커서 안정감을 주는 반면, 이수가 지나치게 커서 중압감을 주고 있다. 이수를 제외한 비의 높이는 110㎝이다.
제535호 : 영국사망탑봉삼층석탑(寧國寺望塔峰三層石塔) 영동
이 탑은 영국사에서 동쪽으로 500m 되는 곳의 망탑봉(望塔峰)이라는 작은 봉우리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커다란 화강암을 기단(基壇)으로 삼고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기단은 암석 윗면을 평평하게 다듬고 그 중앙에 돌출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기단은 기둥모양과 안상(眼象)을 조각하여 형태를 완성하였다. 그 위에 아무런 받침없이 그대로 탑신이 놓여있다.
탑신은 윗부분이 아래부분보다 좁아지는 몸돌을 쌓아올렸다. 1층 몸돌에는 네 면에 무늬없는 문짝모양을 돋을새김하였는데 위·아래가 돌출된 액자형이다.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며, 추녀는 수평의 직선을 이루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층이 5단이고 2·3층은 3단이다.
탑은 전체적으로 체감률이 일정하지 않지만, 몸돌의 상부를 좁게함으로써 비교적 안정감이 있다. 기단을 한 층으로 하고 기단의 맨윗돌을 생략하는 등 부분적으로 간략화된 고려석탑의 유형을 보여준다. 각 부 양식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인 12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제536호 : 아산평촌리석조약사여래입상(牙山坪村里石造藥師如來立像)
이 거구(巨軀)의 석불입상(石佛立像)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장륙불상(丈六佛像)(1장(丈) 6척(尺))이다.
상체가 짧고 하체가 긴 다소 불균형스러운 불상이지만 얼굴이나 옷주름의 뛰어난 조각(彫刻)솜씨 때문에 우수한 불상으로 돋보이고 있다. 갸름하고 단아(端雅)한 얼굴, 맵시 있는 이(耳)·목(目)·구(口)·비(鼻), 잔잔한 미소 등은 고려시대의 독특한 불상양식(佛像樣式)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은 불상(佛像)의 체구가 직사각형이면서 평판적이지만 손이나 팔, 어깨와 다리를 서투르게 표현하지 않은 점이나 옷주름의 유려(流麗)한 솜씨 등으로 당시의 석불상(石佛像)으로는 드물게 우수한 모습을 표현한 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선(線)이 구불거리는가 하면 기하학적인 좌우대칭성을 잘 지키고 있고, 힘없이 흐늘어진 선인가 하면 상당히 유려하고 섬세한 필선(筆線)을 과시하고 있으며 혼란된 선(線)인가 하면 무릎 등 동심원(同心圓)의 강조점을 표현한 옷주름선의 특징 있는 표현은 얼굴의 단아한 형태미와 함께 고려시대 석불상을 대표하는 우수한 작품임을 단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더구나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약합(藥合)을 받쳐들고 있는 수인(手印)은 중생들이 앓고 있는 심신(心身)의 온갖 병마를 없애 주는 자비로운 의왕(醫王)인 약사여래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어서 이 불상을 찾는 참배객들에게 환희심을 더욱 일으키게 해 주고 있다.
제537호 : 아산읍내리당간지주(牙山邑內里幢竿支柱)
온양시내에서 송악면 쪽으로 3㎞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당간지주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받침부분인 기단(基壇)이 땅 속에 묻혀 있어 마주 세워진 두 기둥만 드러나 있다. 기둥머리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안쪽에는 깃대를 단단히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홈이 파여져 있다. 표면이 심하게 닳아 다른 조각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으며, 기둥 바깥쪽 두 모서리를 깎아내어 마치 세로줄무늬를 새긴 것 같은 효과를 냈다. 위·아래 기둥의 굵기가 별 차이없이 다듬어져 전체적으로 세련미를 보이고 있다.
제538호 : 홍성동문동당간지주(洪城東門洞幢竿支柱)
이 당간지주는 홍성읍내의 경작지 한가운데에 78㎝ 간격을 두고 마주 서있다. 이 일대는 고려시대의 광경사(廣慶寺)터로 알려져 있고 석탑 및 석불좌상 등이 함께 전하고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위로 오를수록 가늘어지고 윗쪽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홈이 파여있으며 가운데 깃대는 남아있지 않다. 기둥의 바깥면에는 세로줄 문양이 새겨져 있고 기둥 머리부분은 둥글게 처리되었다. 두 지주 사이에는 낮은 대(臺)가 놓여있는데 중앙에 둥근 구멍 하나가 뚫려있어 깃대를 세우던 자리임을 알게한다.
높이가 4.8m 이고 다소 무거운 느낌을 주는 이 당간지주는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539호 : 용연사석조계단(龍淵寺石造戒壇) 대구 달성
계단(戒壇)은 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수여하는 식장으로, 이 곳에서 승려의 득도식을 비롯한 여러 의식이 행하여 진다. 용연사 내의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이 계단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임진왜란(1592) 때 난을 피해 묘향산으로 옮겼던 통도사의 부처사리를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이 다시 통도사로 옮길 때 용연사의 승려들이 그 일부를 모셔와 이곳에 봉안하였다 한다.
돌난간이 둘러진 구역 안에 마련된 계단은 널찍한 2단의 기단(基壇)위로 종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네 모서리마다 4천왕상(四天王像)을 1구씩 세워두고, 위층 기단은 4면에 8부신상(八部神像)을 돋을새김하였는데, 뛰어난 조각솜씨는 아니지만 섬세하고 균형감이 있어 단조로운 구조에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양식을 보이고 있는 탑신은 별다른 꾸밈을 하지 않은 채 꼭대기에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조각해 두었다.
절 안에 세워져 있는 석가여래비에는, 석가의 사리를 모시고 이 계단을 쌓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계단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540호 : 홍천괘석리사사자삼층석탑(洪川掛石里四獅子三層石塔) 홍천군청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높이 3.5m의 탑으로 원래 홍천군 두촌면 괘석리 밭 가운데 있던 것을 1969년 12월 30일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기단< 基壇 >은 이중기단< 二重基壇 >으로 하층기단은 지대< 地臺 >·면석< 面石 >·갑석< 甲石 >이 하나의 돌로 조성< 造成 >되었는데, 면석에는 각면에 2구씩의 안상< 眼象 >이 있다.
상층기단은 네 마리의 돌사자가 탑신부< 塔身部 >를 떠받치고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의 이형탑< 異型塔 >인 구례< 求禮 >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 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35호)에서 그 시원< 始原 >을 찾아볼 수 있다. 탑신부< 塔身部 >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2·3층의 탑신석은 없어졌다. 옥개석받침은 3단이며 상륜부< 相輪部 >에는 하나의 돌로 된 노반< 露盤 >과 복발< 覆鉢 >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