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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아르벤
후속편.
"여기에 바리엔에서 온 여자가 있다 들었는데?"
"주, 중위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저번에도 싸움 벌려서 영창 갈 뻔했지 않습니까? 저 이제 전역 100일 남았습니다. 좀 살려주시면 안됩니까?"
라인은 부하의 목을 팔로 감아 조이고 입술 앞에 검지를 들이댔다. 한창 추운 겨울 날 뜨겁게 김이 서리고 있는 음식점 안의 이목이 모두 주목되어 있었다.
"야. 내가 그렇다고 뭐 큰거 저지른 거 있냐? 나야말로 모범이지 않느냐. 내가 여자나 후리고 다녔지 저쪽 누구누구 아들처럼 객기 부리지는 않잖아? 그리고, 큰 싸움이라고? 그거 그냥 패싸움이었어."
"그, 그걸 패싸움이라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저 그거 때문에 영창 다녀오는 줄 알고 세상 끝나는 줄…!"
"아니 어쨌든, 닥쳐."
부하의 입술을 콱 잡고 입을 다물린 라인은 이쯤 되면 주목받았겠지 싶어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4년에 한번 있는 안식년이라 외부인이 많았다. 기회를 틈타 여기저기서 건너온 각양각색의 의복들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잠깐. 라인 중위. 오늘은 좀 조용히 해줘."
문 옆의 계산대에 서 있던 주인이 눈에 띄게 긴장한 얼굴로 일어나 라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안에 들어오는 금속 감촉에 라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햄스 아저씨. 제가 여기서 언제 난동 부린적 있나요. 이런거 주지 마세요. 전 공명정대한 군인입니다."
"저기 잠깐. 잠깐."
햄스가 손을 잡아끌자 라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끌려가며 식당 안을 돌아보았다. 언제나처럼 서빙을 하던 미나와 줄리가 윙크를 하고 한창 저녁때인 시간 상 웬만한 테이블은 모두 북적거리는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복식도 가지각색, 얼굴빛도 각양각색, 햄스가 소란이 일어나지 않게 전전긍긍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자. 한 잔 해. 비번이지?"
"아저씨도 참."
따라주는 과일주를 마지못한 척 받아들며 라인은 테이블 사이에서 수상해 보이는 사람을 찾았다. 도시 경비대의 사관으로서 근무한지도 2년째라 웬만한 사람은 파악할만한 자신이 붙은 무렵이라 라인은 남의 시선도 아랑곳 않고 사람들 사이를 훑었다.
"너도 소문 듣고 온 거냐? 벌써 몇 팀 하고 갔으니 제발 좀 조용히 해줘. 오늘 장사 잘 된다. 이따 미나 퇴근하면 봐 줄게."
"제가 뭘, 오."
라인은 눈을 빛내며 식당 안을 둘러보다가 사람들 사이를 보고 눈을 빛냈다.
북적거리는 테이블 사이 외딴 섬이라도 된 것처럼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는 여인이 음료를 들이키고 있었다.
검은머리를 늘어트린 모습은 전혀 본적이 없었다. 이국적인 여인의 인상은 지금껏 이 도시에서 보아 온 어떤 인종과도 닮지 않았다. 다만, 한눈에 확 들어오는 미인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히야, 어, 어디서 저런 미인이 왔답니까?"
"바리엔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얼핏 듣긴 했지. 확실히 이 근처나 주변 나라들에서 볼만한 외모는 아냐. 그렇지?"
"에이, 바리엔은 너무 멀잖아요. 여자가 혼자서 여기까지 어떻게 와요?"
"그거야 모르는 거지. 직접 들은 거니까 함부로 치근덕거리지마. 벌써 여럿 나가 떨어졌다. 어떻게 술수를 쓰는지 이 근방에 난다는 놈들, 그락이나 반스 같은 놈들도 꼬리말고 도망 쳤어. 혹시 어디 유명한 마법사일지도 모르지."
"흠. 그래요? 아저씨, 이거 가져갈게요."
"어, 중위님?"
테이블에 술값인 돈을 올려놓고 라인은 병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부하와 식당주인이 보는 가운데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가서 테이블의 비어있는 의자를 빼어 앉았다.
"바리엔에서 왔다면서?"
가까이에서 보자 여인은 잘해봐야 16살이나 먹었을 법한 소녀였다. 아직 앳된 턱선이 남아 있는 얼굴에는 형광등 불빛에 솜털이 자잘한 것이 보였고 눈매는 날카로웠다. 그래도 한숨이 나올 정도로 엄청난 미모였다. 라인은 마주 보았다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서 날카로운 눈동자가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채고 허둥지둥 빈 컵에 과일주를 따랐다.
"음, 험. 거기 엄청나게 먼덴데 어떻게 왔어요? 여긴 군인들하고 술집 밖에 없는 우중충한 도시인데. 그쪽 같이 화사한 아가씨하곤 어울리지 않는 데라고요."
소녀는 말이 없었다. 한 손에 잔을 든 채로 라인을 빤히 쳐다보는 모습은 축객령을 내리는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라인은 엉덩이를 더 깊게 의자에 밀어 넣고 먼저 과일주를 목으로 넘겼다.
"미인이 이리저리 구질구질한 일들 당하는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나 같은 놈 많이 봤죠? 딱히 흑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먼데서 와서 이야기 좀 듣고 싶네요. 이런데 처박혀 있는 군인이란 바깥 나가는 것도 큰 맘 먹어야 하니까."
사양은 받지도 않겠다는 듯 라인은 소녀의 앞에 컵을 밀어놓고 술을 따랐다. 알싸하고 달콤한 향이 피어오르자 날카롭게 노려보던 소녀는 미묘한 숨을 내쉬며 잔을 들었다.
"거기도 여기와 별반 다를 바 없는데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야?"
"뭐 이것 저것. 사람 사는데가 다 똑같다지만 거기서 여기까지 오는데만 못해도 2년은 걸렸을 텐데 뭔가 이야기 거리라도 없어요? 거기다 이런 겨울엔 자주 악마들이 출현해서 더 위험한데 이럴때에 이런 곳으로 온다면 지나간 이야기 만으로 하룻밤을 새기 바쁘죠. 뭐 시시콜콜한 거라도 좋으니 말해줘요."
소녀는 과일주를 한번에 쭉 들이키고 불쑥 라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괜찮네. 이런게 있었나?"
라인은 히죽 웃으며 손으로 등 뒤를 가리켰다.
"아저씨랑 안면이 있거든. 아 참, 혹시 몇 살? 그렇게 나이 먹어 보이지 않는데?"
"15살."
"이야. 난 23살. 여기 장벽에서 군인노릇 하고 있어."
반쯤 남은 과일주를 잔에 따라주고 병을 내려놓은 라인은 팔을 테이블에 걸치고 약간 앞으로 몸을 숙였다. 소녀는 몸을 물리지 않고 라인이 하는 모양을 빤히 지켜보았다. 겁을 먹지도 않고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나이가 어린데도 이렇다면 이런 일엔 이골이 났거나 어디 지체높은 아가씨인 모양이었다.
"아저씨네."
"에이. 아저씨는 좀 아니지. 내가 군인물 먹어서 좀 늙었긴 하지만 아직 창창하다고. 그런데 바리엔에서 혼자 여기까지 온 거야? 내가 듣기론 바리엔은 서쪽 끝에 있는 절벽 나라로 1년 내내 추운 곳이라며? 몇 달 동안 낮만 지속되기도 한다던데?"
"맞아. 3달 정도 백야가 지속 됐어. 눈은 많았지만 그다지 춥지는 않았어. 여기의 음산한 추위보단 적어도 훨씬 나아."
"오, 그래? 거기 사람들은?"
"여기보단 밝았어. 여기는 왜 이렇게 음침해? 밖에 나가면 진득하게 공기가 붙는 것 같아. 악령들이 나와서 그런거야?"
소녀의 목소리는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는 음성이었다. 남자에게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그렇지만 평소 고함소리에만 익숙해져 있던 라인은 그 목소리에 빠져 정신을 놓고 있다가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아, 음. 여긴 최전선이라 그래. 혹시 오면서 봤어? 동쪽에 있는 장벽."
"응. 그 뒤엔 바다라고 들었어."
아무것도 칠하지 않았는데도 분홍색으로 빛나는 조막만한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이는 것은 절로 만져보고 싶게 만들만큼 유혹적이었다.
"여기 오면서 해안가에 있는 절벽을 제일 먼저 봤을거야. 음침한 겨울엔 바다에서 악령들이 올라오거든. 그래서 도시 방어선을 구축해 놓았지."
"그래? 악령들이 올라오는 바다라. 그쪽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야?"
소녀는 귀 옆으로 흐르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고 식사용 칼을 들어 구워진 고깃점을 한 입 집어 먹었다. 라인이 뻔하게 앞에서 쳐다보아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러인은 그 태도에 오히려 자신감이 생겨 소녀의 얼굴을 이모저모 뜯어 보았다.
"여긴 불가능해. 바깥에 항구는 있지만 겨울엔 배도 다 안으로 들여놓고 항로도 봉쇄돼. 장벽 바깥은 인외마경이야. 군대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지."
