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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요한복음 공부 제7강
* 말씀 : 요한복음 7:1-52
* 요절 : 요한복음 7:11
오병이어의 기적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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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약속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저자는 이 말씀에서 ‘생수의 강’은 ‘성령’을 가리킨다는 해설을 덧붙였습니다(39). 우리가 그동안 성령에 대해서는 많이 공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성부(聖父) 하나님 그리고 성자(聖子) 예수님과 똑같은 위상(位相)과 권세와 영광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는 ‘삼위일체(三位一體; the Trinity)’라고 합니다. 우리가 올해를 시작하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기도해온 터라 이 말씀에 더욱 끌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우리 인생들에게 얼마나 귀중한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수님 (1-36)
1,2절을 보면 때는 초막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초막절은 아주 쉽게 말하면 유대인의 추수감사절입니다. 이 기간에 예루살렘에서는 대 축제가 벌어지고 전국과 해외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축제와 예배를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갈릴리에만 계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이런 예수님이 답답했습니다(3,4). 그들은 자기들이 그래도 다윗 왕가의 후손인데, 중앙에 관직 하나 얻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고, 능력 많고 인기 높으신 큰형님이 그 한을 풀어주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생들의 요구나 시류에 영합하기 보다 하나님의 때에 따라 일하고자 하셨고 진리를 따르고자 하셨습니다(6,7).
예수님은 동생들의 요구를 외면하셨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자 은밀하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비밀리에 올라가신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벼르고 있었고,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아직은 목숨을 버리실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4절을 보면 명절 중간이 되자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가 공개적으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명절 중간이 되어 백성들이 많이 모였을 때 나타나면 유대인들도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함부로 예수님을 해칠 수 없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듣고 있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처럼 일류 율법학교를 졸업하지 않았기 때문에, 겨우 톱질이나 대패질밖에는 알지 못하는 무식쟁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어보니 놀라웠습니다. 말에 조리가 있었고, 표현이 정확했고, 비유는 적절했습니다. 그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에는 영적인 지식과 하늘의 지혜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비판의식이 충만한 종교지도자들에게조차 잘 기록해 놓았다가 다시 보고 싶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널리 전하고 싶은 그런 말씀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늘 뻔한 잔소리나 늘어놓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과는 달리, 권세가 있었습니다(마가 1:22; 누가 4:32). 사람의 폐부(肺腑) 찌르는 감동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렇게 아름답고 지혜롭고 힘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그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을 듣고 구원을 얻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죽이려 했지만, 그 가르침을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며 술렁거렸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16,17절을 봅시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이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나,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은 명상의 편린(片鱗)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주의를 끌거나 학위를 받기 위해 만들어낸 기발한 착상 같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저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들은 바를 그대로 증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진리를 따라 살려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 해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게 됩니다.
세상은 사람의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관찰하고, 사람이 깨닫고, 사람이 지은 말에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그때의 상황이나 자기 입장에 맞는 말들뿐입니다. UBF가 처음 시작할 때에는 실존주의가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다고 하는데, 제가 대학 다닐 때는 사회주의를 알지 못하면 캠퍼스에서 사람 노릇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무슨 ‘-주의’ 같은 건 몰라도 됩니다. 그런 걸 알면 도리어 사람 노릇하기 어렵습니다. 그 대신 그 많은 아이돌 스타들이나 스포츠 선수에 대해서 잘 알고, 또 온라인 게임을 능란하게 다룰 줄 알아야 사람 노릇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매력 있게 생각하는 남성상도 그러합니다. 한 때는 제임스 딘 같이 반항적인 터프 가이가 매력적인 남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배가 좀 나온 사장님 스타일의 남성을 좋게 보더니, 또 좀 지나니까 깔끔한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화이트칼라를 선망하더니, 또 그 후에는 유머 있는 남성이 매력 있다고 해서 별의별 시리즈의 유머가 다 돌아다녔습니다. 그런가 하면 불과 1년 전에는 여성처럼 앙증맞은 꽃미남들이 한창 인기이더니, 요즘에는 근육 좋은 ‘짐승남’이 인기인 모양입니다. 앞으로는 또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이같이 ‘사람의 것’, 사람의 기준이나 사상은 늘 변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진리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것’에는 독소가 있습니다. 그 독소가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병들게 하고, 퇴폐적으로 살게 하고, 절망하고 죽게 만듭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독소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성을 최고로 여깁니다. 물론 다양성은 좋은 것이고 또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최고로 여길 때 독이 됩니다. 그들은 절대성을 부정하며, 절대적인 진리를 원수로 여깁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옳습니다. 동성연애도 옳고 간음도 옳습니다. 그들에게는 회개라는 것이 없습니다. 다양성이라는 미명 아래 모든 게 다 합리화됩니다. 그런데 그 독소가 육신주의나 물질주의와 반응하여 별의별 황폐한 문화와 온갖 몽롱한 종교들을 쏟아놓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취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병들고 영혼이 죽어갑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사사시대가 가장 죄악 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때에 사람이 각각 그 소견(所見)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기술합니다(삿 21:25). 포스트모더니즘은 알고 보면 새로운 사상이 아니라, 4천년 전 사사기 때부터 있었던 사상이요, 절대적 진리가 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자 하는 못된 사상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소박하고 진실해져야 합니다. 