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종순(호남신학교 신학과 교수)
Ⅰ. 문제제기
1980년대에 들어 선교 1세기를 앞에 둔 상황에서 1) 한국교회가 성장하고, 2) 한국교회사에 대한 재정립이 논의되기 시작하고, 3) 한국과 미국 장로교회의 상호 협력으로 미국 장로교 총회에서 소관하고 있는 자료를 한국인 연구자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공개되기 시작한 원 자료를 통하여 한국인 연구자들은 한국교회사를 한국인의 입장에서 재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 본 연구자도 이와 같은 혜택을 입어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역사에 대하여 새로운 차원에서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선교사들과 한국인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주된 흐름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반면에 그 흐름에 들지 못한 사람들은 소홀히 되어 왔다. 이 연구는 선교사와 한국인 목회자들 가운데 주된 흐름에 있었던 인물보다는 저변 층에 있었던 사람들을 발굴하여 소개함으로써 이들이 왜 배척 당하고, 역사의 주된 흐름에 속하지 못하였는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리려고 한다.
이 연구를 진행하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선결되어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본 연구에 적절한 사관을 정립하고 둘째는 최흥종 목사에 대한 성격을 규명한 다음에 셋째로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의 신앙적·신학적 성격을 규명하고 넷째로 한국교회의 사회적 관심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확정해야 한다.
Ⅱ. 최흥종 목사의 개종
최흥종(崔興琮) 목사의 본명은 최영종(崔泳琮)이다. 그는 1880년 광주의 최학신(崔學新)과 부인 국(鞠)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10년 연상의 형이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남으로 최영종이 장남이었다. 그러나 최영종은 5세 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남으로 새 어머니 공(孔)씨에게서 자랐으며, 아래로는 10살 미만의 이복동생 최영욱(崔泳旭)이 있었다. 최영종은 엄한 계모 아래서 따뜻한 모정을 그리면서 자랐다.
최영종은 여느 아이처럼 서당에 다니면서 한학을 익혔으나,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광주의 무쇠주먹[鐵漢]으로 널리 알려졌다. 남다른 활력과 대담성을 지닌 젊은이가 기개를 펼칠 무대를 만나지 못함으로써 방황기를 겪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어거스틴(Augustine)이 카르타고(Carthago)에 도착하여 "나는 불법적인 사랑의 솥 단지가 주변에서 들끓고 있는 카르타고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육체적인 즐거움을 얻는 것을 필요로 했다.……드디어 결혼의 해변에서 목욕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듯이 최영종은 강명환(姜明煥)과 결혼함으로써 젊음의 가시를 무디게 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최영종의 젊음의 가시를 무디게 한 사람은 부인이 아니라 김윤수(金允洙) 집사와 벨(Engine Bell) 목사였다. 김윤수 집사와 최영종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하여는 알 수 없지만, 김천배는 소책자《오방 최흥종 목사의 삶》에서 출세를 위한 동기라고 피력하면서, "김윤수 집사가 현 산수동에서 후보지를 물색하는 것으로 도와서 양림리의 한 동산을 사게 되었다. 왜냐하면 최영종은 김윤수를 자신의 출세의 길잡이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고 기록하였다.
어찌되었거나 최영종은 친구 최재익과 함께 1904년 12월 25일 오전 11시 벨 목사의 사택에서 드린 최초의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벨 목사의 부인은 1905년 6월호〈The Missionary〉에 이렇게 묘사하였다.
우리가 도착한 다음의 첫 번째 일요일은 크리스마스날이었으며, 11시가 되도록 조사들과 그 가족밖에는 없었다.……11시 정각에 밖을 보니 하얀 옷을 입은 긴 줄이 우리 집 쪽으로 오고 있었다.……부인들을 한쪽 방으로, 그리고 남자들은 다른 쪽으로 방으로 초청하였으며, 벨 목사는 문에 서서 '땅에는 평화요 사람들에게 선한 의지'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날 진리를 최초로 들은 이방인이 200여 명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들은 호기심으로 왔으며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최영종은 김윤수 집사와 벨 목사의 감화로 기독교인이 되었으나, 아직까지 세상과 결별한 사도 바울은 아니었다. 기독교는 그에게 출세의 도구였으며, 서구문명과 만나는 길이었다.
그는 교회에 참석하면서도 곧바로 출세라는 길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김윤수 집사가 보여주었던 결단력보다는 쟁기는 잡았어도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김윤수 집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순검 시험에 응시하였다.
Ⅲ. 선교사들의 복음이해와 최흥종 목사의 복음이해
최흥종 목사는 개종 초기부터 복음의 영적인 거듭남의 기능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이것을 교회와 교인의 사회적 사명으로 연결시키면서 평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해한 복음이 무엇인가? 이 문제는 한국에 왔던 초기 선교사들의 신앙관과 신학을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다.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과 신앙을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마펫(Samuel A. Moffett : 馬布三悅)이다. 그는 1890년 [네비어스 선교방법론] 결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1901년 평양신학교를 세우고 목회자를 양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영향력이 제자 목회자를 통하여 한국교회의 한 뿌리로 깊숙이 자라게 되었던 것이다. 마펫은 1934년에 교회가 복음사업과 더불어 사회사업에 개입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지하면서 오로지 복음만, 그것도 자신이 "40년 전에 전해준 복음만" 전하도록 토로하였다.
내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복음전도를 개시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가 있다. 그것은 십자가의 도 이외에는 전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든지 죽든지 구원의 복음만을 전하기로 결심하였다.……다른 것은 참 복음이 아니다. 근래에 와서 교회 안에서도 종종 이런 말이 들린다.……새 시대에 옛적 복음이 적당치 않다. 새 세계에는 새로운 복음을 전하자고 한다.……옛 복음에는 구원이 있으나 새 복음에는 구원이 없는 것이 답답하다.……조선교회 형제여, 40년 전에 전한 그 복음 그대로 전파하자.……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마펫이 말하는 "40년 전에 전한 복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부분을 잘 설명해 주는 논평이 있다.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국의 총무로 있던 브라운(A. J. Brown)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라를 개방한 이래 처음 25년간 전형적인 선교사의 모습은 퓨리턴 형의 사람이었다. 이 퓨리턴 형의 사람은 안식을 지키되 우리 뉴잉글랜드 조상들이 한 세기 전에 행했던 것과 같이 지켰다. 춤이나 담배, 그리고 카드놀이 등은 기독교 신자들이 빠져서는 안될 죄라고 보았다. 신학이나 성경을 비판할 때 이러한 선교사들은 강력하게 보수주의적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전천년의 견해는 없어서는 안될 진리라고 주장했다. 고등 비평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이라고 생각하였다.
마펫은 총무 브라운이 제시하는 선교사의 자격조건을 골고루 갖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말하는 복음에는 십자가의 도, 그리고 개인영혼 구원이며, 여기에 청교도적인 윤리와 전천년설적인 종말론적 기대가 다함께 곁들어 있었다. 따라서 마펫을 중심으로 한 평양신학교는 개인 영혼구원과 전천년설적인 종말론적 긴장과 기대가 근본적인 것이며, 여기에 청교도적인 윤리가 첨가되었다. 그리고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는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유형의 신앙이 한국교회에서는 보수·정통신앙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최흥종 목사는 마펫 유형의 이른바 보수·정통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복음을 삼애(三愛)로 이해하였다. 즉, 하나님 사랑(愛神)과 이웃사랑(愛隣)과 나라사랑(愛土)이다. 그리고 그는 이 복음을 언제나 살아 움직이는 실천으로 옮긴 신행일치(信行一致)적 삶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따라서 그에게서 기독교의 복음은 명사적 의미의 정체성이 아니라, 동사적 의미의 움직임과 실천이었으며, 그 말씀의 배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막 3 : 31∼35)"였다.
문제는 이른바 보수·정통적 복음을 교회 안에서 개인 영혼구원과 종말론적·내세적 희망에 국한시킴으로써 교회와 사회를 이분화 시킬 것인가, 아니면 이상과 같은 복음이해를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시켜 교회와 사회를 일원화시킬 것인가이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한국교회의 사회적 관심이 어떻게 하여 발달하였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얻을 수 있다.
Ⅳ. 3·1만세운동 이후 진행된 사회운동과 최흥종 목사
1. 광주 YMCA 설립과 운영
광주 YMCA 설립은 광주 숭일학교 학생부의 설립이 시초이다. 1908년 학교의 설립 이래로 학생의 숫자가 증가하다가 1909년에는 프레스톤 선교사가 목포에서 광주로 전임하면서 목포 영흥학교의 선생 남궁혁과 함께 왔으며, 곧바로 광주 숭일학교에서 영어와 신학문 선생으로 근무하게 하였다. 곧이어 홍우종 선생이 한문을 맡고 여타의 과목은 선교사들이 맡았다. 1911년 접어들면서 교장은 프레스톤 목사가 맡고 뉴랜드(LeRoy T. Newland : 南大理) 목사는 체육 및 여타의 과목을 맡았다. 그리고 12월에 이승만 박사가 강연차 광주를 방문하였다. 뉴랜드 목사는 이승만 박사와 프린스톤 동창이고 또한 남궁혁 선생은 이승만 박사와 배재학교 동창이었다.
이 당시 학생은 김세열·변영득·이병열·최영욱·조정환·장맹섭 등이었다. 이들은 이승만 박사의 강연을 들은 다음에 광주 기독학생 청년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 부분을 최윤상은 "고등부 학생들만의 회합이라 하여 나는 회의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 당시 모인 학생 중에는 최영욱·조정환·최기현·정효룡·장맹섭 등이 있었다. 이 밤은 이승만 박사가 다녀간 후 1911년 광주 학생 기독교 청년회가 창설된 밤이었다"라고 회상한다.
