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때 민물, 밀물때 바닷물이 목재 진을 빼던.. 덤벙내.
물에 뜬 목재가 가라앉은 상태까지 숙성하던 곳., 가매소
목선을 보수하기 위해 목재를 가공할때 이 방법을 사용한다.
판각을 위한 불경을 필사,
오자를 확인 했던 서실모(書室)
그 한지를 생산했던 지소골(紙所골)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를 재배했던 한지골
경판의 판각을 하고 보호했던 대사마을(大寺마을)
장인과 각수들의 장구를 보관하던 장구배미
대장경판각 현장의 경계구역을 지정한 벅시배미
대장경판각 현장의 생활용수로 사용했던 빗개 참새미
목재 운송과 가공에 말을 동원했던.. 말배미
판각에 사용하는 연장을 생산하던 관당리(觀唐)
대장경을 육지로 발송했던 공진날(公陣나루),굴개
운송되는 경판을 묶는 틀을 생산한 게안공터(偈按工攄)
이런 대국적인 판각작업을 관리 감독한 대국산성(大國山城)
...................팔만대장경...............................
고려 고종 때 판각된 해인사 대장경은 국보 제32호.
목판본은 1,516종에 6,815권으로 총 8만 1,258매인데
이 가운데 후대에 판각된 15종 문헌은 보유판(補遺板)
초조대장경, 속장경(續藏經)은 몽골 침입 때 소실
1236년(고종 23) 강화에서 시작 1251년 9월에 완성
제주도 완도 거제도 자작나무를 바닷물에 절여 사용
이 대장경은 이조 초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보관
1398년(태조 7) 해인사로 옮겼다는 학설이 가장 유력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2,000명의 군인들이 호송,
5교양종(五敎兩宗)의 승려들이 독경(讀經)했다는 기록.
한석봉은 "육필(肉筆)이 아니라 신필(神筆)이다"라고 경탄
팔만대장경은 5차례 간행 유포되었다는 역사기록이 있는데
고려말 이색이 인출한 대장경 1부가 여주 신륵사에 봉안
1898년 4부를 인출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등에 봉안
현재 해인사에서 1년에 1번씩 대장경판을
머리에 이고 탑 주위를 도는 행사를 한다.
....................................................
고대 해상 실크로드 종착지로 알려진 남해.
동쪽으로는 쓰시마 섬[對馬島] 서쪽은 흑산도
남쪽은 제주도 그외 거제도 거문도를 잇는 지역.
기원 전후 중국이 개통한 무역로 <실크로드>
중국, 유럽, 아시아,아프리카를 연결한 교량.
동서방 간 무역과 문화교류를 위해 중요한 기여
중국 비단이 서양으로 수송되어 <실크 로드>
기원전 1세기 한나라(漢朝)때 기본적으로 형성.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2세기까지 <실크로드> 따라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나란히 자리잡았던 4대 제국
유럽의 로마와 서아시아의 팔티아(이란고대노예적국가),
중아시아의 쿠산(인디아북부를 통치한 제국),중국 한나라
<호 >(胡)자가 붙은 식물인 호도, 호박, 후추 등은 서방 산.
7세기부터 9세기까지 당나라 <실크로드>가 제일 번창
서방의 진귀한 조류와 괴상한 짐승, 진주보석, 향료,
유리그릇, 금은 화폐, 서아시아와 중아시아의 음악, 무용,
음식, 의상 등이 끊임없이 서방에서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이와 동시에 중국비단과 누에, 제지기술, 인쇄술, 칠그릇,
사기그릇,화약, 지남침 등은 세계문명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남해는 기원 전부터 국제무역항이 될수 밖에 없던 천혜의 항구.
한반도의 삼면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옛날에 국제교류는 거의 바닷길로 이루어졌고,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한 때 '동아시아 해상왕국'
정치권력 또한 해상무역을 장악한 이들의 것.
고구려·백제·신라는 그 주도권을 둘러싸고 혈투
해양 패권을 장악한 왕건은 후삼국 쟁패의 최후 승자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바다는 항상 소외된 영역
이조는 500년간 해금정책(海禁政策) 일관
지금도 바다의 중요성은 동해표기 문제나
독도 문제 같은 사건이 있을 때만 강조될 뿐.
