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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화성의 효찰(孝刹), 화산 용주사(華山 龍珠寺) ③
다음은 천불전으로 향하여 천불전을 참배했습니다. 참배 후 삼존불과 천불을 사진에 담았 으나 모두 사진이 흐릿하게 나와 올릴 수 없음이 아쉽습니다.
천불전(千佛殿)
이 천불전은 원래 노전(爐殿) 또는 향로전(香爐殿)으로 불리던 건물을 중수하여 천불전이라 했는데, 석조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안에는 중앙에 주존(主尊)으로 비로자나불과 좌협시 아미타불과 우협시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고, 현재의 현겁천불을 모 시고 있습니다.
지장전(地藏殿)
현판이 세로로 달린 것이 특이합니다.
『이 지장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에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식 건물입니다. 건물의 측면에는 주심포 양식 특유의 도리가 노출되는 가구(架構)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물 정 면의 좌우에는 빗살무늬의 창이 마련되어 있고 중앙 한 칸에만 출입문이 있습니다. 이 출입문 을 들어서면 정면에 자리한 지장보살과 좌우에 협시한 도명존자ㆍ무독귀왕의 지장삼존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중앙의 지장보살은 민머리(僧形)에 지물(持物)은 육환장을 들고 있으며 몸 체는 어깨가 좁고 그 경사가 급하여 움츠린 듯한 인상을 줍니다.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의 좌우 에는 명부시왕 10구와 판관 4구, 사자(使者) 2구, 그리고 인왕상 2구가 있는데 이들은 1894년 만의사(萬儀寺)의 지장전이 퇴락하여 이곳 용주사에 모셔온 것이라고 합니다.』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
대웅보전 뒷쪽 왼편에 자리잡은 시방칠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인데, 말하자면 삼성각(三聖閣)입니다. 이름이 참으로 독특합니다. 처음 보는 이름입니다.
시방(十方)이란 동ㆍ서ㆍ남ㆍ북 사방(四方)과 동북ㆍ동남ㆍ서남ㆍ서북 사유(四維), 그리고 상ㆍ하의 열 곳의 방향으로 이는 무수한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칠등(七燈)이란 칠성, 즉 북두칠성을 가리키므로 시방칠등각은 결국 칠성각과 동일한 뜻입 니다. 이것은 절의 창건 당시 지금과 같은 시방칠등각이 아니라 칠성각이라 했다 합니다.
내부에는 정면에 칠성탱화, 그 왼쪽에 산신탱화, 오른쪽에 독성탱화가 있고 최근작인 소규 모의 석조 석가상이 안치되어있습니다. 왜 석가상이 안치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칠성탱화. 1935년 제작.
그런데 석불이 모셔져 있는데 석가모니불의 대표적인 항마촉지인(降魔觸指印)을 하고 있어 석가여래상으로 여겨지는데 이 부처님을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로 모시고 있는 듯 합니다.
독성탱화. 1942년 제작.
독성은 원래 부처님의 제자로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고 석가불의 수기를 받아 남인도의 천태산(天台山)에 머무르다가 말세중생의 복덕을 위하여 출현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독성 탱화는 나무와 산, 즉 천태산을 배경으로 하여 늙은 비구가 석장(錫杖)을 짚고 앉아 있거나 편안한 유희좌(遊戱坐)를 취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나무와 산과 꽃, 그리고 새가 어우러진 천태산을 묘사하고 유희좌를 취한 나반존자와 차를 끓이는 동자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산신탱화. 1942년 제작.