이렇게 하여 광주 숭일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학교 내에 YMCA 가 창설되었으며, 이들을 위하여 1914년에 미국 스텐포드 대학교(Stanford University) 총장 조르단(Dr. Jordan) 박사가 광주를 방문하였다. 이 부분을 광주의 선교사 스와인하트(M. L. Swinehart)는〈한국의 첫인상〉이라는 제목으로 보고하였다.
지난 밤 나는 지역 YMCA(local YMCA) 집회에 참석하여 1,400명의 젊은이들이 캘리포니아 주 스텐포드 대학의 총장 조르단 박사의 강연을 경청하는 것을 보았다.……나는 단상에 앉아 1,400 얼굴과 2,800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조르단 박사는 깨끗한 삶의 가치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고 통역이 뒤따랐다.……이들에게서 대다수의 같은 나이 또래의 미국 소년들보다도 훨씬 더 진지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광주 숭일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한 학생 YMCA 운동이 점점 성장하여 1920년 최흥종 목사가 수감생활을 마치고 광주 북문밖교회에 다시 부임하여 목회에 전념할 때인 1920년 8월 29일에 광주지부를 설립하게 되었다. 모든 여건으로 미루어 최흥종 장로가 회장을 맡아야 하지만, 본인은 뒤에서 젊은이들의 활동을 밀어주는 협력자로 만족하였다. 그리하여 초대 회장은 당시 숭일학교 선생이며 광주 양림교회 장로인 최병준이 맡았다. 그러다가 1924년 최흥종 목사가 제4대 회장을 맡을 때에 비로소 서울 중앙 YMCA 의 인준을 받아 지부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김천배·송건호 두 사람이 저술한《한국 YMCA 운동사》에서 송건호는 이렇게 밝힌다.
1920년 8월 29일에 창립되었다. 그러나 연합회의 인준을 받은 것은 1924년 이상재·신흥우·김필수 등 최고 간부들의 임석하에 최흥종이 제4대 회장으로 취임하고 나서이다. 총무에는 최영균이 임명되었다.
이 당시 광주 YMCA 의 회원은 광주 숭일학교 선생과 학생 그리고 광주 양림교회와 북문밖교회 교인들이 대다수를 이루었다.
이들의 활동은 무엇이었는가? 1920년 8월 16일에서 30일까지 전남 각 지역에 광주 기독청년 전도대를 보내어 복음전도활동과 함께 음악 및 각종 문화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이 거둔 성과는 785명의 결신자였다. 그러나 이 전도대를 이끌던 사람들의 성격으로 미루어 단순히 복음전도와 더불어 국가의 독립과 애국심에 관하여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김정련 선생과 추종하는 학생들이 전개한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에 크게 남을 만한 사건들이 있었다. 경찰서 및 교도소에 수감된 독립지사들에게 사식을 차입하고, 또한 친일적인 반민족주의자들을 집단으로 구타하거나 습격하고, 심지어는 요인암살과 관공서 파괴까지 서슴지 않았다.
최흥종 목사 자신이 무력적인 독립운동을 고취시킨 것은 아니지만, 강태성·주형옥·김철주 등 광주 북문밖교회에서 신앙생활 하였던 신도들 가운데에서 이처럼 무력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람이 있었다. 물론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은 최흥종 목사를 위시하여 사찰당국의 감시와 함께 선교사들과 교계로부터 배척받는 계기가 되었다.
2. 북문밖교회 유치원과 야학운영
최흥종 목사는 일찍이 조선의 어린아이 교육에 대한 큰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광주의 주일학교운동을 크게 이끌었던 윌슨(Robert M. Wilson)과 스와인하트(Martin L. Swinehart) 두 사람의 선교사와의 사귐을 통하여 어린아이 교육이 앞으로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하였다.
특히 스와인하트는 1913년 전국 주일학교 연합회 실행위원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주일학교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왔으며, 그의 주일학교 운영 철학은 확실하였다. 1913년 당시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가 보고한 입교인(communicants)이 7,174명인데 반하여 주일학교 학생의 숫자는 8,154명이라고 밝혔다. 주일학교에 다니는 학생의 연령층은 주로 7세에서 14세인데, 스와인하트는 자신과 더불어 9개월간 어린이 전도협회에서 일하게 된 한국인 동료에게 주일학교 교육의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1. 어린아이는 전도하기가 쉽다
2. 어린 시절에 배운 것은 결코 잊지 않는다
3.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란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스와인하트는 이 사람이 누구라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최흥종 목사라고 말할 수 있다. 최흥종 목사는 어린아이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는 것이 사람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0년 6월경 북문밖교회로 재 부임한 이래로 어린아이의 교육을 생각하다가, 1921년부터 유치원을 운영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유치원 운영은 자금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재정확충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최흥종 목사는 동아일보 광주 지국장인 최원순과 상의하여 오웬 기념각(Owen Memorial Building)에서 유치원 설립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이렇게 하여 1921년 4월에 광주유치원이라는 명칭으로 시작하였으며, 선생은 여류 소설가 박화성과 박경순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광주 유치원 사업은 곧바로 재정난에 봉착하여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으나 1921년 12월에 개최된 학부형 총회는 [광주유치원 유지회]를 조직하여 지속적으로 운영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렇지만 광주유치원의 지속적인 유지는 교회측의 재정지원보다는 광주의 갑부인 현준호가 연 경비 900원 가운데 500∼600원씩 지원함으로써 경제 공황 시기를 이겨내고 유지될 수 있었다.
최흥종 목사의 또 다른 사업은 여성들을 위한 야학운영이었다. 한국의 문맹률은 참으로 높았다. 1933년도 통계에 따르면 문맹률이 72%를 넘었다. 1920년의 문맹률도 최소한 이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여자들의 문맹률은 더욱 높아 "여자는 천 명 중에 구백이 무식자이외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최흥종 목사는 교회에 여성을 위한 한글 야학반을 북문밖교회 안에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여자반 야학은 1921년 10월 1일부터 시작하였는데, 선생은 유치원 보모인 박경순과 한국의 여류소설가 박화성이 맡았다. 박화성은 이 당시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쓴다.
최흥종 목사님은 곧 북문밖교회에 유치원을 만들어 나를 보모로 채용하여 낮에는 유치원에서, 밤에는 부인야학에 매달려 나는 밤과 낮으로 그 머나먼 양림에서 북문밖까지를 왕래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유치원과 야학은 날로 번창하였는데 특히 야학생으로는 당시의 갑부들, 큰 사업가들, 법관들의 부인들과 자녀들이 노소를 불문하고 모여들어 진지한 모습으로 지성껏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비단옷과 금비녀·가락지 등이 눈에 거슬려 명을 내렸다. "여기는 작으나마 학교입니다. 여러분은 학생인 이상 학칙을 지켜야 합니다. 비단옷과 금비녀는 엄금합니다. 70명 중에 50명이 가난한 부인이나 처녀들이니까요. 여러분은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최흥종 목사는 여성의 교육이야말로 한국의 앞날을 위한 기초석이 된다는 것을 확신하였으며, 특히 자신의 제수이며 한국 YWCA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필례의 여성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최흥종 목사는 1921년 7월 30일 광주 흥학관에서 조직된 광주 부인회 창립총회에 고문으로 석진형·홍우종·남궁혁과 함께 참여하였다. 김필례는 1923년에 한국 여성운동으로 인한 변화에 대하여 "1913∼1923 사이의 여성의 발전"이라는 글을 통하여 이렇게 평가하였다.
(1) 교육의 권리. 초등과정에서 여학생 수가 4,000에서 40,000으로……그리고 중등과정에서 300에서 3,000으로 증진되었다.
(2) 결혼에서의 새로운 해방. 10년 전만 해도 딸들은 결혼에 맹목적으로 순종하고, 아무런 주장도 할 수 없었다.……이제는 약혼자에게 말할 수 있고, 또한 약혼하지 않은 남자들에게도 말할 수 있다.
(3) 사회적 관계에서 결정적으로 발전했다. 10년 전만 해도 여성들은 머리를 쓰개로 덮고, 낮 동안에 거리를 다니지 못하고, 가마를 타야 했다. 이제는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 이것이 놀랄 만한 진전이다.
(4) 사업과 장사에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다. 10년 전에는 여성들이 가게에 물건 사러 가지도 못했으나, 지금은 가게를 여성들이 운영하기도 한다.
(5) 여성단체들의 성장. 10년 전에는 여성단체란 존재하지도 못했다. 이제는 58개의 여성단체가 등록되어 있다.
3. 노동공제회 지회장
1910년 강점 이후 일본의 자본이 항만·도로·철도 등 노동집약적 국가 기간사업에 집중적으로 투입되면서 저임금 노동자들이 증가하게 되었다. 조선의 근대적 노동운동이 전국적 규모로 시작된 것은 노동공제회와 그 노동운동이다.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노동자들의 권익에 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박중화·박이규·차금봉·오상근·신백우·장덕수·김명식 등이 조선노동문제연구회를 개최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1920년 4월 11일 서울에서 발기하여 [조선노동공제회]를 창립하였다.
이들의 강령은 민족차별 철폐, 식민지교육 폐지, 노동자의 기술향상, 노동보호 및 쟁의권 획득, 상호부조 등이었고, 활동방침은 노동자의 지식계발, 품성 향상, 환난 구제, 직업 소개, 저축 장려, 위생 장려 및 일반 노동상황의 조사·연구 등이었다. 이와 같은 활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노동자 계몽활동, 중앙노동강습소 운영 및 노동야학을 실시하여 수신(修身), 한국어, 한문, 일본어 등의 대중교육까지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 동조하여 일년이 채 못된 1921년 3월에는 전국적으로 17,259명의 회원을 확보하였으며, 전국 14개 도시에 지회가 설립되었으며 1922년 3월 말까지 40여 개의 지회와 40,000여 명의 회원이 가입하였다.