이러한 무관심은 한국사 연구분야에도 마찬가지
한반도 흥망성쇄 역사를 보면, 해양정책과 밀접
그럼에도 해양 정책은 거의 연구되지 않는 실정.
그나마 , '해신' '불멸의 이순신' 등의 TV 드라마
해양 영웅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어 다행한 일.
해양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잊혀진 무대로 방치되었던 삼면의 바다
그 바다를 중심으로 한국사를 되새김할 필요가 있다.
고조선의 흥망성쇄와 멸망,
삼국시대 세력판도의 변화,
해상왕국 고려의 건국과 멸망,
이조시대 실정이었던 해금정책 및 공도정책.
바다에 대한 무관심은 혹독한 댓가를 치뤘다.
삼국시대에는 주로 연안 항로를 통해 해상무역.
(중국 동쪽 해안 - 발해만 - 압록강 입구 - 서해
- 한반도 남해안 - 쓰시마 - 현해탄 - 일본 열도)
고조선은 중개무역 이익을 독점하다가
중국 한(漢)나라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삼국시대 역시 항로 장악세력이 중흥을 누렸고
해상무역의 항로를 빼앗긴 정치세력은 무너졌다.
한반도 해상무역 전성기는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
황해 횡단항로를 개척해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
당시, 당군의 미자진 상륙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백제와 신라의 운명이 달라질 만큼, 중요한 요소였다.
통일신라는 장보고라는 걸출한 인물을 중심으로
동북아 해상무역 중심에 섰던 동아시아 해상왕국
고려 또한 해상 무역 세력들과 운명을 같이 했다.
왕건은 해상세력과 승려들 지지를 얻어 고려를 건국
고려는 해양국가를 표방하고 개방적인 해양정책을 추진.
황해 횡단 항로를 통한 공무역과 사무역이 모두 활성화.
예성강 하구 벽란도는 국제 무역항구로 번영을 누렸다.
유라시아를 석권하고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
그 거대한 제국을 상대로 고려가 40년 동안 저항했던 힘.
'삼별초 세력을 중심으로 한 해양 무역세력 덕분.'
이조의 주요 패망 원인은 '해금정책 및 ‘공도정책.'
명(明)의 해금정책에 호응하여 바닷길을 막아버리고
육로를 통해 오직 명나라와만 교류한 이조의 큰 실정.
이에 해상무역 길목이 막힌 일본은 한반도를 자주 침공
일본은 내부 분란을 잠재울 목적으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도 이조의 문호는 열리지 않았고
쇄국정책은 강경해지자, 19세기 일본은 한반도를 침탈한다
이조는 끝내 국권 상실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고 만다.
우리나라 해양영웅들
장보고, 왕건, 이순신
그리고, 그 영웅들의 뒷배경이 되어준 해상 세력들.
장보고는 청해진 중심으로 서남해 해상 세력을 결집
해적을 소탕해 항로를 열어 동북아 국제 무역을 주도.
그 영향으로 당시 아라비아 인도 동남아를 거쳐
중국까지 이어지던 국제 해상무역 항로를 열었다.
그리고, 한때 한반도와 일본 열도까지 연장한 항로.
장보고는 막강한 재력과 해양력을 바탕으로
엄격한 골품제 한계를 뛰어넘은 보기드문 영웅.
그러나 염장에게 살해된 후, 역사에서 잊혀져갔다.
'반역자' 낙인이 찍힌 채, 천년간 잊혀진 영웅
왕건은 해상세력을 효과적으로 포섭해
고려왕조 건국 기초를 튼튼하게 다졌다.
9세기말, 서남해는 당대 영웅들이 패권을 다투는 격전지.
왕건과 견훤 역시 이 지역 해양패권을 장악하려고 애썼다.
견훤은 무력으로 해상세력을 지배하려 했으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왕건은 견훤과는 그 방법이 전혀 달랐다.
결혼정책 등을 통해 별 희생 없이 해상세력을 포섭.
