얕은 잠을 자고 깨어나서 인지 온몸이 뻐근하다. 어제 입었던 티셔츠를 다시 집어든다. 땀에 절은 상태로 마르지 않은 것을 입자 겨드랑이가 따갑다. 욕실에 수북히 쌓여진 빨래가 눈에 들어오지만 귀찮다. 생활의 적은 무기력이다. 소설 한 편 써보리라 했던 새벽녘의 마음까지도 어느새 흔들리고 있다.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책들과 연체된 고지서가 보인다. 담배꽁초가 수북히 담겨 있는 우유팩에서 시큼한 냄새가 난다. 라이터를 켜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들여 마신다. 깔깔한 입안에 머물다, 곧게 뻗어나간 담배 연기는 이제 나선형으로 돌아 점차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물을 마신다. 뱃속은 요동친다. 내장기관들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바지를 입었다. 나는 현관으로 걸어간다. 발을 옮길수록 마른 먼지들이 공기 중으로 날아 오른다.
방문을 열고 나오자 열기가 느껴진다. 신발장에 붙어 있던 모기는 힘겨운 날개 짓을 하다, 다시 그늘진 벽에 내려앉는다. 모기는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다. 새벽 내내 시달림을 당한 나는 복수심에 불타오른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바닥으로 그것을 내려친다. 그러자 모기의 몸이 압축되면서 붉은 핏방울이 튀어나왔다. 나는 모기에게 헌혈을 하는데 인색하다. 모기가 피만 빨아간다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기가 문 자리는 붉게 부어오르고 가렵다. 지하 방에 살면서 늦은 봄부터 만날 수 있는 모기는 이제 지겹다. 새로 들여다 놓은 테이프 값을 오늘은 꼭 지불해야 한다. 가게문을 열기 전에 은행에 들러야 한다. 육교를 건너 그곳에 가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곧 귀찮아진다. 은행에 가서 오늘도 돈을 입금시키지 않으면, 오후쯤 거래처에서 걸려오는 영업사원의 독촉 전화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생의 지리멸렬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초복을 앞두는 찌는 듯한 더위에, 나는 다만 시원한 바닷가에 가고 싶을 뿐이다. 이태 전 10월에 가본 이후로 나는 바다에 가보지 못했다.
나는 새벽 두시 부산 행 기차에 올랐다. 휴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기차 안은 듬성듬성 했다. 내 앞자리는 비었다. 창 밖을 내다보았다. 플랫폼을 비추는 형광등의 불빛 사이로,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유리에 비쳐졌다. 홍익회 판매원이 수레를 끌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에게서 맥주 한 캔을 샀다.
흐려진 하늘과 폭풍이 몰아치는 바닷가의 아침이 떠오른다. 그것은 고흐가 자살하기 직전에 그렸다는 바다의 모습과 흡사해 보였다. 바다는 금방이라도 나를 집어 삼켜 버릴 듯, 성난 몸집이었다. 나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참아왔다. 그 모든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되어 주지 않음을 알았다. 내 안에 중심점을 두고 그려댔던, 수많은 달팽이집의 굴레를 저 바다에 던져 버리고 싶었다. 나를 짓누르는 삶과 절망의 분노로 나는 모래밭에 주저앉았다. 소주를 삼키다 사래에 걸려 기침이 나왔다. 목구멍으로 위액이 넘어오려 하는 입안은 썼다. 하염없이 부서지는 파도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표류하는 돛단배였던 나는 그녀가 정박할 수 있는 섬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혜인을 잡을 수 없었다.
반납기에서 비디오테이프를 꺼냈다. 내가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설 때였다. 영화 포스터를 붙인 유리문 너머로 혜인의 모습이 비쳐졌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색 사파리를 입은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그녀가 걸어오면서 아이보리 비누 향기가 났다. 가게로 들어서는 혜인에게서 서늘함이 느껴졌다. 허리까지 오는 그녀의 긴 생 머리는 찰랑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은 전처럼 윤기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옆구리에 테이프들을 끼고, 유리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자 그녀가 안쪽에서 문을 당겨주었다. 나는 테이프들을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혜인은 뭉그적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 유학 가요. 연구 논문으로, 학교에서 추천을 받았거든요.”
