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전인지?....2, 3년 전인가요 한 신학생과의 통화에서 신앙과 관련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야베스의 기도’란 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과목의 담당 교수가 야베스의 기도를 적극 추천하면서 신학생이 꼭 읽어야 할 독서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 며칠이 지나서 한 분 목사님으로부터도 개탄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역시 야베스의 기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신학교 채플 시간에 야베스의 기도를 설교하고 학생에게 기도를 하게 하면서 설교자가 장의자에 앉아 있는 학생들에게 기도를 해 주는데 의자 이곳 저곳을 뛰어 넘나들면서 머리를 꾹꾹 누르며 기도를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베스의 기도를 곡해하고서 갖는 작태에 대하여 개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 교회가 기도를 얼마나 잘못 알고 있으며 또한 잘못 기도를 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 어이없는 행태에 “그러게 말이에요.”라는 말 밖에 하지를 못했었습니다. 그리고 종종 야베스의 기도를 들어서 기도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에서 곡해된 기도를 들을 수 있었습니만 무시하였지 야베스의 기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일에는 지나쳤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서야 야베스의 기도가 무엇인지를, 그래서 그 기도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래도 야베스의 기도란 책에 담겨져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는 우선 보아야겠다고 생각해서 기독교서점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한 장 한 장을 넘기면서 보았는데 야베스의 기도란 책은 그 내용이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행하고 있는 비성경적 이해에 의한 잘못된 기도의 전형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까 한국 교회 목회자와 신자들이 추구하는 기도에 딱 들어맞아서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이런 야베스의 기도를 기도의 모델로 삼고서 좇는 그런 기도를 한다고 하면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이 갖는 기도와는 전혀 거리가 먼 비신앙적인 기도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란 책은 WBT(Walk Thru the Bible Ministries)선교회의 설립자이자 총책임자인 브루스 윌킨스가 구약성경 역대상 4장의 유다 지파의 계보를 나열해가던 중 등장하는 야베스가 드린 기도에 관심을 갖고 이것을 모티브로 하여서 기도에 대한 하나의 지침서를 소개한다는 의도에서 쓰여졌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야베스` 라는 인물을 통해 그가 한 기도를 신자의 일상적 기도 생활에도 적용케 하려고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베스의 기도를 들어서 기도 생활의 실천적 삶을 이끌어 가고자 하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복에 복을 더해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복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려 복을 구하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요 야베스가 자기 지경을 넓혀 달라고 그렇게 기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존귀한 자로 여김을 받고 엄청난 복에 복을 더하는 큰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큰 환난과 근심에서 벗어났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야베스처럼 기도하여서 복에 복을 받고 지경을 넓혀 나갈 것과 세상에서 겪는 환난과 근심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채근하여 부추기는 것으로 쓰여졌습니다.
2.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바른 해석적 설명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은 한국 교회 목회자나 신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으면서 널리, 그리고 많이 읽혀져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한국 교회에 끼친 악영향은 참으로 큽니다. 왜냐하면 ‘야베스의 기도’를 왜곡하여서 사실은 잘못된 기도를 말해주고 있는데 한국 교회 목회자와 신자들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교회 생활이나 기도에 적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만큼 그만큼 야베스의 기도는 그 뜻이 왜곡되어 성도들에게 이해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로 나오는 성경구절은 역대상 4장9-10절 뿐인 단 두 구 절의 참으로 짧은 구절입니다.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그런데 이 짧은 두 구 절의 야베스의 기도를 가지고 이를 글 쓰거나 설교하는 사람은 마태복음 7장 7-8절의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두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와 같은 다른 기도에 관한 성경 구절과 연관해서 야베스의 기도의 의미를 해석하고 이를 설명하려 듭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하면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는 논리로 끌고 들어갑니다.
성경에는 기도에 관하여 많이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성도에게 기도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과연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이 성립이 될 수 있을런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성도의 기도는 그 기도를 하는 것만큼이나 참으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는 기도를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바른 기도가 요구되는 것이지요.