평양의 해상세력 김행파의 딸,
정주의 해상세력 유천궁의 딸,
나주의 해상세력 오다련의 딸
왕건은 잇따라 그 세력들과 혼인 동맹을 맺고
여기에 해상세력이 기반인 선대(先代)의 유산과
당대 고승 도선(道詵)과 형미(逈微) 등 지지를 받아
해상세력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수습하여 고려를 건국
이순신은 세계 해전사에 기록된., 바다의 영웅.
그러나 이순신이 너무 부각된 나머지,
이순신을 도운 집단은 주목받지 못했다.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바다에 익숙한 농어민과 천민층을 규합
관군과 함께 해전에 직접 참전하거나, 해안 주요 요처를 방어
특히, 12척 전함으로 수백 척 적군을 상대로 승리했던 명량해전
이순신을 돕기 위해 100여 척의 피란선을 이끌고
모여든 의병 어민들과 해상 세력들의 연합작전 성과.
그러나, 해양에 대한 이조 조정의 몰 이해와 해금정책
아울러, 이조 조정의 계속된 공도정책으로
의병 어민들과 해상 세력은 설 곳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에 관한 활약상도 묻혀져 버린다.
당시 그 해상세력들은 어디로 떠난 것일까?
그들에 관한 역사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모두 떠났다는 것.
이조 조정의 해금정책과 공도정책에 묶여있던 그들.
혹시, 대마도(쓰시마)로 떠난 것은 아닐까?
대마도는 임진왜란 이후 친일 노선으로 급선회.
한반도를 떠난 그들이 최종 정착지는 일본인듯.
일본은 임진왜란 후 해상 무역왕국으로 급부상.
................대마도(쓰시마)................
현재 일본 나가사키 현[長崎縣]에 속한 열도.
일본과 우리나라를 가르는 대한해협에 있는 섬.
역사상 한반도와 일본 사이 중계지로 중요한 역할
12세기에서 1868년까지 다이묘[大名] 소씨[宗氏]의 봉토.
1274, 1281년 몽골의 침공 때 주민들이 대량학살 당한 섬.
러시아는 1861년 토지 사용권을 확보하려고 애썼지만.. 실패
1905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 발틱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참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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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지배하는 정치세력이 역사를 지배한다.
14세기 이후에도 계속된 해금정책 및 공도정책.
한반도는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고 폐쇄되어 갔다.
15세기 이후 국제사회는 적극적인 해양정책을 추구.
그 무렵 이조 조정은 더욱 더 쇄국정책을 강화했다.
그리하여 이조는 국제사회에서 그 존재마저 잊혀졌다.
세계는 점점 더 해양을 제2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다.
해양을 둘러싼 인접국가 간 영토분쟁은 격화될 전망.
당장 우리나라는 동해와 독도를 두고 일본과의 대립.
16세기 이래 세계 각국지도에 표기된 바다 명칭.
‘Sea of Corea’ ‘Mar Coria’ ‘Mer De Coree’
동해는 근대 100년 사이에 'Sea of Japan"으로 표기.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을 인지한 것은 1960년대 이후
국제사회에 문제 제기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였다.
해양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정책이 아직도 미흡한 사례.
그동안 대륙사에만 파묻혀 있던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고
대륙사와 해양사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결합해야 할 시기.
우리나라는 이제 새로운 대륙사와 해양사를 정립할 시기.
‘태평양의 시대’를 맞이한 지구촌 세계각국.
태평양을 장악하는 국가가 곧 세계를 지배한다.
태평양은 지구에서 가장 넓은 바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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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싯점에서 어떤 길로 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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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남해 금산은 한려해상 국립공원 내에 있는 산
규모는 작지만 국립공원 내 유일한 산악 공원.
기암괴석의 절경과 남해를 한눈에 굽어보고 있어
전망이 장쾌하고 한겨울에도 포근한., 등산 코스.
금강산을 빼어 닮았다 하여 소금강 혹은 남해 금강
천태만상 암석과 울창한 숲이
눈 아래 바다와 절묘하게 조화
1974년 경남 기념물 18호로 지정.
금산의 옛 이름은 보광산이다.