갑자기 불온하게 바닥이 흔들렸다. 미묘한 진동이었지만 술집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덩달아 멀리서 대포 쏘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오늘 밤도 편히 자긴 글렀네. 젠장. 이름이 뭐야? 난 라인. 라인 이소프. 여기 장벽 북쪽에 있는 3대대 2포대로 오면 나 찾을 수 있어. 뭔가 물어보고 싶은 거 있으면 와봐. 그쪽은?"
자리에서 일어난 라인은 급한척을 하며 소녀를 돌아보았다. 겉으론 여유 있는 척을 했지만 마음은 역시 급하다. 소녀가 여기서 뭔가 답을 주지 않는다면 포기하고 병영에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포성이 들리자 라인은 단념하고 발을 옮겼다. 여기서 계속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오히려 안좋은 인상를 주기 뻔했다.
"난 가볼게. 또 악령들이 올라오나봐. 한스 아저씨! 과일이나 야채 좀 주세요. 고기만 먹으니 느글거리네."
"예나. 예르시하이나야. 동쪽 문 근처에 있는 원숭이집에 머물고 있어."
"오오! 좋아 좋아. 한번 찾아와 봐! 시골 구석탱이지만 안내해 줄게!"
귓가에 들리는 사근사근한 말소리에 라인은 한번 소녀의 얼굴을 돌아본 후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장벽 위에서 불꽃이 넘실거리며 검은 구름이 번쩍거렸다.
라인은 그것을 보고 곧장 달렸다. 오늘은 비번이지만 악령들이 상륙하기 시작한 이상 가만히 처박혀 잠이나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같이 온 부하도 영내에 데려다줘야 했다.
"으악! 중위님! 저기 좀 보십쇼!"
"호들갑 떨지 말고 뛰어! 늦게 들어가면 초친다!"
장벽 바깥 바다에서 흘러 넘쳐오는 검은 안개가 도시를 감싼 방어선에 부딪혀 음산한 푸른 불꽃으로 타올랐다. 그 위에서 장벽 위를 지키고 있는 군 병력이 대포와 총을 쏘고 있었다. 평상시 침입과 그다지 다르지는 않았다.
"하여간 시도 때도 안 가려."
아직 밤은 깊지 않은 한창 때였고 비번이라 외박을 해도 되었다. 그러나 저번 여자애도 막 꼬신차에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무렵 이렇게 재수없이 빠져나와야 했다. 눈치 없는 여자애는 이런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도 자길 중간에 내버리고 갔다고 만나주지도 않았다.
위병소에 들어가 병장을 인계하자 언덕 위의 포상 쪽에서 빨간 불꽃과 함께 격한 포성이 울렸다. 라인은 그걸 보곤 참모부보다 먼저 포상 쪽으로 뛰어 갔다. 장벽이 아니라 후방 포병부대에 사격지원 요청이 오는 것을 보면 오늘 밤은 길 것 같았다.
"라인!"
"포대장님! 웬 사격지원입니까?"
"바다 20km쯤에서 2급 악령이 출몰하고 있어! 지금 좌표 수신 중이다! 비번인데 미안하지만 힘 써줘!"
"2급이라고요? 하필 이런 날!"
"뭐야! 여자라도 꼬셨어?"
"굉장한 미소녀를 봤죠! 3포대!"
펑펑 포성이 울리는 와중에 포상으로 올라가자 벌써 분주하게 사격을 하고 있었다. 구덩이처럼 땅을 파고 주위를 돌로 메운 포상에는 사람키의 세배 높이는 되는 커다란 대포가 방열판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라인은 즉각 상의를 벗고 포상으로 들어가 병사들에게 외쳤다.
"포탄은 뭘로 장전한거야?"
"전포대장님!"
"4호 고폭탄입니다!"
사수와 부사수가 막 포탄을 밀어넣던 참이었다. 라인은 포상 옆에 있는 포탄 적재함을 보고 숫자를 헤아렸다.
"10발 쏜 후엔 재고가 없잖아? 2호 고폭탄은 아직 안 가져왔어?"
"지금 탄약고에서 꺼내는 중이랍니다!"
"새 사격 제원 들어 옵니다!"
"좋아! 장전 완료!"
"뛰어!"
"뛰어!"
장전이 완료되고 포미가 닫히자 라인은 지체할 것없이 병사들과 함께 포상 옆 참호로 내려가 대기 되어 있던 단말기를 들었다. 대대 통신망을 통해 전해져 온 사격제원이 장입되고 포가 자동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격 좌표 변경! 포 회전 완료! 장전 완료! 발사 준비 끝!"
주위에서 속속 발사되는 포성에 바닥이 쿠르릉 울리고 병사들이 몸을 더 움츠렸다. 라인은 단말기에서 발사명령이 내려오자 소음기를 쓰고 외쳤다.
"발사한다! 삼! 둘! 하나! 쏴!"
부대에서 사용하는 포는 포좌만 웬만한 어선 크기에 이중으로 된 두터운 포신과 방열판은 건물 2층 높이에 달했다. 그런 것이 한번 불을 뿜으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은 심장마비에 걸릴 정도로 충격이 대단했다.
"으악!"
"재장전! 재장전! 탄종! 4호 고폭탄!"
"재, 재장전!"
"움직여!"
포탄은 70kg에 달하는 무거운 물건이라 움직이는데는 최소 3명이 필요했다. 포상에 자욱히 퍼진 흙먼지 구덩이를 헤치고 포로 달려가자 정전기로 인해 온몸의 털이 죄다 곤두섰다. 포신 위의 방열판은 노랗게 달아오른 채 열기로 펄펄 끓고 있었다.
라인은 포미를 열고 연기를 흩어낸 다음 부하들이 포탄 수레의 장전대를 포미와 맞추자 기중기 고리를 포탄에 걸고 밀었다. 3명이서 달라붙어 밀어야 포탄은 겨우 포신 안으로 들어갔다.
"장전 완료!"
"뛰어! 뛰어!"
사격제원을 확인한 라인은 지체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포성은 정말 몸에 좋지 않았다. 포상에 있는 포탄 7발을 연거푸 발사하고 사격대기 명령이 떨어지자 라인을 비롯한 병사들은 열기를 피해 포상에서 뛰쳐나왔다. 죄다 지쳐 땀으로 목욕을 했다.
"전포대장!"
"예! 포대장님!"
한겨울이지만 포에서 내뿜는 열기는 살이 익을 정도였다. 라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포상에서 벗어나 바로 옆 포상으로 달려갔다.
포대장이 있는 하나포도 다들 비에 젖은 꼴이 되어 밖으로 도망쳐 나와 있었다.
"어, 수고 했어. 긴급 사격 지원은 끝난 모양이다. 그런데 이제 겨울 초입에 2급이라니, 좀 빠른 거 아냐?"
"그러게요. 한 달 정도 빠른 것 같은데요? 어떻게 격퇴했다는 보고는 없습니까?"
"사단 통신망이 아직 혼란스러워. 장벽 관측반이 당한 듯 싶은데..."
조심스러운 상관의 말에 라인은 이마를 찌푸리고 땀에 젖은 목덜미를 훔쳤다. 장벽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면 내일은 비상경계에 들어갈 것이 틀림 없었다.
"장벽에 피해가 있었다면 며칠은 상황 걸리겠네요. 나 이것 참."
"일단 대기해. 탄약고에서 포탄 내리고 있으니까. 저기 온다. 2포대! 방열판 열고 빨리 냉각해! 또 사격지시 올지 모른다!"
막사 쪽에 있는 길에서 불빛이 보이자 포대장이 소리쳤다. 라인은 마저 땀을 훔치고 포상으로 들어갔다. 긴 밤이 될 것 같있다.
다음날 아침.
도시 바깥 해안 경계를 방어하는 형태로 설치된 장벽은 그 높이만 30미터에 두께는 10미터에 달했다. 그 위엔 포대와 진지가 설치되어 있고 분주히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아침 해가 조금 떠올랐을 무렵 언덕 위로 올라 온 예나는 해안가를 바라보며 어제의 상세를 살폈다.
장벽은 전투의 영향으로 언덕에서 북쪽 조금 지난 곳이 엉망으로 깨져 있었다. 유실된 높이는 대략 5미터. 긴급 복구 공사 때문에 중장비와 인부들이 동원되고 있었다.
"좀 쉽게 찾으면 얼마나 좋아. 나 때문에 악마들이 더 날뛰는 건가?"
내쉬는 한숨에 김이 서리는 것을 보고 예나는 몸을 돌려 언덕 사면에 있는 오솔길을 올라오는 경계병들을 바라보았다. 총을 어깨에 매고 산길을 서둘러 올라오는 세 병사는 아침의 한기에 오들오들 떨면서 손을 비비고 있었다.
"흐아! 왔냐!"
초소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병사들이 부리나케 쫒아나와 교대병력을 재촉했다. 잠시 실랑이가 있고 교대한 경계병들이 성급하게 내려가자 초소 주변은 다시 조용해졌다.
언덕 사면 아래에는 동그랗게 만들어진 포상이 3개씩 도합 12개가 있었다. 도시 내에 흩어진 포병 부대 중 하나였다. 그곳들 중에 어제 만났던 뻔뻔한 남자가 있을 것이 틀림 없었다.
