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프란츠 카프카 홍성광 옮김 팽퀸클래식코리아
"나는 밤에
혼자 있어야 합니다. 바닥에서 자면 침대에서 떨어질 염려가 없는 것처럼 혼자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카프카
일기
흔히 카프카를
절망을 노래한 작가라고 한다. 나는 이런 식의 평가는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작가 이전에 한 인간의 삶을 그렇게 단순화 할수는 없지 싶다.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은 다른 사람의 절망을 보고 나의 희망의 근거를 찾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절망적 상황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휴먼 다큐'같은 방송은
끔찍하다. 카프카를 통해서 절망속에서 희망을 발견할 근거를 찾기보다는 그의 절망의 여정을 같이 가보는 게 어떨까 싶다.
환경에서는
지표종이 있다고 한다. 반딧불이도 그런 종의 하나라고 한다. 반딧불이가개체수가 많고 적고가 생태의 건강성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기에 그럴
것이다. 즉 이
생물들은 환경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프란츠 카프카를 인간 세계의 지표종 같은 존재라고 하고
싶다.
차이가 있다면
환경 지표종은 보호받고 존중 받는 대상이지만, 인간 세계의 지표종들은 '루저'나 '찌질이'나 사회 부적응자로 세간의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직장에
출근하는 것을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싫어 하지만 직장을 그만두지 못하고, 전업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밥 벌이의 두려움으로 실행하지 못하고
질망하여 몸부림치고, 결혼을 하여 가족을 이루고 싶었으나 결혼을
앞두고는 도망을 치고. 그러다가 병으로 41세의 짧은 나이게 죽는다.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 받지만, 당시에는 단 한 권의 변변한
책도 제대로 된 평가도 받지 못한 작가가 프란츠 카프카다.
위대하다고
평가 받는 모든 작가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많은 작가들은 당대에 형편없는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들의 작품은 당대의 상식과
관념을 해체하고 파괴하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 . 시대에 너무 앞서기에 이해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카프카의 재능을 알고 지지하고 사후에 작품을
출판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브로트란 친구는 당시에 상당히 인기있는 작가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단지 카프카의 출판인으로만 기억될 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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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지표종을 한 번 더 언급해야겠다. 환경의 미세한 변화에 예민하고 섬세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가장 무능한 생물종 임도 틀림이
없다. 이들이 환경의 변화에 잘 적응하는 능력자들이라면 결코 지표종이라는 왕관을 차지할 수는 없지 않았을까? 한 인간만
아니라, 삶과 작품의 총체로서 프란츠 카프카를 '근대'라는 환경에서 인간의 지표종으로 간주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프란츠 카프카처럼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없는 작가는 드물다고 해야 하지 싶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 모략한 게 분명하다. 아무런 나쁜 짓도 않았는데 이날 아침 느닷없이 그가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하고, 법원과의 소송도 느닷없이 이렇게 시작한다. 어떤 이른 아침에 아이가 느닷없이 엄마의 자궁에서 세상 속으로 떨어졌다. 혹은 어느날
바다에 살던 명태가 오산천에 느닷없이 방류된다. 얼마나 당황스럽고 황당하고 불안하겠는가? 이유도 모르고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다.
요제프 k는
대형 은행의 부장이지만 죄명도 모르면서 길고 지루하고 실체도 없는 소송에 말려든다. 처음에 그는 소송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소송을 통해
잘못된 제도를 바로잡겠다는 호기도 부린다. 하지만 소송에 점점 빠져들면서 혼란스럽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처지에 빠지게 되며, 언제 끝날지
기약도 할 수 없게 되고, 중단도 할 수 없는 소송의 덫에 걸린다. 판결을 하기 위한 소송이 아니라 어쩌면 소송을 하기 위한 소송인
셈이다.
카프카의 짧은
단편 중에 <법 앞에서>가 있다. 이 단편은 소설에도 삽입되었는데, 단편이 극도로 압축해 놓았다면, 장편 <소송>은
압축한 단편을 물에 풀어 놓았다고 해 보고 싶다. 간단히 소개하면 어느 날 시골 남자가 법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법의 문 앞으로 간다.그런데
법의 문 앞에는 문지기가 있어 시골 남자에게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시골 남자는 나중에 들여보낼 수 있는지 물어본다. 법의 문지기는
그것은 가능하다고 한다.
시골 남자는
법의 문 앞에서 평생을 기다리는데 아무도 법의 문을 통과한 사람도 없고 법의 문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도 없다. 죽음을 앞둔 시골 남자가
마지막으로 문지기에게 이유를 묻자. 문지기는 이렇게 대답한다. "다른 사람은 누구도 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소. 당신만이 이 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라고 대답하고 이제 법의 문을 잠그겠다고 한다.
이 짧은
단편만큼 많고 다양한 해석이 달라붙은 글도 드물다고 한다. 카프카는 복잡한 사람이며 쉽게 접근을 허락치 않는 소설가다. 처음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가, 죽게 되자 이 문은 오직 당신만 들어가도록 정해졌다고 한다. 시골 남자는 죽어서도 이 문을 들어가지 못하고 법의 문
앞에서 죽는다.
이럴때
우리는 아리송하다고 해야할 것 같다. 문지기는 왜 시골 남자만 들어갈 수 있다는 문을 막았을까? 들어갈 수 없는 전용문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들어갈 수도 없는 전용문을 왜 만들었을까?시골 남자는 왜 평생을 그 문을 들어가려고 온갖 노력을 했을까? 법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여기에서 법을
구체적인 민법이나 형법 같이 실제하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라고 해 보자. 법은 분명히 있지만, 아무도 그
실체를 알지는 못한다. 누구 한 사람이나 한 세력이 대표하지 못한다. 하지만 법은 누구나에게 열려 있다.단 들어갈 수 없을
뿐이다.
