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다솜지역아동센터
 
 
 
 

친구 카페

 
 
카페 게시글
♡ 기차길옆 오막살이 스크랩 한반도 서남해지역의 문명사적 위상
오랑캐풀 추천 0 조회 39 09.09.23 19: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1세기는 문화관광시대이기도 하다. 한반도는 세계 고인돌의 원형인 수 많은 고인돌들.세계 검들의 원형인 돌검들.세계최대규모의 전방후원분 무덤양식(서울 한강변 구태백제 유적).공룡화석.세계 최초 최고의 농경유물과 선사유적 등 유구한 문화유물유적들로 가득한 땅이다. 역사를 한민족 주체사관으로 바로 세우고 역사유적.유물을 잘 보존하여 관광상품화해야 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전남지역에 해당하는 한반도 서남해지역은 왜 그렇게 고인돌들이 밀집분포되어 있는 것일까?
서남해 고인돌에는 마고할미의 전설이 깃들어 있고,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마고는 조상들이
아이을 임신했을 때 3신 할미가 점지해 주었다할때의 3신 할미를 말한다. 마고는 신라 박제상이
기록한 [부도지]에 나오는 '마고성'의 여성통치자다. 문제는 마고성의 위치가 어디인가인데,
2만년전 지금의 서해는 호주 시드니대학 지질학과 교수들의 전문에 따르면 중국과 연결된
육지였다고 한다. 해빙기이후 바다가 되었는데, 이 때 마고성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지
않았나 생각한다. 마고전설이 서남해지역의 고인돌에 많이 깃들어 있고, 고인돌이 모계사회의
흔적이고, 서남해지역이 나주 영산강 아파트무덤에서 발굴된 유골들의 DNA조사를 통해서도
드러났듯이 모계사회였음이 입증되었다는 사실은 마고성의 위치가 바로 서해지역이였음을
입증한다고 본다. 마고성을 떠난 황궁씨는 천산이 있는 북서쪽으로 이동하여
도을 닦는 도인족이 되어 유인씨을 경유하여 한인씨에 이르러 백두산지역에 중심지를 삼고
유라시아지역을 포괄하는 12한국을 건설했다고 봐야 한다.

한자어 바다'해'도 갑골문자로 보면 어미 모자가 들어가 있어
마고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서남해지역이 유난히도 고인돌들이 밀집되어
있으며, 동남아.인도.유럽지역 등 세계 고인돌의 성지가 되고 있다.


그러면 동남아.인도.유럽지역의 고인돌문화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아마도 일찌기 발달한 서남해지역의 해양문화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한반도 고인돌.농경문화를 가지고 해로를 따라서 동남아에서
유럽까지 전파했으며, 서남해 사람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단고기]에 보면 단군이 마한인들에게 선박을 제조하라는 기록도 있고
일본열도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마한수군 500여척이 출동하여 진압한 기록도 있다.

구태백제가 동아시아 해상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도 모두
서남해 지역의 선박제조술과 해양기술이 발판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 서남해안 사람들이 바로 고대에는 [왜]로 불리던 마한인들이였다.
[왜]는 마한의 해양세력이라 보면 된다. 북방유목세력인 부여세력의 남하로
한반도 서남해지역의 '왜'권력이 일본열도로 이주했다고 볼 수 있으며,
한반도에서 무역을 차단하는 봉쇄정책이 있을 때는 생존을 위해
해적질을 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윤복현]

세계 고인돌 분포지역(노란색)
한국에는 8천년전 고인돌도 있고 (전남 화순).세계 고인돌의 대부분이
한반도에 있다.다른 나라의 고인돌들은 한국보다 수천년 늦은 것들.즉
김치가 한국이 원조인 것처럼 고인돌도 한국이 원조인 것.고인돌은 영어로
돌멘(DOLMEN)이라 한다.이는 '돌로 된 멘'이라 뜻으로 [돌만]이라는 소리인데
[만]이란 만주의 [만]도 되겠지만 (만 - 마의 사람) 남한 지역 즉 [마한(馬韓)]의
[마]와 상통하는 말.고인돌은 특히 남한지역에 많다.가장 오래된 고인돌도
남한에 있다.[마한(馬韓)]의 말마 자 馬는 한국어의 [마]라는 글자를
한자식으로 표기하기 위해서 붙인 것.

[자료]한반도(주로 서남해)에서 세계로 전파된 고인돌문화


그런데 유럽의 모든 대형 거석유적들은 모두 우리 한반도의 고인돌에서 파생(派生)된 것들입니다. 인도(India)의 고인돌은 한참 늦은 시기에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반도 고인돌과 관련하여 영국(英國), 즉 잉글랜드(England), 웨일즈(Wales), 스코트랜드(Scotland), 그리고 아일랜드(Ireland)와 영국의 식민지(植民地)인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는 지금부터 4000년 전 이상되는 과거에 아시아인(Asians)들이 서쪽의 죽음의 땅을 찾으러 갔다가 살게 된 곳입니다. 선사시대(先史時代)에는 죽음이 또 하나의 '저세상(the other world)'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많은 아시아인들이 브리티쉬(British) 제도(諸島)로 이주(移住)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들이 남긴 언어(言語)는 아직도 웨일즈 지방에 방언(方言)으로 남아있으며, 스코트랜드와 특히 아일랜드에서는 가장 분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즉 문장(文章) 마지막에 동사(動詞)가 따르는 우리 한글의 문법(文法)이 이들 웨일즈와 아일랜드 고어(古語)에 남아있으며, 또한 수많은 고인돌(Dolmens)과 거석유적(Megaliths)들은 대부분 아시아에서 이주한 비이커족(Beaker People)들이 만들었지요. 스토운헨지(Stonehenge)와 애브버리 둘레돌(Avebury Circle) 등 수많은 영국과 아일랜드 유적들은 대부분 아시아에서 이주한 비이커족이 남긴 것입니다.
 