방벽 너머를 바라보며 예나는 산길을 내려갔다. 딱히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잠깐 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괘씸한 사람들을 좀 더 기다리게 만들어 줄까 하는 심술도 들었다. 무엇보다 어제 보았던 악령들의 기세는 가벼이 보아 넘길 것은 아니었다.
그대로 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온 예나는 노점에서 매콤한 연기가 나는 생선구이 몇개를 사서 들고 이리저리 나있는 길을 따라 정처 없이 걸었다.
삭막한 군사도시의 풍경은 음식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생선구이는 매우 맵고 짰다. 분명히 장벽 너머 바다에서 잡힌 것을 염장해 말려놓았던 것이 틀림 없었다. 어제 식당에서 먹었던 저녁도 거의 그랬다. 야채는 거의 없고 고기는 가공육이었다.
왼쪽에서 시선이 느껴져 바라보자 길가의 음식점 앞에 선 네다섯명이 빤히 쳐다보다 저마다 고개를 돌렸다. 소위 남자들의 시선은 이제 너무 익숙해서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하늘에는 완연히 빨간 해가 떠올라 스산함을 더했다. 이곳의 색깔과 공기는 어딜 가든 똑 같았다.
어디로 갈까, 생각하며 길을 걷던 예나의 발길은 어느새 장벽에 가까워졌다. 장벽 밑은 침입을 우려해서 시가지와 거리를 두고 철책이 쳐 있어 다가갈 수 없었다. 하지만 예나는 장벽 바깥에서 아우성치는 비명들을 들었다. 바다에서 나온다던 악령들은 낮에도 잠복한 채 울부짖고 있었다.
소름이 끼치는 귀곡성이었다.
"나가면 고생하겠네."
가벼운 한숨을 내쉰 예나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잠시 열기를 느낀 다음 고개를 들고 다시 돌아 나왔다. 이 삭막한 도시라도 아직은 안전한 사람들의 영역이다. 그래도 사람들의 온기가 여기 있었다. 예나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하지만 이 안온함을 언제까지나 만끽하며 느긋하게 지낼 이유는 없었다.
예나는 다시 장벽 반대쪽, 해가 뜨고 있는 동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부터 떠오르는 햇살은 어제와 다르게 무언가 상서로운 기운을 품고 유난히 따뜻했다. 아무래도 큰 일은 이쪽 저쪽에서 다 일어날 듯 싶었다.
그 날 오후가 되서야 비상대기령은 해제되었다.
라인은 보급된 음료수 캔을 들이키곤 건빵을 씹었다. 계속된 대기령 때문에 부대 외부에 나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남아있던 것은 그게 전부였다. 사실 전투식량보다 맛있긴 했지만 라인은 되도록 사제음식을 선호했지 보급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종일 부대에 갖힌 전포대장이 죽을 쑨 표정을 내내 짓고 있자 병사들은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기. 전포대장님."
"왜?"
라인이 휙 바라보자 신입 이등병은 화들짝 놀라 우물쭈물거렸다. 선임들이 대신 가서 말하라고 보낸 모양이었다.
"대, 대기령 해제라고 하지 말입니다. 간부들 모두 퇴근할 사람은 퇴근해도 된다고요..."
"아 그래? 알았어. 가봐. 수고 했다."
"아, 예! 충성!"
"어, 충성."
병사가 서둘러 돌아가자 라인은 우선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사실은 어제 본 소녀의 얼굴이 눈 앞에 어른거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런 시골 마을 소녀와 질적으로 다른 미모를 가지고 있는데도 세월에 닳은 흔적 따윈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 전혀 순진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이 정말 신비했다.
"원숭이집이라고 했지? 가봐야지."
포를 정리하는 것은 후임과 병사들에게 맡기고 서둘러 몸단장을 한 라인은 찬 공기를 씹어 삼키며 위병소로 향했다. 비상근무 때문에 났던 짜증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러나 위병소에 난 난리를 보고 얼굴이 뒤바뀌었다.
작업을 마친 일단의 병사들이 위병소 뒤쪽 공터에 모여들어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라인은 모종의 직감을 느꼈다. 병영에 박힌 남자들이 관심을 가질거라곤 언제나 뻔하다.
가까이 가서 넘어다 보니 역시나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위병소 바깥 벤치에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소녀의 자태는 이런 군인 천지인 도시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화사했다. 여기저기 여자를 후리고 다닌 라인으로서도 가슴에 두근거려 함부로 앞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형광등 불빛이 아닌 햇빛 아래에서도 피부가 정말 새하얗게 윤이 난다.
라인은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치고서 소녀가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야! 이거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재빨리 병사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간 라인은 주위에 눈치를 주며 소녀를 몸으로 가렸다. 뒤에서 야유가 들렸지만 가뿐히 무시했다.
수많은 시선이 쏟아져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앉아있던 소녀는 불쑥 손에 있던 물건을 내밀었다. 종이 봉지로 싼 그릇이었다. 라인은 거기에서 나는 냄새를 느끼고 살짝 긴장했다. 이 여자애는 생각보다 고단수인 모양이었다.
"우와. 나한테 주는 거야? 혹시 나 주려고 만든거?"
"시장에서 팔길래 집어왔어. 선불 정도로 해두지."
"이야. 고마워. 그럼 일단 가볼까? 여기 겉 보기엔 삭막하지만 찾아보면 좋은데 많아."
"그럼 안내해봐."
절묘한 대화가 오간 후 소녀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라인은 살짝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 손을 받아들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위병조장에게 퇴근한다고 말을 던진 라인은 그 손을 잡아 끌고 밖으로 나왔다.
소녀는 바리엔에서 이곳까지 혼자 몸으로 온 것이 우연은 아니라는 듯 고단수였다. 선물을 내밀면서도 말로 벽을 치고 먼저 찾아왔음에도 틈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어린 외모만 보고 얕보아선 안될 모양이었다. 가볍게 손을 내어온 것은 손을 잡는 것 따윈 아무런 의미도 아니라는 뜻이 분명했다.
물론, 라인이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나 첨 보는 여자가 남자가 마음에 든다고 그렇게 아무렇게나 허락하는 경우를 보진 못했다.
"도시 경계선은 저기 남쪽 끝에 있는 장벽 부터야. 그쪽은 군 사격장등이 있어서 민간인 통제구역이라 못 들어가. 장벽 쪽엔 정박지가 있고 북쪽은 네던 산으로 비트리인과 갈려 있어. 여름이라면 장벽 바깥에 나가면 해변도 있고 한데 지금은 별거 없지. 일단 시장부터 가볼까?"
"시장은 가봤는데?"
"혹시 뭐 잔뜩 먹고 온 거야? 의외인데?"
"뭐가?"
"처음엔 어디 마실 나온 높은 양반 딸인 줄 알았거든. 바리엔에선 혼자 온 거야?"
"혼자야. 상단 다섯개쯤을 거쳐가면서 여기까지 왔어."
"잘도 왔네. 요즘 흉흉하다고 하던데."
"너 같이 집적대는 놈들 많았지. 개중에는 덮어놓고 자빠트리려는 놈들도 많았고. 강도나 소매치기는 말할 수 없을 정도야. 꽤 반반하게 생긴 돈 많은 놈이 자기가 어디 누구 아들이라며 무작정 끌고가려고 한적도 있어."
"허어. 이런데 쳐박혀 있는 내가 뭐라 평가할 건 아니지만, 고생했네."
라인은 진심으로 소녀를 다시 보았다. 바다 밖에서는 악령들이 넘어오고 내부에선 치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라인도 사관학교에 가 있는 동안 겪은 일이지만 라인이 속한 델리안은 내우외환을 겪고 있어 사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장벽쪽의 군사도시들은 워낙 최전선인지라 그래도 기강이 잡혀 있지만 요즘 들어선 수시로 반란소식이 들렸다. 그런 사이를 이런 미모의 소녀가 혼자 여행했다면 그건 정말 믿기지 않을 일이었다.
"귀찮은 일 한두가지야 있는 법이지."
소녀는 별 대수 아니라는 듯 넘기고 라인이 들고 있는 봉지에 손을 뻗어 뒤적거렸다. 꺼낸 것은 질 낮은 호밀을 씌워 구운 거친 팥 과자. 라인은 이런거였나 싶어 툴툴거렸다.
"뭔가 대단한 아가씨인줄 알았는데 이런것도 잘 먹네?"
"날 뭐라고 생각했는데?"
소녀가 약간 올려다보며 질문했다.
새삼 라인은 소녀의 키가 꽤나 큰 것에 놀랐다. 가늠해보면 불과 10cm 정도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이런 키를 가진 여자는 드물다. 처음 봤을 때는 그다지 키가 크다는 인상이 아니었다.
"음. 비밀 호위가 딸린 귀족 집 딸? 아니면 엄청나게 나이 먹은 마법사?"
"그런 애들이 혼자 빨빨거리며 생선구이나 뜯어먹고 다니진 않겠지."
소녀는 입에 과자를 넣고 우물거렸다. 라인도 팥과자를 하나 입에 넣었다. 겉은 싸구려지만 설탕이 좀 많이 들어간지라 팥 과자는 비쌌다. 라인도 가끔 가다 한번 사먹는 정도였다.
