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3시 30분쯤 출발. 신탄진-남이분기점이 막히는 바람에 증평에선 대략 5시쯤 출발.
가려고 했던 곳들이 생각보다 너무 늦어지는 바람에 구불구불한 2차선 지방도를 과속주행한다.
아직도 통화중인 뒷 좌석은 장난치고 갈구고 시끌시끌하다가 어느덧 조용해진다.
분명 계속 목소리는 들려오는데 한 사람과의 대화만 들린다. 다른 한 사람은 이야기를 거의 꺼내지 않는다.
청안과 청천의 괴악한 고개를 거의 다 내려올 무렵, 들리는 목소리 '나 체한 것 같애 형... 천천히 가...'
문득 깨달았다. 60km/h짜리 도로에서 1.5배에 달하는 엄청난 속도로 전력질주하고 있었던 것.
구불구불 커브를 쉴새없이 넘나드는 바람에 피로에 쩔어있던 일행이 결국 이기지 못하고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던 것.
사실 서울에서부터 시작된 일정은 쉴새없이 왔다갔다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다.
분명 사진 찍는 이유도 있지만 드라이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보니 일부러 안 좋은 길을 찾아갈 때도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너무 긴 장거리 여행과 그날밤의 음주가무로 모두의 몸이 한계치에 이르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결국, 목적지에 다다라서 천천히 낮추어 '청천'이라는, 나 빼고는 아무도 모르는 오지로 몸을 향했다.

버스를 좋아하시는 동호회 분들도,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곳 '청천'.
이름 그대로 맑은 계곡이 어우러진 오지로서, 청원과 괴산 사이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하지만 낯설다 해서 그저 조그맣다고만 치부하기엔 상당히 크기가 큰 데,
이래뵈도 청천이 속한 청천면은 200㎢에 달하는 광대한 넓이를 자랑하는 곳이다.

인구 약 5천명, 200㎢의 광대한 넓이를 지닌 청천면은 경기 이남 모든 읍/면 중 가장 큰 고을이다.
그 크기만 해도 수원이나 성남, 안산 정도는 가볍게 넘으며 무려 통영, 고양과 맞먹는 넓이.
그래서 '청천사거리' 이정표에 나오는 문경, 보은, 산외 지역도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다.
다른 '마을'까지 차로 이동하는 시간만 해도 기본 30분은 걸릴 정도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동네로 나가기 불편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생겼고,
설상가상 사방으로 이어진 산줄기는 청천을 더 고립된 오지로 만들었다.
이 불편을 덜기 위해 오래 전부터 버스터미널이 생겨 동네 주민들이 편히 기댈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괴산군에서도 상당히 신경을 쓴 탓인지 완벽한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은 아예 새로 지은 건물마냥 깔끔한 비주얼을 뽐낸다.

유동인구가 많지 않은 시골터미널 답게 건물 옆으로 버스 출입구가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역세권에는 당당히 감자탕집의 간판이 길~게 들어서 있다.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지만 의외로 있을 건 다 있는 것 같다. 심지어 편의점도 있고.

왠만한 면 규모 마을에선 찾기 힘든 재래시장도 아직 남아있고, 규모도 꽤 크다.
5천명이란 인구가 워낙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어 타 지역으로 이동하기 힘든 주민 분들이 많이들 이용하시는 것 같다.
정선5일장 처럼 아직 유명세는 타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괴산 내에선 알아주는 재래시장이므로,
한 번쯤 찾아봐도 좋을 것 같다. 비막이 시설까지 되어있어 구경도 편하고 주차공간도 넉넉하고, 특히 먹을 게 많다.

하지만 시간에 쫒기는 우리는 이 좋은 곳에서 여유롭게 식사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일행 하나가 체해 편의점에서 헛개차(-_-)로 떼우는 와중에 밥을 먹는 상상 자체를 할 수 없는 분위기다.
속이 울렁거리는데 헛개차로 떼우는게 답답해서 다경험자인 내가 결국 소화제를 건내고 주차장 옆 정자에서 쉬라고 한다.
체했을 때는 소화제와 더불어 매실이 직빵이란 것을 전혀 모르는 모양.
선천적으로 저주받은 내장(?)을 타고난 나였기에 그나마 어떻게 해야 나아지는지를 터득하고 있어 참 다행이었다.
대전 있을때 내내 여유부리다 뒤늦게 레이싱을 했던 것에 대한 자책과 반성은 더불어서.

해질녘 아스라히 산에 걸친 한 줌 노란 빛깔은 조용한 시골마을을 더 황홀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비록 리모델링되어 깔끔하고 번듯해졌지만 시골 특유의 정겨움은 어디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원래 같으면 출입도 못할 주차장이지만 이미 바로 옆에 정자와 주차장이 있고 푸르른 녹음도 우거져서,
그저 버스를 탈 용도가 아니라 쉬어가는 용으로도 충분히 쓸 수 있을 법하다.

