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경(打京)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 효 순
깜깜한 차창 밖으로 멀리 띄엄띄엄 불빛이 보였다 사라진다. 실내등도 안 켜고 어둠 속을 무작정 달리는 버스 안, 이따금 상대편 차선에서 달려오는 차의 불빛에 희미하게 보이는 ‘궁중오리 들oo 전주oo점’이라고 박힌 좌석등받이가 호남선 고속버스임을 알려준다. 신입사원 연수를 마치고 내일이면 회사에 첫 출근을 하는 둘째아들의 거처를 회사 주변으로 옮겨주고 심야버스에 올라타는 엄마 손에 들려 준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자니 갑자기 목이 메었다. 이별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잘 내려가시라는 아들의 축축해진 목소리에 너무나 홀쭉해진 얼굴이 겹쳐지는 까닭이다.
대학을 서울로 가면서부터 집을 떠났던 아들이다. 막내라서 그런지 유난히 집에만 내려오면 서울에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곤 했다. 반겨줄 사람 없이 텅 빈 원룸을 혼자 들어갈 때 느끼는 착잡한 기분을 엄마는 모를 거라고 큰 소리를 친다. 그사이 군대까지 다녀왔으나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첫발을 내딛는 지금까지도 집을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 태어나서 한 번도 집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는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랴?
집 떠나 홀로서기에 애를 못 삭인 것은 큰아들도 마찬가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못가고 재수를 해야 했던 큰애는 오히려 더 심했다. 눈 내리는 겨울에 이불 보따리를 메고 고속버스에 오르는 아들의 축 늘어진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입시학원과 기숙사를 오가며 불안과 긴장 속에 힘들게 재수생활을 하는 아들을 멀리서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얼마 뒤에 큰아들로부터 장문의 메일을 받았다. 어느 날 저녁, 우연히 기숙사 옥상에 올라가게 되었다고 했다. 가까이에 한강이 흐르고 멀리 수많은 고층빌딩과 아파트 불빛, 네온사인, 오가는 차량들의 불빛으로 휘황찬란한 서울의 야경을 보니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졌다고 했다. 그렇게 넓은 서울 하늘아래 누구에게도 말을 걸 사람이 없다 생각하니 문득 어렸을 적 엄마가 들려준 ‘타경’이야기가 생각났다고 했다. 그날 이후 울적한 날에는 옥상에 올라가 서울의 야경을 보면서 ‘타경’을 가슴에 새기면서 열심히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타경’을 잊지 않고 있다니……. 두 아들이 중학생이었을 때 나는 교육청 장학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부교육감님이 새로 부임하셨는데 그분의 호가 바로 ‘타경(打京)’이었다. ‘서울을 깨뜨리다’라는 뜻이라 했다. 전주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교육부에 발령을 받았는데, 대부분 소위 스카이대 출신이고 지방대 출신은 한두 명이어서 너무 외롭고 힘들었노라고 했다. 심정적으로 위축됨은 물론이고 학연과 지연으로 눈에 보이지 않은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아 자신의 호를 ‘타경’이라 짓고, 어려울 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노력하여 극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당시 나에게 자못 충격이었던 그 이야기를 두 아들에게 들려주면서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말고 넓은 세상으로 나가라’고 했던 모양이다. 정작 나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재수를 하던 큰애가 기억해내고 마음을 잡아 힘든 시간들을 이겨내고 있다니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서울공화국’이라는 말이 있다.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에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살고 있으니 과히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자연히 서울을 뺀 나머지를 지방 또는 시골이라고 부르면서 절대적 우월감으로 지방을 상대적으로 얕잡아보는 세태다. 우리 역시 그러한 세태를 별 거부반응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면 나만의 편견일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부분에서 지방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참아야하는 불편함을 감내하기에는 좌절감과 상처가 깊다.
지방대를 졸업하면 취업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불편한 진실이다. 솔직히 자녀를 서울로 진학시키려면 하나에서 열까지 고스란히 부모의 부담이 된다. 먼저 거처가 문제다. 하숙을 하거나 원룸을 얻는데 경제적 부담이 제일 크고, 식사 문제 역시 만만치 않다. 아이들은 하루 세끼를 꼬박 사먹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딸들도 직접 해먹기도 하지만 아예 아침은 굶고 커피 한 잔으로, 저녁은 컵라면이나 빵조각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다. 영양 섭취가 제대로 안되어 체력과 건강이 걱정된다. 혼자 지내는 외로움에서 오는 심리적 불안정과 간섭할 사람이 없는 자유분방함에서 오는 무절제한 생활습관이 염려되지만 부모로서는 다 큰 자녀이니 알아서 잘하겠지 하는 불안한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서울에 사는 부모들보다 모든 점에서 부담이 크다.
오늘날은 스마트 폰 하나만 가지고도 안방에 앉아서 지구촌 곳곳 통하지 않는 곳이 없고,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된지 오래이다. 초음파 비행기가 개발되면 뉴욕에서 아침 먹고 파리에서 영화 보며 밤에는 서울에서 잠잘 수 있는 세상이 곧 다가온다고 한다. 작년인가 네덜란드의 한 벤처회사가 발표한 화성 이주계획에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몰렸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2억 원짜리 5분 우주여행 예약이 삽시간에 동이 났다는 기사도 보았다.
그야말로 우주시대가 열리고 있는 마당에 서울과 지방을 따져가며 애면글면하는 나 자신이 초라하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자식들은 전 세계를 누비며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더 이상 타경이라는 말도 무색해진다. 두 아들이 깨뜨리고 뛰어 넘어야할 대상은 서울이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과 나약함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타경(打京)이 아니라 타아(打我)인 셈이다.
그래도 당장 눈앞에는 냉혹한 현실이 기다린다. 이번에 둘째의 취업과정을 지켜보면서 지치고 힘든 아들의 손 한 번 잡아주면서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수 없고, 따뜻한 밥 한 끼를 해먹일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아직도 지방에서 올라간 수많은 젊은이들이 노량진 학원가나 좁은 원룸 구석에서 청춘을 유보한 채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쩐지 그들에게 미안하고, 그러한 자식들을 멀리서 바라봐야하는 지방에 사는 부모들에게 한없는 연민의 정이 생긴다.
어느새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씁쓸한 마음만큼이나 쓰디쓰다. 창밖은 여전히 어둡고, 차안은 마치 아무도 타지 않은 듯 무거운 정적만 흐른다. 요란한 것은 엔진소리뿐이다. 아직도 전주까지는 한참을 달려야 한다. 멀고 먼 서울과 전주 사이이다.
(2014. 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