여기에 한가지 일화가 전해온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세울 당시
보광산 백일기도 후 거사를 도모했고
그일로 인해 이조를 건국할 수 있었다.
이성계는 기도처에서 뜻이 이루어지면
산을 비단으로 감싸겠다고 천신과 약속.
이를 지키려하자, 한 총명한 신하가 충언.
"큰산을 비단으로 감싼다는 것은 경제가 허락치 않고,
비단은 삭으니 빛나는 이름을 하사하는 것이 좋을 듯"
이를 받아들여 비단 금(錦)자 금산이라 명명.
주봉인 망대(701m)를 중심으로 왼편에 문장봉, 대장봉,
형사암, 오른편에 삼불암, 천구암 등 암봉이 솟아 있다.
탑대(고제암)를 중심으로 가사굴, 쌍홍문등 명소가 많다.
38 절경 중 쌍홍문, 사선대, 상사암, 암불암이 대표적
쌍홍문은 해골에 두 눈이 뻥 뚫린 듯한 높이 7~8m 쌍굴.
온화한 미소의 해수관음상이 있는 쌍계사의 말사 보리암
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보문사와 함께
보리암은 우리나라 3대 기도처.
보리암을 지나 조금 오르면 좌우로 갈라지는 갈림길.
왼쪽이 상사암이고 정상에 오르면 한눈에 다도해 풍경
특히 이곳 일출은 금산 38경 중 제 38 경으로., 황홀경.
..........................보리암.....................
신라 신문왕 3년에 원효 대사가 세웠다는 고찰
전국 불자들의 발길이 끊일 줄 모르는 곳이다.
금산 보리암은 금산 38경과 망망대해 전망대.
경내에는 인도에서 허황후가 가져왔다는 3층 석탑.
원효대사가 이곳에 안치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1977년에 해수 관음보살상이 바다를 향해 세워졌다.
.............................................................
금산은 동쪽으로 기암괴석, 남쪽으로 미조항, 송정,상주 해안과 섬들
서쪽으로 서포 김만중 선생의 유배지였고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절경.
이곳 상사바위에는 오늘날까지 두 가지 색다른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전설 - 1. 안방마님과 돌쇠.
이조 숙종 때 전남 돌산에 사는 청년이 남해로 머슴 살러왔다.
돌쇠는 자태가 고운 안방마님을 흠모하다가 상사병에 걸렸다.
예나 지금이나 약도 없는 상사병에 청년은 시름시름 죽어갔다.
이를 보다 못한 과수댁 안방마님은 금산으로 돌쇠를 불러냈다.
금산에서 돌쇠는 상사병을 낳게 되었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훗날 상사바위라 했고 상사풀이 할 때 뒷물로 썼다는 구정암.
금산 38 경 중 28경 구정암은 엉덩이 크기 9 개 홈이 물확 같다.
숙종 때 남해로 귀양왔던 약천 남구만은 구정암을 보고 감탄한다.
'도대체, 몇 해 동안에 아홉 개의 샘이 패였을까?'
안방 마님과 돌쇠는 백년해로 하며 그곳에서 잘살았다고 한다.
그곳 파인 웅덩이마다 빗물이 고여 '운우의 정'을 실감나게 한다.
27경 상사암은 금산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조망이 아름다운 절벽.
이곳에 오면 약천 남구만 선생의 시조가 절로 떠오르는 전설의 고향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전설에 대한 해설>.........................
이조 19대 숙종(1674∼1720) 붕당정치 파탄이 절정일 즈음.
희빈 장씨가 낳은 왕자에 대한 세자책봉문제가 빌미가 되어
남인정권이 들어섰다가 폐출되었던 민비를 복위시킴을 계기로
남인이 거세되고, 그대신 서인이 재집권하는(甲戌換局) 변화기.
당대의 명사들이 당파싸움 여파로 화를 당하던 시절
일본에는 1682년과 1711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 파견,
왕은 민비와 희빈 장씨 사이에서 애증의 편향이 심하고
그것이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쳐 당쟁을 격화시켰던 시기.