"예르시하이나라고 했지?"
"예나라고 불러."
"그래? 어제는 비상 걸린 탓에 빨리 갈 수 밖에 없었어. 좀 더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말야. 낮엔 좀 덜하지만 밤에는 아주 난리거든."
"나도 어제 봤어. 그 악령들은 뭐야?"
"그걸 나한테 물어봤자 모르지. 여기 의외로 역사가 꽤 돼. 저 장벽이 만들어진 것도 내가 태어나기 두 세기 전은 된다던데?"
"장교면서 역사공부도 안했어?"
15세 소녀에게 그런 말을 듣자 라인은 까칠한 팥과자가 씁쓰레하게 느껴졌다.
"나 그런거 별로 안 좋아해. 뭐 대충 써있기론 옛날 크레트쉬 신과 마하트 악신 간에 끊이지 않는 줄다리기 어쩌고 하던데 당장 최전선에서 싸우는 입장에선 포탄 하나가 더 중요하지 그런거 신경 쓰겠어? 혹시 진짜 마법사야?"
예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봉지에서 과자를 꺼냈다. 검은 머리채가 흔들리며 피어나오는 향내에 라인은 일순 말문을 잃었다. 맡는 순간 정신이 명료해지며 가슴 속이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찼다. 이 여자애는 적어도 그냥 평범한 범인은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어 라인은 무얼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내가 마법사 같이 보여? 여기 마법사들은 다 나 같아? 전에 들렀던 마을에서도 다들 그러던데."
말에서 여자들 특유의 싫증이 느껴져 라인은 재빠르게 변명했다.
"마법사를 직접 본건 아니지만 대게 어른들한테 듣던 이야기는 다 그렇거든. 이 근방도 다르지 않을거야. 그런 차림이니까 더 그렇지 않을까?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잖아."
라인이 몸을 가리키자 예나는 코웃음을 쳤다.
"이 겨울에 그럼 이런거 없이 어떻게 다니라는 거야? 아무래도 이 지방 사람들은 편견이 심한 모양이네. 기껏해야 여행용 코트 가지고 사람을 왜 그렇게 봐?"
"요새 좀 흉흉해. 너도 오면서 많이 당했다며. 그런데 어떻게 무사히 왔네?"
"엄청난 일이 있었지."
예나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라인은 그걸 알아차리고 피식 웃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엄청난 일이라, 뭐 더 묻지 않을게. 그런데 확실히 편견은 맞겠어. 수도에선 그런 후줄근한 차림으로 돌아다니면 당장 근위대가 달려들어서 발가 벗기려 들걸?"
예나는 새침하게 쿳 웃곤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옷으로 사람 판단하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 바리엔에서도 그렇게 말하며 다가오는 남자들이 있었어. 중간에 잠깐 묵었던 교회에선 저희들끼리 마녀 아니냐고 수군대던데? 내가 그렇게 생겼나?"
예나가 정면으로 다가오며 얼굴을 가까이 하자 라인은 움찔 놀라 뒤로 물러날 뻔 했다. 여태까지 많은 여자를 만나 온 라인이었지만 이렇게 먼저 쭈뼛거리게 만드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음, 어. 예쁘잖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 않아? 솔직히 말해서 난 살면서 너보다 더 예쁜 여자는 보지 못했어."
여자애가 얼굴을 들이대자 코트 사이로 드러난 목선이 보였다. 안에는 하얀 옷을 입고 있었는데 피부가 정말 희었다.
예나는 짖궂게 빙긋 웃으며 라인을 시선으로 희롱했다.
"아양 잘 떠는데? 선순가봐?"
"아양이라니? 잘 좀 봐주지. 나도 여기서만 처박혀 있던 건 아니야. 나름 견식은 있다고?"
가슴이 떨려 표정 조절을 하면서 라인은 맞대답을 했다. 여자애가 꽤나 직설적이었다.
"오호라. 견식이라."
예나가 씨익 웃었다. 발갛게 익은 입술이 길게 늘어나는 모양새가 정말 고단수였다. 제대로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어느새 속옷까지 텉릴지도 모른다.
장전된 대포 뒤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라인은 어물쩍 넘겼다.
"내가 한 마당발 하지. 어디 보고 싶은데 있어? 방에 처박히는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맞아. 여기 좀 음침해서 귀신 튀어나올 것 같아. 저기 가볼 수 없어?"
북쪽을 가리킨 예나의 손을 따라가자 네던산이 나왔다. 초록색 침엽수림이 자리잡고 있는 가운데 도시에서 유일하게 장벽보다 높이 솟은 곳이었다.
"저기?"
"저거 케이블카지? 군용은 딱히 아닌 것 같은데 저렇게 움직이는 걸 보면 사람들이 많이 올라가나봐?"
산에 매달린 케이블카는 깨알같이 작아서 날파리 정도로 보인다. 라인은 용케 잘도 봤구나 생각하며 말했다.
"가려면 못 갈건 없는데 지금은 시간이 늦었어. 밤에는 악령들이 출몰하니까 일몰 전에 닫지. 가려면 점심쯤엔 출발해야해."
"오. 그래? 혹시 내일 쉬어?"
일단은 청신호다. 예나를 마주보며 라인은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같이 어디 가자는데 마다할 성격은 아니다.
"내일 저녁때 전까진 시간 낼 수 있어. 딱히 비상이 걸리지만 않는 다면야."
"그러면 내일 가도록 하지. 여기 군인이라면 지리는 잘 알겠지? 난 시간 여유 많으니까 원숭이집으로 찾아와. 주인에게 말하면 알거야."
"그래 알았어. 잘 모시러 가지. 기대하라고."
"기대는 안해. 군인이 뭐가 얼마나 있겠어? 어디 가볼데는 없어? 미안하지만 시장은 샅샅히 살펴보고 왔거든."
예나의 웃는 얼굴은 이제보니 능글맞았다. 라인은 소녀가 고단수임을 인정하고 그에 맞게 대응했다. 이 소녀는 여기 변두리 도시에서 사는 여자애들처럼 다루면 안되겠다. 그보다는 수도의 콧대높은 아가씨들을 다루는 법을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서쪽 길 끝에 잘 아는 찻집이 있어. 거기 가보자. 길 옆에 잘 안보이는데에 있는 곳이라 외지인은 잘 모르는 곳이거든."
"그런데가 있었어? 도시 입구에는 멋 없는 검문소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서 장사가 되나봐?"
"거긴 햇빛이 잘 들어서 분위기가 여기랑 좀 틀리거든. 아는 사람들은 하루종일 죽치고 일광욕 하는 데지. 골목 하나만 들어갔는데 분위기가 틀려."
라인이 으스대자 예나는 일부러 그러는 듯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며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석양이 지기 시작하면서 하늘에 걸린 구름이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요런 삭막한 도시라도 데이트하기 좋은 데는 있는 법이지."
"여자 꼬시는 말발은 좋네."
"싫어?"
"무식하게 손 부터 대려는 놈들보단 낫지. 안내해."
예나는 선뜻 손을 내밀었다. 라인은 어쩐지 쓴 입맛이 감돌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맞잡았다.
"후우."
그 거리는 적당한 1층 상점들이 줄을 잇고 있는 좁은 골목이었다. 하지만 성벽을 따라 골목 안쪽까지 빨간 햇살이 들어오고 있어 다른 곳보다 조금 더 따뜻했다. 단지 그 차이였지만 삭막한 군사도시에서 그것만으로도 아늑함으 느끼기엔 충분했다. 예나는 그 햇살을 느끼자 얕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괜찮네."
저녁놀을 받자 어깨와 등으로 흩어진 머리카락이 노랗게 빛났다. 하얀 얼굴에 깃든 혈색은 더 화사하게 빛을 반사하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엄청나게 예쁜 소녀였다. 이러니 이 어수선한 도시에서도 금새 소문이 쫙 퍼진 것이 틀림 없었다. 본인은 이미 감흥도 없는 모양이었지만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에는 라인이 아는 얼굴들도 있었다.
지금까지 뒤를 따라오고 있던 중인듯 여기저기 골목에서 띄엄 띄엄 나타난 소년과 청년들이 벌레씹은 표정을 짓고 라인을 쳐다보았다. 라인은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 뻔뻔함에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 라인중위. 오랜만이야?"
자주 가던 찻집에 재빨리 들어가려던 라인의 어깨를 커다란 팔이 감쌌다. 등에 얹어오는 묵직한 무게에 라인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야. 한스. 잘 있었냐? 코는 어때?"
한스는 라인과 몸집은 비슷하지만 팔뚝은 두배는 굵었다. 얼굴은 그리 험상궂지 않지만 표정엔 흉악함이 가득하다. 지금쯤이면 철공소에서 일하고 있을 시간이라 안심하고 있던 라인은 한스의 얼굴을 보고 웃었다.
"아, 거참. 중위님께서 권세가 요새 많이 좋아지셨어요?"
명백히 띠꺼운 표정이었다. 한스의 코에 얹힌 반창고를 보고 라인은 슬쩍 한수의 팔을 밀어 내렸다.
"지금 좀 바쁘거든? 빚은 나중에 청산하지 그래?"