서울 중앙회의 결성과 함께 곧바로 광주 지부의 설립이 이루어졌다. 1920년 7월 30일 광주지방의 유지 122명의 발기로 광주 향교 명륜당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최흥종 목사를 초대 회장으로 선임하였다. 초기의 활동은 주로 새로운 사조에 대한 민중 계몽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이와 같은 흐름은 발기취지문이라 할 수 있는〈발기통론〉(發起通論)을 통하여 알 수 있다.
大凡 萬有界의 현상은 모든 자연에 始하여 자연 귀납합니다. 우리 인생의 생존 존망이 다 자연의 지배하는 것일 뿐이올시다. 자연은 공정하여 자유 평등 박애로써 전세계에 임하나니 그의 법칙에 순한 자는 存하고 역한 자는 亡합니다. 공정한 자연의 광명을 받은 우리 인생이 어찌 근본적 빈부우열의 차등이 있겠습니까. 다만 자유와 평등이 있을 뿐이올시다. 그러므로 자아의 노력과 고통으로서 오락의 糧米를 구함은 불합리한 인의의 賊害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회의 조직과 현상을 볼지라도 이것이 자연인가 부자연인가. 합리적인가 불합리적인가. 자기의 노력과 고통을 盡하여도 食할 수 없고 衣할 수 없는 자 幾何이며 타인의 노력으로 양식을 삼고 타인의 고통으로 오락을 삼는자 幾何이뇨. 이와 여히 부자연 불합리한 현상을 보수함은 오인의 비참한 말로를 초치함이 아닌가. 노동이 신성하고 귀중한 것을 자각하여야 하겠습니다. 자연의 노력이 아니면 생활할 수 없고 자아의 고통이 아니면 위안 받을 수 없는 것이 자연진리가 아니겠습니까? 이의 모순되는 사회현상을 보수코자 하는 자는 자연의 주재하신 상제의 노하심을 면할 수 無합니다. 분기하라. 인생자연의 진리를 자각한 자들이 이 사회의 모순된 현상을 볼 때에 자기의 노력과 고통이 타인의 오락적 희생이 되고 마는 자들을 위하여 전세계의 명예와 영광을 그에게 돌리어 노동가치와 자연진리를 표명함이 오인의 사명이 아닌가. 우리 회는 맹세코 이 사회의 모순된 현상을 인생자연에 歸正케 하여 인생의 이상을 관철하여 인생의 행복을 조장코자 합니다.
이와 같은 취지문을 발표하여 회원을 확보한 노동공제회는 회장인 최흥종 목사가 시베리아 선교사로 떠나려는 등 거취문제로 활발한 활동을 못하다가, 1921년 6월 10일 흥학관에서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임원을 새롭게 개편한 뒤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때로부터 진행된 사업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노동야학의 실시, 둘째, 노동 강연 활동, 셋째, 광주소작인 연합회의 구성, 넷째, 소비조합의 구성, 다섯째, 노동자 합숙소 건설, 여섯째, 임금노동자 조합조직 등이었다.
4. 신간회 지회장
1919년 3·1 만세운동이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한국사회의 지성인들에게는 매혹적인 대안이었다. 기독·지성인들의 모임인 YMCA 에서도 사회주의적 성향은 모임체의 운동방향에 관한 상호간의 구체적인 논의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적 성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기독정신의 사회주의적인 면을 실현하려는 경향이었다. 따라서 초기최소한 1920년에서 1926년까지는 사회주의 운동이 좌우의 첨예한 분화를 거치지 않고 하나로 움직여 가던 시기였다.
1920년대 초기의 사회운동은 계급투쟁 운동이라기보다는 봉건사상과 봉건신분제에 억눌려 있던 일반대중의 인간의식 혹은 인권운동이었다. 그리하여 일본 당국에서도 이 시기의 운동을 실력양성운동과 향학열 발흥시대라고 이름을 붙였을 정도이다. 이와 같은 향학열은 YMCA 운동에서는 야학운동과 농촌계몽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다가 재일 유학생들의 사회주의적 사상단체인 북성회와 국내의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가 1923년에 만들어지면서 아직까지는 좌·우 미분화된 상태에서〈동아일보〉의 노선을 공격하는 입장에서 나름대로의 입장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동아일보〉는 1922년 2월 일본 유학생들이 서울에 와서 계급투쟁 전개를 선언하자 1922년 2월 11일자 사설 "학생제군에게 고하노라", 2월 14일자 사설 "교육 당국자에게 고하노라", 2월 15일자 사설 "불량신사를 배척하라"는 제목으로 이들의 활동을 배격하였다.
이에 맞서 사회운동가들은〈동아일보〉가 일제의 기관지인〈매일신보〉,〈경성일보〉와 다르지 않다고 보면서 불매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동아일보〉의 사주인 김성수·김연수 일가가 토지조사사업 기간과 산미증산계획 기간 중 거대로 토지를 집적하였음을 지적하면서 이들이 세운 경성방직회사의 운영에 대하여도 문제점을 제기함으로써, 점점 더 노동자와 부르주아지의 대립양상으로 발전하여 갔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그것도 강렬한 반일·민족의식을 유지하면서 민족해방 투쟁의 수단으로서 사회주의를 지향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1924년에 노동총동맹이 설립되고 1925년에 조선공산당이 비밀리에 조직되면서부터 좌·우의 사상적 대립은 점점 더 노골화되기 시작하였다. 초기 조선공산당마저도 일본제국주의의 완전한 타도,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외치면서 노동문제, 여성문제, 기본적 정치의 자유문제 등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과제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실체가 발각됨으로써 제1차 공산당운동은 해체되었다.
그후 순조의 죽음을 계기로 조선공산당은 대한독립당을 조직하여 천도교 구파 세력과 연합하여 전국 50여 개 도시에서 대대적인 6·10만세사건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동자들이 체포됨으로써 또 다시 실패에 그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들은 현 사회를 자본주의 계층과 무산자 계층의 대립으로 간주하면서 식민지에서는 민족해방이 곧 계급해방이고 정치해방이 곧 경제해방이라는 것을 촉구하였다.
지금까지 이른바 일제의 비호 아래 전개된 민족개량주의와 자치운동을 부르짖는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자들의 대립이 진행되는 가운데 1926년 11월의 정우회 선언과 12월의 제2회 조선공산당 대회에서 민족단일당 설립을 결의함으로써 1927년 2월에 신간회를 결성하였다. 결성 당시에 부르짖은 강령은 다음과 같다.
-. 우리들은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 우리들은 단결을 견고히 한다
-. 우리들은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이렇게 결성된 신간회는 곧바로 광주에도 지회를 조직하였으며, 광주의 지회장은 최흥종 목사가 맡았다. 신간회 회원들의 직업을 분석해 보면 목사·전도사 등의 교역자는 전체 회원 39,914명 가운데 255명으로 0.64%이지만, 그 숫자는 결코 적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라남도 지역에서도 14개의 지회가 또다시 결성되어 있었다.
광주지역의 신간회 조직은 어떠하였는가? 1927년 4월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600여 명의 회원으로 출발하였으며, 간사는 정수태·최종섭·김수·문태홍·김용기·정석천 등이었다. 그렇지만 신간회 광주지회는 처음부터 유명무실이었다. 그 이유는 신간회의 설립취지에 따른 좌·우 합작의 인물이 아닌 인물들이 간사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광주지회의 활력을 위하여 1927년 10월에 최흥종 목사를 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그렇지만 신간회는 1929년 2월 15일 중앙본부의 정기총회가 총독부의 불허조치로 열리지 못하자, 복대표제(8개 지회에서 1명의 복 대표 선정)로서 총회를 대신키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7월 1일 전남에서는 정수태(광주 지회장), 장병준(목포 지회장), 김영준(구례지회 간사)이 참가하였다.
광주의 지회장이 정수태로 바뀐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최흥종 목사가 1929년 6월 4일에서 7일 사이에 회집한 전남노회에서 제주도 모슬포교회 담임목사로 임명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보건대, 최흥종 목사는 신간회 좌·우 합작의 대의명분에 협조하였으나, 목회자로서의 삶으로 방향을 다시 전환한 것이다.
최흥종 목사의 사회운동은 사회주의적 노선을 따른 행동주의가 아니라, 기독교 정신에 따른 인도주의적 입장과 민족주의가 합쳐진 활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하여 일본 당국의 감시대상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최흥종 목사가 사회주의적 노선을 어느 정도 반영한 운동에 참여했던 것은 당시 광주의 좌·우를 중도 통합시킴으로서 무력적인 혹은 상호 배타적인 감정대립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중심인물이었기 때문이다.
Ⅴ. 사회 봉사자로서의 최흥종 목사
1. 사회정화운동
아편은 한국에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어 있었으므로 〈그리스도신문〉은 1901년 4월 4일자 "아편 금할 론"이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아편의 해악성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아편은 '을사조약' 이후에도, 그리고 강제 합병 이후에도 조선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제의 보호 아래 재배되었다. 따라서 3·1만세운동 이후 한국의 젊은이들의 영혼을 잠식하는 각종 퇴폐물이 범람한 가운데에서도 가장 극악스러운 행위가 마약의 암시적인 권장과 성행이었다. 물론 겉으로 밝힌 이유는 의료용과 군사용이었다. 일제는 1919년 공식적인 재배령을 발표하여 3,000에이커(3,750,000평)의 재배지를 확보하고, 미화 182,000달러를 집행하였다. 이와 같은 마약재배에 대하여 브라운(A. J. Brown)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마약 밀매는 일본의 법에는 저촉되지만, 그것도 일본 사람에 의하여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공개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수천 수만의 한국인들이 이들 행상인들에게서 몰핀 주사기를 쓰는 법을 배우고 있다. 한국의 병원 치고 이 중독자들을 진료하지 않은 곳이 없다. 아편 문제가 이렇게 악화된 일은 없었다. 선교사들의 항의가 한 둘 먹혀 들어간 곳이 있다. 하지만 한국인의 비도덕화는 계속되고 있다.