“어디로?”
“좀 멀어요. 독일이에요. 뒤셀도르프”
“혼자…….”
“아니요, 결혼 살 사람이랑 같이 가요.”
나는 호주머니를 더듬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 갑에서 담배 개비를 집었다. 불을 붙이고 그것을 빨아올렸다. 나는 담배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지켜봤다. 그것을 보며 애써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내가 답답했는지 혜인은 영화 포스터를 붙인 유리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하얀 얼굴 위로 빛의 파편이 쏟아졌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를 허망하게 바라보다, 가게를 나갔다.
그 날 나는 가게문을 일찍 닫았다. 날이 꾸물거렸다. 옷깃 속으로 파고드는 추위를 느꼈다.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나는 우산이 없었다. 온몸이 비에 젖어들었다.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소주병을 입가에 기울이며, 나는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 침대에 스러졌다. 눈가가 떨려왔다. 멀거니 거미줄이 쳐 있는 천장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슴이 죄어와서 나는 밖으로 나왔다. 새벽 거리는 스산하고 적막했다. 내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동네 개들은 찢어댔다. 나는 언덕길을 내려와 택시를 타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내 몸이 비틀거렸다.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한산했다.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구내매점만 불을 밝혔다. 불콰하게 술에 취한 남자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의자에 주저앉았다. 대합실의 텔레비전은 꺼져 있었다. 나는 고약스런 냄새를 풍기는 남자의 뒷자리에 앉았다. 두 세 명의 사람들이 바퀴가 달린 가방을 끌고, 매표소로 가고 있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행선지와 열차 시간표가 보였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졌다. 답답하고 초조한 마음에 어딜 가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딱히 가고 싶은 곳은 없었다.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가던, 하얀 원피스를 입고 가게로 들어서던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나는 전화를 찾았다. 그러다 에스컬레이터로 오르기 전, 역사 앞 광장이 떠올랐다. 그곳에 공중전화 박스가 있었다. 나는 황급히 에스컬레이터를 뛰어내려갔다.
검지가 떨려 왔다. 나는 전화번호를 잘 못 눌렀을까 싶어서 재발신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그녀의 집 전화번호를 천천히 눌렀다. 신호음이 가는 내내 나는 술을 사올 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수화기 저편에서 잠에 깬 혜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슴이 저려왔다. 이쪽에서 아무 말을 하고 있지 않자, 그녀는 또 한번 여보세요 한다. 나는 수화기를 떨어뜨렸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수화기는 전화선에 매달려 밑으로 늘어졌다. 혜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다. 그녀는 나인 것을 알았던 것이다.
한참을 공중전화 박스에 앉아 있었다. 나는 가게에서 이따금 마음이 답답할 때면, 곧잘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녀의 하얀 원피스 자락이 나풀거리며, 가게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중경삼림 있어요? 했다. 호출 번호가 223이던 금성무가 생각났다. 혜인의 생일은 12월 23일, 금성무처럼 그 날짜가 찍힌 파인애플 통조림을 수없이 먹어야 할 것만 같다. 내가 생각에 잠겨 먼 곳을 응시할 때마다, 그녀는 당신은 세상의 모든 짐을, 지고 있는 사람 같아요 라는 말을 자주 했다. 혜인의 입가가 생각났다. 립스틱을 칠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입술을 붉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하얗고 고른 치열이 보였다. 나는 다시 혜인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가 힘겨워질 터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담벼락에 담쟁이 넝쿨이 푸른 줄기를 뻗어가고 있다. 나는 골목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밑을 내려다보자, 계단과 계단 사이의 간격이 아찔하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빈속에 담배를 피워대서 그런가 싶어졌다. 목구멍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낀다. 담쟁이 넝쿨에 작은 녹색 꽃이 피어 있다. 매일 이 계단을 오르내리면서도 꽃은 처음이다. 나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재건축을 앞두고 있는 미도 아파트가 보인다. 어디선가 여자의 가는 목소리가 들린다. ‘햇볕 때문이었어…….’그 떨림이 증폭되어, 귓가에 맴돈다. 이상하다. 아파트 주민들은 벌써 봄에 이사를 나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기 저기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없다. 아파트 주변, 소음을 막기 위해 새워진 철판이 보인다. 며칠 안으로 아파트는 무너져 내릴 것이다. 입구에 다다르니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간밤에 잠을 설쳐 헛소리를 들은 것 같다. 선풍기의 모터가 과열로 고장이 났기 때문이다. 열대야의 무더위 속에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에 간신히 잠을 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달려드는 모기떼에 뒤척였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 서 있었더니 현기증이 난다. 땀에 전 옷가지가 자꾸 몸에 달라붙는다.