"음. 오늘은 야근이라서 말야. 나도 중대한 용건이 좀 있거든."
"뭔데?"
"이런. 눈치 대장 라인중위님이 그런 얼빠진 소릴 하다니 악령들이 넘어올까봐 무서워서 살겠나."
과장되게 팔을 흔든 한스의 뒤로 그의 패거리가 보였다. 라인은 잡은 손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예나를 돌아보았다.
"친구인가봐?"
라인이 대답하려는 찰나 한스가 선수를 쳤다.
"안녕? 아가씨. 내가 어제 한 말은 생각해 봤나?"
예나가 다른 여자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를 가졌다고 해도 한스가 앞에 서자 5살 어린애 같았다. 두꺼운 외투와 옷으로 무장하고 있는데도 그런 것을 보면 본래 몸매는 가냘프기 그지 없을 것이다.
"아니. 생각 안했어."
거한이 앞에서서 압박을 가해도 예나는 아무런 떨림도 없이 한스를 마주보았다. 눈빛이고 몸짓이고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라인은 전혀 겁을 먹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감탄을 하다 피식 웃으며 한스를 건드렸다.
"야. 이쪽은 나와 선약이 있으신지라 너랑 놀아줄 시간 없거든?"
"아가야. 네 놈은 어른의 놀이 하기엔 아직 좀 희여멀건해서 안돼. 저리 갈래?"
"아, 꼬마 골목대장 씨보다는 성숙했거든. 얕보지 말아줄래?"
한스는 하 하고 콧방귀를 뀌며 해가 지는 쪽을 보고 싱글싱글 웃었다. 라인은 마주 웃다가 갑자기 목으로 달려드는 억센 팔뚝을 쳐내고 소매를 털었다.
"이야, 군인 건드려봤자 좋을거 없을텐데?"
"이 쥐방울 만한 놈이 아빠 백 보고 덤비냐?"
"워워. 누구처럼 잘나신 아빠 두지 않았거든."
"이 새끼!"
한스가 휘두른 주먹을 라인이 피하고 발목을 걸었다. 하지만 원체 단단한 덩치를 가진 한스도 그 정도 태클에 넘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세가 무너진 라인을 밀어붙여 넘어트렸다.
"저기..."
그 틈을 타 한스의 패거리가 말을 붙이자 예나는 그를 한번 바라본 다음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으며 카페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똘마니가 주저하며 뒤따라 갔지만 예나가 한번 더 날카롭게 노려보자 돌연 겁을 집어 먹고 후다닥 달아났다.
때 아닌 싸움 구경에 작은 골목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예나는 자신을 보고 멍하니 넋이 나간 여급을 불러 메뉴판을 가져오게 시킨다음 턱을 괴었다. 라인은 그래도 훈련 받은 군인이라서 개싸움을 벌이지 않고 적당히 완급을 조절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스는 훈련 받은 티도 나지 않고 그저 힘으로 밀어 붙이는 모양새였다. 그래선 맞상대가 될리 없었다.
"우리 아빠도 저렇게 열 받아서 치고 박는 성격이면 한심한데."
따뜻하게 데운 커피와 비슷한 음료가 나오자 예나는 목걸이를 들어 품 속에서 조그만 병을 꺼냈다. 코르크 마개로 막혀 있는 엄지손가락만한 병에는 하얀 액체가 가득 차서 찰랑 거렸다.
마개를 열고 붓자 희안하게도 저절로 섞여 들어가며 우유를 섞은 것처럼 밝아졌다. 예나는 신중하게 병을 기울여 마지막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잔 안으로 똑 떨어트리곤 다시 병을 닫았다. 병 안에는 손톱만한 돌조각 두개가 굴러다녔다.
"맨날 감질나게 이게 뭐야."
불만 어린 말을 터트리면서도 예나는 조심스레 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 천천히 마셨다. 눈을 감고 컵을 기울이는 예나의 표정이 점점 풀어지면서 황홀경에 빠진 얼굴로 변했다.
그 사이 싸움은 끝나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바닥에 주저앉은 라인과 한스는 거친 숨을 내쉬며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둘 다 서로 노려보면서 주위는 상관 하지도 않았다.
"이거, 윽. 남들한테 말하지 마라?"
"이제와서 무슨 소용이라고? 너야말로 입 맞출 때 잘해."
"꼬맹이 치곤 머리가 돌아가는 편이네?"
"사관학교 꼴찌보단 낫지."
"전체 수석이거든?"
허덕대던 둘은 문득 한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빨갛게 물든 햇빛이 저물어가는 테라스에 앉은 소녀는 컵을 앞에 놓고 팔을 벤채 잠들어 있었다. 라인과 한스는 나란히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켜 옷을 털었다.
"응? 끝난거야?"
"어? 그렇지 뭐. 늘상 있는 일이야. 신경 쓰지 마."
"흥. 흙냄새."
자는 줄 알았던 예나는 라인이 자리에 앉자 벌떡 일어났다. 깜짝 놀란 라인은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웃었다.
"여기 후콩차 좀 갖다주세요."
"난 매운차."
한스가 의자를 끌어와 앉자 라인은 눈을 부라렸다. 거기다 예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응이 없자 인상이 더 험악해졌다.
"예나. 다른데로 가자."
예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마치 두 남자가 하는 양을 지켜보겠단 이야기 같았다. 라인으로선 속이 타는 일이었지만 한스에겐 기회였다.
"크큭. 네 놈의 애송이 같은 인상이 별로 마음에 안드는 모양인데?"
"근육바보나 철없는 꼬맹이나 매력없긴 마찬가지야."
예나의 말에 라인과 한스는 입을 뻐금거리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으르렁거렸다. 금방이라도 다시 투닥거릴 분위기는 여급이 와서 음식을 내려놓아서야 풀렸다.
"그런데 내일..."
"아, 그런데 정말 15살 맞아?"
예나의 앞에 놓인 튀김을 바라보던 한스는 매운차를 단숨에 반쯤 들이켰다. 그러는 와중에도 팔꿈치로 라인의 옆구리를 계속 찔렀다. 여자 앞이라 자제하고 있는 것 같지만 불씨는 여전했다.
"내가 나이들어 보여?"
"아, 아니. 그런건 아니지만 꼭 산전수전 다 겪은 술집 마담 같아서."
"야, 말을 해도 그렇게..."
라인은 뜨악하며 말했지만 예나는 피식 웃으며 튀김을 주워 먹었다. 분홍색 입술이 오물거리는 모양새에 둘 다 입을 다물었다.
"그쪽은 순진하네. 여자 잘 사귀어. 잡아 먹힐라."
한스가 귀밑까지 붉어지자 라인은 못볼 것을 봤다는 듯 의자를 들어 멀찍이 떨어졌다.
"내일 해가 조금 뜨면 만나지? 마침 원숭이집은 그쪽이니까 내가 갈게."
"그래."
"어? 어이. 이봐. 언제 뭘 만난다고?"
"넌 닥쳐."
두 남자는 예나를 앞에 두고 또 옥신각신 신경전을 벌였다. 누가 못났니, 누가 잘못했니 따위의 온갖 신변잡기와 비방이 이어졌다. 예나는 나른한 얼굴로 튀김을 주워먹으며 바라보고 있다가 탁자에 손가락을 튕겼다.
퉁 하는 울림이 나무탁자를 걸쳐 바닥까지 울렸다.
"지, 지진인가?"
"으악!"
라인은 벌떡 일어서고 한스는 재빨리 바닥에 몸을 던졌다.
"이제 그만 집에 가보지 그래? 착한 아이는 일찍 자야지?"
"응? 벌써?"
"자, 잠깐."
예나는 다급한 표정으로 만류하는 둘을 바라보며 지겹단 표정을 지었다. 둘이 뜨악하는 사이, 마지막 튀김을 손에 들고 일어난 예나는 왼손 검지손가락을 흔들며 테라스를 내려갔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라고. 알았으면 오늘은 이만 끝."
라인은 떠나가는 예나의 뒤를 쫒고 싶었지만 여기서 뒤를 밟았다간 정말 우스운 꼴이 될 것이 틀림 없었다.
하필이면 한스와 마주쳐서 너무 열이 받은 것이 패착이었다. 예나 입장에선 그렇게 투닥거리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이 되도 않을 수작으로 보일 것이 분명한데도 성급하게 닦달을 해버렸다. 여자애를 앞에 두고 남자 둘이 싸우는 건 누가 봐도 미련한 짓이었다.
해가 지며 밤이 찾아오자 도시는 불을 환하게 켜고 어둠을 내쫒았다. 특히 장벽쪽은 어제의 일로 인해 수많은 집광등을 갖다놓고 대낮만큼 환하게 밝혀 놓았다. 겨울의 얼음처럼 찬 바다에서 올라오는 악령들은 결코 얕보아선 안될 것들이었고 상륙했을 때 나타난 결과들도 역사책에 빠짐 없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날 밤은 어제와 달리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예나가 묵고 있는 동쪽 문 근처의 원숭이집은 5층짜리 호텔이었다. 그곳의 최상층 한곳, 내륙쪽 장벽이 내다보이는 방에 자리를 잡은 예나는 불을 끈 방에 미등만 켜놓은 채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슬슬 오는 모양이네. 그냥 잠이나 자지 왜 나오는 거야? 정말."