이와 같은 마약의 사용은 총독부 보고에 의해서도 쉽사리 알 수 있다. 일제의 아편 생산량은 1919년에는 2,308.2정보에서 2,022.94관, 1920년부터 1929년까지는 생산량이 감소하여 400∼500관 사이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1930년부터 갑작스럽게 증가하여 재배면적으로 볼 때, 1930년에 1,255정보, 1931년에 5,104정보, 1932년에 6,835정보에 이른다. 이와 같은 증가는 일본이 만주에 괴뢰국을 세우고 대동아 공영권 확보를 위한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취해진 조치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약이 조선 사람들의 영혼을 죽이는 암적 존재가 되자, 교회는 이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1921년 최흥종 목사는 일본산 마약을 퇴치하기 위하여 모루히네 방독회를 광주 YMCA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하였다. 이 활동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자세하게 밝힌 것이 없지만 대한여자절제회보다 앞서서 마약퇴치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은 고무적인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나환자 근절협회
최흥종 목사는 1927년 1월 25일 제2차 시베리아 선교사로 광주를 떠났으나 당시 러시아의 종교탄압 정책에 따라 '케·페·우'에 수금되어 40여 일 간 고생하다가 강제 퇴거조치를 당하여 4월 30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곧바로 광주로 내려와 최흥종 목사는 신간회 광주 지회장을 역임하고, 광주에서 사립학교 보호운동에 참여하였다. 1928년 최흥종 목사는 광주교육보급회 이사를 역임하고 동시에 사립보통학교유지방침연구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최흥종 목사는 1929년 6월 4일에서 7일까지 담양군 객사리교회에서 소집된 전남노회에서 "최흥종 목사는 제주도 모슬포 교회로……"라고 결정함으로써 지금까지의 활동을 중단하였다. 최흥종 목사는 모슬포교회로 부임하여 사역하였으나, 제주도가 전남노회에 소속됨으로써 경제적 침체기에 접어든 제주도 교회와 교인들에게는 여러 가지 행정상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다. 이에 따라 최흥종 목사는 제주도 전역의 교회를 전남노회로부터 독립하여 제주노회를 구성하였다. 1930년 12월 17일자〈기독신보〉는 이렇게 전한다.
제주노회
본년 6월 전남노회의 결의와 9월 총회의 승인으로써 조선예수교장로회 제주노회 제1회가 조직장 최흥종 씨의 사회아래 조직 및 결의한 개요는 다음과 같다.…… 4. 임원선거 회장 : 최흥종.
이렇게 제주도에서 목회사역에 전념하다가 최흥종 목사는 드디어 건강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벌써 50세를 넘긴 최흥종 목사는 소화기 계통의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이 질병은 육지에서 제주도로 건너간 거의 모든 목회자들이 다같이 겪었다. 1931년 7월 22일자〈기독신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제주노회(제2회 촬요)
1. 교역자 이동
이기풍 목사는 성내교회를 사면하고 순천노회(벌교교회)로 이명 거.
최흥종 목사는 수토불복증으로 모슬포교회 시무사면하고 일년간 휴양키로……
최흥종 목사는 건강상 제주도 사역을 지속할 수 없어서 육지에서 일년간 휴양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것은 명목상의 이유에 불과하고 실제적인 이유는 나환자를 위한 성금모금 활동이었다.
여기에서 몇 가지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첫째는 왜 최흥종 목사가 제주도 모슬포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자청하여 갔을까? 둘째는 최흥종 목사는 왜 1920년대부터 1927년대까지 선교사들과 절친하게 지낸 기록이 없는가? 셋째는 최흥종 목사가 과연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시베리아에 선교사로 갔는가?
첫째 질문에 대하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즉, 최흥종 목사가 1929년 제주도 모슬포교회 담임목사로 광주를 벗어난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하나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동생 최영욱 의사가 개업한 서석의원을 일제는 반일적인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괴롭게 하였기 때문에, 최흥종 목사는 자신의 민족주의적인 행동이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사회활동을 전개하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공산주의 노선을 추구함으로써 하나님과 민족과 땅 사랑을 통한 좌우 연결이 실패함에 따른 좌절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질문에 대하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의 최흥종 목사의 활동을 보면, 그가 사회주의적 성향을 지닌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더 나아가서 기독교 목사로서의 신분에 대한 책임감을 더욱 강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의 최흥종 목사의 활동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1920∼1922년 10월 : 광주 북문밖교회 담임목사, 1922년 10월부터 1923년 10월 : 시베리아 선교사, 1923년 10월부터 1924년 10월 : 광주 북문밖교회 목사, 1924년 10월부터 1925년 10월 : 광주 남문밖교회 목사, 1927년 1∼4월 : 러시아 선교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최흥종 목사를 사회적 성향으로 기운 목사로 간주하면서 절친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선교사들의 편지 혹은 보고서에서 최흥종 목사에 대한 기록을 읽을 수 없는 것으로 잘 알 수 있다. 즉, 선교사들은 한국인 지도자들을 자신들의 친구라는 이름으로 소개하였는데, 광주에서는 이기풍 목사와 남궁혁 목사를 소개하고 최흥종 목사를 제외시킨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셋째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광주 YMCA 계열에서 주장하는 대로 독립지사로서 시베리아에 선교사를 지원하였다라고 단정할 수 없다. 물론 이 당시의 독립지사들이 가족이나 친지에게 자신의 활동을 전혀 알리지 않음으로써 신분상의 불이익을 안겨주지 않으려 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최흥종 목사가 독립지사적인 활동을 했는가? 이 부분은 다만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어찌 되었거나 최흥종 목사는 제주도 모슬포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나환자 구제사업에 또다시 개입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선교사들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환자들의 요청에 의하여 활동하게 된다.
미국 남장로교회 한국선교회는 1931년 12월 선교비 예산의 10% 감소라는 최후의 통보를 받았다. 이것은 곧바로 선교활동의 막대한 지장을 주었으며, 특히 여천군 신풍리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 정착촌 환자들에게는 참으로 큰 아픔이었다. 1909년 광주에서 시작한 나환자 보호시설은 최흥종 목사가 제공한 1,000여 평의 땅에 45인 수용시설로 출발하였으나, 1924년에는 560여 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이렇게 환자가 많아지자, 광주 기독병원 원장인 윌슨(Robert M. Wilson) 의사는 입원환자를 제한하고 매월 치료비 7원씩 7개월 분을 선납하는 자를 수용하기로 하였다.
광주의 나환자 진료소는 정착촌과 더불어 기독교 복음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선교의 장이었으나 너무나도 많은 나환자들이 호남지역에서 광주로 모여들었으므로 광주시민들로부터 정착촌 자체가 거부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윌슨 의사는 1924년에 이렇게 호소한다.
광주 문둥병원 상황(2회)
무료로 입원하기를 원하는 문둥병자를 이 병원으로 가라고 권고치 마심을 바라는 것은 이러한 병자들이 조선 전국에서 이곳으로 모여들어 광주 안에는 큰 폐해가 됨으로 우리는 도리어 심한 평판을 받습니다.
광주지역에 많은 나환자들이 운집함으로써 기독병원과 나환자 진료소는 광주시민으로부터 좋지 않은 평판과 함께 거부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순천지방에서도 나환자 진료소 개설을 염원하였다.
광주문둥병원 상황(3회)
……순천지방에서도 문둥병원 설치하기를 원하며 선교사 측에서는 재정이 순환되는 대로 속히 이 일을 착수하려는데 이 지방은 문둥병자가 많이 있는 곳입니다.
1924년부터 광주의 나환자 정착촌을 순천으로 옮겨가려는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한편으로 광주에서는 나병구제회를 설립하였다. 이 회는 김정기(金正基)에게 전국 교회를 순회하면서 모금케 하였으나, 그 구제액수는 극히 미약하였다. 그리하여 광주 나환자 진료소의 원장인 엉거(James Kelly Unger : 원가리) 목사는 미국에서 성행하였던 돼지저금통 운동을 전개하였다. '금도야지'라고 명명한 이 운동은 금돼지를 쇠로 된 밥(돈)을 먹여 살이 찐 다음에 잡으면 된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한국의 나환자들을 위하여 미국에서 도움을 준 액수가 1923년 동안에 50,000원인 반면에 한국사람이 도와 준 액수는 겨우 40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하였다.
엉거 목사가 지적한 미국교회 후원금 50,000원과 조선총독부의 후원금 17,200원, 그리고 한국인 헌금 40원을 합하면 67,240원인데, 환자 1명이 한달간 7원의 입원치료비가 소요되었으므로, 800여 명 환자의 1년간 치료비에 해당되는 액수였다.
이렇게 나환자의 무료진료가 힘들어지게 되자 광주에서 조직된 나병구제회는 이름을 나병공제회로 개칭하고서 전국을 향하여 구원의 손길을 다시 벌렸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음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광주군 조선나환자공제회에서는 그동안 전조선 각 단체와 개인에게 많은 동정이 있기를 바랐던 바 3월 26일까지에 20처 교회와 기타 3인에게서 드러온 동정금이 합 84원 80전이라더라.