그런데 비이커(beaker)라는 것은 바로 신의주(新義州)에서 평양(平壤) 사이에서 많이 출토되는 '미송리형 단지'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한반도(韓半島)의 많은 고인돌들은 이스라엘(Israel)과 요르단(Jordan), 러시아(Russia) 코카사스(Caucasas) 지방에서 발견된 고인돌들의 원형(元型)이며, 지중해(地中海)의 코르시카(Corsica, Corse) 섬에서는 돌널무덤(Cists)과 함께 우리나라의 개석식(蓋石式) 고인돌과 탁자식(卓子式) 고인돌이 발견됩니다. 또한 이같은 고인돌들은 피레네(Pyrenees) 산맥에서도 발견되면서, 프랑스와 그리고 브리티쉬 제도로 연결되지요.
 
그런데 유럽의 모든 대형 거석유적들은 모두 우리 한반도의 고인돌에서 파생(派生)된 것들입니다. 인도(India)의 고인돌은 한참 늦은 시기에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브리티쉬 제도의 둘레돌(環狀列石, Stone Circle)은 원래 스페인(Spain)과 포르투갈(Portugal)에서 건너간 한반도 고인돌 종족의 후손(後孫)들의 영향을 받아, 우리말로 '뫼'라고 부르는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에서 비롯된 구조입니다. 그러니 영국에서의 둘레돌이 얼마나 늦게 만들어졌는지 알만 하지요. 이 '뫼'라는 말은 영국에서 무어(Moor)라는 말로 남아있으며, 이 무어인(Moors)들이 바로 웨일즈 지방과 잉글랜드 서남쪽의 콘월(Cornwall) 지방, 그리고 아일랜드에 살던 아시아인들의 후손(後孫)입니다.

무어(moor)는 보드민 무어(Bodmin Moor), 다트 무어(Dart Moor), 엑스 무어(Exmoor), 노스? 무어(North York Moor) 등 영국 중남부 지역의 황무지 고원지대를 일컫는 말인데, 그 원래의 뜻은 개활지(open land)로서, 평원에 솟은 언덕 정도로 여기면 적당합니다. 이 고원지대에 크고 작은 거석문화 유적지들이 지천으로 산재하고 있는데, 현재는 일년 내내 거센 비바람을 맞아 기후가 최악으로서 아무도 살지못하는 지역이지만 청동기와 철기시대에는 나무와 꽃이 피고 샘이 솟는 기후 좋은 지역이었다는 점이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하여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은 특히 원시 고원족(일명 하이랜더, Highlander)이 거주하였던 스코틀랜드 고원지대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지금의 무어인의 명칭 자체는 고아시아족 계통이지만 대개의 잉글리쉬인들이 그렇듯이 영국을 점령한 침략자들은 기존의 거주민들의 문화를 통째로 훔쳐 자신의 것으로 도용하였다는 역사적인 증거들이 많습니다. 영국해안에는 해안 단구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필자가 보기에 원래 잉글랜드는 바다 지역으로서, 영국제도 전체가 지반이 떠오르면서 바다가 육지로 바뀐 지역이어서 처음부터 주인이 없던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지층변동을 수만 년 전 또는 수억 년 전이라 말한 것은 전혀 근거없이 말한 것으로 완전히 엉터리 학설입니다. 영국 고고학을 보면 거석문화를 전후하여 이 같은 엉터리들이 지천으로 깔려있는데, 지금으로서 이것들을 제대로 증명하라 하면 제대로 증명될 것이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은 절대 아닙니다. 이처럼 필자가 보기에 기원 전후의 영국역사는 엄청난 오류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국 역사는 그 근간을 로마의 기록에서 찾고 나머지는 아일랜드 수사들의 기록에서 인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 고고학적인 자료에서는 오스트리아 할슈타트의 철기 문화 이후인데, 이것이 뒤죽박죽된 경우들이 많아 도무지 종잡을 수 없게끔 되어 있습니다. 즉 숨기는 것이 많다는 말인데, 영국이 말하는 자신들의 역사에서는 로마가 물러간 이후에 색슨족이 침입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필자의 잘못 판단도 물론 있지만 실상 그다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기원전후 영국은 한마디로 개판이어서, 제멋대로 조작하여도 그것을 입증 또는 반박할 만한 근거자료가 희박합니다. 워낙 아일랜드는 북유럽 문화의 전통있는 근원지로 알려져 있었으며, 그에 반해 영국은 일자 무식한 해적들이 사는 곳으로, 살인강도와 도둑질을 본업으로 삼는 부족들이 많았습니다. 전통적으로 영국의 재력은 오로지 정보원을 많이 두어 국민을 압제하고 착취하는 식민통치에서 나오는데, 과거 영국에서 중국 도자기의 보유는 곧 부유한 재력을 뜻하는 것으로 중국 도자기의 밀무역과 아시아에서의 해적질에서 근대 초기 영국의 자본이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색슨족(Saxon)은 대개 독일의 작센(Sachsen) 지방에서 건너온 종족으로, 영국에서 거석문화 이후에 영국으로 들어온 종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센은 곧 우랄산맥 주변에 퍼져있던 용맹한 무사 코작(Kozak)인들과 인도 북부를 점령했던 무사귀족 사카(Saka)인들과 상통하는 점이 있는데, 코작과 사카는 터어키(색륜-탁륜-튜르크-토이기)족과 함께 근본이 아시아족으로서, 그 근간이 동아시아의 색륜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색륜은 곧 한반도 북방 동이족으로서, 색에서 작 또는 탁으로 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잉글랜드의 이주민이었던 앵글로 색슨족은 단군시대에 만주일대에서 서로 앙숙이었던 앙골(앙骨, Angol)과 숙신(肅愼, Sukshin, Jushen)과 발음이 통하여 색슨족의 어원이 숙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 라이프찌히(Leipzig) 근처의 할(Halle, 또는 쌀, Saale)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엘베(Elbe)강 유역의 작센 지방 또한 그 대부분 지역이 원래 바다였습니다. 글/변광현
 