나는 물이 오른 푸른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 이마에 맺힌 땀을 셔츠로 훔쳤다. 플라타너스의 싱그러운 잎사귀들을 본다. 가게 카운터에 읽으려고 놓아둔 책이 생각났다. 플라타너스 꽃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아직 읽어보진 못했다. 아무리 살펴봐도 크고 넓은 잎사귀들만 보였다. 꽃은 없다. 갑자기 식물도감이 읽고 싶다. 아니 그녀가 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녀는 도시환경과 인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졸업 논문을 쓰고 있었다. 혜인과 나는 늦은 점심을 함께 했다. 소화도 시킬 겸, 우리는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나는 그녀의 하얀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 갑자기 그녀가 걸음을 멈추더니, 손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그리고는 플라타너스를 향해 연신 플래쉬를 터뜨렸다. 나는 의아해서, 그거 왜 찍어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플라타너스는 공기 정화 능력이, 다른 나무보다 뛰어나요, 대기 오염에 대한 저항성이, 강하기도 하구요, 이번 연구의 초점이, 거기에 있거든요.’그녀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려볼 뿐이었다.
혜인은 로렐라이로 이어지는 라인강가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민 소매 원피스를 입고, 가죽 샌들을 신었다. 쏟아지는 햇살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반짝인다. 강을 따라 푸르고 울창한 플라타너스가 심어져 있다. 뷰파인더로 그것에 초점을 맞추는 그녀를 그려본다. 아밀리에와의 불행한 사랑을 한 하이네가, 내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녀는 하이네의 사랑을 뿌리치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와 나의 차이는, 내가 혜인을 떠나왔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자신이 없었던 나, 그런 걸 생각하면 허탈하다. 쓴웃음이 나온다.
도로에는 신호대기에 차들이 서있다. 가끔 손님으로 오던 이씨는 차 한 대 팔아줄 생각이 없느냐 물었다. 나는 걸으면 운동도 되고 좋아서라는 변명으로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몇 번인가, 운전 면허증을 따기 위해 시간을 낸 적이 있었다. 사당역 근처 자동차 학원에 다녔다. 필기시험은 가볍게 붙을 수 있었지만, 기능시험은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차는 앞으로 몇 미터 못 가서 계속 시동이 꺼졌다. 학원 강사는 불거진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답답하다는 듯, 그는 내게 남자치곤 참, 운동 신경이 없으시군요 라고 말했다.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운전기사와 차를 같이 사면 될 것이 아니냐며 스스로를 위로해 보기도 했다. 예전부터 나는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학교에 다닐 때에도 그랬다. 체육시간이면 먹을 걸 사들고 가서 주번에게 찔러주었다. 나는 빈 교실을 지키며 소설책을 뒤적거렸다. 차를 갖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별 생각이 없다. 나는 바지 지퍼를 만져본다. 다행히 지퍼는 잘 채워져 있다.