이는 이것이 강조되는 그만큼 사실은 기도를 잘못하고 있다는 것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곡해하고서 잘못하고 있는 기도는 기도를 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불순종에 있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기도를 바르게 하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도는 기도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 기도를 하는 믿음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도의 본질적 개념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관계적 개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이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며 기도가 무엇인지를 그 성격과 내용 면에서 알려주신 예수님의 기도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며 가르치신 기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구원과 이 속에 있지 않은 자들의 멸망을 위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부터 아들의 관계성으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신의 존재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자신이 맡은 구속 사역의 활동을 하실 때 아버지의 뜻을 따르며 아버지의 뜻대로의 이루어짐을 구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문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사도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그리고 자신들이 믿는 믿음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떤 관계론적 신앙에서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신앙고백하여 그의 이름을 이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기도란 예수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아들 된 관계를 말하며 아버지의 사랑을 입고 있는 것이듯이 성도의 기도는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참된 생명인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신의 존재를 항상 인식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모시고 그의 사랑을 입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믿음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도에게서 기도가 있다는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고 하는 사실을 자증(自證)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는 곧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 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기도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가진 관계성에서 가져지는 것이 아니면 이는 기도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도의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에서 가져지는 것이라고 하면 그 기도는 항상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되어진 것에 대한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며 이 은혜가 자신의 삶 안에서 믿음으로 실질적으로 발휘되어질 수 있기를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성도의 기도란 말입니다. 자신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이루어 가실 구원의 능력을 구하고 이를 의지하는 믿음에 있고자 하는 것이 아니면 기도의 응답이란 사실상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에 있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다른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의 응답이 있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기도를 하였는데 만일 응답을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기도의 응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 대하여 응답해 주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유대인이 구하는 기도나 이방인이 구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면서 몇 가지를 들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구할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하나님 나라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시작된 성취에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 것인지를 고민하여 생각하는 바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믿음의 의에 있어야 할 것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그 지도자가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 또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란 존재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의 약속의 자손으로 주신 메시야 언약 사상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으로 도도히 흘러가는 가운데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뜻했습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그 지도자가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자신들이 소망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하여서 자신들이 갖고 있는 심정의 간절함을 토해내듯이 하여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관계성에서 갖는 구속사라고 하는 특수한 이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메시야 의존 신앙의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반드시 성취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언약 사상을 좇아서 이를 사색하고 의존하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활동해 나가시는 구속 사역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성취의 때’에 두고 이를 항상 의식하여 순종으로 받들어 나가셨는데 여러 차례 기록되고 있는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 아들의 관계로 보냄을 받았기에 자신이 언제 십자가에 달리시는 일을 하실지 그 날과 시간까지 정확히 알고 계셨으며 그래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체포되어서 죽음을 당할 것과 또한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고해 주셨으며, 이를 ‘때가 왔다’는 표현으로 그 시기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고자 하신 죄인이 당할 저주의 진노를 짊어져 대신 담당케 하였으며 예수님은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졌으며 이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마지막 말씀으로 남기신 ‘다 이루었다’에서 알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계시해 주신 자기 백성에게 가지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이며 이를 예수님은 분명히 세상에 알게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응답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이제 야베스의 기도에 들어가서 그의 기도가 갖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야베스가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알게 해주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야베스가 갖는 기도는 그 자신 한 개인의 욕망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내용 안에서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어서 이를 확인케 하는 것이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그에 대한 구함 속에 있게 하는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야베스는 역대상 4장 9-10절의 단 두 구절에서만 그 이름이 언급이 되고 있기에 그에 대한 신상은 지극히 제한적으로 알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야베스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과 그는 형제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 형제들 가운데서 가장 존귀한 자였으며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을 때에 유난히 산고를 심하게 겪었기 때문에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는 뜻으로서 그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야베스가 하나님께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올렸으며, 하나님은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그 내용에 있어서 두 가지를 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어 자기에게 주어진 영토를 넓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의 손이 항상 자신과 함께 하여서 모든 불행과 고통이 되는 환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야베스가 왜 이러한 기도를 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을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야베스가 처한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야베스라는 인물은 역대상 4장 1-2절에서 유다의 자손들과 그 가족들의 족보가 언급되면서 나옵니다. 유다의 자손들은 다음과 같이 대대로 그 자손을 이어갔습니다. 베레스, 헤스론, 갈미, 훌, 소발의 다섯 사람의 이름과 소발의 아들 르아야와 르아야의 아들 야핫과 그리고 야핫의 아들인 아후매와 라핫입니다. 이들은 소라 사람의 족속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에게서 소라 지역에 사는 족속들이 퍼져 나간 것이죠. 이들 이름 중에서 베레스만 유다의 아들이었으며(대상 2:4) 나머지는 손자들이거나 그의 대대로 이어지는 자손들입니다. 유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베레스와 세라이며 이중에서 여기서는 베레스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대상 4장 3절에서 8절까지는 갈렙의 아내 에브라다에게서 나온 홀과 그의 자손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훌의 자손들은 베들레헴 성읍을 세웠는데 훌은 세 아들을 두었습니다. 에담과 브누엘과 에셀이며, 에담은 세 아들인 이스르엘과 이스마와 잇바스를 두고 헤슬레보니라는 딸도 두었습니다. 훌의 아들 중에서 브누엘은 그돌 성읍을 세웠으며, 에셀은 후사 성읍을 세웠습니다.