경남 창녕군에서 발굴. 8천여 년전의 배로 세계 최고 선박-고대 한국인들이 해양족이였음을 증명함

 
 나주 영산강지역 사람들의 웅관무덤에서 발굴된 유골은 현대 일본인들의 원형임이 DNA분석결과 밝혀졌다. 고대 영산강지역에 정치경제의 중심지를 둔 서남해안 사람들은 일찌기 일본열도에 영산강 문화를 전파시켰고 이주하여 일본에 일찌기 뿌리를 내린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현대 일본인들의 조상은 영산강문화를 일본열도에 전파한 서남해 사람들이며, 고대문헌에서는 이들을 한반도남부지역에 거주하는 마한인들로 [왜]로 기록되었으며, 백제인 부여세력의 남하로 인하여 일본열주로 권력기반이 이주했으며, 백제와는 협력세력으로 교류협력했다. 그리고 서남해지역의 선박제조술과 항해기술없이는 백제의 22담로라는 해상제국건설도 존재할 수 없었다.


[방송자료]역사추적
영산강 아파트형 고분의 미스터리


▣방송 : 2009. 5. 11 (월) 23:30~24:15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손현철 PD
▣글 : 박민경 작가

 

지난 2005년 영산강 중류 지역인 전라남도 나주 영동리에서
5~6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 20여구가 발견됐다.

1500년 전의 인골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발굴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

게다가 이 고분군 안에는 백제의 영향력을 벗어난
여러 양식의 무덤들이 나타났는데..

여러 종류의 무덤이 아파트처럼 얽혀 있는
영동리 고분에 대한 의문은 깊어만 갔다.

과연 1500년 전 무덤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가?”
옹관 고분의 등장이 주는 단서

▲ 나주 영동리 고분 중 제4호분 발굴현장
나주 영동리 고분은 지난 2005년 밭을 개간하는 과정 중 석실과 인골이 노출되면서 빛을 보게 되었다. 4세기~6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고분에는 다양한 무덤 양식을 볼 수 있다. 돌로 방을 만들어 시신을 매장한 백제식 돌방무덤, 판석으로 관을 만든 돌널무덤, 옹관으로 된 무덤까지..... 이 중 인골이 무더기로 발견된 것은 6세기 것으로, 석실이 6개, 7개씩 붙어있는 형태의 아파트형 고분. 그렇다면 무덤의 주인은 어느 시대, 어떤 정치체제의 집단이었을까?
▲ 나주 영동리에서 출토된 옹관고분과 토기들

“인골 분석 결과, 현대 일본인과 유사하다”
외부 세력의 유입? 또 다른 일본 전파의 흔적?

▲ 나주 영동리 출토 인골 중 두개골
영동리 고분 발굴에서 또 하나의 주목할 점은 1500년 전 인골이 무려 23구가 발굴된 것이다. 수습된 인골은 두개골의 이목구비가 모여 있어, 그 동안 한반도에서 수습된 다른 두개골과 차이가 있었다. 또한 형태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어서 형질분석과 DNA분석이 가능했다. 분석 결과 유전적으로 신라, 가야인과 차이를 보였고, 조선인들과도 차이가 있었다. 놀랍게도 인골은 현대 일본인과 가장 가까웠는데... 이러한 유사성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옹관고분을 사용했던 독립적 정치세력이 있었다”
다국적 출토 유물이 보여주는 세력의 정체는?

▲ 나주 화정리 마산고분 출토 옹관과 부장품

최근 영산강 유역의 고분에서 주목 받는 무덤 양식이 바로 옹관이다. 크기가 큰 옹기 한 쌍을 관으로 이용해 시신을 매장하는 방식으로, 최근 영산강 일대의 영동리, 복암리 고분에서 수장급이 사용한 무덤의 양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 통해 학자들은 옹관고분을 사용한 세력이 백제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정치연합체라는 점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 부장품에서도 백제보다는 신라나 가야, 심지어는 왜에 가까운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결국 이들이 백제보다는 다른 지역과 더 많이 교류한 세력임을 알 수 있다.
▲ 나주 영동리 출토 토기들

“영산강은 해상 세력에 의한 자유무역지대였다.”
비밀 해독의 열쇠를 쥐고 있는 영산강
▲ 해남 만의총 서수형 토기
상서로운 동물이 나타나 있는 신라시대의 대표적 유물이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었다.
해남 군곡리 패총과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고려 시대의 배편들은 과거 영산강이 300톤 정도의 배가 드나들 정도로 큰 강이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것을 통해 옹관 고분 세력은 4~6세기 경 영산강 유역에 다양한 지역과 활발히 교류한 해상 교역 세력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교류는 일본의 마루쿠야마 고분과 일본 신마치 집자리에도 영향을 주는데....이러한 새로운 교류 세력을 입증하는 유적과 유물의 발굴은 영산강 유역사를 다시 써야하는 과제를 우리에게 남겨주는 것이다.

 


단군3조선 중 마한에 해당하는 지역은 한반도.일본열도다
마한의 왕검성은 북한 평양으로 마한단군은 일본열도까지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열도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마한의 수군 500척이 출동하여 진압시켰다는 [한단고기]기록도 있다.

