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함양 수철~산청 중태 42km, 10월 말 연장 개통!
산청군 "길은 이미 완성 상태"...연말쯤 하동구간도 열 듯
둘레길 바람을 타고 지리산둘레길도 연장 개통을 앞두고 있다. 현재 남원 주천~함양 수철까지 70km는 열린 상태지만 산청 수철에서 평촌~대장~내리~어천~청계~운리~사리~천평~중태 구간 42km를 10월 말 개통할 예정이다.
현장 조성작업을 하고 있는 산청군 산림과 관계자는 "현재 개통식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길은 이미 완성된 상태" 라며 "여름 장마와 태풍으로 비가 오랫동안 내려 작업을 못 해 조금 늦어지고 있으며, 이정표도 이미 다 만들어놓은 상태라 설치작업만 끝내면 된다"고 밝혔다. (사)숲길도 "산청군에서 10월 말 개통할 것이라고 알려왔으며, 현재 마무리 작업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지리산둘레길 산청구간이 개통되면 총 연장구간이 110km를 넘어서며, 나머지 산청과 구례구간도 탄력을 받아 연말이나 내년 초까지 개통작업을 서두를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리산둘레길 300km가 완전 개통되면 지리산이 주는 상징적 의미가 큰 만큼 길 문화에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 동쪽 산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중산리를 통해 올라가는 천왕봉과 남명조식(1501~1572년) 선생이다. 산청은 한약초와 곶감 등의 특산물도 유명하지만 천왕봉의 웅장한 산세와 남명 선생의 기개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오랫동안 비 내려 둘레길 추가개통 늦어져
10월 말 개통예정인 중태리에서 유점골과 불당골을 지나 덕천강까지 장장 5.8km의 내리막길로 내려온 뒤, 덕천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덕산중고교 앞 다리를 건너면 덕천서원이 나온다. 이 덕천서원이 지리산 정신의 상징적 인물인 남명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선생은 1538년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이후에도 선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선생은 관직에 나가지 않은 이유를 '선비가 벼슬을 하는 것은 녹을 받아 자신의 사리를 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군주를 도와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데 있다. 선비는 모름지기 출사할 때와 은둔할 때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선비가 출사해 자신의 뜻을 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차하게 연명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본 것이다.
산청은 남명 선생과 곶감으로 유명
남명 선생이 은둔생활만 한 것은 아니다. 1568년에 올린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봉사'에 나오는 서리망국론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산림처사를 자처하면서 말년에는 산천재를 짓고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 전념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의를 중심적 실천과제로 삼았던 곽재우 등의 제자들이 최초로 대대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해,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선생의 기개를 대변하는 시 한 수가 전한다.
'천석이나 되는 종을 보게나/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네/어떻게 하면 두류산(지리산)처럼/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으랴'
덕천서원 바로 앞에는 세심정이란 정자가 있다. 세심정 바로 앞으로 흐르는 덕천강을 바라보며 잠시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덕천강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사시사철 내내 곶감을 파는 덕산시장이 나온다. 곶감은 산청의 명물이다. 강변길은 걷기 좋게 잘 단장돼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오래된 소나무 세 그루가 그윽한 풍취를 자아내는 산천재를 만난다. 남명 선생이 말년에 후학들을 가르친 곳이고, 지금은 남명 선생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선생은 산천재를 짓고 그 뜰에 매화나무를 손수 심었다. 밑에서부터 크게 세 갈래로 갈라진 줄기가 뒤틀려서 위로 뻗어 오른 나무는 440여 년의 수령을 자랑한다. 매년 3월 하순이면 연한 분홍빛이 도는 반겹꽃이 만발해, 사방에 은은한 향기를 풍긴다.
이 남명매는 남사마을의 원정매, 단속사지의 정당매와 더불어 '산청 3매(三梅)'로 불리고 있다. 3~4월에 지리산에 온다면 꼭 산천재, 남사마을, 단속사지의 '산청 3매'를 둘러볼 것을 권한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산천재 앞 도로(국도 20호선)를 건너 마근담으로 가는 길은 차량이 겨우드나들 만한 포장길이다. 산청의 오지마을 중 하나인 마근담마을은 원래 '막힌 담' 이란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농업학교가 자리한 안마근담에서 웅석봉 자락의 협곡에서 길이 막히니 그럴 만도 하다.