임진왜란 이후 민심과 성풍속이 어수선한 시기의 전설인듯.
.....................................................................
전설 - 2 . 주인 따님과 돌쇠.
상사암에 또 다른 전설은 무남독녀를 가진 부자와 수많은 하인들.
그중 돌쇠는 부자의 무남독녀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상사병.
감히, 주인의 딸을 사랑한다는 말도 못하고 가슴속에서 애만 태웠다.
돌쇠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혼이 뱀으로 환생.
사랑하는 그녀가 잠자는 방으로 들어가 몸을 칭칭감고 풀어주지 않았다.
돌쇠는 그녀와 이승에서 못다한 원을 풀려고 죽어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굿을 하는 등 별 수단을 다 동원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홀연히 나타난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
"금산에 있는 높은 벼랑으로 가서 굿을 한번 해 보시오"
그녀의 부모는 뱀을 감고 있는 딸을 데리고 금산으로 갔다.
그곳 벼랑 위에서 굿을 하자 뱀은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하여, 지금도 상사병 총각의 넋과 마음을 달래어 주는 상사바위.
금산은 기암 38경이 유명하고
한려수도와 여수를 내려보는 곳.
아울러, 산행, 여행, 해수욕, 낚시, 레져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곳.
금산 38경 중 1경 망대에는 고려 시대부터의 최남단 봉수대가 있다.
7경 태조기단은 이성계가 100 일 기도를 올려 이조를 창건했다는 곳.
29경 감로수는 이조 숙종이 병을 고친 샘(상사암 남쪽 아래).
34경 부소암은 진시황 아들 부소가 유배되었다는 전설의 바위.
35경 상주리 석각은 서불이 500 동자를 거느리고와 남긴 흔적.
38경 금산 일출봉은 다도해 일출을 감상하는 명소.
........................서불.................................
서불은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기 위해 보낸 인물.
제주 정방폭포, 지리산 화개동천에도 그의 족적.
한라산, 지리산에서 불로초를 캐기 위해 들렀다.
그러나, 불로초를 못 찾자 족적을 남긴다.
(서불은 진시황이 두려워 족적을 남긴 듯.)
서불은 다닌 곳마다 족적을 남긴 흔적이 뚜렷.
결국,불로초를 찾지 못하자 왜로 도망간다.
어차피 진나라로 돌아가도 죽을 목숨인 때문.
불로초를 찾아오면 진나라 절반을 준다던 진시황.
불로초를 찾던 못찾던 죽임을 당하리라 여긴 서불.
진시황이 죽기만을 기다리며 실컷 온 세상을 유람.
진시황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왜로 망명한 서불.
서불은 500 동자와 함께 왜에서 여생을 보내었다.
진나라에서 왜까지 그가 다닌 항로 = 오늘날 항로.
.....................................................................
544년전 이조시대 이륙이 쓴 유두류록.
천왕봉 아래 암법주굴에서 바라본 남해.
다도해 풍경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조시대 지리산은 남해안 전망대.
수백척 왜구들의 배가 보였을 만큼.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에도 나타난다.
'지금은 공해 탓에 조망이 흐리지만.'
...........
남해 바다
...........
동쪽은 대마도(對馬島), 서쪽은 흑산도,
남쪽은 제주도를 잇는 바다를 일컫지만,
보통 부산에서 전라남도 진도까지의 해역.
제주도 거제도 남해도 거문도 등 약 2,240개 섬
다도해로서, 전국 총도서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남해의 섬은 산맥이나 구릉이 침수되어 생긴 것으로
섬들의 방향이 비슷하며, 만과 반도 및 섬 등이 발달
해안선 드나듦이 매우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을 이룬다.
세계 어느 곳도 없는 수많은 섬 대한식해안(Korean Coast)
해안선 길이는 2,251km로 '해안의 직선거리 255km'의 8.8배
쿠로시오 해류의 영향으로 연중 수온이 높다.
여름 수온은 최고 28~29℃, 겨울에 최저 13℃.
염도는 봄 3.5‰, 여름 3.0‰, 가을과 겨울 3.5‰
대부분 평균수심은 100m 대륙붕으로 수심이 얕다.