일본열도는 한반도인들의 이주로 문명이 시작되었고,
일본열도의 역사는 한반도인들의 역사다.일본왕가는
본래 김해 김씨에서 부여족인 백제계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현재 일본어의 기원은 고구려.백제어와
동일한 고대부여어다.한국과 일본은 이러한 역사적 진실속에서
사죄와 화해.협력을 통하여 21세기 동반적 관계를 열어야 할 것이다.


지금은 국가주의로 인해서 '왜'하면 나쁜 이미지화되었지만.
고대에서
왜의 실체는 한반도 해안.일본지역에 거주한 마한인들

일본 천황가의 고분으로 알려진 전방후원분 형태를 하고있는 나주 반남 고분군. 앞쪽이 신촌리 9호분이고, 뒤?이 덕산리 고분들이다.

경주나 부여·공주의 유적에 익숙한 사람들, 그래서 남한의 고대 유적은 신라와 백제, 그리고 가야가 전부인 줄 아는 사람들은 전남 나주 영산강 유역의 반남이란 작은 면 일대에 산재한 고분(古墳)들을 본다면 커다란 충격을 받을 것이다. 나주군 반남면 자미산 일대에 산재한 30여 기(基)의 반남 고분군은 한국 고대사에 남겨진 최대의 비밀이다.

이 지역이 백제 영토였으니 부여·공주의 고분보다 작으리라는 예상을 가지고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일단 그 엄청난 규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덕산리 3호분의 경우 무덤의 남북 둘레가 46m이고 높이가 9m에 달한다.

이런 엄청난 규모는 백제 왕실의 고분들보다 훨씬 커서 통일신라나 가야 왕실의 고분들과 비교해야 할 것이다. 이 정도 고분을 조성할 수 있었던 정치권력이라면 적어도 고구려·백제·신라·가야에 뒤지지 않는 세력을 지니고 있었어야 한다. 도대체 이 거대한 고분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마한인들(해안지역에 거주하는 마한인들=왜인)의 전방후원분. 전남 광주 월계동 전방후원분(맨 위)과 일본 군마현의 전방후원분인 간논야마 고분(아래). 장고 모양을 한 고대 일본 특유의 이 무덤 양식은 전라도 영산강 유역 일대에서도 종종 발견되어 당대 문화 교류상을 증언하고 있다.

전남 강진만 입구의 서남쪽에 위치한 북일지역 전방후원분. 간척으로 인해 육지화 되었지만 신방리 고분군 인근까지도 한때 바닷가였다. 북일 내동간척지 남쪽의 밭섬에도 고분 두기가 있는데 고분의 위치상으로 보아 이들은 육상세력이 아닌 해상세력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결론적으로 한반도 남부해안지역에 거주한 단군조선의 마한인들이다. 한반도.일본열도는 단군조선시대에는 마한의 영역이였다. 그리고 한반도해안지역과 일본열도에 사는 마한인들을 [왜]라고 [문헌]에 기록한 것이고, [왜]의 중심세력이 백제세력의 남하로 인하여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서 일본열도로 이주한 흔적이 바로 전방후원분이다. 따라서 일본열도의 전방후원분의 기원은 한반도 서남부지역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며, 일본이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했다는 주장은 허무맹랑한 주장이 되고 만다.
 
그리고, 한성백제의 중심지였던 서울 한강변에서도 세계 최대규모의 전방 후원분 무덤군이 발견되었는데, 규모가 작은 초기형태의 한반도 서남해지역의 전방후원분보다 규모가 커진 배경에는 한반도 남부해안지역의 마한인들과 만주지역에서 남하한 고두막 후손 구태세력과의 관계성을 보여준다 하겠다. 즉, 구태백제세력은 서남해 지역과 일본열도까지 장악하여 왜세력과의 연합을 통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서울 한강변의 온조백제까지 통합하여 백제의 왕권을 장악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무덤양식을 전방후원분 양식으로 바?다는 의미가 된다. 한반도 서남해안지역의 작은 규모의 전방후원분과 일본열도의 초기 전방후원분, 그리고 일본왕들의 대형 무덤양식으로 공식화된 전방후원분과 일본 왕들의 전방후원분보다 규모가 큰 한강변(강동구)지역의 전방후원분 무덤군은 구태세력과 왜세력과의 연합과 정복활동 관계를 증명하는 고고학적 자료라 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비문에 [백제은 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침략하고..왜는 백제의 보좌]라는 대목에서 잘 알 수 있듯이, 당시 왜는 이미 구태백제과 협력교류관계의 대상으로 복속당한 세력이였음을 알 수 있다.[윤복현]



<왜>와 관련한 문헌내용과 고고학적 자료
 
출처 http://cafe.daum.net/charisfa/7OcO/859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한전(韓傳)은 한과 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南與倭接) 면적은 사방 4천리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마한·진한·변진이며 진한은 옛 진국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다. …지금 진한 사람 모두 편두(頭·납작머리)고, 왜와 가까운 지역(近倭)이므로 역시 문신을 하기도 한다. …(변진의)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界).”

위 기사에서 주목할 점은 왜의 위치가 한반도 밖이 아니라 한반도 안쪽, 즉 삼한의 남쪽인 한반도 남부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껏 ‘왜는 일본열도에 있다’는 고정관념 속에서 이 기사를 봐왔으므로 이 기사가 말해 주는 위치 비정을 무시해왔는데 이런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한의)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南與倭接)는 기사를 해석하면 왜는 도저히 일본열도 내에 있을 수 없게 된다.

“삼국지” “후한서” 등 倭의 위치는 한반도 내

‘접’(接)은 육지로 서로 경계할 때 쓰는 낱말이지 바다 건너 있는 지역을 말할 때 쓰는 단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바다 건너 왜가 있었다면 ‘바다’(海)로 동쪽과 서쪽의 경계를 표시한 이 기록이 유독 남쪽 경계를 표시할 때만 바다를 생략할 이유가 없다.