유다의 자손들 중에 한 사람인 헤스론의 아들 아스훌은 드고아 성읍을 세웠습니다. 아스훌은 드고아의 아비로서 역대상 2장 24절에서는 그를 헤스론의 유복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스론이 죽자 갈렙이 아버지의 아내였던 아비아와 동거하여 아스훌을 낳았는데 이 아스훌이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7km 지점에 있는 드고아 성읍을 세운 것입니다 아스훌에게는 헬라와 나아마 라고 하는 두 아내가 있었으며 이 중에서 나아마는 네 명의 아들인 아훗삼과 헤벨과 데드니와 하아하스다리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헬라는 세 아들을 낳았는데 세렛과 이소할과 에드난입니다.
그리고 고스의 자손인 아눕과 소베바와 하룸의 아들 아하헬 족속이 언급되고 있으나 이들이 유다의 자손들을 이루고 있는 가족들로서 유다의 족보에서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야베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야베스라는 이름은 역대상 2장 55절에서 성읍의 이름으로도 불려지고 있는데 이 야베스 성읍의 주인이 야베스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다른 성읍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읍을 세운 주인의 이름으로 명명한 것을 보아서 야베스가 야베스 성읍을 세운 주인이었지 않겠는가 하는 추측이 가능할 뿐입니다.
그런데 역대상 2장 50절에서부터 언급되고 있는 갈렙의 아들인 훌이 낳은 세 아들인 소발과 살마와 하벨과 함께 맏아들인 소발에게서 나온 자손들이 이루고 있는 족속을 말하고 있으면서 야베스의 성읍에 살고 있는 레갑 족속의 조상 함맛의 자손들로서 모두 겐 족속에 속한 디랏 족속과 시므앗 족속과 수갓 족속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만일 야베스가 야베스 성읍의 주인일 경우에는 소발의 자손들에 속하여 있는 자일 것입니다. 그리고 야베스가 고스와 그 아들들의 이름이 언급되면서 이어서 나오는 것을 보아서, 더욱이 앞에서는 어떤 사람의 아들들을 이야기 할 때는 몇 명의 아들들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고스가 낳은 아들들을 언급하여 기록하고 있을 때는 몇 명이라는 숫자를 말하는 것이 없이 바로 아들들의 이름이 말해지면서 그 아들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족속을 말하면서 “야베스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야베스가 고스의 아들들과 연관이 있거나 아니면 고스와 형제였거나 하는 것으로 추측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더 존귀한 자였다.”는 말로써 앞에 연결되고 있기에 그 가능성이 더욱 큽니다. 또한 야베스를 낳은 어미가 그를 낳을 때에 특별히 산고를 심하게 겪었기에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어 주었다고 말하고 있어서, 이런 그가 그 형제보다 더 존귀한 자가 되었다는 것(다른 형제에 비해서 산고를 더욱 심하게 겪고 낳았기에 특별한 자식으로 생각되어서 더욱 애지중지하고 사랑하였다는 뜻에서 존귀한 자였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제에 비해서 산고를 심하게 겪고 낳은 그가 다른 형제에 비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존귀한 자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을 말해주고 있기에 야베스가 고스의 아들들과 같은 형제이거나 또는 고스와 형제일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런 야베스가 기도를 하였는데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구했습니다. 우리는 야베스의 이 기도를 대하면서 그가 왜 이러한 기도를 하였는가 하는 사실에로 다가서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이끌어낼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야베스의 기도를 다루면서 왜 이처럼 유다의 자손들과 그 가족들의 족보를 끄집어 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야베스의 기도는 유다의 자손들과 그 가족들의 족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적 복과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는 방식을 통해서 장차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복을 주십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모형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십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의 원형, 곧 실체는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악한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게로 불러내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것인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가나안 땅에 세우실 이스라엘 왕국을 통해서 현시(顯示)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땅을 주실 것과 이 땅에서 큰 민족의 세계를 이룰 것과 하나님께서 이들의 주가 되어서 다스리실 것을 내용으로 하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언약에 의한 약속은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마침내 실현을 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을 모세의 인도를 받게 하는 것을 통해서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요단강을 두고서 앞에 있는 가나안을 바라보며 “이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면서 그들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이다. 내가 그 땅을 네게 보여주기는 하지만 네가 직접 그 땅에 들어가지는 못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가나안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워 자신이 맡았던 임무를 계속해서 수행하게 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였던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수 1:3-6)”고 굳게 약속하시는 말씀을 주십니다. 그에 따라서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입성하면서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해 가는 중에 아직은 서남쪽으로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점령해야 할 땅들이 있었고 서북쪽으로도 시돈과 그 발등과 같은 베니게의 도성들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가나안 전체의 땅을 분배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여호수아가 이제는 나이가 많아 노쇠하였으므로 자신이 죽고 난 뒤에 남을 이스라엘 자녀들이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되어 그 남은 땅을 정복하여서 차지할 것을 기대하면서 그것들까지도 포함시켜 가들의 기업의 땅으로 분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신실히 이루실 것을 바라보고 있는 믿음에 있는 것에서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한 것으로 보고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가나안의 전지역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이때 땅을 분배하는 방식은 제비를 뽑아 나누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방법은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서 세워져 있었던 원칙이었습니다.