바다 조수의 차이는 동해와 서해의 중간 정도이다.
서쪽 전라남도 해안 일대의 넓은 간석지는 양식장.
'해식애와 육계도 같은 암석해안의 경관들.'
난류에 의해 연중 수온이 일정하고
수심이 얕고 어류번식과 서식에 적합
사철 어로가 가능하여 3면의 바다 중
어획량이 가장 많고 어족이 풍부하다.
멸치는 진해만 중심으로 남해안 전역에서
3~12월에 많이 잡히는 대표적인 어종이다.
고등어·갈치·전갱이·삼치·도미·병어 등이 어획.
수산 양식업은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해 본격적 시작
최근 경제가 향상되고 생선 수요 증가에 따라 급성장.
양식업은 간석지와 얕은 바다에서 이루어지며
굴 조개 홍합 등의 패류와 김 미역 다시마 등
굴은 통영 거제·진해에서 양식, 미국과 유럽에 수출.
김은 완도·고흥에서 양식, 겨울철 어민들 주요소득원.
옛부터 남해는 우리 민족의 대외교류 및 항쟁의 장소
삼국 시대에는 백제와 일본이 이곳을 통해 해외 교류.
통일신라 시대에는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
왜 당 해적을 무찔러 해상왕국을 세우고, 당과 교역.
고려시대에는 삼별초가 진도를 중심으로 활약했으며,
이조 때 왜구 침입에 대비, 경상도 전라도에 수영 설치.
임진왜란 때 충무공은 명량 노량 한산도에서 왜군을 대파.
해안 일대에는 동래 마산 등의 온천 휴양지와
해운대 송지 등의 해수욕장은 전국적인 피서지.
크고 작은 섬과 충무공 전적지 중심으로 바다경관이 수려
동쪽 거제도에서 여수에 이르는 곳곳이 한려해상 국립공원
서쪽 여수에서 신안군에 이르는 곳곳이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항구가 잘 발달되어 선박의 물동량이 3면의 바다 중 제일 많고,
우리나라 제1의 중화학공업지대 남동임해 공업지대가 면해있다.
..........
한려수도.
............
196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한려해상국립공원
거제시, 통영시, 사천시, 여수시, 하동군, 남해군
2도 4시 2군에 걸쳐 공원 면적 총면적 545.627k㎡
(육지 188.64k㎡, 해상 356.978k㎡)에 91개 섬.
(유인도 33개 무인도 58개)으로 형성되어 있다.
옛부터 아름다운 바다 뱃길로 이름난 한려수도 300리
태평양을 마주한 남해의 잔잔하고 영롱한 쪽빛 바다.
굽이굽이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해안선, 하얀 파도
거제시, 사천시, 통영시, 하동군, 남해군, 여수시
각 지역 마다 제각기 독특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매년 200만 탐방객이 찾는 아름다운 해상 국립공원
우리나라에서 두번째 큰섬이 거제도의 남쪽 해안
구조라 해수욕장과 몽돌이 깔려있는 학동해수욕장
그 고운 자태를 뽐내며 무리지어 피어 있는 동백림
무지개마을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대,소병대도
바다의 금강산, 해금강 갈곶도는 명승 제 2 호
사자바위, 촛대바위, 십자동굴 해안절벽의 절경
삼신이 이 마을을 지켜 온다는 전설의 고향.
한산도를 비롯한 비진도의 선유봉, 풍화리 학림도.
미륵도의 천연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된 팔손이나무
남해안에서 물이 가장 깨끗한 곳이 바로 사천 지구.
물살빠른 물목에 부태꼴 나무말뚝을 박아
고기를 잡는 죽방림이 아직도 있는 곳이며
신수도, 학도, 늑도 등이 어우러져 있는 곳.
특히, 학섬 무인도는 수천쌍의 학 서식처.
근래 환경 변화로 안타깝게 종적을 감췄다.
국도 19호선의 마지막 종착지 남해섬을 가려면
동양 최대의 현수교인 남해대교를 지나야 한다.