또한 진한조의 ‘근처에 왜가 있다’(近倭)는 구절과 변진 12개국 가운데 하나인 독로국이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界)는 구절도 왜가 일본열도가 아니라 진한과 독로국 근처의 한반도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한조(韓條)에서 왜의 위치를 추측해 보자.

‘마한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왜의 위치는 마한과 진한·변진의 남쪽, 즉 한반도 남부다. 따라서 왜는 적어도 중국의 삼국시대인 3세기까지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송서”(宋書) 왜국전(倭國傳)은 ‘왜국은 고려(고구려)의 동남쪽 큰바다 가운데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중국 남북조 송나라(420∼479년) 때에는 왜가 한반도를 벗어나 일본열도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이후에 발간된 중국측 문헌들은 모두 왜가 일본열도에 자리잡고 있다고 기록했다.

 
일본 천황가의 고분으로 알려진 전방후원분 형태를 하고있는 나주 반남 고분군에 대하여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권의 1장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신촌리 제9호 무덤에서는 다섯개의 옹관이 한꺼번에 나오면서 그 가운데 옹관에서는 금동관이 출토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금동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그것이 고고학과 역사학에서 매우 흥미로운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데, 대체로 삼한시대 마한의 마지막 족장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마한은 처음에 충청·호남지방에 근거를 두었는데 북쪽에서 내려온 백제에 밀려 충청도 직산에서 금강 이남인 전라도 익산으로 쫓겨갔다가 4세기 후반 근초고왕의 영토확장 때 이곳 영산강까지 밀리게 되며, 이후 백제가 공주·부여로 내려오면서 더욱 압박을 받게 되어 5세기 말에는 완전히 굴복하고 만 것으로 추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남 고분군은 대개 5세기 유적으로 비정되고 있죠.”

유홍준의 설명처럼 이 반남 고분군은 마한의 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현재 학계의 불완전한 추측이다. 그러나 얼마 전 모 방송사에서 ‘아파트형 고분’이란 제목 아래 이 고분의 주인공을 마한세력으로 추정하다 확실한 결론을 못내려 물의가 인 데서 알 수 있듯이 마한이라는 설명은 합리적 설명이 부족한 그야말로 추측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

이 반남고분군은 매장 방법도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하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다. 거대한 하나의 봉토(封土) 내에 수개 혹은 수십개 이상의 시신을 담은 옹관(甕棺·항아리관)이 합장돼 있는 것이나 몇몇 고분 조사에서 밝혀지고 있듯 봉토 주위에 도랑이 존재했던 점도 특이하다. 옹관 규모도 우리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큰 것은 그 길이가 3m, 무게가 0.5t이나 되는 것도 적지 않다. 그 안에는 금동관(金銅冠) 및 금동제(金銅製)의 호화로운 장신구와 환두대도(環頭大刀) 등 무기류들이 부장돼 있었다.

처음 이 고분들을 주목했던 사람은 일본인들이었다. 일본은 ‘고분시대’(古墳時代)를 하나의 시대로 시기구분할 정도로 고분을 중요시하는데 반남고분군이 일본의 고분들과 겉모양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일본 후나야마 유물과 비슷한 반남고분

신촌리 9호분에서 발견한 금동관 역시 일본 구마모토(雄本)현의 후나야마(船山) 고분에서 출토한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특이한 점들 때문에 반남고분군은 일제시대 초기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됐다.

반남고분군을 최초로 조사한 기관은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古蹟調査委員會)다. 1917∼18년 곡정제일(谷井濟一)·소장항길(小場恒吉)·소천경길(小川敬吉)·야수건(野守健) 등 4명의 위원이 나주군 반남면 신촌·덕산·대안리 일대 고분들 가운데 신촌리 9호분, 덕산리 1호·4호분과 대안리 8호·9호분 등을 발굴·조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대대적인 발굴 조사와 달리 곡정제일이 단 한쪽짜리 보고서만 세상에 내놓는 것으로 발표를 갈음했다. 다음은 당시 내놓은 보고서 전문이다.

‘반남면 자미산 주위 신촌·덕산리 및 대안리 대지 위에 수십 기의 고분이 산재하고 있다. 이들 고분의 겉모양은 원형(圓形) 또는 방대형(方臺形)이며 한 봉토 내에 1개 또는 여러 개의 도제 옹관(陶製甕棺)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 조사결과를 대략 말하면 먼저 지반 위에 흙을 쌓고 그 위에 도제의 큰 항아리를 가로놓은 뒤 이에 성장(盛裝)한 시체를 오늘날에도 한반도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천으로 감아서 판자에 얹은 뒤 머리쪽부터 큰 항아리 속에 끼워 넣고 큰 항아리의 아가리에서 낮거나,

또는 아가리를 깨서 낮게 한 작은 단지를 가진 판자를 아래로부터 받친 뒤 약간 작은 항아리를 큰 항아리 안에 끼워 넣어서 시체의 다리 부분을 덮고 크고 작은 항아리가 맞닿은 곳에 점토(粘土)를 발라 옹관 밖의 발이 있는 쪽에 제물(祭物)을 넣은 단지를 안치하여 흙을 덮는다. 여기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칼(大刀·刀子)과 도끼·창·화살·톱이 있고, 귀고리· 곡옥(曲玉)· 관옥(管玉)·다면옥(多面玉)·작은 구슬 등 낱낱이 열거할 겨를이 없을 정도다. 이들 고분은 그 장법(葬法)과 관계 유물 등으로 미뤄 아마 왜인(倭人)의 것일 것이다. 그 자세한 보고는 후일 ‘나주 반남면의 왜인의 유적’이라는 제목으로 특별 보고로서 제출하게 될 것이다.’