승차장 끝 건물과 맞닿은 쪽에 자그마한 입구가 있는데 거기에 매표소가 있다.
하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차표 파는 곳'이라지만 사람은 온데간데 없었는데,
잠시 일 보러 다른 곳으로 가신건지 아예 영업을 안 하시는건지는 알 수 없다.
문 안쪽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농사를 위한 화분(?)도 잘 가꾸어진 것을 보아 잠깐 일 보러 나가셨을 가능성이 더 높다.

시간표도 2013년 8월. 방문 기준으로 바로 전 달에 깔끔하게 새로 뽑은 것이었다.
시간표가 잘 바뀌지 않는 시골 터미널의 특성상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증평, 괴산, 미원을 비롯 여기에 있는 모든 시간표는 군내버스.
시내버스처럼 현금 or 카드를 써서 이용할 수 있기에 아마 이 쪽 표는 영업을 한다 해도 팔지 않을 것 같다.
그 어떤 배차도 1시간 이내로 들어오는 법이 없다.
아무리 괴산 땅이라지만 증평이 더 크고 소요시간도 큰 차이 없는데 괴산행이 조금 더 많다는게 놀랍다면 놀라운 점.
그 외 청원군 미원면 가는 버스도 있고 (청원군이지만 증평, 괴산보다 가깝다..!)
나머지는 청천면 지역을 돌아다니는 지선 버스들. 하루 몇 대 안 되기 때문에 정말 시간표가 꼭 꼭 필요하다.

직행버스 시간표는 오래된 종이판에 붙어있다. 근방에 큰 도시가 청주뿐임에도 하루 7회에 불과하다.
같은 면 동네인 화양동-송면행 버스도 7회 있고 이 중 3회는 상주 화북까지 운행.
청주에서 출발해 화양동-송면-이평-화북으로 운행하는 노선이 청천을 중간경유하는 것이다.
수많은 계곡과 산을 이어주기에 경치도 좋고 은근히 타볼만한 노선이지 싶다.
의외로 이런 곳까지 동서울 가는 차가 있다. 무려 하루 1회.
물론 위의 청주-청천-화양동-송면-이북 노선이 동서울까지 연장된 경우라서 실제론 청주-화북 노선이 청천의 유일한 시외버스다.

반짝반짝하게 코팅된 시간표지만, 뭔가 옛날 느낌이 나도록 각도를 잡아보았다.
어쩐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위의 것과 사실 별 차이는 없지만 땜질이 많은 정도.
시외버스도, 군내버스도 많이 들어오지 않아 청천은 사시사철 여유롭기만 하다.

시간표가 붙어있는 '차표 파는 곳' 바로 옆의 풍경.
그렇다.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입구는 사실상 여기 뿐이다.
시장 골목이 청천터미널 입구인 셈이고, 실제로 버스를 이용하는 분들 상당수가 청천시장에서 장을 본데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시골 속의 중심지, 고요함 속의 북적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월의 흔적이 물씬 느껴지는 삼각지붕과 깔끔하게 리모델링된 타일바닥이 조화를 이루는 광경.
시간에 휩쓸려 사라질 줄도 모르고 어엿히 옛 그림을 그려주는 저 존재가 참으로 고맙다.
더불어 겉모습은 바뀌었을 지언정 속내는 그대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청천의 활기를 이어주는 이 정류장과 시장도.
맑고 화창한 공기와 특유의 조화로운 분위기는 그 어느 곳에서도 느끼기 힘들다.
말로 설명하기도 벅차다. 왠지 직접 가보라는 말밖엔 하지 못 하겠다. 그만큼 좋고 또 좋았다.

