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국군 이라크 추가파병 요청'이 있은 후 이를 둘러싼 찬반논쟁이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1969년 청룡부대의 일원으로 베트남전에 파병된 바 있는 김준태 시인은 최근 논란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전쟁의 비극을 몸소 체험한 그의 기고문을 통해 최근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이라크 추가파병 논란을 점검해본다...<편집자 주>
우리의 국론이 왜 이렇게 분열되었나
| | | ▲ 1969년 월남파병 당시의 김준태 시인. | | ⓒ2003 김준태 시인 제공 | 우리 국민들이 왜 이렇게 갈라지고, 찢어지고, '국론'이 형편없이 분열되어 버렸는가. 물론 현대사에 들어와서 치른 저 6·25한국전쟁의 결과로 빚어져 유래한 일이겠으나, 한국은 해를 거듭하면서 남남갈등·보혁갈등·계층(혹은 계급)갈등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는가 싶었는데, 또 여기에다가 최근 들어와서는 북핵문제에 이어 '이라크추가파병'을 놓고 목소리들이 제각각이다.
여야 정치권은 여야 정치권대로 노무현 정부는 노무현 정부대로 이 눈치 저 눈치에 갈팡질팡하는 모습들이어서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불안의 가중속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바로 1년 전 서울의 세종로와 시청 앞 광장을 뒤덮었던, 전국을 온통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던 국민적 총화와 단결 그리고 '자신감'과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어느새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이라크 추가파병'이라는 엄청난 숙제 혹은 예측할 수 없는 먹구름이 밀려들면서 마치 태풍 '매미'처럼 한반도 남쪽을 강타할 듯이 보여 국민들의 오금을 조이게 하고 있다.
여기에 뒤질세라 일부 파병론자들은 어떤 명확한 논거도 제시하지 않고 단지 감정적 반대급부 논리로 북핵해법이니 국익에 도움이 되느니 하면서 파병을 부추기는 논리를 펼치는가 싶더니, 이윽고는 친미냐 반미냐, 반미라면 북쪽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 아니냐 하면서 엉뚱한 이데올로기 공방까지 보이는 모습들이어서 한숨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친미냐 반미냐 하는 것을 따지기 전에 '파병'을 놓고 과연 어떤 판단을 내려야만 우리나라의 앞날에 불행을 가져오지 않을 것인가 하는 데에 고심하면서 심도있게 따져보아야 할 사안인데 말이다.
아무튼 미국의 부시정권이 강요하는 한국군의 '이라크 추가파병문제'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었고 우리 정부와 국민들은 여기에 대처하는 지혜를 하루빨리 찾아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지혜를 찾아내야 하는 데는 정부의 다각적인 모색과 외교능력이 뒤따라야 함은 물론, 국민들 또한 예의 '국론분열'을 최소화하면서 어찌 보면 19세기의 한반도 상황의 재현이기도 하는 이 어려운 난국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당연히 국민의 한 사람인 나의 경우도 일찍이 다녀온 베트남전 경험과 몇가지 교훈을 토대로 '이라크추가파병'에 대한 문제점들을 도출해 볼까 한다. 이것이 분단된 나라에 사는(그러나 통일을 염원하는) 그리고 자식들을 낳아 키우는 한 어버이로서 또 금이냐 옥이냐 하는 하늘같은 남의 자식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은 '부끄러운 전쟁' 혹은 '아무도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베트남전쟁(혹은 인도차이나 전쟁)을 가리켜 '더러운 전쟁'이라 했다. 중국과의 오랜 전쟁, 프랑스 식민지 70년을 걸친 이후에 치러진 미국과의 27년 동안이나 계속된 '베트남전쟁'은 그야말로 제국주의자들의 더러움을 시험하는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더러운 전쟁? 그러나 이 말로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표현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간에 베트남 민중들이 겪은 이 전쟁은 베트남 민중들의 목숨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질기고 질긴 민족혼과 영혼까지도 짓밟아 버리려 했다. 그러나 어디 그게 쉬운 일이었던가. 오늘의 통일 베트남이 확인해주고 있듯이 베트남 민족혼은 무서운 것이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전역한 이후 기자가 된 미국 작가 '팀 오브라이언'의 소설 한 대목을 읽어보자.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번역된 바는 없지만 미국 안에서는 상당히 많이 읽혀진 것으로 알려진 소설 <그들이 남긴 것들(The things they carried)>에서 작가 팀 오브라이언은 베트남 인민들의 씨앗보다 더 강인하게 대지를 파고드는 불꽃같은 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물론 소설 속의 주인공은 베트콩(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1960년 12월에 결성된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 소속으로 정식 명칭은 Viet Nam Cong San이며 남부 베트남에서 게릴라로 활동)이다.