파란 불이 켜졌다. 햇빛은 거의 수직으로, 머리 위에 쏟아져 내리고 있다. 모자도 눌러쓰지 않은 맨 머리가 뜨거워진다. 코에서 뜨거운 김이 나온다.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시장 입구로 들어섰다. 가게마다 파라솔을 쳤다. 그것이 겹쳐지면서 그늘을 만들었다. 물건을 진열하고, 상자들을 옮기는 일손들이 분주하다. 리어카에 묶어놓았던 굵은 고무줄이 풀어졌다. 덮어놓았던 천이 벗겨졌다. 감자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저씨는 등을 구부리며, 바닥에 떨어진 감자들을 줍기 시작했다. 나는 내 앞에 떨어진 서너 개의 감자를 집었다.
생선이 있는 스트로폼에는 얼음이 담겨있다. 그 앞에 이르자 코끝으로 알싸한 비린내가 맡아진다. 생선가게 아줌마는 도마에 꽁치를 놓는다. 꽁치의 배가 갈라지고, 그녀의 투박한 칼은 내장을 긁어냈다. 내장은 도마 밑에 놓인 통 속으로 미끄러져 떨어진다. 아줌마는 만족스러운 듯한 얼굴을 하며, 허리에 둘러찬 앞치마에 손을 씻는다. 매일 보는 풍경이었건만 헛구역질이 났다.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김밥 집에 들러 콩국수라도 한 그릇 사먹으려던 생각을 걷어낸다. 건어물 가게에는 파리가 날아다닌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시장을 빠져나왔다. 낮은 그늘 속을 걷다 밖으로 나오니 눈이 부셨다.
양말이 축축하다. 발바닥이 후끈거린다. 뜨거운 아스팔트로 햇빛이 반사된다. 그 사이, 여자의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린다. 작열하는 태양 속으로 누군가가 내게 다가오는 것 같다. 갑자기 빠른 비트의 댄스 음악이 점점 크게 들려온다. 다리가 갑자기 뻣뻣해진다. 정신이 몽롱해서,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그 짤막하고 요란스러운 소리에 여자의 목소리는 묻혀진다. 환상 속에 아직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다 무너지고 있어도……. 중국집 배달원의 오토바이가 내 옆을 빠르게 지나간다. 기름 냄새가 맡아진다. 진정되었던 속이 다시 울렁거린다.
귀를 찌를 듯한 음악 소리도 사라진다. 햇빛에 얼굴이 그을린 아이들이, 우르르 아름 슈퍼에서 나왔다. 아이들은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가게 앞에서 한참 떠들어댔다. 쮸쮸바를 빨고 있던 여자 애는, 놀이터로 뛰어간다. 아이들은 찌는 듯한 더위도 잊은 것 같다. 나의 눈도 그 아이를 따라간다. 갈래를 지어 머리를 곱게 딴, 여자 애는 이제 그네를 탄다. 힘껏 발돋움을 해서 높이까지 올라갔다, 내려간다.
중탕기에서 뜨거운 김이 피어오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김씨 아저씨의 이마에 심줄이 돋우어진다. 아저씨는 지금 오리를 손질하고 있다. 그가 움켜잡은 오리의 목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김씨 아저씨는 피로 흥건히 젖은 손을 걸레로 씻는다. 그는 다시 깃털을 뽑는데 열중한다. 깃털이 날리는지 아저씨는 켁켁거린다. 그는 바닥에 깔아놓은 신문지에 침을 뱉는다.
오복 건강원은 유리창에 며칠 전부터 '국내산 자라중탕 팩으로 만들어드립니다' 라는 종이를 붙었다. 오늘은 큰 대야를 들여놓았다. 자라 몇 마리가 물갈퀴로 헤엄친다. 하지만 나머지는 물 속에 가라앉아 있다. 가만히 그걸 들여 다 보니 자라들의 몸놀림이 둔하다. 물 속에는 그것들의 배설물이 떠있다. 내 생각에 자라들은 중국산 같다. 어제 저녁 엄지네 분식 아저씨와 내기장기를 두고 있을 때였다. 그렇지 않아도 엄지 아저씨의 전략에 밀리고 있는 판이었다. 삼 천 원 째 돈을 날리고 있었다. 마(馬)가 떼어졌다. 이어 나의 포(包)가 엄지 아저씨에게 잡혔다. 옆에서 훈수를 두던 김씨 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자라탕 끓이러 안 가느냐고 했더니, 그는 입을 해죽거렸다. 주문이 있긴 하지만 급하지 않다는 거였다. 그의 입가에 있던 굵은 팔자 주름은 밉상이었다.