이 액수의 헌금액은 나환자 한사람의 1년 분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는 적은 액수였다. 이렇게 구원의 손길이 끊겨 가는 상황에서 미국의 경제적 공황은 선교사들의 선교비 축소를 가져와 더욱 더 각박한 현실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흥종 목사에게 구원을 손길을 벌림으로써 지속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 한 나환자공제회는, 1932년에 최흥종 목사에게 호소하였으며, 그의 허락을 얻자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나병자들의 슬픈 寃情
전남 여수 나병원 문밖에는 전국 각처에서 입원을 희망하고 모여든 환자가 날로 늘어감은 심히 유감된 바라. 정원 외에는 더 수용할 수 없는 사정에서……저 가련한 자들을 서로 서로 구조하자는 생각이 불일듯하여 병원문밖에 토지를 건설케 하고 조선 나환자 공제회라는 실로 애처로운 회가 병원 수용환자 중에서 현금 조직하여 나온 지가 4∼5년이 되었도다.……참담한 그들의 사정을 제주도 모슬포교회에 시무하시는 전 서 시베리아 선교사 최흥종 목사에게 고백하였더니……그들을 위하여 출마하시게 된 목사님의 허락은 나환자 2만여 명의 입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였도다. 최 목사님의 초연하신 허락은 사회 내 정치사업은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다음과 같은 총회의 허락을 바라더라
총회진정의 건
1. 전조선 나환자를 위하여 구제부를 조직하여 주실 일
2. 최흥종 목사를 전조선 지교회에 동정금품 및 물품요구에 대하여 허락하여 주실 일
3. 공제회 보고를 위한 언권 허락할 일
4. 위급환자 50여 명을 위하여 1개월 식량을 당석 연보로 부조하여 주실 일
여수군 율촌면 신풍리 조선 나환자 공제회 회장 이종수
조선나환자공제회는 이〈애원서〉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발송하고 또한 한국에는 나환자 진료소가 세 곳, 그리고 한 곳에 집단 수용소가 있다고 사정을 알렸다. 이 세 곳의 진료소에서 치료할 수 있는 인원은 전체 나환자의 10%에 불과한 2,000여 명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경제적인 침체와 함께 나환자들의 수용비용이 증진되고, 더 나아가서 장기간의 입원진료를 위한 선납제로 인하여 조선인 나환자가 거리를 유리 배회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도 나환자들의 치료를 위하여 총회 안에 나환자위원회를 설치하여 구제헌금을 하게 하였다. 총회에서 집계한 구제액수는 연도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액수도 각 교회의 어려운 형편을 감안한다면 큰 보탬이 되었지만, 지속적인 치료비를 충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였다. 이렇게 하여 나환자공제회는 근원적인 나환자 치료대책을 세우고 한편으로는 최흥종 목사가 나환자를 위한 모금운동에 적극적으로 헌신하면서 전국교회를 순회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총회 및 전국 각지에〈애원서〉를 발송하여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이 활동도 경제적인 긴축상태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안 최흥종 목사는 곧바로 발길을 서울로 향하였다. 종로에 새롭게 건축한 YMCA 중앙회관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모금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나환자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하여 나환자 근절협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모금액수는 서울지역에 있는 환자 30여 명을 신풍리 애양원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1,278원 10전에 지나지 않았다.〈신동아〉는 최흥종 목사의 지금까지의 경력을 소개한 다음에 나환자 근절협회의 조직 및 계획, 그리고 활동을 이렇게 보도하였다.
나환자의 근절책은 크게 4가지인데, 격리·치료·구제·예방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치료기관을 갑·을·병·정으로 구별하여 갑은 대구와 여수 치료소, 을은 소록도와 부산 치료소, 정은 각 지역에 위치한 위탁치료소, 병은 경환자 및 유사환자의 자가 및 집단 거주지를 말한다. 이 사업을 향후 10년간 운영하는데 드는 비용은 5백만 원이며 매년 50만 원씩 소요된다. 이 4곳에 수용 건물과 부속설비를 각각 세우고, 선교회와 조선인 기부금으로 그 총액을 충당하려고 계획하였다.
최흥종 목사의 계획에 동의하여 조선나환자 근절협회에 가입한 사람은 김병로·이인·김성수·송진우·안재홍·유억겸·조만식·윤치호·신흥우·현동완·김을한·서정희·명제세·원익상·신공숙·유광열·유각경·국기열·홍병선·이선근·오긍선·김철·장영규·노종갑·김삼현·최상채·김흥열·민병기·고재욱·현덕신·김양수·김정기·김용환·최영균·김희성·박영만·신태윤·이은상 등 70여 명이었다. 발기 당시의 꿈은 원대하였다.
이렇게 발기한 협회는 광주지역 사람들이 많았지만,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이선근·김을한·국기열이 특히 협력적이었다. 초대회장은 윤치호, 그리고 총무는 최흥종 목사가 맡았다.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시작한 조선나환자 근절협회는 당시의 경제적인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최흥종 목사는 1932년 6월 23일 서울지역의 나환자 30여 인을 데리고 신풍리 애양원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러면 이상 계획은 일장춘몽이었던가? 애쓰고 애쓰다가 시원한 결과를 못 본 최씨는 무정한 사회를 원망하면서 6월 23일 경성에서 거리로 방황하던 30여 명 환자를 데리고 여수로 내려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나환자 근절협회는 해산하게 되었으며, 최씨는 만사가 여의치 않게 됨을 탄식하면서 서울을 떠난 것이다.
최흥종 목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나환자들과 일생을 같이하면서 지낼 것을 다짐하였다. "그러나 씨는 아주 낙망한 것은 아니다. 여수로 가서는 소규모로나마 나병환자 구제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설명뿐이 아니라 그는 일생을 그들을 위하여 노력한 분이다." 최흥종 목사는 약속한 대로 실행하였다.
3. 걸인과 빈민 구제활동
나환자를 위한 최흥종 목사의 사역은 다시 시작되었으나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그가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고, 방향을 바꾸었을 뿐이다. 최흥종 목사는 광주의 빈민들과 걸인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이 사역은 광주 기독병원 간호부장이며 동시에 이일(Stephen Neel Bible School : 李一)성경학교의 책임자로 있는 세핑(Elizabeth Johanna Shepping : 서서평)과 함께 동역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30년에도 '토막 및 불량주택조사'(土幕及 不良住宅調査)를 해 온 것을 알 수 있으나, 1942년 3월호와 1944년 6월호에 실린 '토막 및 불량주택조사'에 따르면 토막이란 "지면을 파내려 가서 토벽으로 하고 간단한 지붕을 덮은 원시적 주택"을 말하며, 불량주택이란 "위생상 유해 또는 보안상 위험하다고 인정되는 오두막과 같은 조악한 주택"을 말하였다.
통계적으로 보면, 1939년에 토막민이 2,779호에 11,709명이며, 불량주택 거주자는 23,957호에 104,250명으로 합계 26,736호에 115,959명으로 전체 인구의 0.5%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토막 및 불량주택 거주자를 지역적으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1940년도 광주시내에는 토막거주자가 10호에 22명, 그리고 불량주택 거주자가 198호에 739명이었다.
토막민에 대한 당국의 대처는 한결같았다. 즉 도시 미관을 해치고 또한 복잡한 사회문제를 야기시킴으로써 이들을 한 곳에 집단적으로 수용할 방침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의 주요도시에서 동일하게 계획되어 있었다. 광주의 토막민은 부동교 다리 밑과 사직공원 뒤에 움막을 짓고 기거함으로써 신사에 참배하러 오는 일본인들에게 미관상 좋지 않게 보였다.
일찍이 나환자 근절협회 사건으로 최흥종 목사와 대면하였던 우가키(宇垣) 총독이 초도 순시 차 1932년 광주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때를 맞추어 전라남도 도지사는 이들 걸인들과 부랑인들의 움막을 철거함과 동시에 부동교 다리 밑에 있는 토막민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렇게 하여 사정이 딱하게 된 사람들이 세핑 선교사를 찾아가 호소함과 동시에 최흥종 목사에게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최흥종 목사는 초도 순시를 위하여 전라남도 도청에 있는 총독을 면회하여 경양방죽 제방 밑에 이들을 위한 움막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냈을 뿐만 아니라 건축비용까지 받아내게 되었다. 최흥종 목사의 걸인생활은 해방을 전후하여 이현필 선생에게 많은 영향력을 주었다.
Ⅵ. 신사참배와 최흥종 목사
1. 사망통지서 발송
1935년 최흥종 목사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서울의 오긍선 의사를 찾아가서 오늘날의 정관절제 수술을 하였다. 최흥종 목사는 광주로 내려 와서 곧바로 YMCA 총무를 불러서 사망통지서를 수신인들에게 직접 전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때로부터 최흥종 목사는 호를 오방(五放)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최흥종 목사가 친자식처럼 사랑하였던 광주 YMCA 간사, 이영생 선생에게 오방의 의미를 이렇게 전하였다.
다섯 가지의 얽매임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으로, 첫째 가사에 방만, 둘째 사회에 방만, 셋째 경제에 방만, 넷째 정치에 방만, 다섯째 종교에 방만이 그것이다. 즉 혈육의 정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구속을 받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속박 받지 않고, 정치적으로 자기를 앞세우지 않으며, 종파를 초월하여 정한 곳이 없이 하나님 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다섯 가지의 생활신조를 말함이라고 하였다.
가정·사회·경제·정치에 매이지 않고, 더 나아가서 기성 교회의 제도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과 나 자신만의 관계에 충실함으로써 어지러웠던 시대에 등불이 되려는 순수한 마음에서 출발하였다. 이렇게 하여 최흥종 목사는 신앙인으로서의 양심을 팔아버리는 기성 교회와 지도자들에게 "너희들은 죽었다"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죽었다"라고 외쳤다. 최흥종 목사는 자신의 신체적인 죽음으로써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발하였다.
최흥종 목사에게서 버린다는 놓임을 받는다는 해방(放 : liberation)의 의미와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愛神)을 이웃(愛隣)과 국가(愛土)에 전하는 방법론적인 통로의 의미를 가졌다. 따라서 최흥종 목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사에 참배할 수 없었으므로 신사참배를 요구하는 자들을 향하여 나는 죽었다라고 생명을 버릴(放) 수밖에 없었으나, 그것은 신사에 절하지 않는 남은 자의 생명을 이웃과 국가를 위하여 보전하는 길이었다.