이들은 훗날 내놓겠다던 ‘나주 반남면의 왜인의 유적’이란 보고서를 끝내 내놓지 못했다.

본 나라현 덴리(天里)시 고분에서 발굴된 무녀·樂人 등의 인물상, 말·돼지·닭 등 동물상, 검·방패 등의 무기 모양들이 일괄적으로 출토됐다. 전남 광주시 월계동에서도 비슷한 원통형 토기들이 발견됐다.

그러나 이 간단한 한쪽짜리 보고서의 내용도 당시 고고학계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보고서를 보고 먼저 움직인 것은 고고학계가 아니라 도굴꾼들이었다. 보고서 내용 중 ‘금동관·금동신발, 칼과 도끼’ ‘귀고리· 곡옥(曲玉)· 관옥(管玉)· 다면옥(多面玉)’ 등은 이들의 모험심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1차 발굴조사 20여년 후인 38년 일제는 다시 신촌리 6호·7호분과 덕산리 2호·3호·5호분 등 옹관고분 5기와 흥덕리 석실분(石室墳)을 발굴·조사했는데, 조사에 참여했던 유광교일(有光敎一)과 택준일(澤俊一)이 “도굴의 횡액(橫厄)으로 이처럼 유례가 드문 유적이 원래 상태를 거의 잃어버리게 됐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의 고분이 도굴당해 완전한 봉토가 거의 없었다”면서, “신촌리 6호분에서 겨우 2개의 옹관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도굴은 사실상 일제가 조장한 셈이었다. 일제는 1차 조사 후 한쪽짜리 보고서에서 ‘금동관·금동신발’ 등의 유물이 나왔음을 발표하고도 이 지역에 대한 아무런 보호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는 도굴꾼들에게 도굴 장소를 안내한 격이었다.

한쪽짜리 보고서의 ‘그 장법(葬法)과 관계 유물 등으로 미루어 아마 왜인(倭人)의 것일 것이다’라는 내용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제가 시종일관 주장해왔던 한반도 내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일제는 ‘광개토대왕비문’의 왜 침략 기사와 “일본서기” 기사를 바탕으로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는데, 그들은 이를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아마 왜인’일 가능성이 있는 한반도 내 유물이 출토됐으면 침묵을 지키거나 도굴을 조장할 것이 아니라 임나일본부설이 타당함을 대대적으로 선전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한쪽짜리 면피용 보고서만 내놓은 채 침묵을 지키며 도굴을 조장했다. 왜 그랬을까.

반남고분의 출토 유물들이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기는커녕 임나일본부설을 뒤집을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일 것이다. 다시 말해 반남고분군의 출토 유물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반남고분의 주인공들이 고대 일본열도를 지배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기 때문에 덮어 버리고 도굴을 조장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 거대한 고분을 쌓은 주인공들은 누구일까. 먼저 일제의 한쪽짜리 보고서의 ‘아마 왜인’이라는 구절에 주목해 고대 왜에 대해 살펴보자.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한전(韓傳)은 한과 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南與倭接) 면적은 사방 4천리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마한·진한·변진이며 진한은 옛 진국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다. …지금 진한 사람 모두 편두(頭·납작머리)고, 왜와 가까운 지역(近倭)이므로 역시 문신을 하기도 한다. …(변진의)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界).”

위 기사에서 주목할 점은 왜의 위치가 한반도 밖이 아니라 한반도 안쪽, 즉 삼한의 남쪽인 한반도 남부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껏 ‘왜는 일본열도에 있다’는 고정관념 속에서 이 기사를 봐왔으므로 이 기사가 말해 주는 위치 비정을 무시해왔는데 이런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한의)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南與倭接)는 기사를 해석하면 왜는 도저히 일본열도 내에 있을 수 없게 된다.

4∼5세기 일본 고대사
문자 없는 소국 연합정권

일본에서 한자를 사용해 기록을 남긴 것은 대략 6세기께. 그러므로 이보다 앞선 시기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중국 및 한국의 기록과 고고학 연구성과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일본에는 ‘고분시대’라는 시기가 있는데, 학자들에 따라 견해는 다르지만 대략 3세기 말부터 7세기까지로 비정되고 있다. 고분시대는 대체로 3기로 구분된다. 3세기말∼4세기를 전기, 5세기를 중기, 5세기 이후를 후기로 설정한다.

고분의 출토 유물 중 토기류는 고분 주인공의 성격 변화를 보여주는데, 하지키(土師器)는 야요이(彌生·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식 토기의 기술을 계승한 것으로, 5세기 이전 고분들에서 주로 출토된 반면 5세기 이후 후기 고분들에서는 보편적으로 대륙 전래의 스에키(須惠器)가 출토됐다. 또한 중기 고분은 전기고분에 비해 규모도 획기적으로 크고 조성지도 언덕 위에서 평지로 내려오는데 이는 5세기에 일본 정치세력의 성격이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 남조의 “송서”(宋書)에 따르면, 왜는 5세기 초부터 몇차례 사신을 보낸 끝에 5세기 말 송나라 황제로부터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의 칭호를 받았다. 이는 왜왕이 당시 각 지역단위 소국(小國)의 호족, 즉 기미(王)들을 통합한 연립정권의 수장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6세기에는 오오기미(大王)로 호칭된 것으로 보아 정치·군사적으로 소국의 호족들을 상당한 정도로 통제할 수 있는 권력기반을 구축했음이 분명하다. 5세기 이전 일본의 정치세력은 호족 중심의 소국들로 분열돼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쇼토쿠 태자(聖德太子·574~622년)가 섭정하기 시작한 593년부터 일본은 비로소 관등을 제정하는 등 중앙집권화가 강화되더니, 645년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을 단행, 중앙집권제에 한층 다가섰다. 그리고 701년에는 당나라의 제도를 따라 율령(律令)을 반포했다. 이는 명실상부한 고대 천왕제, 즉 중앙집권적 율령체제 국가를 확립한 것을 의미한다