틈새가 뻑뻑한지 셔터는 잘 올라가지 않는다. 나는 억지로 그것을 끌어올린다. 쇠가 부딪치면서 나는 마찰음에 소름이 끼친다. 손이 시커매졌다. 대충 손을 털고, 나는 가게로 들어갔다. 카운터 앞에 앉았다. 리모콘을 찾았다. 가스가 떨어졌는지 에어컨에선 더운 바람이 나온다. 벽 쪽에 장을 짜서 꽂아놓은, 비디오 테이프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을 보자 마음이 답답해진다. 리모콘으로 에어컨을 다시 껐다. 그리고 발로 살짝 선풍기 버튼을 눌렀다. 낡은 선풍기가 돌아가지만 더위를 식혀주지는 못한다. 가만히 앉아 있자니, 등허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느껴진다. 속옷을 축축하다. 카운터 책상에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영화 포스터와 비디오 테이프들로 어지럽다.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나는 포스터들을 대충 말아, 한쪽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펼쳐져 있는 플라타너스 책을 접어, 서랍 속에 처박는다. 전자동 기계에 비디오 테이프를 넣는다. 그것은 빠르게 되감기고 있다.
낡은 선풍기는 덜덜거리며 날개를 돌린다. 집에 있던 것처럼 메케한 연기가 나올까 싶었다. 흐려진 눈으로 선풍기가 돌아가는 것을 본다. 자꾸 눈이 감긴다. 눈을 뜨기가 힘겹다. 카운터 책상으로 고개가 숙여진다.
비가 그친 바닷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끔씩 차들이 지나갔다. 젖은 모래밭에 앉아있으려니, 몸이 떨려왔다. 술기운이 깨면서 추웠다. 나는 모래밭에 스러졌다. 검은 하늘에 총총히 박혀 있는 별들을 보았다. 때때로 검푸른 잔물결이 길게 밀려와서, 구두를 적셨다. 하루종일 가게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은 무료하다. 다른 일을 시작 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쪽까지 손길이 닿지 않았다. 글을 쓰고 싶지만, 막연했다. 당장 밀려있는 월세며 생활비가 급급할 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나는 낙서를 했다. 달팽이집을 그렸다. 그것은 안으로 자꾸만 파고들어 제 살을 깎고 있었다. 나는 손님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계속 타원을 그렸다. 무얼 그리세요? 아이보리 비누향기가 맡아졌다. 나는 놀라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들고 있던 식물학 서적을 카운터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찐 호박의 달짝지근함과 약제 냄새가 섞여 있다. 나는 눈을 뜬다. 김씨 아저씨가 문을 열고 힐끔 쳐다본다.
"정씨, 자네 점심 먹을 건가? 김밥 집에 시키게."
나는 마른 입술에 침을 축였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저씨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아저씨가 운동화를 끌며, 부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온다. 그의 눈은 심상찮게 나를 훑는다. 그러더니 그는 헛기침을 연거푸 했다.
"자네 어디 아픈가? 얼굴이 허옇게 질렸네. 젊은 사람이……."
"더위 먹었을 땐 자라탕이야. 한 번 먹어봐.”
“아니에요. 됐습니다.”
나는 사양하고 싶었다. 대야 안에서 맥없이 가라앉아 있는 자라를 떠올린다.
햇빛은 문을 나서는 아저씨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것은 조금 떨렸다. 그가 다리를 조금 저는 탓이었다. 기타 케이스를 어깨에 맨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의 검은 색 가죽 부츠는 그림자를 조금 밟았다. 남자가 들어오자 쉰내가 났다.
"뭐 죽이는 거, 없나요?"
"어떤 걸 찾으시는지……."
남자는 답답하다는 듯이 둘러맸던 기타 케이스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남자는 비디오 테이프들이 꽂혀진 선반으로 갔다. 남자의 매서운 눈이 나와 마주친다.