"베트콩인 그의 입술과 이빨은 날아가 버렸고 살아오면서 어느새 그는 애꾸눈이 돼버렸다. 그의 머리칼은 짓이긴 듯 나부끼고 있었다. 그는 아마 쿠앙나이 미체 마을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그의 아버지와 두 분의 삼촌, 많은 이웃들이 베트남 인민들의 독립투쟁에 연루되어 엄청난 곤욕을 치렀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평범한 시민이었으며 군인이었다.
쿠앙나이 지방 역시 애국적인 레지스탕스의 운동은 예로부터 전통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미국사람들(미군)이 어서 떠나기를 희망했다. 심지어 잠꼬대를 할 때에도… 그렇다. 베트남 정글 속에 담겨 끈끈하게 출렁이는 그들의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아무도 찾아낼 수 없고, 설령 찾아낸다 해도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이 베트남의 전설이며 신화이다."
역시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베트남전쟁에 강대국이 개입한 것은 인류의 수치다.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이길 수 없는 전쟁이 베트남에서의 전쟁"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우리들이 베트남 인민들에 관한 한 잊어서는 안될 것들이 있다.
그들의 통일 배경에는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오랜 세기 동안 축적되어 온 요지부동의 민족주의가 그것이며, 둘째로는 동양적 의미의 조상숭배가 그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조상숭배는 이미 사원문화에서 확인되듯이 서양의 어떠한 종교 세력도 그것을 아무렇게나 범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베트남의 어디를 가도, 어느 도시 혹은 어느 작은 마을을 가도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나 사원이 꼭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건 그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대목인데 베트남 인민들은 예로부터 객지를 떠돌며 너무나 많은 처절한 전쟁을 치러왔기 때문에 '조상에 대한 그리움' 나아가 '가족애'가 다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강하다는 것이다. 가족애는 바로 민족주의로 연결되며 인간존중으로 이어진다. 거리를 거닐다가 아무 집을 들어가 봐도 그들 가족들이 오순도순 사는 모습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것을 비로소 알게된다.
그리고 물론 베트남 통일의 정신은 '호치민 사상'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호치민은 절대적인 도덕성과 미래를 내다보는 국가철학을 겸비한 국부이며, 이웃집의 친근한 아저씨며, 혹은 학생들(국민들)을 실천적으로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며, 엄하지만 자애로운 아버지이며, 손주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할아버지라는 것이 베트남 인민들의 한결같은 생각이며, 그래서 이 나라 인민들은 호치민의 삶과 말을 오늘도 일상 생활철학의 표준으로 삼고 있다.
베트남 현지를 다녀온 사람들은 거의 똑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면 '호치민을 읽고 이해하라!'고 귀띔을 해주고 있는 것이 그 일례다.
어쨌든 20세기 출발 이후 최고 최대의 무소불위의 강자로 자부하고 나선 ―그러나 <람보> 시리즈 영화가 보여주는 미국식 영웅주의도 결국엔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와 함께 베트남의 정글에 처참하게 묻어야 했던 나라가 바로 아메리카 미합중국이 아니었던가.