지리산둘레길은 마근담마을 오른쪽 산길로 접어들어 산 너머 단성면 백운계곡에서 올라오는 임도를 만나기까지 오르막 오솔길을 올라야 한다. 시천면과 단성면의 경계인 고갯길을 넘어서면 8km 정도의 임도가 구불구불 이어진다. 백운계곡을 건너 고령토 채취장을 지나치면 운리 원정마을의 1001 지방도가 나온다. 왼쪽으로 이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바로 탑동마을의 단속사지에 도착한다.
단속사는 말 그대로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뜻으로, 신라 경덕왕 때의 신충이라는 대신이 지리산으로 출가해 지은 절이라 한다. 경덕왕이 두 번이나 불렀으나 신충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이 단속사를 짓고 속세를 떠났다고 한다.
단속사지의 금당터 앞에는 동서로 두 탑이 나란히 서 있다. 보물 72호와 73호인 단속사지 동서 삼층석탑이다. 동탑은 2단의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모습이다. 기단의 아래층은 'ㄴ'자 모양의 돌을 이용해 바닥돌과 동시에 만들어놓았다. 그 위에 기단을 한층 더 올린 후 몸돌과 지붕돌을 교대로 탑신을 올려쌓았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머리장식의 일부가 남아 있다. 동탑은 서탑과 그 규모와 건조 수법이 거의 동일한 신라 중기 이후의 양식으로 상·하의 비례가 알맞고 석재의 구성에도 규율성이 있어 보인다.
지금은 단속사 절은 없고, 그 절터에 집을 지어 사람이 살고 있다. 그 농가 앞에 동서 삼층석탑만 덩그러니 서 있어, 과거의 역사를 전하고 있을 뿐이다.
탑을 둘러본 뒤 위쪽 마을길로 조금만 들어서면 바로 그 유명한 정당매가 담벼락 아래 보호철책을 두른 채 모습을 드러낸다. 고려 말 정당문학 겸 대사헌을 지낸 강회백이 단속사에서 공부할 때 심었다고 한다. 1000년을 훌쩍 넘긴 매화나무인 셈이다. 단속사지 입구에는 남명 선생의 작은 시비가 하나 있다.
'옛 단속사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이별하던 때 잘 기억해 두게나/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을 때' 라는 내용이다. 단속사지에 들른 사명대사에게 남명 선생이 써준 시로 알려져 있다.
보물 제72호와 73호 단속사 삼층석탑 지나쳐
단속사지를 지나 임도를 따라가면 점촌마을과 산중의 청계저수지가 나온다. 이 청계계곡은 지리산 끝자락인 웅석봉(1,099.3m) 아래 자리 잡아, 많은 이들이 찾는 휴양지다. '가파른 벼랑 아래로 곰이 떨어져 죽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져 오는 웅석봉은 전북 남원시 운봉읍의 바래봉에서 시작하는 지리산 태극종주의 마지막 봉우리다. 이병주 선생의 대하소설 <지리산>에도 웅석봉 얘기가 나온다.
'달뜨기는 지리산의 초입이다. (중략) 지리산을 찾은 빨치산들은 조개골 등에 숨어 이곳 달뜨기 능선 위로 떠오르는 달을 보며 고향과 가족을 생각했다. 낡은 총자루를 옆에 두고 구수하게 풍기던 된장 냄새와 아내의 젖비린내와 어머니의 말라붙은 가슴팍을 떠올렸을 것이다.'
여기에서 '달뜨기'가 바로 웅석봉의 다른 이름이다.
청계저수지를 에둘러 1001번 지방도를 오른다. 고갯길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조금 쉬었다가 내리막길에 접어드니 어느새 어천계곡의 산간오지인 어천마을이다. 지리산 태극종주의 출발 지점이자 종점인 웅석봉 아래 첫 마을이 어천마을인 것이다. 여기서 낙동강과 남강의 상류인 경호강이 멀지 않다.
어천마을은 산청군 단성면과 산청읍의 경계에 있으며, 경호강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피서지로도 꽤 알려진 어천계곡이 마을을 지난다. 지금은 작은 마을 전체가 별장과 펜션으로 변신을 거듭해 예전의 오지마을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
어천마을을 지나 오르막 임도를 오르면 산청읍 내리의 아침재가 나온다. 이름도 멋지지만 참으로 한적한 아침재를 넘어 구불구불 내리막길에 몸을 맡기면 경호강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경호강은 산청뿐만 아니라 인근의 남원·함양에서 내려오는 강물이 모여 흐른다. 덕천강과 더불어 진주 남강을 이루고 마침내 낙동강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러나 지리산둘레길은 이 아름다운 길을 두고 경호강을 따라 새로 조성했다. 어천교를 지나기 전 다리 옆으로 길을 만들어 강을 따라 올라가도록 했다. 사람들이 아침재로 가는 길을 알면 자연스럽게 아침재로 방향을 틀어 걷지 않을까 싶다. 아침재는 실제로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길이다.