남해대교는 노량해협 건너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 말하지 말라며
숨을 거둔 충무공의 한이 서린 남해의 노량
노량을 지나 남해섬의 남단으로 내려오면 금산
진시황의 사신 서불이 불로초를 구하러 들렀던 곳,
신라시대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 등의 기도처
이성계의 이조건국과 관련된, 숱한 전설의 고향 금산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인., 금산.
해송의 방풍림이 한폭 동양화 같은 상주해수욕장
산과 바다를 함께 즐길 천혜의 관광지로서., 각광.
한산도.
'충무공의 혼이 서려있는., 한산도.'
충무항에서 유람선 타고 한려수도 관광.
한산도는 한려수도에서 가장 인기높은 곳.
막상 그 섬에 가면 작은 섬 규모에 놀란다.
'삼도 수군통제부 위치로는 비좁은 느낌.'
그러나, 그 섬을 애워싼 바다는 끝없이 넓다.
저 바다가 육지라면 이곳은 결코 작지 않은 섬.
저 바다는 제 4 빙하기 전까지는 광활한 저지대.
우리 민족의 고향일지도 모를..저 바다 속.
저 바다 속 저지대에 아직도 잠겨있을 옛 유적지.
저 바다속 논밭에서 풍요롭게 농사짓던 우리 민족.
저지대 사이로 흐르는 강과 호수에서 고기잡던 민족.
'지금은 바다 속에 묻혀버린, 전설의 고향.'
우리 민족은 옛부터 조선 항해술이 앞선 민족.
선사시대부터 오랜 세월을 물에 익숙했던 민족.
그 저력이 임진왜란 당시에 왜군을 물리친 원동력.
한산도는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 통제영.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한산대첩을 이룬 곳.
충무공의 호국혼이 살아 숨쉬는 유서깊은 섬.
한려해상 국립공원 중심에 위치한 아름다운 섬.
충무공의 우국심정이 담긴 시조로 잘 알려진 곳.
한산도 제승당은 충무공 사적지로 유명하지만
한산만 풍경은 마치 한폭의 동양화인 듯 수려.
이곳은 사철 관광객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
충무공은 세계 해전사에 그 이름이 올라가는 장수.
특히, 임진왜란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버린 한산대첩
1597년 정유재란 때 12척으로 133척 왜군함대와 접전.
31척을 격파한 명량해전은 세계 해군 전술의 교과서.
명나라 황제는 선조에게 칙서까지 보내 충무공을 극찬.
'조선의 장수가 아닌 명나라 군사를 지휘해야 할 장수
선조는 이순신 같은 신하를 둔 것을 하늘에 감사할 일.'
'경남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875 제승당.'
한산도 충무공 유적지 '159,128평 제승당 일원'.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사 충무공의 삼도 수군 사령부.
선조 1593년 8월 편제에도 없던 삼도수군 통제사를 제수
한산도에 진영을 옮기고 장기전에 대비하며 진영을 설치.
1597년 2월 26일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기까지 3년 7개월
운주당을 비롯한 각종 공해, 창고와 부대시설을 건립했던 곳.
난중일기, 시조 및 한시 등이 전해오는데
그 중에서도 유명한 "한산섬 달밝은 밤에"
<<한산섬 달밝은 밤에>>
"한산(閑山)섬 달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茄)는 남의 애를 끓나니."
그 섬을 빠져나올 배를 기다리며
선착장에서 가볍게 소주 한잔도 멋.
초고추장 듬뿍 찍은 해삼이 무척 달다.
그 섬이 멀어져가는 갑판에서..충무공의 시.
.......................찾아가는 길..........................
서울 제주에서 진주 사천까지 항공편을 이용할 수 있으며,
공항 리무진 버스로 마리나리조트, 여객선터미널까지 도착.
배편은 여객선터미널 - 제승당 07시 부터 1시간 간격 운행.
..............................................................
18:30까지 12회 운행하며 운임은 4,100원으로, 25분이 소요.
한산섬 일대를 도는 유람선은 제승당, 해금강, 소매물도 관광.
................한산도 지명 해설............................