27년의 전쟁 기간 중 미 공군이 하늘에서 베트남 땅에 쏟아 부운 폭탄 양만 해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투하한 폭탄양의 3.5배가 넘는 760만 톤에 이르렀지만, 베트남은 '20세기의 위대한 신화'라 명명되는 '통일베트남'의 깃발 앞에 미국을 무릎 꿇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전쟁에 참전했던 필자가 오늘에 와서 돌이켜 볼 때 이데올로기는 변할 수 있어도 민족혼은 오히려 그들의 핏속에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 ▲ 월남전 참전 후 30여년이 흐른 뒤 베트남을 방문한 김준태 시인이 만난 하롱베이의 여인들. | | ⓒ2003 김준태 시인 제공 | |
베트남전쟁 때도 미국은 한미동맹 운운하며 파병 강요했다
미국과의 전쟁으로 250만여 명의 희생자를 낳은 베트남 인민들. 바로 이 전쟁에 한국은 미국의 강력한 요청으로 참전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해야 하는 이유를 △6·25한국전쟁 당시 받았던 군사원조를 보상해야 한다는 의무감 △미국과 동맹관계를 강화시키는데 의미가 있다는 점 △장래의 경제적 이익을 고려한다는 점 △국제적 권익을 획득하는데 한국군 참전이 요구된다는 점 △베트남안보가 한국의 안보와 연계되어 있다는 점을 들었다.
예컨대 베트남 참전은 '한미동맹 관계'의 산물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미국은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만약 한국이 전투부대 파병을 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의 베트남 파병까지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한국정부에게 압력을 가했던 것이다. 이 상황은 최근 이라크 파병 문제를 놓고 또다시 되풀이되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압력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결국 1963년 9월 의무부대 130명 파견 이후 1964년 존슨 미대통령의 친서를 통한 요청으로 한국은 1965년 2월 2000여 명 규모의 비둘기부대를 파견하였다. 비둘기부대는 건설공병단 임무를 띤 부대였다.
이어 미행정부가 한국의 전투부대 파병을 재차 요청하여 한국은 1965년 8월 청룡부대 5000명과 육군 맹호부대 1만500명을 파병한 것을 비롯하여 10년 동안 연병력 45만여 명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결국 한국은 맹호·백마 등 육군 2개 사단과 건설공병단인 비둘기부대, 해병여단인 청룡부대로 구성된 총 4만7872명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것이다. 한국은 파병 기간 중 1만1070여 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6000회의 소규모 군사활동을 수행하면서 월맹군 정규군을 포함한 베트콩 4만1000여 명을 사살했다.
한국군 희생자는 약 50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는데 부상자 경우는 1만5000여 명으로 밝혀졌다. 물론 전쟁터에서 부상한 군인의 경우는 평생동안 불구로 살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고 또 고엽제 피해자 경우도 1만5000여 명을 넘어섰으니 그 피해는 엄청난 결과이다. 미국은 약 5만여 명의 사망자가 난 것으로 발표했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은 주로 사이공과 가까운 남부 베트남 지역에 주둔했다. 그 지역들을 열거하면 십자성부대는 나짱, 비둘기부대는 붕타우, 백마부대는 닌호아, 맹호부대는 퀴논, 청룡부대는 다낭 근교 호이안 전선이었다. 한국군 사령부는 사이공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야전사령부는 나짱에 있었다.
베트남 참전으로 하여 국내경제에 날개가 돋쳤던 것은 사실이었다. 소위 '월남전특수'가 그것인데 미화 25억 달러가 들어와 60·70년대의 한국 근대화를 도모했다. 1965년에 맺은 한일회담으로 3억 달러 규모의 일본 '엔화 차관'이 들어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월남전 참전 결과로 한국은 여기에서 얻은 부가가치의 효과를 더욱 축적, 총 250억 달러에 상당하는 외화를 이끌어들인 셈이 된 것이었다. 우리가 모두 기억하고 있듯이 1960∼1970년대의 한국경제개발은 베트남전쟁 참전, 도시근대화 바람이 부추긴 농촌붕괴와 저임금인구의 도시집중,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후 복구열망에 온몸을 던지고자 했던 국민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은 1인당 연 5000 달러, 미국군은 연 1만3000 달러였다고 당시 존슨 미행정부는 밝혔지만 실제로 필자가 기억한 바로는 꼭 그렇지 않았다. 필자가 1969년 청룡부대 2여단 3대대에서 인사행정병을 하면서 파악한 바로는 한국군 병장의 1개월 봉급이 53달러였는데 반해 같은 계급의 미군 병장은 530달러(생명수당 빼고)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저런 이유를 들어 당시 세계 여론은 한국군이 '대리전'을 치른다고 비하했다.