뭐든지 다 옳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옳은 게 있고 틀린 게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상황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도 지키고자 하는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것을 좇기 보다 절대적인 진리를 좇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인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거기에는 군더더기나 애매모호한 것이 없습니다. 명확하고 단호합니다. 그래서 거부감이 생기고 부담스럽고 고통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은 지혜롭고 감동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에게 생명과 희망을 주고, 빛과 자유를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것’이 세력을 떨치는 그 시대에서도 ‘하나님의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한동안 스터디를 통해서 돕는 양들을 MT수양회에 초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하니 부담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전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자들은 능히 깨달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28,29절을 봅시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요,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실 수 있습니다. 아니, 요한복음 1장으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 자신이 바로 말씀이십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혼란스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교훈인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기준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성령을 주시는 예수님 (37-53)
37b, 38a을 보면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님은 서서 큰 소리로 외쳐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사람들에게는 다 그 속에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목마름을 해결하려 합니다.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음으로써,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함으로써, 또는 돈이나 명예나 권세를 얻음으로써, 혹은 자장면과 짬뽕을 한 그릇에 담아 자장면 먹고 싶은 욕구와 짬뽕 먹고 싶은 욕구를 다 만족시켜 준다는 ’짬자면‘을 먹음으로써 해결하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애와 육신의 쾌락으로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내적인 갈증이 그렇게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그렇게 시시한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인생들의 내적인 목마름을 해결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39절을 보면 저자는 여기서 ‘생수의 강’이란 ‘성령’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성령’은 어떤 점에서 생수의 강이며, 어떻게 사람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십니까?
첫째, 성령은 죄 사함을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 20:22,23에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성령은 죄를 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죄 사함이 없을 때 사람은 뭔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이 답답하고, 알 수 없이 불안합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서 뭔가 들춰내려는 것 같고,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조소(嘲笑)하는 것 같습니다. 감옥에서는 아무리 신나는 일이 있어도 기쁨이 없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죄 사함이 없는 사람에게는 참다운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아는 사람에게는 마음에 자유와 평화가 있고, 사람들에 대한 부담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 이해가 되고 사랑스러워집니다. 죄 사함을 아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기를 귀하게 여기며,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릅니다.
둘째, 성령은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 요한 14:26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말씀을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성경을 많이 공부한 분들도 때로는 말씀이 머리에서 뱅뱅 돌기는 하는데, 알쏭달쏭하고 맨송맨송하기만 합니다. 그럴 때면 소감을 써도 마음에 없는 말을 쓰는 것 같아 괴롭기만 합니다. 말씀은 머리가 좋다거나 공부를 많이 한다고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성령을 받을 때 말씀의 뜻을 깨닫고 무릎을 치며 감격합니다. 관절과 골수가 쪼개지는 전율을 느끼며(히 4:12), 말씀의 빛에 의해 드러나는 눈부신 세상과 빛나는 삶을 보는 황홀경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 때는 소감을 몇 페이지라도 쓰고 싶고, 아무나 붙들고 말씀을 가르쳐 주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 그 배에서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셋째, 성령은 사람이 내적으로 성장하고 열매 맺도록 도우십니다. 우리가 새해를 맞으면서 공부했던 갈라디아서 5:22,23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사람은 그 본성이 근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사람의 의지와 노력과 수양(修養)만으로는 인격이 자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사람의 본성과 인격이 변화되도록 도우십니다. 악한 본성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인격이 자라고 내면이 성장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본성이 변화되지 않으면 세 살 때나 여든 살일 때 그 속은 똑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사람이 자라고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이 외적으로 좀 부족하고 세상적으로 남에게 좀 뒤떨어졌다 하더라고 자신의 내면이 살찌고 인격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기쁜 일은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내적인 열매를 맺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넷째, 성령은 사람에게 비전을 줍니다. 사도행전 2:17에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성령이 임할 때 특히 젊은이들이 환상(vision)을 봅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비전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비전이 없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작은 것에 울고불고 합니다. 연애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고, 조금 ‘쪽팔리는 일’을 당하고도 큰일 당한 것처럼 절망합니다. 비전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일에 대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멀리 내다보며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이 없습니다. 비전이 없으면 모든 것이 불만이고, 모든 것이 성에 차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때그때의 감정이나 조그마한 유익에 매달리는 작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항상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이 임하고, 성령이 임하면 비전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나 하다가 생을 마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았을 때, 그들은 세계를 복음화 하고자 하는 비전에 불탔습니다. 비전에 불탔기 때문에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현실은 어려웠지만, 그들의 배에서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왔습니다.