손에는 돌아오며 사왔던 약간 매운 과자가 있었다. 매콤한 것이 입맛에 맞았다. 두꺼운 코트를 입고 돌아다녔던 낮과 달리 몸에는 속이 비치는 슬립에 속옷 한장만을 입었다. 예나는 과자를 먹으며 침대 위에 쿠션과 이불을 끌어모아 만든 언덕에 등을 기댔다.
이변은 서쪽 지평선으로부터 생겼다.
느닷없이 산봉우리 하나가 밝은 빛에 감싸여 사라지더니 커다란 불꽃이 지상에서부터 일어나 하늘에 뜬 구름을 밝혔다. 적어도 나라 하나 둘은 사이에 둠직한 거리였다.
하늘이 밝게 홍색으로 물들며 하늘이 열리고 무언가가 대지로부터 일어났다.
변경의 해안도시에 있는 사람들 중 경비병력만이 이변을 눈치 채었다. 대륙 저펀에서 일어난 빛 안개는 뭉게뭉게 퍼지며 부피를 늘려가더니 이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곳 사람들은 저녁쯤에 나타난 이변에 나라가 발칵 뒤집힐 만큼 놀랐을 것이 틀림 없었다.
'도래했는가. 멸망이여.'
"처음부터 짜증내긴, 여기 신들은 왜 저래?"
귓속을 울리는 말투에 예나는 짜증이 난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곳으로 가서 숨는다 한들 찾아내지 못할 일 없으니, 멸망의 이름은 이 대지에서 속히 물러날 지어다.'
"흥."
코웃음을 친 예나는 이불 속으로 더 깊숙히 몸을 묻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석양빛은 이윽고 거대한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지평선 너머에서도 보일만큼 거대한 거인은 모습이 다 갖춰지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산은 무릎에도 오지 않고, 구름은 허리에 걸려 흩어졌다. 분명히 엄청나게 무겁고 커다란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진동도 소리도 없었다.
석양빛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거인이 성큼 성큼 들판을 넘어 걸어온다.
예나는 과자를 몇개 더 집어 먹은 후 손가락을 빤 다음 가슴 위로 팔짱을 끼고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멸망이여. 움직이지 않음은 여에 대한 조소와 마찬가지이리니, 속히 그 대지에서 물러나지 않는 다면 그는 곧 불경한 모독이니라.'
"혹시 네가 크레트쉬야? 아까 저녁 때부터 낌새가 이상하더니 왜 처 자다 말고 일어나서 난리야? 한번 해볼거야?"
볼을 부풀린 입술 안에서 거친 말이 튀어 나왔다. 예나는 순간 당황하여 소리쳤다.
"잠깐! 지금 상황 몰라? 저딴 거 하고 싸울 틈이 어디있어?"
다시 거친 말이 흘러나왔다.
"아 그거 모르고, 지금까지 가는데마다 줄줄이 일어나서 멸망이 어쩌구 파멸 어쩌구 해대는 놈들 때문에 짜증나서 견딜 수가 없어. 저 망할 놈이 여기로 오는 바람에 또 미친 광신도 인간들이 들이닥칠걸?"
예나는 골치 아프단 표정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흐트렸다. 검은 앞머리 사이사이가 갑자기 바래오며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결이 드러났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악마들이 지겹게 튀어나오는 곳이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석 말대로 무대포인 놈이 나올 줄은 몰랐어. 그리고 튀어 나오지마. 엄마 젖으로 간신히 유지하는데 힘 쓰면 목 말라."
지평선에서 찬란한 석양빛과 함께 거인의 머리와 어깨가 불쑥 올라왔다. 몸이 지평선 너머로 감춰질 정도로 먼데도 그 크기는 웬만한 산보다 컸다.
그를 바라보는 예나의 눈동자가 은빛으로 변하며 정체를 간파했다.
라인이 말한 크레트쉬, 여명과 석양의 신인 그는 동시에 태양의 신이기도 해서 지하에서 튀어나오는 악마들과 상극이고 그들의 대신격인 마하트와는 앙숙지간이었다. 그러나 마하트는 오래전에 크레트쉬에 의해서 스러져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가라앉았고, 그 악신의 몸에서 튀어나오는 악령들이 바다에서 기어올라와 태양의 신과 그 종복인 인간들을 학살하고 피를 취한다. 그 오랜 싸움은 과거와 미래의 기약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뻔한 스토리잖아."
'그렇군. 나의 역사를 읽은 것인가. 그대는 어디에서 도래했는가. 그대처럼 강력하디 강력한 자가 어째서 영락한 인간의 껍질을 쓰고 있는가? 그 몸에 지닌 목적이 나의 오랜 숙적 마하트를 일으켜 세울 것이 분명한 것을 나는 알고 있나니, 그대가 미증유라 하여도 나는 도전할 것이다. 태양의 진노가 업화를 일으킨다!'
가슴까지 드러난 거인이 거대한 손을 들어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달빛이 몇배로 밝아지며 거대한 항성이 되어 그 손에 잡혔다. 달의 빛이 옮겨져 이글이글 타는 태양빛이 되며 달이 빛을 잃고 어둠속에 잠겼다. 넘치는 신의 힘은 자연현상을 떡 주무르듯 주물렀다.
"으. 가만 놔두면 땅채로 불사를 모양이네."
'나의 도전을 받아들이라! 모든 종류의 패퇴는 죽음을 가리키니!'
예나가 몸을 일으키며 허공에서 칼을 꺼냈다. 동시에 밖에 나갈 수 없을 가벼운 차림인 몸 위에 하얀 갑옷이 덧씌워졌다.
거인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손에 든 태양을 집어 던졌다. 그 속도는 빛의 속도와 같아서 던진 순간 도시 상공에 떨어지고 있었다.
"오우."
예나는 감탄사를 흘리며 미적미적 칼을 꺼내 들었다. 동시에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은빛으로 바뀌며 제 색을 되찾고 하얀 갑옷 사이로 얇은 천들이 비끄러져 나왔다.
"나도 참 착하단 말야."
창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온 예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낮보다 더 밝게 도시를 비추는 태양이 푸른빛 광막에 막혀 떨어져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악령들이 직접적으로 침입하지 못하게 하던 방어벽이었다.
'옛 신의 신물인가! 그래서 그곳에 있었군! 영악한 자구나!'
"우호! 역시 이런 맛이 있어야지. 패스코드는 아직 유효하구나."
짖굿게 웃은 예나는 가볍게 몸을 놀려 옥상으로 올라선 다음 칼을 들어 날에 덕지 덕지 붙은 금속 상자들중 하나를 떼어냈다. 분명 기계적인 장치는 전혀 없음에도 무언가 화면이 나타나고 상태 표시가 흘렀다.
거인, 크레트쉬 신은 공격이 가로막히자 속도를 올려 띄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지평선 위로 쑥쑥 솟아오르며 지축을 울리는 지진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한편 방어막에 가로막힌 태양은 그 빛만으로 도시를 태우기 시작했다. 장벽의 보루나 지붕들에서 연기가 오르기 시작한다. 그대로 있으면 도시 내의 모든 물체와 사람들이 증발해 버릴 것이 틀림 없었다.
"아, 진짜 여기까지 시달렸는데 좀 놔둬. 그러니까 냉큼 박살내고 자야지. 이제 조금 찼으려나? 잠깐, 뭐하는 거야?"
예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품에서 꺼낸 유리병을 가늠했다. 오후에 바닥까지 비워낸 탓에 불과 4분지 1밖에 차있지 않았다. 그것의 뚜껑을 열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단숨에 마셔버렸다.
"으악!"
자기가 마시고 놀란 예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유리병을 황급히 집어넣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니, 그보다는 자포자기한 표정이었다.
"몰라 이젠. 진짜로 내가 이게 무슨 꼴이야. 하여튼 그 녀석 죽을지도 모르니까 뭐. 나도 착한 여자라고. 엄마가 생명의 여신인데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은 건 아니잖아?"
ㄹ일이 합리화한 다음 예나는 표정을 굳히고 이를 드러내며 가볍게 뛰었다.
'호기가 생긴 것인가! 좋다! 겨루어 보자!'
"여자애 한테 그런 식으로 만날 들이댔나 보지!"
예나의 손에 들린 칼에서 금속 조각들이 사방으로 뛰어나갔다가 몸에 달라붙어 기계장치를 만들ㅇ냈다. 어깨와 허리, 무릅과 발에서 추진력이 생겨나자 예나는 그것을 발판 삼아 몸을 날렸다.
"일단 칼 쓰기는 잘 못하니까."
검을 휘둘러 방어벽에 막힌 태양을 베어내자 불꽃은 날아온 속도보다 더 빠르게 밤 하늘로 튕겨나갔다. 빛이 초광속으로 퍼지며 무리법칙을 뒤엎고 대기에 엄청난 전광을 만들어냈다. 상공에서 보자 대륙 여기저기서 전자파를 맞은 방어막들이 푸르게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날뛰어보자 멍청아! 스트리트 파이터로 다져진 나의 권을 보여주마!"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라인은 영내에 울리는 비상벨에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하늘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광경에 목을 빼고 얼었다.