1917년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독립된 정치체의 왕권을 상징하는 중요 유물이다

일본열도 향해 떠나는 한반도 倭 일부 세력

이런 기록들은 왜의 중심지가 5세기의 어느 시점부터 한반도를 떠나 일본열도로 이동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왜는 “삼국사기” 등 우리나라 사료에도 빈번히 등장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사료는 ‘광개토대왕비문’의 기사다. 한·일 양국 사이에 수십년에 걸쳐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유명한 신묘년(서기 391·광개토왕 1년, 백제 진사왕 7년, 신라 내물왕 36년) 기사를 보자.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를 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 新羅 以爲臣民).

왜가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다를 건너와’(渡海)라는 구절이다. 이에 대해 일본의 어떤 탁본들은 ‘渡海’라는 글자를 선명히 보여주지만, 광개토대왕비문 조작설 제기 당사자이자 최근 이를 현지답사한 이진희(李進熙)는 ‘海’(해)자는 ‘皿’의 자획이며 ‘渡’(도)자도 확실치 않았다고 말했다.

일본사 연구자들에 따르면 신묘년 즉, 4세기 후반 일본은 통일된 정권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 4세기 후반에 일본열도 내에는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공격할 만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 학계의 연구결과다. 그렇다면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공격한 왜는 한반도 내에 있었던 정치세력인 것이다.

당시 왜가 강력한 정치집단이었음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6년(397)에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 보냈다”는 기사 내용과 신라본기 실성왕 1년(402) 3월에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는 당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던 강력한 정치집단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반도에 있었던 왜는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맞서 싸웠던 강력한 정치집단이었다. 그간 일본인들이 왜를 일본열도 내로 비정하면서 생겼던 모든 모순은 왜를 한반도 내의 정치집단으로 이해할 때 풀리게 된다.

일본 천황가가 대륙으로부터 한반도를 거쳐 온 기마민족이었다는 ‘기마민족설’을 주장하여 일본 국내외에 큰 충격을 던진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는 이렇게 설명한다.

“기마민족이 4세기초 바다를 건너 북규슈(北九州)에 한·왜 연합왕국을 수립했다가 4세기말께는 동북 기나이(畿內) 지방에 야마토(大和) 정권을 수립하는데, 그 주인공인 16대 오우진(應神) 천황은 한·왜 연합왕국의 주도자로서 남한지역에 군대를 보내 신라를 제외한 남한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 주장은 4세기말에 일본열도 내에 그런 일을 수행할 만한 정치집단이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의해 부정되지만, 고구려의 남하에 저항했던 왜가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발상을 전환한다면 상당부분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는 것이다.

한반도 내의 왜로 추정되는 정치세력은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神功) 49년(369)에도 보이는데, 백제 근초고왕과 함께 가야 7국과 마한 잔존세력을 정복한 사건은 한반도 내의 왜가 수행한 군사정복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한반도 내의 왜는 ‘광개토대왕비문’의 기사에 의하면, 400년과 404년 두차례에 걸쳐 고구려와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가 패하여 그 세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된다. 고구려와 더이상 싸울 여력을 잃은 왜의 상당수 세력은 한반도 남부를 포기한 채 일본 규슈 지방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동정(東征) 기사는 이들이 수행한 열도 정복사건을 묘사한 것이다.

5세기 이후 중국 기록 倭 중심지는 일본열도로 기록

5세기 이후의 중국 기록들이 이전의 기사와 달리 왜의 중심지를 한반도 남부가 아닌 일본열도로 기록한 것은 이런 변화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영산강 유역의 고유한 매장시설을 보여주는 대형 옹관

왜 관련 기사는 “삼국사기”에도 수없이 나타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혁거세 8년(서기전 50)부터 소지왕 19년(497)까지 대략 5백50여년 동안 49회에 걸쳐 왜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데, 그중 33회가 왜의 신라 침략 기사다. 그후 약 1백60여년 동안 왜 기사는 보이지 않다가 백제가 멸망한 문무왕 5년(665)에야 다시 나타난다.

백제본기에는 왜 관련 기사가 아신왕 6년(397) 처음 등장해 비유왕 2년(428)까지 7회에 걸쳐 나온다. 그후 1백80년 동안 보이지 않다가 무왕 9년(608)에 다시 나타나 의자왕 때 두번 보인다. 백제 비유왕 2년(428)과 신라 소지왕 19년(497) 이후 왜 관련기사가 “삼국사기”에서 오랫동안 사라지는 것은 이 무렵, 즉 5세기께 왜의 주도세력이 한반도를 떠나 일본열도로 들어간 사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왜와 백제의 관계는 신라의 경우와 달리 우호적이었다. “삼국사기” 문무왕 5년의 기사는 백제 부흥군의 부여융이 항복 후 당나라와 화친을 맹세하는 글인데, ‘(백제의 전 임금이) 왜와 내통하여 그들과 함께 포악한 행동으로 신라를 침략하여 성읍을 약탈하니 편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고 하여 왜가 백제와 함께 신라를 침범하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왜와 백제의 관계는 우호적

왜의 중심지는 중국측 기록과 “삼국사기”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데 “당서”(唐書) 지리지 고려(고구려)조에 의하면,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連)·덕안(德安) 등 5도호부(都護府)와 대방주(帶方州)를 설치하는데 바로 대방주가 과거 왜의 중심세력에 설치한 주(州)였다.