아침재를 거쳐도 다시 경호강으로 내려오게 돼 있다. 경호강은 유려히 흐르고 있다. 성심교에서 잠시 경호강 아래 위를 둘러보며 쉬었다가 프란시스꼬 수도회의 산청 성심원을 둘러본다.
이곳은 1959년 설립된 '한센인들의 집'이다. 소위 '문둥이'라 불리며 멸시받던 한센인들의 안식처로서 50여 년을 유지해 왔다. 지금은 그 역할을 넓혀 '성심인애원' 이라는 1,2급 중증장애인들의 요양시설까지 운영하고 있다.
성심원을 나와 경호강의 왼쪽을 거슬러 오른다. 무거운 발길로 강변길을 따라 걷다가 바람재 안쪽으로 돌아 산청읍 내리 내동마을 앞에서 35번 고속도로(대전-통영) 아래를 지나 내리교까지 내쳐걷는다. 산청 주변 곳곳에 광고간판이 붙어 있을 정도로 경호강 래프팅은 이미 오래 전부터 유명하다. 내리교를 건너 왼쪽길로 들어서면 체육공원이 잘 만들어져 있다. 강변 산책로와 더불어 지붕이 덮여 있는 반 실내 족구장이 있을 정도다.
여름엔 경호강 래프팅도 쉽게 볼 수 있어
체육공원을 지나 휘도는 경호강을 따라 오르면 경호1교가 나온다. 이를 건너자마자 왼쪽 아래로 강변길이 이어진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서 언제든 경호강에 발을 담글 수 있는 호젓한 길이다.
이 강변길을 걸어 다시 35번 고속도로 아래를 지나 왼쪽 대장교를 지나면 금서면 매촌리 대장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을 지나 농로와 금서천을 따라 오르면 시냇가가 참으로 아름다운 평촌마을이 나온다. 적당한 깊이의 물웅덩이와 산등성이의 상수리나무 등 참나무과의 나무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어릴 적 물장구치던 날들이 떠오른다.
이 마을에서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폐교된 매촌초등학교에 세워진 원각사 해동선원이다. 처음 얼핏 보았을 때는 무슨 석재공장 같아 보였다. 뛰어난 석수장이 혹은 돌장사가 이 폐교에 둥지를 틀었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론 전혀 다른 곳이었다. 운동장에 세워진 거대한 석불은 통일대불이었다.
이 폐교에 대한불교 조계종 원각사 해동선원을 세운 사람은 선지식으로 수많은 수좌들의 존경을 받는 조계종 전계대화상인 활산 성수 스님이었다. 1994년 성수 스님은 "지금 고찰들은 죽은 땅이라 새 땅에서 사자새끼를 키우겠다"며 지리산 자락인 경남 함양 황대마을로 들어가 황대선원을 세운 뒤 2002년 바로 이곳에 해동선원을 열었다고 한다.
해동선원이라는 말은 신라고승 원효 스님을 중국에서 '해동불' 이라 불렀다는 데서 따왔다. 불교 정신문화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근원으로 삼겠다는 의미에서 원(院)이 아니라 원(源)자를 붙였다고 한다. 또한 이곳의 통일대불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서린 지리산의 영령들을 위로하고 평화통일을 발원하기 위해서 조성했다고 덧붙였다.
통일대불과 여러 불상 및 십이지신상 등이 가득히 들어선 해동선원 뒷문을 나와 다시 길을 나선다. 금서천의 아주 작은 다리인 평촌교를 건너 농로를 따라 신촌마을에 다다르면 59번 국도를 만난다. 향양교 건너 삼거리에서 큰길 왼쪽으로 올라가 향양마을 앞에서 다시 왼쪽으로 꺾어지면 수철교 건너 수철리가 보인다.
수철리의 아주 작은 나무 이정표가 반갑다. 새롭게 개통예정인 구간의 끝이다. 수철리에는 지리산둘레길이 이미 개통돼 있기 때문에 이정표가 잘 세워져 있고, 마을에서는 많은 주민들이 민박을 한다.
지리산의 둘레길은 계속 된다. 현재 70km지만 곧 100km를 넘을 예정이다. 둘레길 따라 사람들은 지리산을 돈다. 지리산 스스로도 계속 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로 돌고, 순환길이 생겨 돌고... 그래서 지리산은 영원하다.
글쓴이:박정원 부장대우
참조:지리산 둘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