그에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며 그 땅을 각 지파에게 분배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정복해 나가면서 각 지파에게 그 땅을 분배하게 되는데 유다 지파에 속한 갈렙에게는 헤브론 산지가 주어졌습니다. 이 지역은 사해 서부 전지역에서 지중해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입니다.
그런데 각 지파에게 이렇게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원칙대로 제비를 뽑아 분배를 하였는데 여호수아는 갈렙에게만은 그가 원하는 땅을 기업으로 분배해 주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이러한 결정은 갈렙에게만은 따로이 특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갈렙에게는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하는 것에 앞서서 먼저 그가 요구하는 땅을 줄 것이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갈렙에게 그렇게 약속한 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 머물러 있으면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에 앞서서 모세가 가데스바데아에서 각 지파에서 대표로 뽑은 열 두 명을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였을 때 이를 보고하는 열 명은 자신들이 탐지한 땅은 신장이 장대하고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이 살고 있어서 그들에 자신들을 비교하면 자신들은 메뚜기 같기에 도저히 이길 수 없으니 그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으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자신들이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서 이미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반드시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니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 것이며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말 것은 하나님이 계시니 그들은 이미 우리의 밥이나 다를 바 없다 라는 하나님의 언약에 견고히 서 있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 백성이 일어나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려 쳐죽이려 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이 둘을 지키면서 이스라엘의 믿음 없음을 크게 노를 발하여 책망하셨습니다. 이러한 광경에 서 있는 모세는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면서 그들의 용서와 사랑을 빌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번에도 이스라엘을 용서하겠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 있는 한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을 뿐만 아니라 애굽과 광야에서 하나님이 베푼 이적을 많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우습게 여겼으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주기로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며 오직 갈렙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 하나님에게 충성스럽게 행동하였으므로 그에게만은 그가 살피고 온 그 땅에 들어가 살 수 있게 할 것이며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이제 가나안을 정복하여 분배하는 시점에 이르러서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나아와 그때의 일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은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신 1:36)고 하였다는 것과 비록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에는 아낙 사람이라고 하는 거인족이 살고 있고 또 그들이 사는 성이 참으로 크고 견고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모두 몰아낼 것이므로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를 말하므로 여호수아는 갈렙을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가 차지할 몫으로 주었으며 그런 까닭에 헤브론은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몫으로 지정되어 대대로 그 자손들이 차지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대로 갈렙이 기업으로 분배받아 차지한 땅은 헤브론이며, 아직 이 땅은 완전히 정복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며 크고 강한 아낙 자손이 버티고서 맞서 있는 상태였습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나오는 당시에도 유다 지파에서 갈렙으로부터 지금 야베스에 이르는 자손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을 정복하고 각 지파에게 분배된 땅을 차지해 나가는 시기의 시대적 상황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야베스의 기도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하여 그 땅을 정복하고 그래서 각 지파가 자기들에게 분배된 땅을 저마다 차지하는 기간은 단시일에 되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의 원주민들과의 전쟁을 통해서 그들을 몰아내어야 했기 때문에 오랜 기간을 거쳐서 되어졌습니다. 먼저는 중부지역의 가나안을 정복하였으며 이어서 남북지역의 가나안을 정복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의 정복에서도 각 지역을 부분적으로는 정복을 하였지만 완전한 정복을 하여 토지 분배를 실질적으로 완전히 마치기까지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렇게 아직은 가나안 땅을 각 지파가 자기들에게 정해진 분배대로 차지해 가는 과정에 있는 시대적 상황의 상태에 있는 것에서 야베스는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어 자기에게 주어진 영토를 넓혀 달라고 구하였으며, 또한 주님의 손이 항상 자신과 함께 하여서 모든 불행과 고통이 되는 환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 달라고 구하였습니다.