시방칠등각 앞에서
호성전(護聖殿)
『정조대왕께서는 일반적인 제사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던 듯 현륭원 옆에 사도세 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용주사를 창건하고, 대웅보전 옆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각 으로 호성전을 건립하였다. 호성전은 팔작지붕의 궁궐형식으로 지어진 전각으로서 사도세 자의 위패를 모셔두고 매일 새벽, 한낮, 해질녘, 초저녁, 한밤중, 자정 이후 등 여섯 번의 재를 올렸다. 이후 호성전에는 정조대왕, 경의황후(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김씨(정조의 왕비)를 차례로 모시게 되는데 이때마다 49재(영산재)를 베풀 것은 물론 속절제와 기신제를 올려 극락왕생 을 발원하였다. 호성전은 용주사 창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후 일반 맞배지붕으로 중건되었다.』
호성전의 위패
사도세자(장조), 혜경궁홍씨(정조대왕 어머니), 정조대왕, 효의황후(왕비)의 위패.
전강영신대종사사리탑(田岡永信大宗師舍利塔) 전강대종사(1898~1975)는 현대 한국의 대표적 고승이자 용주사의 정신적 지주입니다. 스님의 속성은 정(鄭)씨이며 전남 곡성출신으로 부친은 해룡(海龍), 모친은 황계수(黃桂秀)로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화상(霽山和尙)을 은사로, 응해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출가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습니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들어가 제산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고, 이후 예산 보덕사(報德寺), 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행에 전념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 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하며, 특히 100일 동안 자지 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 합니다. 스님은 23세가 되던 1921년 드디어 크게 깨달은 후 오도송(悟道頌)을 남겼으며, 이후 당대의 선백들을 찾아가 인가(印可)를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의 한암(漢巖)스 님을 찾아가자 한암스님이 묻기를 "육조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계속해서 용성(龍城)ㆍ혜월(慧月)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스님은 만공(滿空)스님을 찾아갔다가 더욱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스님은 처음에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지 못했다가 재발심을 하고 다시 정진하였으며, 마침내는 전법게(傳法偈)를 전수받으면서 선종 제 77대의 법맥을 계승하게 됩니다.
전강스님 오도송(悟道頌)
昨夜月滿樓(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이 누각에 가득하더니
만공스님 전법게(傳法偈)
示 田岡永信 시 전강영신 佛祖未曾傳(불조미증전) 부처와 조사도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고 鏡虛門人 滿空 경허문인 만공
탑에는 팔상도가 새겨져 있습니다.
정파님과 이 사리탑을 돌며 팔상도에 대해 설명하느라 시간이 다소 지체 되었습니다.
부모은중경탑
용주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부모은중경탑입니다. 용주사는 창건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효의 본찰'로 유명합니다. 용주사는 창건 후 6년이 지난 정조 20년(1796)에 부모은중 경판을 제작했는데 당시 최고의 화가였던 김홍도가 변상도를 그렸다고 합니다. 일찍이 정조 는 보경당(寶鏡堂) 사일(獅馹)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에 대한 설법을 듣고 아버지 사도세자 에 대한 효심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 효심의 발로로 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목판 42매, 석판 42매 그리고 동판7매로 모두 73매라고 합니다. 이중 목판 42매는 정조대에 만든 것이고 석판과 동판은 순조 2년(1802)에 원래의 목판을 바탕으로 제작하여 절에 기증한 것이라고 합니다. 목판 42매는 각각 한문판 11매, 국역판 25매, 변상도 6매로 구성되었고 각판은 앞뒤로 사용하였고, 변상도는 6매인데 모두 14회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석판 24매도 한문판, 한글판으로 나뉘고, 7매의 동판은 모두 변상도라고 합니다. 석경(石經)의 부모은중경판은 휘기(諱忌)라 할 만큼 이 절의 자랑거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보물은 친견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있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일입니다. 여기 부모은중경탑은 정조의 효심을 기릴 뿐만 아니라 모든 불자, 아니 이 절을 찾는 모든 이들이 부모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리고 효를 다하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탑은 부모은중경을 한글로 음각하였는데 부모의 십중대은(十重大恩)이 눈에 띄였습니다.