문지기는
뭔가 임무를 하고 있지만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았는지, 무슨 목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지 모른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의 관료제도나 관료들 같다. 시골 남자는 자유로운 사람이지만, 법의 문 앞에서 떠나지를 혹은 떠날 수가 없다. 평생을 거기에 얽매어
있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운명 같다.하지만 소설은 아무것도 명쾌하지 설명하거나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혼동스럽고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되는
것도 아니고 안되는 것도 아니다.
뭔가 지껄여
놓았지만, 사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내가 기생하고 있는 회사에서는 사장부터 말단 직원까지 모두가 힘이 든다고 아우성이다. 회식에서 직원이
사장에게 힘들어 죽겠다고 토로하면, 사장도 많이 고통스럽다고 하소연하는 식이다.. 사장 직원 할 것 없이 다 힘이 드는데, 무엇이 그들을
힘들게 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모두 힘이 드는데 분노를 폭발시킬 대상이 없다. 강물에 쓸리는 빗물처럼 어디서 나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지만 그냥
고통스럽다.어느날 느닷없이 강물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사회는 각
개인에게 성공과 출세의 길과 행복으로 통하는 문을 만들어 주었다. 개인들은 자신이 열심히 하면 행복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란 생각으로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문에는 무서운 문지기가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만 문지기도 모른다고 한다.
운이 좋아서
문 안을 살짝 들여다 볼 수는 있지만, 사실 문안에 뭐가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단지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은 할 수 있다. 개인은
행복의 문 앞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시도을 다 해본다. 하지만 문은 그가 죽을 때까지 열리지 않고, 그는 문 앞에서 죽고 만다.
행복의 문도 죽음과 함게 닫히고 만다. 죽음으로서 그는 비로소 자유롭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근대'의 인간을 소외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근대의 인간은 괴롭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를 귀찮게 하는 왕도 운명의 여신도 없다.. 괴로운
이유는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조건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개인으로서
자유로운 인간이 있어야 한다. 개인이 발견되고 나서야 소외가 있을 수 있다. 고통을 주는 구체적인 실체가 없어야 한다. 시스템 자체가 고통의
원인이다. 시스템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누가 대표하지도 않는다. 시스템은 모호하다. 프란츠 카프카를 위대한 작가라 평가 한다면
'근대'와 근대 인간의 이런 면을 먼저 발견하고 작품에 녹여낸 점이 아닐까 싶다.
요제프 k는
소송에 말려들고 길고 지루한 소송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지만, 소송이라 할만한 소송도 없었고, 그는 단지 계속 소송 중이다.
처음부터 나중까지 무엇 때문에 소송을 하는지도, 관할하는 법정이 어디에 있는지도 법이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법은 법원과 관료를 통해서만 변호사를 통해서만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고, 그들 관료들도 모든 게 혼란스럽고 종잡을 수가 없다. 법이 있긴
있지만 아무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한다. 모두 다 각자가 짐작만 할 뿐이다. 소송은 유죄냐 무죄냐를 판결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소송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관료기구도 처음부터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 그 속에서 개인들이란 소송이나 관료기구나 시스템을
위한 원료에 지나지 않는다. 기계 속으로 빨려들어갈 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가련한 존재로서 인간.
단 하나의
사실은 그가 소송중이라는 것이다. 그는 왜 도망가거나 소송을 거부하지 못하고 계속 소송에 매달렸을까? 1년여의 소송 끝에 그는 어느날 찾아온
사형 집행인에게 끌려가 채석장에서 참수를 당한다. 물론 죄명도 이유도 모른다. 그냥 집행이 되었을 뿐이다. 법의 실체는 모호하지만 법은 존재하고
인간의 저항은 여기에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현대인은
지금 모두 소송중일지도 모르겠다. 고발자도 없고, 피해자도 없고, 판사도 법도 없지만 계속 소송 중일지 모른다. 이 세계는 나를 영원한 소송
상태에 놓아 두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증거를 모으고 변호사를 사고 이런저런 알리바이를 모아서 무죄를 선고 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 보지만,
그런 모든 서류들이나 노력들을 법이 감안하는지 무시하는지도 알 수 없다. 공판 날짜가 언제인지, 때로는 판사가 누구인지도, 대체 이 소송이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하나 형벌에 처해질 것은 확실하다.
밤을 견디기
위해 장난을 하고 있긴 하지만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아리송하다. 단지 내가 지금 절실히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다시 카프카를 읽고 싶고, 또
읽고 싶은 마음 뿐이다. 카프카의 소설들은 매력적이다. 작품들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외려 혼돈만 가져다줄지 모른다.그 이유가 카프카를 읽을
이유가 아닐까 싶다.
환경 지표종을
보고 우리는 생태 지도를 그리거나, 대책을 강구하거나, 대안을 모색해 볼 수 있다.
인간 세계의
지표종인 카프카가 고통스럽게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다행인 점은 그가 충실한 보고서를 남겨 놓았다는 점이다.
"이 거대한
법원 조직은 말하자면 영원히 떠 있는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누군가 자신의 자리에서 독자적으로 무언가를 바꾸면 발밑의 지반을 없애
버려 자신만 추락할 뿐, 거대한 조직 자체는 약간의 장애를 다른 곳에서 쉽게-모든 것이 연결 되어 있으니까요.-보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