“삼국사기” 잡지(雜志) 지리(地理)조는 “본래 죽군성(竹軍城)인 대방주의 여섯개 현은 본래 지류(知留)인 지류현(至留縣)과 본래 굴나(屈奈)인 군나현(軍那縣)과 본래 추산(抽山)인 도산현(徒山縣)과 본래 반나부리(半奈夫里)인 반나현(半那縣)과 본래 두힐(豆 )인 죽군현(竹軍縣)과 본래 파로미(巴老彌)인 포현현(布賢縣)이다’라고 적었는데, 이 기사에 대해 조선 후기 학자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 지리고에서 대방주의 지역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에 있는 (당나라) 이적(李勣)의 보고서를 상고하면 백제의 땅을 나누어 군현을 만들었는데 대방주는 그중 하나로 여섯개의 현(縣)을 통솔하였다. 그 주치(州治)인 죽군성은 본래 백제의 두힐이니 지금의 나주 회진현이 바로 그곳이다. 나머지 연혁된 것을 알 수 있는 속현으로는 반나현은 본래 백제의 반내부리로 지금 나주의 반남현(潘南縣)이다.’ 대방주의 중심지역이 나주 회진현이며, 반나현이 지금의 나주 반남면임을 밝히고 있는데 안정복의 이 설은 학계에서도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로 보아 왜의 중심지역은 오늘날 나주 일대로 비정할 수 있다.

안정복은 위의 책에서 대방주의 설치 이유를 ‘대방군이 본래 왜와 한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나주지역에 대방주를 둔 것’이라고 그 역사적 연원을 밝혔는데 이는 당나라가 옛 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대방주를 설치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처럼 국내외의 현존 문헌들은 왜의 중심지역이 나주 지역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문헌 기록들의 타당성은 고고학의 연구성과와 배치되지 않는지 검토해야 할 것이다.

현재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나주고분의 특징은 하나의 무덤 내에 여러개의 옹관, 어떤 경우는 수십개의 옹관이나 석실(石室)을 합장한 것이 특징이다. 일제 때 발굴한 신촌리 9호분은 8개의 옹관을 합장한 것이고,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남대박물관이 합동발굴한 복암리 3호분은 22기의 옹관과 11기의 석실 등 총 41기가 합장돼 있음을 보여준다.

신촌리 9호분은 일제시대 조사위원이었던 소천경길(小川敬吉)이 결과보고서 대신 남겨놓은 수기가 최근에 전해짐으로써 8개의 옹관이 합장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복암리 3호분이 현재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복암리 고분군 위에 어느 문중의 무덤이 있었던 덕택에 도굴이 방지된 덕이다.

나주 복암리 3호분 옹관석실에 여러 기의 옹관이 합장돼 있다.

어쨌든 이런 무덤 형태는 한반도 내에서는 유례가 없다. 다만 일본의 천황릉으로 추정되는 고분들에서 유사한 형태가 보인다. 신촌리 6호분· 덕산리 2호분은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한 봉분의 앞부분은 장방형이며 뒷부분은 원형인 형태)이라는 점, 덕산리 3호분과 대안리 9호분 등처럼 무덤 주위에 도랑을 조성한 점 등은 일본 고분시대에 조성된 고분들과 형태가 유사하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 고분들의 조성시기를 보통 4∼6세기로 비정하고 있다.

나주 고분들의 정확한 조성시기는 학자들에 따라 견해가 다르나,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는 3세기에 조성됐음을 전해준다. 나주 고분과 일본 고분들은 한반도 내에 있던 왜의 중심세력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일본 고분시대를 열었음을 말해 주는 좋은 증거인 것이다.

왜 사신이 중국에서 큰소리친 배경

또한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형태가 비슷한 것이 일본 후나야마 고분에서도 출토되었는데, 이 고분은 5세기∼6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단순한 고깔 모양의 내관(內冠)과 복잡한 초화형(草花形)의 장식을 한 외관(外冠)의 이 금동관은 세부적인 면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 재질과 형태는 동일하다. 이런 형태의 관은 한반도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이 역시 고구려와 전쟁에서 패배한 한반도의 왜 세력이 5세기 이후에 일본열도로 건너갔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한 증거다. 이런 사례는 금동제 신발, 환두대도 등 기타 유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90년대 후반 발굴한 광주의 월계동 고분군에서는 일본의 천황릉에서 다수 출토되는 장식용 토기인 하니와(埴輪)가 출토됐다. 광주와 나주는 같은 문화권이라는 점에서 이 또한 이 지역의 정치세력과 일본 천황가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유력한 물증의 하나다. 이러한 고고학의 연구 성과들은 나주지역에 고대의 삼한이나 삼국 및 가야와는 별개의 정치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고구려에 결정적 타격을 입고 일본열도로 이주한 왜는 과거 한반도에서 차지했던 위상을 근거로 한반도 남부의 연고권을 주장했다. 중국 “송사”(宋史)에 따르면 왜왕(倭王)은 남송(南宋·420∼479년)에 보낸 외교문서에서 스스로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육국 제군사’(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라 칭했다. 당시 남송은 백제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백제에 대해서는 연고권을 인정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남송은 비록 형식적이지만 왜왕에게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 제군사’라는 작호(爵號)를 내려 한반도에서 지녔던 과거의 위상을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남송을 계승한 남제(南齊·479∼502년)도 이 왜왕의 작호를 인정해 왜는 비록 형식적이나마 고구려를 제외한 한반도 남부의 주도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과거부터 사이가 좋았던 백제와는 계속 정치·문화적 교류를 계속했다. 전남 나주 반남 고분군은 고대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했던 왜라는 정치세력이 남긴 민족사적 유산이다. 이 유산을 어떻게 해석하고 우리 역사로 편입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비단 우리 사학계 뿐만 아니라 일본 사학계에도 던지는 심각한 과제일 것이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