지금도 나는 경부고속도로를 달릴 때 1964부터 1973년 사이에 베트남 전장에서 숨져간 '젊은 영혼들'이 떠올라 문득문득 담배를 피우고 싶어 안달이다. 화랑담배가 아니라 미국담배의 연기 속에 사라져간 전우들이 생각나서, 왠지 모르게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 '월남전의 선물'인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어찌하지 못한다. 그리고 수많은 부상자들이 보훈병원이나 기타 병원에서 오직 죽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들을 볼 때 더 그렇다. 특히 고엽제 환자들을 볼 때가 그렇다.
내 친구 중의 하나는 광주의 C대학 외국어학부 교수였는데 오랜 기간 잠복해 있다가 20년 후에야 갑자기 나타난 고엽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고엽제?! 고엽제!?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무시무시한 제초제다. 정글의 풀과 나무들만을 테우는 제초제가 아니라 인간의 목숨과 정글의 모든 것들을 완전히 소멸시킨 악마의 선물이 아니었던가.
참전 병사만이 아니라 그가 낳은 자식들까지도 무서운 환자 혹은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고엽제…. 그 날의 참전 병사였던 필자가 33년만에 찾아간 베트남에서 확인한 바로는 고엽제 피해자가 낳은 자식들 중에는 얼굴에 두 눈이 완전히 없는 피해자도 있었다. 그러니까 두 눈도 없이 얼굴이 완전히 손바닥처럼 납작한 상태였던 피해자를 그곳 비디오에서 보았다.
해마다 그치지 않고 태어나는 고엽제 피해의 기형아들…. 전쟁이 남긴 상처 치고 너무 엄청났다. 전쟁은 순간의 상처를 주지만 그 전쟁이 남긴 후유증은 시간의 제한이 없이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베트남전쟁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할 때 베트남전쟁은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 그 전쟁은 베트남 민족을 오랜 세월동안 질곡과 죽음과 공포로 몰아넣었던 잔인하고 더러운 전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사르트르 말처럼 '더럽고 수치스러운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은 '베트남이여 미안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이라크전쟁은 아군이 완전히 사막 위에 노출된 전장이다
그런데 21세기 들어와 채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한국은 또 미국으로부터 '이라크 추가파병'이란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으니 한심스럽다. 40년 전의 상황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과 이라크는 다르다. 불교국가요 농경국가인 베트남과 이슬람 국가요 유목민국가인 이라크와는 완전히 다른 문화와 역사적 환경을 가진 나라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같은 동양문화권이어서 똘레랑스(관용)의 문화가 있는 곳이지만 이라크는 그들의 오랜 역사가 말해주듯이 전쟁 자체를 성전(Holy War)이라고까지 추겨세우는 문화를 가지고 지탱되어온 나라이다. 성전문화는 그들의 너무도 절박했던 생존문화와 그 역사에서 배태되어 나온 것이다.
베트남은 비록 열대지방이지만 마음대로 숨쉴 수 있는(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그래서 베트남을 지상의 낙원이라 말하기도 했다) 광대한 원시림이 존재하지만 이라크는 사막의 나라이다. 오로지 알라신만을 믿고 그 척박한 땅에서 ―사막의 여우라고 호칭을 받았던 독일의 전쟁영웅 롬멜도 '혀를 차고 떠나야 했던' 열사의 땅이 아니었던가.
| | ▲ 호치민 묘지광장 앞에 선 김준태 시인. | | ⓒ2003 김준태 시인 제공 | | 베트남은 연 평균 기온이 섭씨 40도라 하지만 거의 매일 뿌리는 스쿨과 무성한 정글이 있어 시원하다. 그러나 이라크는 연 평균 낮 기온이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데 밤과 낮의 기온 차가 엄청나다. 베트남전쟁은 주로 정글전이라 아군이 쉽게 노출이 잘 안되었지만 이라크전쟁은 아군이 완전히 사막 위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전장이다. 최근 들어와서 외신이 전하고 있듯이 바그다드를 비롯한 도시 게릴라들의 활동은 더욱 거세어지고 있어 만약 한국군이 그곳에 가면 상당한 피해가 예상된다.