유다 지파에 속한 갈렙이 보인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알 수 있듯이 유다 지파의 자손들은, 그리고 야베스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따르는 믿음에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땅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유다 지파의 한 사람인 야베스는 아직까지도 정복되지 않고 남아 있는 땅이요 크고 강한 아낙 자손이 버티고 있는 헤브론 땅을, 그러나 갈렙에게 이미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분배되어진 헤브론 땅을 온전히 차지하게 해줄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야베스의 기도’의 실체입니다.
그러니까 야베스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내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한 것은 그가 속한 지파에게 분배되어질 영토를 두고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내 지경을 넓혀 달라고 구한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배를 받을 기업(땅)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 개인으로 존재하며 그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서의 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지파에게 돌아갈 분배된 기업으로서의 영토를 구하는 것이었으며 이 분배는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는 가운데서 차지할 것으로 아직은 완전히 마쳐진 상태가 아닌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아직도 정복해야 할 땅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자기 지파에게 분배되어진 땅이 온전히 주어질 수 있기를 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베스가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라고 말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고 이를 순종하여 가는 과정 속에 나타난 것으로서 유다 지파에게 분배되어진 기업의 땅이나 아직 온전히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땅에 대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갈렙이 그랬던 것처럼 그 자신도 의지하여 바라보고 있는 믿음에 있는 것으로서 그 믿음이 기도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이지 야베스의 이 기도는 결코 오늘날에 신자들이 잘못 구하고 있는 땅을 넓혀 많이 차지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교회들이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한 구실로 터를 넓혀 달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종종 교회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한 욕심에서 교우들이 밟고 다니며 소원하는 그 모든 땅을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야베스의 기도는 예배당을 크게 지을 수 있도록 땅을 넓혀 많이 달라고 하는 것이나 기타 이런 저런 내용의 복을 구하는 것으로 악하게 이용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야베스는 오늘날의 신자들이 갖는 기도에서 흔히 보게 되는 기도인 결코 보다 많은 개인의 부동산 소유를 위해서나 재산 증식을 위해서나 자신이 섬기는 예배당 확장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야베스가 주님께서 복에 복을 더하셔서 지경을 넓혀 달라고 구하면서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를 드린 것은 헤브론의 전지역을 온전히 차지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있게 되는 아낙 자손들과의 전쟁에서 겪게 되는 환난으로 말미암은 모든 불행과 고통의 해로부터 하나님의 돌보심에 의한 보호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구함은 단지 전쟁의 해로부터의 보호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은 땅에 있는 자신들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데 따르는 평화의 세계를 소망으로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야베스는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통치의 세계인 하나님의 왕국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야베스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야베스 당대에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야베스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그 즉시 응답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베스가 구하는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데 있는 것으로 실제 그의 기도의 응답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약속은 다윗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 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왕국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에서 발현되어지는 하나님의 의와 평강을 다윗의 아들 솔로몬 시대에서 그가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던 것에서 알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의 나라입니다. 가나안 땅에 세워진 이스라엘 왕국은 이를 온 세상에 나타내 알게 해주시는 것으로서의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이 보여준 하나님의 왕국은 장차 다가올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를 모형적이요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성격을 띱니다. 하나님의 왕국의 실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죄악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내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물밀 듯이 들어가게 하여 그 땅을 차지하게 하는 일로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를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까지 공격을 받아왔고 공격하는 힘있는 자들이 차지하는 특성의 방식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준비된 약속의 땅의 실체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워 보여준 하나님의 왕국의 원형인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는 믿음으로 가나안에서 세운 하나님의 왕국에서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자인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에게로 힘있게 전진하여 들어가 차지하여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영원히 받게 되는데 시편 기자가 23편 4절에서 말한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깊은 골짜기를 지난다고 할지라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갈 수 있는 것은 주께서 함께 계시다는 사실로 인하여 모든 환난에서 벗어나 의와 평강이 그에게 지배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에서 입증이 됩니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기도를 아는 성도라면 그의 기도를 탐심에 의하여 정욕적으로 이용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론적 관계 속에서 견고히 믿음에 서나가는 은혜를 주님께 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