다섯째, 성령은 사람을 능력 있게 합니다. 요한 14:12에서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여기서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는 말씀은, 요한복음 14장의 맥락에서 볼 때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가시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성령이 오셔서 그들을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도우실 때 사람이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으리라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만 해도 제자들은 연약하고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면서 다락방에 모여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행 1:13,14). 그리했을 때 그들은 성령을 받았고, 능력 있는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능력 있는 메시지를 전하여 한번에 삼천 명을 회개하도록 돕기도 했고(행 2:41),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하였습니다(행 3:6-8). 다른 제자들도 종교지도자들의 갖은 핍박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두려워하고 좌절하는 자신을 보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어도 이를 극복하고 담대하게 헤쳐 나가는 자신을 보는 것처럼 기쁜 일은 없습니다. 성령이 임할 때, 어떤 환난 속에서도 우리의 배에서는 생수의 강이 흐릅니다.
요즘 평소보다 책 읽고 공부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지식이나 사상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또 공대생들에게는 책 한 줄이라도 더 읽히고 그래서 그들에게 문제의식이 생기고 영적소원을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지식이나 사상이 사람을 지배할까요? <지성사>라는 역사학의 장르가 따로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상당한 영향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사상가 루소가 사생아를 다섯이나 낳고 모두 고아원에 보냈다는 이야기, 마르크스가 자기 가정부를 건드리고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뛰어난 지식이나 사상이 결코 사람을 지배할 수 없다는 중요한 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능력이나 환경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스폰서 검사들 문제를 보면 그 능력 많고, 권력 있는 검사들이 얼마나 목마르고 얼마나 죄악 되고 그래서 얼마나 자기 인생을 망쳤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결코 지식이나 능력이나 환경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靈; spirit)’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즉 사람은 악령(惡靈)의 지배를 받든지 성령(聖靈)의 지배를 받든지, 둘 중 하나의 지배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세상에서 출세함으로써 그들의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이 가진 권세를 지킴으로써 그들의 목마름을 만족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때문에 도리어 악령의 지배를 받아 욕심에 불탔고 미움과 시기심에 불탔습니다. 때를 분간하지 못했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면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들 뿐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죄에 빠질 때 사단이 주는 악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죄의식에 시달리고, 무지하고, 근시안적이고, 약해집니다. 무엇보다 항상 내적인 목마름에 시달립니다. 목마르기 때문에 아무 거나 마셔댑니다. 그래서 그 배에는 술의 강이 흐르고, 정욕의 강이 흐르고, 걱정과 근심의 강이 흐릅니다. 욕심의 강이 흘러 넘치고, 미움의 강이 둑을 무너뜨리고 범람하여 자기의 인생마저 흘러 떠내려가게 합니다.
이런 인간들에게 예수님은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11에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스피릿’이 있으면 자신의 연약함, 힘든 환경, 어려운 일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그의 배에서는 생수의 강이 흐릅니다. 악령의 지배를 받는 인생들에게 성령의 약속처럼 귀한 것이 없습니다.
맺는 말 :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성경에 이름과 같이…’라는 말씀은 특히 구약성경 에스겔서 47:9을 말합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라.”
이 말씀은 구약성경에서도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언한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이 예언처럼 예수님은 오셨고,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셨는데(행 1:4), 그것이 바로 생수의 강 곧 성령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이 되자 제자들 가운데서 성령이 임하였고, 그 두려움 많고 무기력하던 제자들은 변화되었습니다. 바로 그 제자들로부터 구원의 복음이 시작되어 온 세계에 미쳤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우리들에게로 그 역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고 흘러나와서, 이윽고는 온 인류와 온 우주를 적시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메마르고 병든 세계와 인류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로 가서 그 물을 마시면 나의 목마름이 해결되는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물이 흘러 넘쳐 강을 이룹니다. 세상을 살리고 역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세상의 것들로 목을 축이려 합니까? 그러다 죄에 빠져 방황하기를 반복합니까? 이 시간 예수님의 초청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에게 나아가서 그가 주시는 물을 마시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그 강이 흘러 넘쳐 경기대와 세계 캠퍼스로 흘러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