첫째, 잉태하여 지키고 보호해 주신 은혜, 화탐수호은(懷耽守護恩) 둘째, 아이를 낳으실 때 수고하신 은혜, 임산수고은(臨産受苦恩) 셋째, 아기 낳고 모든 근심을 잊어버리신 은혜, 생자망으은(生子忘憂恩) 넷째, 쓴 것은 삼키고 단 것 뱉아 먹여주신 은혜, 인고토감인(咽苦吐甘恩). 다섯째, 마른 자리 아기 뉘고 젖은 자리 눕는 은혜, 회건취습은(廻乾就濕恩). 여섯째, 젖을 먹여 길러주신 은혜, 유포양육은(乳哺養育恩). 일곱째, 깨끗하지 못한 것을 씻어주신 은혜, 세탁부정은(洗濯不淨恩). 여덟째, 먼 길 가면 걱정하시는 은혜, 원행억념은(遠行憶念恩). 아홉째, 자식을 위해 애쓰시는 은혜, 위조악업은(爲造惡業恩). 열째, 끝까지 사랑하시는 은혜 구경연민은(究境憐愍恩).
이 열 가지 부모의 은혜를 잊지 맙시다. ^^
이밖에 많은 전각이 있고 곳곳에 돌아 볼 것이 많지만 일행들은 이미 모두 주차장으로 나간 상태고 왜 안 내려오느냐고 성화가? 빗속에서 빗발치니 정파님과 둘이서 서둘러 돌아보며 일부의 주련을 찍어 내려왔는데 다음부터는 주어진 시간을 충분히 정해서 돌아오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가졌습니다. ^^
이것으로 용주사의 순례가 끝났으나 우중인 관계로 사진이 선명치 못함이 못내 아쉬워서 언제 인연이 되면 다시 찾고 싶은 마음입니다.
우중인데도 많은 분들이 동참하시어 함께 순례를 할 수 있어서 무척 즐거웠고 다음에는 또 다른 멋과 얼을 찾아서 가 보고자 합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순례에 동참하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그리고 몸은 동참 못 하셨지만 언제나 마음은 함께하시는 정수님은 회비를 보시하셨습니다. 황심행님은 군고구마로 입을 즐겁게 하셨고, 해사랑님은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행여 아침밥 을 들지 않고 오시는 분들을 위하여 김밥을 손수 만들어 오셨습니다. 또한 비니초님은 우중 의 진미를 느끼고자 커피를 마련해 오셨습니다. 청안님은 먼 김포에서 청안거를 몰아 오셔 서 순례의 발이 되었고, 묘법님은 아름다운 이의 모습을 담고자 애쓰셨습니다. 또한 대전의 도솔님은 금강대도님과 도솔거를 끌고 먼길을 마다 않고 오셔서 기쁨을 주셨습니다. 정파님 과 현실님은 순례를 통해 많은 대화를 나누며 의미를 되새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깜짝 방문하신 득명님은 순례를 함께하시며 옛추억을 더듬으며 우의를 도탑게 하였습니다. 모두 모두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순례에 다시 뵙겠습니다.
백우 합장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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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많으셨네요~ 덕분에 눈으로 순례길 함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 읽어 보셨나요 감사합니다. 용주사는 적을 꺼리가 너무 많네요. _()_
백우님과 팔상도를 보며 부처님 생애 설명을 귀담아 듣던 그때가 그립습니다,비니초님 커피 해사랑님
김밥 어느분이 주셨던 군고구마 맛있게 먹었습니다.순례길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전강스님 사리탑 탑신에 새겨진 팔상도 다행히 아는 내용이라서... 다음 순례 때도 함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_()_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거운 순례 같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_()_
부모은중경탑이 있다고 하길래 눈여겨 보았습니다. 어버이의 열 가지 은혜에 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부모은중경탑은 용주사의 상징인 것 같습니다. _()_
용주사의 주제는 효인 것 같습니다. 효사에 부모은중경이 빠질 수 없지요. 부모의 은혜를 생각해 보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우중이라 분위기를 자아내어 이 탑을 바라보며 마음이 더욱 숙연해졌습니다. _()_
백우님그날은수고많이하셨읍니다
감사합니다. 운전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