20세기의 베트남전쟁과 21세기의 이라크전쟁이 유사한 점이 있다면 첫째 게릴라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 그래서 당연히 '전선이 따로 없는 전장터'라는 것이다. 시장이고 논밭이고 어디에서나 예의 적들이 나타나 거기에 참전한 병사들을 '정조준'하여 쓰러뜨리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늪 속에 빠뜨릴 무수한 위험이 도처에 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베트남전쟁에서(가령 청룡부대의 짜빈둥 작전) 그런 쓰라린 경험을 맛보았듯이 몇 명의 게릴라가 침투해 1개 중대 병력을 충분히 혼비백산시킬 수 있는 그런 위험이 이라크전장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고 예견되기 때문이다. 이라크민족은 그 오랜 역사가 증언해주고 있듯이 다분히 호전적이고 게릴라 전술에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미국이 요구하는 것은 '경보병부대(light infantry)'라고 하지 않는가. 전장터에 다녀온 사람은 알겠지만 '보병부대'는 공군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일반 포병이나 탱크부대와는 달리 그 임무 특성상 제일로 전사자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는 문자 그대로 지상전투를 주 임무로 삼는 보병부대가 아닌가.
자아, 그래도 죽고 못살게 아름다운 생명이요 자식들인 우리 젊은이들을 저 열사의 나라 이라크 전장에 보내고 마음을 놓을 부모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마 모르긴 모르되 이라크추가파병을 부르짖는 일부 어리석은 사람들도 자기 자식만은 그 전장에 보내고 싶지 않은 것임을 말할 필요조차 없다.
생각해 보자. 1960∼1970년대 시절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을 때만해도 한국의 출산율은 1953년도의 '베이비붐'을 타고 지속적 성장을 보인 때였다. 그래서 어느 집을 가서 봐도 적어도 아들 두 서넛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많아야 아들 딸 합해 두 명이다. 평균적으로 한 명뿐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 금쪽 같은(아니 하늘같은) 하나 뿐인 아들을 멀고 먼 사막의 나라 이라크에 보낸다고 생각할 때 어느 가족 어느 아버지 어머니가 찬성이나 하겠는가. 요즘 식으로 말해서 사람 하나하나가 있어서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지 국가가 존재해서 사람 하나하나가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세계 최하위의 출산율인 이 나라에서, 그것도 분단국가인 나라에서, '주권'은 어디에다 팽개치고 미국의 눈치만 보고 있다면 그것이 말이나 되는지 의심스럽다.
미국이 한미동맹관계 강화 운운하며 혹은 주한 미2사단을 이라크로 돌려 빼기 운운하며 한국정부를 압박해 들어온다는 것은 위험한 도박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한국이 '폴란드형 사단' 병력 규모인 1만여 명을 파견할 경우 연 부담액이 1조2000에서 3조5000억까지 추정된다고 하니 실로 기가 차는 말이고 천문학적 숫자의 비용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의 현 경제상황은 IMF상황 못지 않게 바닥을 기고 있다는 소식들인데 말이다.
청년 실업자가 20만 명을 넘어서는 판국이고 은행 신용불량자가 무려 120만 명이나 넘치는 판이고, 4인 가족 최저생계비도 안되는 100만원 이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100만 명을 넘어선 지 오래이고, 심지어는 가계파산으로 경제형 자살비율도 높아지고 있는 판에 이라크 파병 전비부담까지 떠맡게 된다면 나라의 앞날이 어찌될 것인가 싶다.
더구나 앞서서 말했듯이 태풍 '매미'의 융단폭격으로 집도 없이 내몰린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며 파괴된 공장들이 셀 수도 없는 판에 미국의 '한국 이라크 추가파병' 종용은 결국 그들이 애써 강조하는 동맹국관계를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900억 달러에 가까운 이라크 전비부담에 시달린 미국의 부시정권이 한미간의 신뢰와 우정을 저버리고 단순히 동맹국 운운하며 한국을 몰아붙이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나 대단한 무리수요, 이윽고는 그것이 친미가 아닌 반미감정을 낳게 되는 결과가 된다는 점이다.
