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견불생분 (知見不生分:지견을 내지 말라)
수보리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어일체법 응여시지 여시견 여시신해 불생법상
須菩提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於一切法 應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 不生法相
수보리 소언법상자 여래설즉비법상 시명법상
須菩提 所言法相者 如來說卽非法相 是名法相
해역: “수보리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자는 일체법을 응당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믿고 깨달아서 법이란 생각을 내지 말지니라. 수보리야, 말한 바 ‘법이란 생각’도 여래는 곧 ‘법이란 생각’이 아닌 것을 말함이요, 다만 이름이 ‘법이라는 생각’일 뿐이니라.”
강설: 지난달 지견불생(知見不生分)의 내용은 ‘알음알이를 일으키지 말라’는 것으로, 여래가 만약 ‘사견(四見: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에 대해서 말한 사실이 있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시며, ‘사견(四見)’은 그냥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다.
12월의 지견불생(知見不生)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자’는 일체법을 응당 이와 같이 알고(如是知), 이와 같이 보고(如是見), 이와 같이 믿고 깨달(如是信解)아서 법이란 생각을 내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고 내가 말한 ‘법이란 생각’도 나는 곧 ‘법이란 생각’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다만 이해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법이라는 생각’일 뿐이라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다.
먼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자’의 마음은 이러해야 된다는 것이다. 즉 ‘무엇을 안다’ ‘알고 있다’라는 생각을 조금도 내지 말라는 것인데, 눈으로 본 물질이나, 귀로 들은 소리나 촉감으로 느낀 것이나 경전의 어떠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이 다 공(空)하다는 것을 깨달음의 눈으로 보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상(法相)은 ‘생각을 일으켜 만들어 낸 분별’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법상’은 분별로 인하여 일어나는 자기만의 생각이고 행위로써 그 배경에는 항상 이 상(相)이 굳게 자리하고 있다. 만약 내가 아는 것이 옳고, 내가 하는 것이 최고라면 남이 하는 것은 모두 잘못이고 부족한 것이 된다. 예로 어떤 사람은 ‘다라니 수행’이 최고이고, 또 어떤 사람은 ‘옴마니반메 훔’이 최고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삼천배’가 최고이고, 혹 참선이나 명상을 최고라 해서 다른 수행과 비교하여 우월함을 주장한다면 이는 큰 법상에 묶여 있는 사람의 자기 편향일 뿐이다.
법상이 많은 사람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그의 말을 듣기보다 자신의 생활방법을 먼저 내세운다. 이것은 옳고 그것은 그르다, 이것이 정법이고 그것은 사법이다, 그렇게 하면 도움이 되고 그렇게 하면 도움이 안 된다면서 언성을 높인다. 그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념을 우격다짐으로 상대에게 강요하며 자신의 생각에 맞추게 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면 급히 자기의 모습을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아! 내가 지금 큰 ‘법상(法相:분별심)’을 내는구나 하고 얼른 알아차려 경청하도록 해야 한다.
불교는 신념의 종교가 아니므로 다른 사람을 어떤 틀에 넣는 식의 교화 방식은 옳지 않다. 금강경의 수행은 이론으로 따져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의 변화작용, 즉 아뇩보리 수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법상(法相)’을 내면 안 된다고 심도 있게 말씀하신다. 아뇩보리의 큰 수행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의 수행이다. 모든 불교인의 최종 목표는 해탈 열반이다. 이 큰 수행을 하려면 욕심이나 집착도 문제가 되지만 더 큰 문제는 법상(法相)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