2. 교역자의 반성과 평신도의 각성을 촉함
최흥종 목사는 아직 제명되지는 않았지만, 오갈 데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구 하나 마음 터놓고 속 시원히 이야기할 상대도 많지 않았다. 최흥종 목사는 한국의 교회를 향하여 박관준 장로처럼 엘리야의 갈멜산 도전장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신사참배를 가결하기 7개월 빠른 1937년 2월〈교역자의 반성과 평신도의 각성을 촉함〉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교회의 친일적 전향을 꾸짖던 박영창·안이숙의 선지자의 목소리가 북쪽에서 울려 퍼졌다면, 광주의 최흥종 목사는 기성 교회보다는 평신도들에게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는 현재를 꾸짖기보다는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양의 옷을 입은 이리와 같은 목회자들에게 고개 숙이지 말고 평신도들이 스스로 각성하여 앞날을 준비하도록 당부하였다.
최흥종 목사는 1952년 빌링겐 대회(Willingen synod) 이후 새롭게 등장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보다 20여 년 앞서서 평신도 신학을 부르짖는 선구자였다. 모이는 교회에서 흩어지는 교회를 부르짖었다. 교회의 희망을 일신상의 영화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정절을 팔아버린 거짓 목사보다는 순결한 평신도에게서 찾았던 것이다.
3. 전남의전을 설립
대동아전쟁은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어 승승장구 승전보를 울리던 일본은 점점 밀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관동군은 제주도로 사령부를 옮기고, 전쟁의 환자치료를 위한 의사의 양성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서울·대구·평양에 이어 광주에도 의전을 세워 의사를 배출하도록 전라남도 지사에게 명령하였다.
이에 다급해진 도지사 야기(八木)는 오방정으로 최흥종 목사를 찾았다. 여기에서 최흥종 목사는 두 가지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첫째는 최흥종 목사 자신은 이미 죽은 몸으로 세상사에 관여치 않기로 작정하였으므로 다시 광주 시내에 몸을 보인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모순되는 일이었다. 둘째는 의전을 졸업한 의사들이 결국 군의관으로 차출될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과연 일본군에게 협조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셋째는 자금조달의 문제였다.
최흥종 목사는 암담한 현재를 보지 않고 먼 미래를 내다보았다. 현재와 같이 불투명한 사회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확신아래에서 주변의 눈총을 아랑곳하지 않고 현준호를 찾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폐교로 문을 닫은 수피아여학교 교사를 임시로 빌어 사용하기로 하였으며, 학생 100여 명을 모집하여 교수는 최흥종 목사의 동생인 최영욱·최상채 등의 시내의 개업의가 참여하였다. 이렇게 하여 광주의학 전문학교는 1944년 5월 20일 문을 열었다.
최흥종 목사는 전주 출신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인 손창식 학생을 아낀 나머지, 현준호에게 부탁하여 일본으로 유학시켰던 것이다. 손창식은 학업을 마친 후 상해로 건너가 군수산업에 뛰어 들었으며, 막대한 재산을 모았던 인물이었다. 손창식은 거뜬히 100만 원을 기부하였으며, 이 자금으로 광주의전의 필요 자재를 구입할 수 있었다.
Ⅶ. 해방과 지속적인 사회봉사 활동
1.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위원장
8월 16일 국기열의 집에 당시〈매일신문〉의 기자인 최인식 등 10여 명이 모여 다음날인 8월 17일에 창평상회에서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식을 갖기로 하고, 초대 위원장은 최흥종 목사를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최인식은 최흥종 목사를 오방정으로 찾았다. 최흥종 목사는 해방의 소식을 들었으며, 그 다음날 집회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최흥종 목사는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더불어 58명의 건국준비위원도 선출되었다. 광주 건국준비위원회의 사업은 곧바로 실시되었다.
2. 삼애학원과 신림교회 설립
그렇다면 최흥종 목사는 정치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어디에 마음을 쓰고 있었는가? 그것은 젊은이들의 정신교육이었다. 김용기 장로가 경기도 고양군 구기리에 제2의 이상촌을 건설하여 개간에 열심 하던 무렵인 1948년 3월에, 최흥종 목사는 광주국민고등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 학교의 정신을 반영하여 삼애학원으로 불렀다. 삼애정신은 어디에서 왔는가? 곧바로 덴마크의 그룬트비히(Grundwich)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愛神), 이웃을 사랑하고(愛隣), 땅을 사랑하는(愛土) 정신이다.
그런데 삼애학원을 맨 처음 개원한 장소는 학교건물도 아니고, 일반 가정도 아니고, 무등산 기슭 오방정 윗쪽에 있는 증심사(證心寺)라는 사찰의 객사였다. 선생은 최흥종·허백련·이은상·홍석은·김천배 등이었으며, 신입생은 이종모(李鐘模), 조종(曺鍾), 문석희(文錫熙 : 최흥종 목사의 다섯째 사위) 등 15명이었다.
교육의 내용은 농사실습이 아니라 정신교육이었다. 이곳에서 학생들을 맞이하여 덴마크의 농업혁명, 국민 계몽적인 정신 등을 강조하면서 함께 기거하였다.
이 사이에 최흥종 목사는 또다시 목회자로서의 고유한 모습을 드러낸다. 즉 오방정에 거처하는 동안에 증심사 주변에 살고 있는 지역민들과 더불어 교회를 시작하였다. 이 교회가 신림교회이다.
최흥종 목사는 오방정에 머무는 동안 교회를 세우고 3년여 목회활동을 하다가, 원효사 인근의 민가로 이주하면서 무등원을 설립하였다. 따라서 최흥종 목사는 정치적인 권유를 멀리하고 무등산 속에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3. 송동원과 무등원 사업에 협력
광주기독병원의 결핵병동은 동병상련 정신으로 서로 돕고 지냈는데, 환자들 가운데에서는 거제도 수용소에서 자유의 품에 안긴 북한 군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1955년 겨울에 이르러 퇴원을 앞둔 북한군 포로 출신의 환자가 자살을 기도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퇴원환자의 지속적인 요양과 재발방지를 위하여 요양소(sanatorium)를 건립하기로 작정하였다. 이에 환자들은 요우회(療友會)를 조직하고, 병원내에 구내매점을 운영함으로써 수익금으로 무의탁 환자와 빈곤한 환자의 치료비를 조달하였다.
이처럼 딱한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은 최흥종 목사였다. 최흥종 목사는 여러 사람을 통하여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을 모색하다가, 서울 YMCA 총무인 현동완에게 협조를 부탁하였다. 이와 동시에 최흥종 목사는 백십자여명회라는 결핵치유를 위한 호소문을 전국에 발송하였다.
白十字 黎明會
人類愛의 지극한 激動에서 民族 保健의 懇切한 要求에서 우리는 폐결핵의 예방과 치료와 根治를 시급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爲政當局과 有志諸賢은 물론, 同感의 憂虛와 退治의 方途를 念念構想이 非止一再임을 인식하오나, 세월은 電光石火로 흐르고 악마같은 결핵균은 男女靑壯年의 생명을 侵擇유린하여 民族의 生長律을 방해위축하고 국가의 保健體를 蟲溢 食肉적하며, 폐병환자증식 소치로 인하여 전문병원이 만원이 되어 收容기 處하여 攝生의 危懼가 莫比尤甚이요, 침식의 恐파가 難堪 暫默이라 衛生錯亂이 不息이면 안녕질서를 難保로다.
捨是呼 同病常憐 동지 幾個人이 熟考再三에 提議干高名大學하여 呼유 干有志諸君子하오니 此를 관철함에는 內外各界에 있는 온갖 有志와 助力을 要하며 有志者篤志家 公私各層과 官民合作을 期하는 바입니다. 人道의 正義로는 모든 힘을 사용할 수 있는지라, 자에 黎明會 취지를 천명하나이다.
최흥종 목사의 호소문을 접한 현동완은 당시 국회의장인 이기붕 씨에게 호소하였으며,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액수의 지원금이 전달되었다. 이 부분을 양한묵 목사는 이렇게 기억한다.
이기붕 씨가 큰 액수의 돈을 희사하여 현재의 광주 지산동 신양파크 호텔아래에 6,000여 평의 땅을 전세로 얻었다. 그리고 일차로 60여 명의 환자를 퇴원시키고, 이기붕 씨를 기념하여 그의 호 晩松을 넣은 松東院이라고 이름하였다.
이렇게 하여 결핵환자의 지속적인 치료가 이루어졌으며, 카딩톤 의사도 매우 흡족해 하면서, "요양소의 일들은 대다수 퇴원 환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송동원에 있는 퇴원환자들의 지속적인 요양을 위하여 충분한 양의 식량이 공급되어야 하는데, 이 또한 큰 걱정이었다. 다행히 카딩톤은 한미재단으로부터 식량과 구호물자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송동원에 배속된 환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여전히 결핵 양성환자이었다. 이에 광주시는 이들의 집단수용은 도시에 결핵환자를 더욱 더 많이 확산시킬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송동원의 해체를 요구하였다. 따라서 카딩톤(Herbert A. Codington,)과 최흥종 목사는 양성 환자들을 조봉동, 골매, 그리고 무등산(소망실) 등 세 곳에 분산 수용하고, 이들의 식사 및 생활을 동광원 여자 수녀들에게 위임하였다. 그리고 결핵 음성판명자들은 무등산 깊숙이 원효사(元曉寺) 아래의 공터에 집을 짓고 예배당까지 건설하여 이름을 무등원으로 개칭하였다.
이렇듯이 최흥종 목사는 광주 기독병원의 카딩톤 원장, 동광원의 이현필 선생과 함께 광주의 결핵퇴치 사업에 참여하였다. 카딩톤 원장은 이현필 선생이 이끄는 고아원 동광원의 전속 의사로 광주시 사회과 및 보건과에 등록함으로써 지속적인 허가를 얻어낼 수 있도록 협력하였으며, 이현필 선생은 휘하의 여자 수도자들에게 동광원과 무등원에서 고아들과 환우들의 식사 및 살림을 맡아서 헌신하도록 명령하였던 것이다.