시간이 촉박해 방방 뛰고 있지만 아직 체기가 가라앉지 않아 계속 기다리며 여유부릴 수 밖에 없었다.
때마침 들어온 차 한 대. 괴산의 교통을 책임지는 '아성교통'이 송면에서 들어와 잠시 쉬고 있다.
몇 년 식인지 정확한 판별은 어렵지만 분명 '새차'다. 중간의 (언제적) 대우 마크도 눈에 띈다.
그나저나 같은 면 내임에도 여러 행선지를 붙여 따로 노선을 만들 만큼 거리감이 있나 보다.
아직 송면, 화양동 일대는 가보지 못 했지만 왠지 그 곳도 분위기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중간에 저 군내버스가 들어왔었던 이평 가는 시외버스도 한 번 왔지만 너무 순식간에 빠진 탓에 사진은 못 찍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하늘의 노을은 더욱 노랗게 물들고, 어둠은 서서히 공기를 가르고 찾아오고 있다.
묘한 분위기에 한창 젖어갈 무렵, 드디어 체기가 가라앉은 것 같다며 어서 가자고 재촉한다. 소화제가 효과가 있었나 보다.
체하지 않은 또다른 한 녀석을 찾아 급하게 차에 올라 마지막 바퀴를 굴리기 시작한다.
약 30분의 시간. 짧다면 짧지만 청천이란 두 글자가 머릿 속에 강하게 박힌 순간이었다.
어쩌면 한 동안은 잊지 못할 좋은 그림을 남겨준 청천이란 두 글자가 그저 고맙다.
다시 찾는 날이 또 있을지 모를, 다시 찾는다면 꼭 여기서 밥을 먹고 계곡과 산을 둘러보겠단 다짐까지 새겨가며 다시 차에 오른다.
첫댓글 1980년대 중반까지 청천-괴산-음성-이천-마장동 직행이
1시간 간격으로 운행했던게 기억납니다(경기.남일여객).
산간시골지역인데도 터미널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점이
당시의 규모를 짐작케 해주고 있죠.
(# 첨부사진:1970년대 마장동터미널 설명절 풍경
왼쪽 행선판 이천 여주 원주/음성 괴산 연풍 청천 목도.
청천까지 운행했음을 알수가 있죠^^)
당시 서울-괴산을 운행하던 노선이 이천, 음성 경유였던 것으로 아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꽤 많이 보이더군요. 청천까지 들어갔을 정도면 지금보다 더 큰 규모였겠죠. 실제로 청천면이 '면' 지역임에도 인구 2만명을 찍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인구가 줄고 자가용 보급이 늘어난 지금은 큰 의미 없지만, 아직도 동서울행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높은 위치에 있는 동네라는 걸 실감케 합니다. (더불어 마장동터미널 사진도 잘 보고 갑니다. 덕분에 좋은 구경 하네요 ^^)
@Maximum 전국 최고 득표율과 최다선 김종호 전 국회의원의 고향이며
임씨와 노씨들이 많이 사는 지역입니다...
@Maximum 중부고속도로 개통 전만해도
단양-충주-장호원-이천-광주-성남-길동-마장동,
충주-직통-마장동, 충주-직통-반포동의 3계통 운행과
괴산-음성-장호원-이천-광주-성남-길동-마장동,
청천-괴산-목도-음성-이천-광주-성남-마장동의
노선을 직행과 완행이 10여분 간격으로 운행을 했었죠.
@중원고속 일개 군 지역임에도 10분 간격으로 운행했을 정도로 수요가 많았나보군요. 비록 완행이지만 다양한 행선도 갖추고 있고... 지금은 너무 많이 변해버린 것 같아 아쉽네요..
눈과 마음이 즐거운 글에 머물다 갑니다.
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역시 우리나라는 가봐야 좋은 점을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고을이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숨겨진 명소가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비록 사진에 남긴 것은 터미널 위주였지만 사진에 담지 못한 풍경이 더욱 멋있었던 것 같아요. 아름다운 고을, 더 많이 찾고 싶습니다. 더불어 안티선진님 필력에 제가 오히려 감탄하고 가네요. 감사합니다. ^^
예전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시내버스만으로 이동하며 들렸던곳인데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 반갑네요~ 청천에 도착해서야 아침식사를 할 수 있죠... 김밥집 우동이 아직도 생각난다는^^
서울-부산 시내버스의 중간 경로에 청천이 있었군요... 나중에 또 한 번 가보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
청천에서 10여분만 가면 화양계곡이니 야영객들 때문인지 조그만 동네지만 진짜 있을건 다 갖춰져 있더라구요. 본인도 2년전에 화양계곡 가려고 청천을 경유한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슈퍼 주인아저씨가 있으셨지요. 아마 직행 운행시간 외에는 마실나가시고 그러신가 봅니다.
청주-미원-청천-화양동 노선은 친선버스의 주력노선이었죠.
1980년대 후반까지 1일 15회정도 운행 했습니다.
대성 대한 서울 충일은 5-10회 수준 운행.
예전 시내버스여행하다 들린곳인데 참 면지역치고유동인구도 제법되더군요.재래시장근처 농협도바삐움직이구요.시외버스승객들은 대부분청주승객이더군요
나름대로 규모가 있기 때문에 활발하게 돌아가는 곳 중 하나인 듯 합니다. ^^
괴산군 소속이지만 노선 계통으로는 청주로 포함되는 지역입니다.^^
그랬었군요... 하긴 시외버스가 청주 가는것 빼곤 아무것도 없더군요. ^^
청천이란 동네는 예전에 고속도로 막힐때 우회하면서 지나간적이 있는데 청천이란 이름대로 아름답네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둘러봐야겠어요^^
이름만큼 아름다운 곳이죠~ 여유롭게 구경하면 더 매력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