심한 말로 한다면 미국 부시행정부가 한국민의 인권은 물론 '주권'마저 무시하며 이라크추가파병을 강요하려한다는 것은 국제법에도 어긋나는 일이 아닐까 싶다. 한국은 분명히 주권국가이며 미국의 동맹국이지 미국의 예속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평화는 이라크 국민들 스스로 풀도록 해야 마땅
끝으로 다시 한번 한국 노무현 정부와 여야 정치인들에게 업그레이드 시켜서 말하고 싶다. 베트남전쟁은 인류의 양심을 시험했지만 이라크전쟁은 인류의 생존을 시험할 수도 있는 더 없이 위험한 전쟁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일찍이 우리가 알고 있듯이 중동지역은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화약고였으며 또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라는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듯 엄청난 변수가 예측할 수 없이 도사리고 있는 이라크로 우리의 젊은이들을 '이라크 추가파병'이란 이름 아래 내보게 된다면 과연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하고 묻고 싶다. 아마 아무도 지려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베트남전쟁과는 다른 엄청난 변수가 바로 21세기의 전쟁인 이라크 전쟁의 한복판 어딘가에서 마치 '핵폭탄'처럼 숨어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미국 맨해튼 쌍둥이 빌딩에 가해진 9·11테러 이후 급격하게 증폭되고 있는 테러리즘이 어쩌면 한반도 남쪽에 만약의 경우 상륙할지 모른다는 기분 나쁜 가정도 그래서 나오고 있는 판국이 아닌가. 그러니까 이라크파병과 동시에 나온 말들이 그렇다는 것인데 이것을 그냥 우스개로 넘겨버릴 '잡언'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는 얘기도 하고 싶다.
그것말고도 한국정부는 해외 700만 동포 교민들과 우리가 밖으로 나가 건설한 해외산업현장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그런 엉뚱하고 비극적인 변수가 개입하지 않도록 파병을 반대해야 할 것이다. 단순한 경구로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이번 이라크전장에 추가파병을 하지 않을 때에만이 세계 여러 나라도 유사시 '한국'을 도와줄 것이고 나아가 두 쪽으로 갈라진 이 땅 삼천리 한반도가 통일을 하도록 애정과 힘을 실어줄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부시정권은 유한하지만 미국은 영원하고, 부시정권은 유한하지만 이라크는 영원하다. 따라서 한국정부와 여야 정치인들 그리고 국민들은 부시의 위험한 도박에 말려들지 않기 위하여 정신 바짝 차려야 하리라. 한국군이 참전했던 베트남전쟁은 상대가 북부베트남이었지만 이라크전쟁에 참전할 경우 상대가 아랍권 전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언해보건대 미국의 아파치 헬기와 60톤의 수 천대 탱크, 토마호크 크루즈 미사일과 수 백대의 스텔스 전폭기가 불바다를 만들어버린 저 찬란했던 바빌로니아 왕국 ―이라크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증오의 화신으로 비치게 되어서는 안되겠기에 오늘도 한국과 세계의 양심은 눈을 떼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하건데 베트남에서 베트남 민중들의 민족혼을 잠재울 수 없었듯이, 그 어떤 혹은 셀 수 없는 수 억 톤의 폭탄이 쏟아진들 이라크 민족의 민족혼은 잠재울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라크 추가파병을 놓고 고심하는 노무현정부와 여야 정치인들에게 그리고 국민들에게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지 않고 부활했듯이 알라신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주길 바란다. 가장 바람직한 평화는 그들 민족에게 그들의 숙제를 풀도록 하는 일밖에 없다. 이라크의 평화는 이라크 민족 스스로 풀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그 말이다.
| | 김준태 시인은... | | | |
| | | ⓒ김준태 시인 제공 | | 1948년 전남 해남 출생. 1969년 <시인>지로 문단에 나옴. 1969년 베트남전에 청룡부대 병사로 참전. 시집으로 <참깨를 털면서> <국밥과 희망> <칼과 흙> <지평선에 서서> 등과 세계문학기행집 <슬픈 시인의 여행> 등 저서 25권 여 펴냄.
고교교사 13년, 전남일보·광주매일에서 문화·경제부장 및 편집국 부국장 등 11년 동안의 언론인 생활을 거쳐 현재 조선대 인문대 초빙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5·18항쟁동지회 상임회장으로 일함.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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