4. 음성 나환자 정착촌 : 호혜원 설립
갈 곳 없는 음성 나환자들은 최흥종 목사의 온정의 손길을 기대하였다. 이러한 딱한 사정을 보다 못한 최흥종 목사는 전라남도 보건과 그리고 친지들을 찾아다녔으며, 그 결과 나주군 남평면 산포리에 10여 명의 음성 퇴원환자들을 정착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부분을 최흥종 목사는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지금 직접 관계하고 있는 호혜원도 그러한 예의 하나의 좋은 본보기인가 합니다. 광주에서 약 20여리 격하여 있는 산간 무인지대에서……경쾌 환자들이 합세하여 정착하더니 그들 지도자들이 자주 나를 찾아와 육성의 길을 문의하는 것이었고 그들의 열성에 나도 감동되어 현지를 답사하여 보았더니 이상촌으로서의 입지적 조건도 매우 좋은바 있어 당국의 인가와 보조 있기를 힘써주는 바 있었으며……
이상과 같은 최흥종 목사의 지원에 힘을 얻은 음성 나환자들은, 또한 최흥종 목사의 지도에 따라 전국 각계 지도자를 찾아다니면서 지속적인 운영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국회의원 정준 의원, 함태영 목사, 김재준 목사, 조향록 목사, 진문원 씨 등을 이사로 추대하고, 정준 의원을 초대단장으로 초대함으로써 정식 사단법인으로 발족하였다."
5. 유언장 배포와 광주 시민장(市民葬)
최흥종 목사는 무등원 예배처소에 기거하면서 성경은 헬라어 원어로 읽고 도덕경은 순 한문으로 된 원본을 읽었다. 최흥종 목사는 유언장을 발송한 이래로 금식을 선포하고 식사를 일체 중지하였다. 최흥종 목사를 따르는 광주 YMCA의 이영생·이문환·조아라·최득은 등은 지게꾼을 앞세우고 무등산을 올라가 최흥종 목사를 아들 최득은의 안집으로 모셨다.
그리고 이 사이에 유언장의 내용과 일치되게 전국교회의 교직자들에게 보내는 경고문을 발송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목회자들로부터, 특히 전라도 지역의 목회자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샀다. 그리하여 1966년 2월 28일을 기하여 절필하였다. 그러면서도 제자들을 불러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최흥종 목사는 금식을 시작한 날로부터 100일째 되는 1966년 5월 14일 오후 2시 10분에 하늘나라로 갔으며 5월 18일 광주 시민장(市民葬)을 광주공원에서 거행하였다. 시민들은 최흥종 목사를 보내는 슬픔을 나누기 위하여 모여들었으며, 학생들, 부랑자들, 나환자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홍성태 목사의 기도에 이어, 장의위원장 허백련 선생의 조사가 울렸다.
Ⅷ. 결 론
호남지역에서 1892년부터 1984년까지 190명의 선교사가 활동하였으나 이들에 대한 학문적·비판적 연구가 지금까지 없었다. 그리하여 본 연구자는 이들에 대한 연구를 시도하였으며, 그 방법론은 종합적 사관이었다.
이 방법을 통하여 선교사들과 한국인 목회자들의 선교정책과 선교활동을 분석한 결과, 대다수의 선교사들과 한국인 목회자들은 1890년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세운 네비우스 방법론과 1893년 미국 남북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합동으로 세운 합동공의회 선교 방법론에 의존하여 선교에 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교회설립과 개인구원 확신, 종말론적인 기대, 청교도적인 윤리, 제반 사회문제에 대한 '엄정중립 불간섭'을 고수하였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이 연구는 단순한 교회사가 아니라, 호남지역에서의 교회의 위치를 최흥종 목사라는 한 인물을 통하여 살펴보는 통전적이며 종합적인 교회사이다. 그리고 이 연구는 최흥종 목사를 통하여 교회가 한국 사회에서 가져야 하는 위치를 '복음적'이라는 단어와 '사회봉사'라는 단어로 연결시켜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선교사들이 사회봉사적 측면을 거부하고 오로지 순수한 복음만을 강조함으로써 교회와 사회를 이원화시킨 반면에, 최흥종 목사는 교회와 사회를 일원화시켰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최흥종 목사는 조선조 말기(1880년)에 태어나서 1905년에 순검과 1907년에 농공은행 은행원을 거치는 등 어거스틴처럼 출세 지향적 삶을 추구하다가, 1909년 포사이트(Wiley H. Forsythe) 선교사가 임종에 가까운 여자 나환자에게 베푸는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행위에 감동을 받고 기독교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았으며, 그것도 사회봉사적 삶을 기독교인의 정형으로 파악하였다. 그에게서 기독교인과 교회는 소속된 사회의 일원으로서 예수님의 복음과 삶으로써 사회를 섬기는 봉사자가 될 때에 가장 올바른 정형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출세 지향적 삶을 포기하고 헌신적인 사회 봉사적 삶을 추구하였으며, 이러한 삶이 그에게서는 곧바로 목회였다.
다시 말하여, 최흥종 목사의 출발점은 복음이라는 확실한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이 출발점인 복음은 항상 사회적 봉사라는 행동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삶과 이 복음적 깨달음을 일치시키는 신행일치(信行一致)의 표본이었다. 이 신행일치의 삶을 철저하게 실천해 나가는 성서적 가르침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막 3 : 31∼35)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방 최흥종 목사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사랑"이며, 그것도 명사형이 아니라 동사형 "사랑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최흥종 목사가 깨달은 사랑의 복음은 ① 하나님께 대한 사랑(愛神)으로부터 ② 동포(愛隣), 그리고 ③ 교회와 자신이 속한 국가(愛土)라고 하였다.
최흥종 목사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충(忠), 절(節), 의(義)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최흥종 목사는 일제의 신사에 절할 수 없었다. 일제가 종교교육부를 총회 내에 설치하여 기존의 교회를 통제하고, 노회와 총회를 통하여 신사참배를 결정하고, 교인들에게 적당하게 타협하며 살 것을 가르치는 목회자들을 대신하여, 1935년에 "나는 죽었다"라는〈사망통지서〉를 친지 및 가족에게 발송함으로써 하나님께 사죄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최흥종 목사는 이 시대의 아픔을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고난받는 종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충·절·의를 저버린 목회자들이 교계에 군림하면서 평신도들을 그릇된 길로 끌고 가는 모습을 보고서 최흥종 목사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37년 2월〈교역자의 반성과 평신도의 각성을 촉함〉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최흥종 목사는 평신도가 거짓 선지자를 따라가면 거짓 선지자와 함께 공멸한다(렘 14 : 15∼16)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신사에 절하는 목회자들을 향하여 양의랑류(羊衣狼類)라고 지적하면서 평신도들이 각성하여 이와 같은 목회자들을 따르지 말 것을 경고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서 "그리스도의 신부는 이부종사(二夫從事)할 수 없다"고 외쳤던 것과 같은 정절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최흥종 목사는 동포에 대한 애린(愛隣)의 사랑을 경(敬), 존(尊), 혜(惠), 자(慈) 등으로 표현하였다. 최흥종 목사는 이 사랑을 따라 ① 나환자 ② 빈민과 걸인 ③ 결핵환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냈다.
최흥종 목사는 1909년 4월 포사이트 의사가 임종에 가까운 여자 나환자를 부축하며 걷는 모습에서 예수님을 보았으며, 그의 일생동안 그 모습이 '오 성인이여!' 라는 감격으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최흥종 목사는 1909년에서 1914년까지 광주 봉선동 나환자 진료소에서 한국인 책임자 및 치료사로 봉사하였다. 또한 1925년에서 1927년까지 광주 진료소를 여수군 율촌면 신풍리 애양원으로 이전하는 작업에 협조하였으며, 1932년에는 나환자 근절협회를 만들어 한국의 나환자를 근본적으로 치료하려고 하였다. 해방과 함께 1945년 9월에 한국나예방협회를 조직하여 돌보고, 1958년에는 음성 나환자의 자활갱생을 위한 호혜원을 설립하여 죽는 날까지 후원하였다.
최흥종 목사는 1919년부터 광주로 옮겨와 광주 제중원 간호부장으로 재직하기 시작한 세핑 여선교사와 함께 광주천 다리 밑과 사직공원 뒤켠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던 걸인들과 빈민들의 생활보호와 거주보호를 위하여 전라남도 도지사 및 행정당국에 적극적으로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에는 경양방죽 제방 밑에 이들을 위한 움막설치를 허락 받았으며, 최흥종 목사 본인도 1935년 3월〈사망통지서〉를 발송한 이후에는 이들과 함께 잠시 기거하였다. 그리고 1933년 계유년에는 계유구락부를 만들어 37명의 회원이 납부하는 회비를 거두어 걸인들의 구제에 사용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1952년부터 광주기독병원 원장인 카딩톤(Herbert A. Codington : 고허번)과 더불어 결핵환자들의 자활갱생을 위하여 기독교 각 단체에 호소함으로써 송동원(나중에 무등원으로 개명함) 설립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으며, 1955년부터는 이들과 더불어 함께 기거하면서 영적인 지도자로 이끌었다.
최흥종 목사에게는 한국의 산하에 대한 농촌사랑과 함께 농업을 이끌어 갈 젊은이들의 정신교육으로 나타났다. 최흥종 목사는 이 사랑을 동포애(同胞愛)로 표현하였다. 그리하여 이 민족을 일깨우기 위한 ① 젊은이들을 교육하고 ② 여성을 일깨우고 ③ 해외에 흩어진 동포들에 대한 선교사를 자청하고 ④ 농촌을 일깨우는 교육에 임하였다.