푸르게 전광이 흩뿌려지는 배경 바깥으로 거대한 거인이 주먹과 몸을 휘두르며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성벽이나 건물에 가렸는데도 불구하고 불과 발목 정도만 보이지 않는 엄청난 거인이었다.
그뿐이었다면 다행이었다.
허공에 받힌 것처럼 상체를 크게 뒤로 떨친 거인이 다리로 균형을 잡자 지진이 일어났다. 막사 앞 연병장에 나와 있던 병사들이 죄다 쓰러지고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두 깨졌다. 감시탑이 쓰러지고 온갖 것이 나뒹굴었다.
라인은 지진이 그치자 영문도 모른채 거인이 싸우는 곳을 향해 달렸다.
거인이 싸우는 곳은 성벽 바깥이다. 도시를 둘러싼 방벽 너머에서 벌어지는 초월적인 싸움에 거리 곳곳에서 사단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하나 둘 공포에 질려 피난하기 시작했다. 악령들이 넘어오는 밤임에도 불구하고 길을 뛰는 사람들은 모두 해안쪽을 향했다.
석양빛으로 이루어진 몸을 움직이는 거인은 야만스런 전사처럼 무기 하나없이 맨손으로 무언가와 대적했다. 솔직히 혼자서 주먹과 발을 날리고 몸통 박치기를 하는 등 우스꽝스런 몰골이었지만 신과 같은 거인이 싸우는 광경은 너무나 압도적이라 조금도 우습지 않았다. 성벽 따위는 발로 차면 그대로 날아갈 것 같은 거인이 지진을 일으키며 투닥거리고 있는 것이다. 발끝을 잘못 디뎠다간 도시가 가루가 될 것이 틀림 없었다.
"이야아압!"
예나의 왼쪽 신발에 붙은 추진기가 푸른색 고리를 뿜어내며 부들부들 떨었다. 다리에 모은 힘을 꺼내 허리를 뒤튼 예나는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며 오른 주먹을 길게 내뻗었다. 전신에 붙은 추진기들이 그 힘을 감내하기 위해 삐걱거리며 출력을 올렸다. 전광석화처럼 쏘아진 자그마한 몸이 거인의 가슴을 강타하자 거인은 꽉 막힌 비명을 내며 푸른 방벽을 덮쳤다.
방어벽이 출렁거리는 것만으로 무지막지한 충격파가 일어나 주위를 휩쓸었다. 나무고 동산이고 바다고 남는 것이 없었다. 뽑혀 날아가고 갈아 엎어지고 해일이 일어나 섬들을 덮쳤다.
'대적을 만났구나! 기쁘다!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끝에 지고의 낙이 찾아왔구나! 나와 대적하는 자! 그대의 진명을 알고 싶다!'
예나는 크레트쉬의 가슴을 밟은 그대로 그를 내려다보다가 양쪽에서 쇄도해오는 손바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귀찮은 모기를 죽이려는 것처럼 동산만한 손바닥이 닥쳐온다. 손가락 사이를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폭풍과 같았다.
"예르시하이나."
방어벽에 갖힌 마을은 그나마 멀쩡한 모습이지만 그 주변은 초토화되어 가옥이 박살나고 산이 무너지며 평원이 해일로 가득찼다. 방어벽도 신이 엎드리자 출렁거리며 불안정해졌다. 혀를 찬 예나는 소리보다 빠르게 다가오는 손바닥을 향해 양 팔을 펼쳐 맞섰다.
"악신을 물리쳤단 놈이!"
태산 같은 두 손바닥이 머리카락보다 더 가는 팔에 막혀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풀려난 기세에 공중에 떠 있던 구름이 흩어지고 먼지 바람이 일어나 지상까지 휩쓸었다.
"민폐 까치지 말고 조용히 잠이나 자란 말이야!"
일갈을 내비른 예나가 손바닥 사이에서 빠져나와 신의 목을 움켜잡았다. 허공으로 손을 뻗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인의 목덜미가 우그러지며 피편이 흩날렸다. 그와 함께 예나의 추진기로부터 황금색 고리가 뻗어나와 진동했다.
"으리야아아!"
오른 다리의 갑옷들이 죄어들며 힘을 압축하고 왼발의 추진기로부터 황금색 고리 세개가 더 생겨나 진동했다. 예나는 그대로 거인을 집어 던졌다.
신화의 순간을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도시 전체를 뒤엎고도 한참 남을 정도로 엄청난 거인이 무언가 거대한 힘에 걸린 물고기마냥 몸을 퍼덕거리며 힘 없이 던져졌다. 라인은 계속 이어지는 충격적인 광경을 바라보며 계속 숨을 들이켰다. 숨을 내쉬면 그대로 짜부라져 죽을 것 같았다.
그런 힘의 충돌에 도시의 푸른 방어벽이 출렁거리며 구멍이 생겼다. 그리고 극곳을 통해 푸효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레트쉬의 역사는 곧 투쟁이니! 지상을 데워 신의 역사함을 알리고 하늘을 비춰 위대함을 뽐낸다! 오너라 나의 무구! 오너라 나의 광명!'
강력한 힘을 풀어내는 말이 세상을 진동시키자 느닷없이 밤하늘에서 달이 나타나고 서쪽 하늘이 대낮만큼 밝아졌다. 달에서는 커다란 별똥별이, 서쪽 하늘의 빛은 기이하게 꺾이더니 크레트쉬를 비췄다.
별똥별을 손에 잡고 빛에 올라탄 크레트쉬의 모습이 일변했다. 빛으로 이루어져 있던 몸이 육신으로 변하며 강인한 근육과 야만적인 가죽 옷이 드러나고, 벌똥별은 도끼로 변하고 석양빛은 끄는 말 없는 전차로 변했다. 동시에 크기도 줄어들어 태산 같은 거인에서 집채만한 거인으로 변했다.
라인은 입을 벌린 채 바라보았다. 여명으로 몸을 두르고 석양빛 전차를 타고 달에서 떨어진 별똥별을 무구로 삼은 모습은 옛날 이야기에서나 듣던 신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리고, 밝게 빛나는 모습이 꺼지자 대적하는 것의 모습이 간신히 보였다.
높은 상공임에도 기이할 정도로 눈에 잘 들어온다. 팔 다리와 등 뒤에 황금색으로 진동하는 고리를 두른 하얀 사람이 크레트쉬와 마주보고 있었다.
예나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한차례 한숨을 내쉰 다음 목을 꺾었다. 세상은 역시 마음대로 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던져서 쫒아내고 편히 잘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상대는 생각보다 강했다. 아니, 그보다는..
"이게 다 엄마 탓이야."
엄마는 울며불며 매달리는 예나를 냉정하게 뿌리치고 혼자 가버렸다. 그 후에 돌아온 것은 칼 하나와 거기에 매달린 작은 돌조각이었다. 이렇게 되어 배신감에 치를 떨며 쫒아왔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곳에 흔적은 보이지도 않고 이상한 것들만 나왔다. 자연히 짜증이 마구마구 일었다.
거기에 더 짜증이 마구마구 일었다.
"이게 다 엄마 탓이야...내가 정말 이런 놈들 때문에! 박살, 박살 내줄거야! 각오하라고! 각오해!"
떼쓰는 어린애처럼 소리친 예나는 눈가에 점점이 방울진 눈물방울을 훔치지도 않고 자세를 가다듬어 돌격했다. 등과 발의 황금색 고리들이 막대한 출력을 뿜어내며 거칠게 진동하고 팔꿈치의 추진기로부터 빛을 일그러트리는 울렁거림이 나타나 대기를 뒤흔들었다.
"으하하! 호쾌한 돌격이구나!"
육신을 갖추고 현계한 신의 목소리는 신화의 그것이 아니라 전설에 나오는 영웅왕의 그것과 닮았다. 크레트쉬는 전차의 손잡이를 잡고 역시 돌격을 감행했다. 별똥별에서부터 태어난 도끼는 나무 자루에 맹수의 힘줄로 흑요석을 엮은 조악한 석기시대 물건이었지만 순식간에 하얗게 달아오르더니 타올랐다.
기껏해야 크레트쉬의 새끼손톱만한 주먹과 예나의 몸보다 커다란 도끼가 격돌하며 폭발이 일어났다.
크레트쉬는 살이 타버릴만한 폭열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도끼를 휘둘렀다. 예리하게 빛나는 흑요석의 칼날이 예나의 허리를 가를듯 쇄도했다.
예나의 황금색 고리들이 비틀어졌다. 어깨와 허리에서 고리 들이 연이어 솟아나고 추진력이 등을 떠밀었다. 쭉 뻗은 킥이 도끼 날을 노렸다.
다시 한번 격돌한 예나의 전신에서 추진기들이 부스러지며 황금 고리들이 타져나갔다. 흑요석 도끼도 날이 한웅큼 빠지며 반 이상이 부러졌다. 예나는 추진력을 잃고 추락하며 이를 갈았다.
"이게 부실해 가지고! 다른거 없어? 패스코드!"
크레트쉬의 깨진 도끼 조각이 허공에서 반전해 예나를 쫒았다. 신이 불러낸 무구인만큼 그냥 물질이 아니라 신력으로 이루어진 무시무시한 무기다.