"뭐라고 할까, 아트 있자나요. 아트……."
"예술 영화는 왼쪽 선반에."
남자의 노랗게 탈색한 꽁지머리가 바쁘게 움직인다. 나는 미납된 회원들을 체크했다. 일일이 연체료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몇 주가 지났는데도 테이프를 반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은 전화를 돌려야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나는 종이에 전화번호를 적어 넣는다. 남자의 부츠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런 거 말고, 아트를 달라니깐."
"어떤 걸 찾으시는 데요?"
"내가 꼭 말을 해야 해요? '사정은 무제'하고 '금단의 사과' 줘요."
"아……. 기다리세요."
남자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코밑수염을 만지작거린다. 나는 웃음이 새어 나올까봐, 어금니를 꽉 물었다. 나는 남자가 프랑스 영화나 제 3국의 매니아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고작 찾는 영화가 에로물이라니 기막히다. 선반에서 테이프를 찾았지만, 금방 눈에 띠지 않는다. 남자가 시간이 없다며 소리친다. 나는 남자가 찾는 비디오 테이프를 집는다. 카운터로 들어서자, 남자는 테이프를 검은 봉지에 넣어달라고 한다. 가죽부츠의 코가 문을 향한다. 남자의 가죽바지에 감싸진 엉덩이가 실룩거린다.
남자는 밖으로 나간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햇빛에 오래 서 있었을 때의 몽롱함이 느껴진다. 다리가 풀려져 나는 의자에 주저앉는다. 배가 출렁거린다. 나는 티셔츠를 걷어올렸다. 배를 쓰다듬자 손끝으로 미동이 느껴진다. 나는 여태 밥을 먹지 않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전자동 기계에서 테이프를 빼든다. 되감긴 테이프의 각을 찾았다. 카운터 책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숙여 바닥을 살폈다. 발 밑에 각이 떨어져 있다. 나는 그걸 주었다. 갑자기 내 손에 이끌려 제자리를 찾는 비디오 테이프가 여느 날과 다르게 보인다. 나는 어디로 담겨져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해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로 버튼을 눌러서 선풍기를 끈다. 나는 바지 뒤쪽의 주머니를 더듬어, 지갑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전화기 옆에 미납회원의 전화번호를 적어놓은 종이를 살며시 놓았다. 요새 인기가 좋은 공포물을 빌려간 회원에게는 빨리 전화를 걸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루기로 하자. 배가 고프니 무얼 먹을까 고민이 된다.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나는 가게문을 잠근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몇 번 흔들었다. 재차 확인해야 마음이 놓인다. 유리창에 붙여놓은 포스터들이 잘 붙어 있는지 살핀다. 사탄의 인형 포스터는 섬뜩하다. 햇빛이 어른거린다. 처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 같다. 반납기 위에 껌이 붙어 있다. 온몸이 달아오른다. 나는 열이 나서 그 앞에 쭈그려 앉는다. 아직 풍선껌은 덩어리져서 마르지 않은 상태다. 껌을 땠다. 손가락 끝에 붙은 껌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손가락이 끈적거린다.
나는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등지고 섰다. 그리고 건강원 안을 들여다본다. 김씨 아저씨는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아줌마의 육중한 뒷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기계를 돌리고 있다. 아저씨는 사거리 금전다방에 나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새로 온 마담의 풍만한 가슴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아줌마는 대야에 씻어놓았던 포도의 물기를 턴다. 그리고 기계 입구에 조심스럽게 포도를 밀어 넣는다. 화장 하나 없는 아줌마의 얼굴은 자글자글하다. 나는 자라가 들은 대야를 무심히 지나친다.