최흥종 목사는 한국의 젊은이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미국의 여러 선교단체 및 기독교 단체에게 한국에 "더 많은 학교, 더 많은 전문학교, 그리고 성경교육기관"을 설치할 수 있도록 재정적 협조를 당부하였다. 그리하여 3·1 만세운동 이후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가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과제를 찾아서 일생동안 보람되게 살도록 이끌려 하였다. 최흥종 목사는 1920년대의 혼란과 좌절은 또 다른 시대를 향한 과도기의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둡고 암담한 눈을 높이 떠서 "사상을 고상히 하고 주의를 철저히 할 것"을 당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이 마약에 물들지 않도록 모루히네 방독회를 조직하였으며, 금주와 금연운동, 공창폐지운동 등 사회정화사업에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젊은이들의 정신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1920년부터는 목포가 낳은 여류 문호 박화성 씨를 교사로 청빙하여 광주 북문밖교회 내에 여성을 위한 야학을 설치함으로써, 여성의 깨우침과 지적인 향상을 촉구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제수인 김필례 씨가 주도하는 흥학관에서 야학반을 운영할 때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더 나아가서, 1945년 해방과 함께 전국이 또다시 동요하면서 좌우 대결구도로 치닫고 있을 때, 젊은이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의제 허백련 화백과 함께 삼애학원을 만들고 젊은이들의 정신을 교육하였다. 깨어서 이 시대를 이끌어 갈 인재가 되도록 실력을 양성시켜 주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말한 것처럼, 인재가 없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인재가 되어 이 시대를 이끌어 갈 꿈을 갖도록 당부하였다.
또한 최흥종 목사에게는 1910년 강점과 함께 한국 국토에 대한 토지조사로 인한 토지상실과 몰려든 일본의 대지주 이민들의 유입으로 소작농으로 전락한 한국의 농민들이, 나라를 떠나 만주로, 연해주로 대거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흥종 목사는 이처럼 흩어진 동포들을 보살피기 위한 서 시베리아 선교사를 자청하여 1922년 11월에서 1923년까지 9월까지 봉사하였으며, 1927년 1월에 또다시 서 시베리아 선교사로 떠났으나 변화된 시베리아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감옥에 수감되는 등 4개월만에 강제로 귀국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 농촌의 부흥과 각성을 위하여 광주 YMCA 주관으로 진행된 전라남도 지역의 신용협동조합 조직을 촉구함으로써 이들의 자립을 시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농사법 도입을 위하여 쌀 전문 농업선교사 에비슨(Gordon W. Avison : 어비손)과 그의 큰사위 강순명과 함께 전라남도 순회 강연회와 지도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이들의 활동을 협력하기 위하여 최흥종 목사는 1928년에는 광주 YMCA 주관으로 농촌사업연구회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을 말하였다. 다시 이 사랑은 자신의 손해를 돌보지 않는 뼈를 깎는 아픔을 동반하였다. 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최흥종 목사는 다섯 가지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오방(五放), 즉 다섯 가지로부터의 자유로움은 가사로부터, 사회로부터, 경제로부터, 정치로부터 그리고 종교로부터 자유로움을 의미하듯이, 그는 가족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하였다. 그렇지만, 이 강요는 억지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따라오기를 바라는 모범이었다. 이렇게 가족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따라오면 그것은 곧바로 새로운 삶을 얻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 진정한 종교였다.
그렇기 때문에 최흥종 목사에게 종교는 기독교인과 교회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 대한 희생적인 섬김이며, 이것이 없으면 신앙도 종교도 아니었다. 이러한 각도에서 최흥종 목사는 기독교 신앙을 ① 반(反)가족생활을 강요하는 이현필 유형의 신앙관도 거부하고 ② 동양사상과 혼합된 기독교 이해도 거부하였으며 ③ 희생과 봉사의 삶을 발판 삼아 정치적 입신의 기회로 삼는 것도 거부하였다.
최흥종 목사에게는 기독교가 성 프란시스코(St. Francisco) 유형의 빈곤과 성결을 통한 자기완성을 향한 수행의 종교가 아니었다. 최흥종 목사는 이현필 선생과 그를 따르는 동광원 식구들이 가족적인 삶을 거부하는 독신주의를 반대하였다. 기독교는 산 위에 있는 초막 속의 종교가 아니라, 산 아래에서 고통받는 인민과 함께 하는 대중의 종교, 생활의 종교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은둔 수도형의 기독교는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유영모 유형의 동양종교와 혼합된 기독교 사회주의적 이념도 아니었다. 유영모 선생과 그를 따르는 YMCA의 연경반 모임체들이 추구하는 톨스토이(Leo Tolstoy) 형의 사색적인 기독교도는 아니었다. 이들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따르면서도 그의 실천적인 사회봉사는 따르지 않았다. 우치무라의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투쟁 등을 당시 일제치하에서 마땅히 일으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하게 자기 수양적이며, 기존교회에 대한 거부적인 태도는 결코 찬성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가깝게 지내면서도, 이들의 사색적인 기독교 사상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로 보았던 것이다.
동시에 최흥종 목사는 기독교를 통한 정치적 입신양명의 기회를 잡으려는 사람들도 거부하였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앙인으로서 순수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선생이며, 그의 모범적 삶을 염원하는 일반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들어오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최흥종 목사는 자신의 소명을 확실히 하였던 사람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최흥종 목사는 목사로서의 사명에 대한 충실을 사랑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김구 선생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제1대, 그리고 제2대 국회와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정치에 참여하였던 수많은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최흥종 목사가 이처럼 동사적인 사랑을 실행함으로써 사회의 현실적인 제반 문제에 관여하고, 사회적 변화를 주도하는 중심인물로 부각되는 것이 당시 선교사들에게는 몹시도 마음에 거슬리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1927년에 뉴랜드 목사는 "선교사 그리고 오늘날의 한국에서의 선교사의 메시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하여 '사회복음'인가 '순수복음'인가라는 논제를 제기하면서, 결코 사회복음으로 기울어질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와 같은 논지를 더욱 확고히 한 사람은 마펫 목사로서 그는 1934년에 "조선교회에 기함"이라는 설교를 통하여 "……40년 전에 자신이 전한 복음을 변하지 말고 그대로 지킬 것"을 당부하면서 "만일 이것을 변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것이다"라고 경고하였다.
그렇다면 최흥종 목사의 복음과 사회의 일치를 강조하는 신행일치적 삶은 복음적인 삶이 아니란 말인가? 그의 삶이 선교사들이 전한 순수복음에서 떠났단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논문에서는 선교사들 내부에서 일어났던 논쟁은 다루지 않았지만, 최흥종 목사에게 감화를 주었던 선교사들은, 다시 말하여 오웬, 포사이트, 세핑, 그리고 카딩톤 등은 복음과 함께 사회의 하층민들의 아픔을 친히 몸으로 감싸줌으로써 동료 선교사 사회에서 백안시 당하곤 하였던 인물들이다. 이처럼 신행일치적 삶으로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섬겼던 선교사들도 그렇다면 사회복음주의자이며, 다른 복음을 전한 자들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최흥종 목사와 그에게 감화를 주었던 앞의 네 사람의 선교사들에게는 기독교가 종교(religion)가 아니라, 신앙(faith)이었다. 그리하여 최흥종 목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나라 사랑을 하나로 보고, 이것을 교회를 포함한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실천의 방법은 버림과 자유로움[放]이었다. 그는 다섯 가지를 버림으로써 자유함을 누렸으나 이 자유로움은 그리스도에게 철저히 예속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다섯 가지로부터의 자유로움은 그리스도에게 매이기 위한 벗어남이었다. 그에게는 풀고 매는 것이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진정한 자유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한국사회의 제반 문제를 교회내에서 논의하고 개입하게 되면 복음이 왜곡되고 교회의 선교가 지장을 받을 것으로 보았지만, 이것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자체적으로 모순이었다. 왜냐하면 선교사들이 한국인 교인들을 교육하고 양육함으로써 복음 안에서 하나님과 국가와 이웃에 대한 섬김을 실천하려는 불같은 열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이 양육한 한국인 교인들이 양육받은 대로 국가와 이웃에게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모순일 뿐이다. 마펫 선교사가 말한 대로 "40년 전에 전한 그 복음 그대로"를 끝까지 고집하는 것은 기독교 복음을 편협하게 만드는 것이며 한 두 사람의 복음이해를 절대화시키는 오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한국교회가 3·1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외래종교로서의 배척을 벗어버리고 한국사회에서 제자리를 찾았으며, 1920대에서 해방 때까지 한국사회의 제반 문제에 깊숙이 관여하여 해결함으로써 많은 개종자를 끌어들인 것은 복음적 사회운동이 선교의 가장 힘있는 수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1895년 선교사 무어(Samuel Moore)의 주선으로 백정 박씨가 장티푸스에서 회복되고 곧바로 이어서 고종에게 상소하여 조선의 신분제도가 폐지됨으로써 하층민들에게 인권이 주어지자 1895년까지 통계에 잡히지도 않던 교인의 숫자가 1896∼97년에 6,800명, 그리고 1897∼98년에 이르러 7,500명으로 증가한다. 그리고 1910년에서 1919년까지 140,000선을 유지하던 숫자가 3·1만세운동 이후 한국교회가 사회의 제반 영역에 참여하여 지도자적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1920년에서 1930년까지 190,000선을 유지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에 최흥종 목사가 보여준 복음적-사회봉사적-목회자로서의 삶은 교회발전과 선교에 아주 적합한 모범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그가 복음적-사회봉사적-목회자로서 살아감으로써 교권적 목회세계에서는 배척을 당하고, 동시에 주류적인 선교사들과도 교분을 나누지 못하였지만 그의 신앙적 자세는 지역사회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음을 감안할 때, 개신교의 사회봉사적 참여가 시급한 선교의 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