"하하하하하! 등을 보이며 도망치지 않는 패기! 감탄하노라!"
야만인처럼 웃으며 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듯한 인상과는 달리 크레트쉬는 교활한 면모를 보였다. 예나의 외침에 반응해 대륙 어디선가 빛이 날아오자 조각난 흑요석으로 요격히고 대지를 향해 도끼를 찔러 넣는다. 신이 엎드려졌는데도 버텼던 방어벽이 도끼에 짓눌리는 것처럼 갈라지며 어둑어둑한 대지 한가운데에 있는 산이 거짓말처럼 퍽 터졌다.
"으으으! 아빠! 어디 있는 거야! 아빠!"
예나는 그 광경을 보고 소리를 질렀지만 응답은 없었다. 도리어 동쪽 수평선 쪽에서 두 신의 싸움에 자극받아 검은 안개가 뭉글뭉글 일어나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쳇.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다. 각오하라고!"
예나는 등에 맨 칼을 꺼내 들어 지상을 향해 몸을 돌린 다음 대지에 보이는 푸른 방벽들 중 하나를 가리켰다. 칼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금속 상자가 그에 반응하여 움직이더니 가리킨 곳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크레트쉬가 움직임을 읽고 도끼를 던진 것이었다.
"전사는 맨손이야말로 당당한 것! 그대 에르시하이나여! 전사로서 나와 대적함에 한겹 부끄럼 없게 싸워라!"
"그러면 너부터 그 전차에서 내리라고!"
허공을 격하며 휘돌아 날아온 도끼의 흑요석 조각이 예나의 칼을 강타했다. 예나는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칼을 양 손으로 잡고 돌 조각을 떨쳐냈다. 트럭만한 날카로운 바위가 깃털처럼 날아다니며 사방을 위협했다. 추진력이 없는 예나로선 피할 방도가 없었다.
"패스코드! 여기 잠든건 폐기물 밖에 없냐! 우주 전함이든 로봇이든 나와보란 말야!"
"하하하하!"
크레트쉬가 전차에서 뛰어내리며 예나를 향해 곧바로 날아왔다. 주먹을 뻗으며 몸을 허공에 내맡긴채 돌격해온다. 그냥 떨어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섬전으로 변했다.
"에이익!"
예나는 쇄도하는 주먹에 맞서 칼을 단단히 틀어쥐고 버텼지만 애초에 불리한 싸움이었다. 섬전으로 변한 노도 같은 크레트쉬의 주먹이 정면으로 칼에 부딪치자 버틸 수가 없었다.
"꺄아아악!"
손에서 칼을 놓친 예나는 그대로 땅을 향해 일직선으로 추락했다.
하늘에서 벌어지는 사단과, 도시 바깥에서 일어난 엄청난 재난에 도시는 순식간에 패닉에 빠졌다. 그러나 민간인들은 이리저리 숨고 도망을 쳐도 이곳은 매일 밥먹듯이 악령들이 쳐들어오려고 하는 군사도시였다. 군대 지휘 체계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살아 있어서 비상이 걸리자 군인들이 무장을 하고 달려 나와서 혼란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도시 방벽으로 지켜지고 있는 안쪽의 일일 뿐이었다.
라인은 무너진 성벽을 지나 달리다가 산사태가 쏟아지며 일어난 지진에 엎어졌다. 하지만 곧바로 일어나 다시 달렸다. 감히 신에 맞서는 사람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하늘에서 사람이 내려꽂힌 자리에 황금빛이 머물렀다. 그를 향해 푸른 태양이 날아간다. 라인은 수백미터나 떨어져 있음에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져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멈췄다. 주변이 대낮 같이 밝아지며 산사태가 일어나 쑥대밭이 된 언덕의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예나? 예나?!"
라인은 시력이 좋다. 애초에 포병장교는 처음 부임할때 관측장교로 무조건 시작하도록 되어 있고 유사시 관측반이 전멸했을 때 관측임무를 맡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라인은 예나의 얼굴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푸른 태양이 쇄도하며 지상에 다다렀다. 신의 돌격이 산중을 비추자 라인은 온몸으로 밀려드는 열기를 참지 못하고 구덩이에 몸을 던졌다.
크레트쉬는 자신의 돌격을 확신했다. 적의 방어는 무너졌고 대책은 없었으며 왕성한 힘이 주변을 불태웠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정해진 길을 정해진 속도로 일주한다.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그것에 휘말리면 어떤 것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흐윽. 흐윽."
볼썽 사납게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땅에 드러누운 예나는 얼굴이 빨개지며 울먹거렸다.
"이게 뭐야. 흐윽. 아빠. 아빠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아빠 보고 싶어. 흐윽. 아빠."
예나의 머리 위로 크레트쉬의 전차가 돌격했다. 태양이 지상 가까이 오자 모든 곳이 불타올랐다.
"아빠!"
흘러나오는 울음을 삼킨 예나는 돌격하는 크레트쉬를 똑바로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것만으로 뭔가 일어날리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틀렸다. 어딘가에서 예나의 칼이 날아와 크레트쉬에게 곧장 달려들었다.
"으윽! 무엇이냐!"
강렬한 예기에 찔린 크레트쉬의 돌격이 하늘 위로 튕겨 나가며 길게 빛이 흩뿌려졌다. 비명과 함께 흐르는 빛줄기는 선혈 같았다.
예나의 앞에 내려온 가느다란 칼은 예나의 응분에 호응하듯 떨었다. 하지만 정작 예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이거 혼자 움직이는 거였어?"
칼이 스스로 움직여 크레트쉬를 쫒았다. 크레트쉬는 재차 돌격하여 칼과 부딪쳤지만 이번에도 손해를 입은 것은 푸른 태양쪽이었다. 칼날이 깊숙히 표면을 가르고 지나가자 홍수처럼 빛이 쏟아져 나왔다.
예나는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입술을 비틀었다.
"엄마 진짜 바보!"
돌격을 멈추고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화한 크레트쉬는 가슴에 길게 난 검상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다가 지금과는 달리 야수 같은 표정을 지었다.
"숨긴 것이 있었구나. 그러나 나는 하늘을 일주하는 공평한 사자! 지상과 하늘의 흠결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저 질주하고 태울뿐!"
"뭐 이런 근육 바보가 다 있어?"
예나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짓고 칼로 시선을 돌렸다. 저 혼자 공중에 떠올라 있는 칼은 그것만으로 의도를 눈치 챈 것처럼 크레트쉬의 앞을 막았다.
"좋아. 엄마 한번 믿어봐야지. 기껏 엄마 아빠 찾았는데 이런데서 객사하기도 싫고, 패스코드!"
"어림없다!"
크레트쉬는 즉각 도끼를 던졌다. 한밤 중의 능선으로 던져진 도끼가 산자락을 파고들어가 터지며 거대한 구덩이를 파냈다. 하지만 예나의 칼이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졌다 나타난 순간 산이 그대로 터지며 푸른 방벽이 떠올랐다.
강력한 엔진음은 예나의 주위에 있는 바위까지 떨리게 만들었다.
"흥. 멍청이! 해삼! 말미잘! 꼴 좋다!"
"크으! 비겁한 술수구나! 정정당당히 겨뤄라!"
"정정당당? 웃기는 놈이네 이거."
예나는 그를 향해 혀를 내밀어 보인 후 재빨리 전함을 향해 도망갔다.
산을 뚫고 떠오른 것은 쇄기꼴 쇳덩어리였다. 이글거리는 불꽃을 꼬리에서 뿜으며 기지개를 편 맹수 위에 예나가 내려앉자 화를 내는 것처럼 푸른 방어막이 강해지며 선명히 빛났다.
같이 따라온 금속상자가 명령을 기다리는 것처럼 발광하자 예나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손가락을 크레트쉬를 향해 쳐들었다.
"너만 전차 타냐? 돌격 준비!"
크레트쉬는 칼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도끼를 내던졌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수였지만 전함이 덮쳐오는 도끼를 향해 무기를 사격하기 시작하자 궤도가 꺾여 하늘 위로 날아갔다. 예나는 신이 나서 깡총깡총 뛰었다.
"우와! 성능 죽이네! 돌격!"
배의 내부기관이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산만한 물체가 공중에서 움직이자 폭풍이 일었다. 쇳덩어리가 돌격해오는 기세에 크레트쉬도 하찮게 여기지 못하고 전차를 몰았다.
도끼가 칼과 맞부딪치며 봉쇄했다.
"태양이 하늘을 일주함은 막을 수 없는 진리니라! 나 여기서 새벽을 선포하노니!"
크레트쉬와 전차의 형상이 뭉그러지며 하나의 동그란 구슬로 형상화되었다. 새파랗게 타오르는 태양의 모습 그대로 태양의 신이 전함을 향해 돌격했다. 물러나는 것 따윈 처음부터 생각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예나도 그에 맞서 물러나지 않았다. 호승심으로 가득한 얼굴에 웃음을 가득 뛰운 예나는 전함의 속도를 계속 올리며 돌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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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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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와 잘보았습니다....... 고3때 ...연재 하신거같은데.. 어느덧 12년이 흘럿네염;;;;;;;;; -0-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