전봇대 앞에 아이들이 모여 있다. 나는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껌을 붙여놓고 간 아이가 저 안에 있을지도 모를 터였다. 아이들의 입을 보았지만, 껌을 씹는 아이는 없었다. 술래인 아이가 전봇대 앞에 눈을 감고 서 있다. 나머지 아이들은 술래의 뒤쪽에 떨어져 서 있다. 술래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얼른 뒤를 돌아본다. 그 사이 뒤에 있는 아이들은 재빨리 몸을 놀렸다. 술래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 새를 놓치지 않았다. 뒤에 있는 아이들은 한 발, 다른 한 발을 술래에게 향해간다. 아이 서넛이 술래의 등을 치고 도망간다. 검게 그을린 아이들의 이마에 맺혀졌던 땀방울이 떨어진다. 나는 도망갈 때 곧잘 엎어졌다. 술래에게 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다급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남자는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나왔다. 야구 모자를 둘러쓴 남자 뒤로 생선대가리들이 보였다. 리어카에 한가득 생선대가리들이 쌓여 있다. 나는 안경을 밀어 올린다. 생선대가리에 붙어 있는 눈을 살펴보았다. 흐릿한 눈알들은 제각각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다. 썩어 가는 그것은 거름으로 쓰여질 거였다.
비릿한 냄새가 풍겨온다.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입구가 붐비고 있다. 햇빛을 피할 수 있긴 했지만, 등줄기에서 땀이 흘러내린다. 사람들의 열기 속에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양옆에 자판이 늘어 서 있다. 그 좁은 틈을 걸을 때마다 다른 사람과 어깨가 부딪힌다. 그런데 그들은 내 뒤를 흘끔 쳐다보고 뭐라 중얼거릴 뿐이었다. 시장 안이 시끄러워서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뜨거운 김과 함께 단내가 맡아진다.
나는 과일 자판 앞에 섰다. 노랗게 잘 익은 참외를 입안에 물으면 달콤할 것 같다. 과일 주인은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사람과 어깨를 세게 부딪혔다. 쾨쾨한 냄새가 난다. 나는 화가 났다. 욕을 올리고 싶다. 이 좁은 공간에 누가 달려왔는가 싶어져서다. 어디선가 여자의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아침에 미도 아파트 근처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다. 나는 아픈 어깨를 만지다, 그 목소리에 놀란다.
봉두난발의 머리를 한 여자가 참외를 집고 있다. 자판 주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온다. 나는 자판 위에 만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여자를 계속 쳐다보았다. 여자는 스물 세 넷쯤 되어 보인다. 여자의 손톱은 새까맣다. 여자는 노랗게 잘 익은 참외 하나를 입안에 넣고 있다. 여자가 입을 벌릴 때마다 누런 이빨이 보였다. 여자의 흰 블라우스는 여기저기가 뜯겨졌다. 앞가슴에 달린 단추 하나가 위태롭게 매달렸다. 그 틈으로 여자의 희고 탄력적인 젖가슴이 보인다. 내가 여자를 계속 쳐다보자 여자도 시선을 느꼈나보다. 여자의 마른 몸이 바르르 떨렸다. 여자는 나를 쳐다본다. 여자의 눈에는 눈곱이 잔뜩 껴 있다. '햇빛 때문이었어…….’여자는 비명을 지른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여자를 본다. 갑자기 많은 시선이 느껴졌는지, 여자는 먹던 참외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천막 밖으로 뛰어가기 시작한다. 여자가 뛰면서 치마가 펄럭거렸다.
여자가 사라지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멍하니 그녀의 이빨자국이 남아 있는 참외를 본다. 과일가게 주인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저 여자, 미도아파트 공사장서 당했다는 게 사실일까?"
"아 그렇다니까. 옷이 찢겨진 채로 울고 있더라니까."
"뭐 여대생이라나……."
그들은 말을 시큰둥하게 주고받았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나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힌다. 사람들의 입이 움직인다. 그들의 입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나온다.‘햇빛 때문이었어…….’나는 여자가 뛰어간 길을 따라, 시장 밖으로 나온다. 어느새 여름 해는 기울어가고 있다. 나는 그것을 허망하게 바라본다.
첫댓글 문체가 마음에 드네요. 단문이 다소 지나친 느낌도 있지만 글 전체의 분위기와 어울리고 긴장감도 느껴지구요.(그러나 조금 지나치긴 해요^^) 나중에 더 정독해 볼테지만,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