개 미 목 : 왜적의 패잔병이 바다로 도주하기 위하여 의항
개미허리처럼 산을 파헤쳤던 곳
너 추 리 : 군함들을 짓던 곳 여차(리)
대 섬 : 화살대를 공급하던 곳 죽도
돛 단 여 : 군함을 가장하여 의병전술을 쓰던 곳 수륙터앞여
두 억 개 : 왜적의 머리가 수없이 베인 곳 의항개
망 산 : 바다에 적의 동정을 살피던 곳 망곡
매 외 치 : 왜적의 시체를 매장한 곳 의항
멜 개 : 군수품 하치장이 있던 곳 하포
죽 전 : 화살을 만들기 위한 대를 키우 곳 죽전
문 어 개 : 왜적이 도망칠 길을 묻던 곳 문어포
야 소 : 군기창이 있던 곳 야소
염 개 : 소금을 굽던 곳 대고포 개
옷 바 위 : 병사들의 군복을 빨래하여 널었던 곳 의암
제 승 당 : 임란 당시의 해군통제부 제승당
진 두 : 진을 친 요새였다는 곳 면소재지
진 터 골 : 뭍에 올라 전투를 훈련하던 곳 의항
창 동 : 군량 창고가 있던 곳 창동
해 갑 도 : 이충무공께서 갑옷을 벗으셨던 곳 관암앞
용 초 : 쇠를 만들고 채굴했던 곳 용초
숯덩이골 : 숯 기타 연료를 조달했던 곳 장곡
독안바위 : 질그릇을 만들던 곳 장곡
못 개 : 식수를 마련했던 곳 하포 뒷편
...............................................
'한산도 곳곳마다 충무공의 혼.'
충무공.
"현자를 추천한 자는 상을 받고
현자를 숨긴 자는 사형을 받는다”
31세 때 선조 5년(1572) 병과(丙科) 급제
종9품이 된 이순신의 출발부터가 늦었다.
백호 윤휴가 충무공에 관해 남긴 기록.
"성품이 고상해 귀족들을 찾지 않았다”
충무공은 아부와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전라좌수사가 되기 전 거듭된 파직, 좌천, 백의종군.
충무공을 천거한 사람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젊어서부터 친구인 유성룡은 매번 대장감이라고 칭찬.
....................유성룡......................
“조정에서 이순신을 추천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무과에 오른지 10년이 되도록 승진되지 않았다”- 장비록.
1598년 정유재란이 막바지일 무렵 도요도미 히데요시 급사
왜군을 철군하기 시작했고 순천성에 있던 고니시부대도 퇴각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은 전남 여수와 광양에 진쳐 왜군 포위
충무공은 왜군이 점령한 순천성을 공격한다고 거짓 정보 유출.
왜 함대는 뱃길 지름길인 노량을 지나 순천성을 구원하러 간다.
1598년 11월 18일 술시(밤 9시~11시) 부터 다음 날인 11월 19일
이 때 왜 구원병은 4만 7천이고 400척의 안택선과 100척의 누각선
이조는 화포 300 기, 1만 6천 병력, 50 척의 판옥선과 20척의 소선
명군은 수군제독 진린의 5천 수군과 40 척의 호선과 사선이 있었다.
충무공이 유포한 거짓 정보가 왜군을 순천성에 묶어놓는데 성공.
이조는 1만 6천 중 1만 3천명 전사하고 판옥선 50척중 26척 소실
명군은 2천여명 전사하고 17척 호선만 무사해 본국으로 철수한다.
충무공은 어떻게 1/5 병력으로 왜군을 물리쳤을까?
전략 1. 순천성의 왜군을 봉쇄시켰던 점.
충무공은 1만 6천 병력으로 7만 왜군을 분산시켜 승리.
수십척 배에 탄 이조 백성들이 순천성 밖에서 횟불시위.
왜군은 밤안개 속에서 이조 수군으로 착각을 하게 한 것.
전략 2. 매복 및 야간에 기습공격.
노량은 여러 섬이 있어서 길이 좁고 험하며 밤에는 암흑.
이조 수군이 매복했다가 왜군을 기습공격하는데 성공한다.
전략 3. 조총 유효사거리 밖에서 공격하라.
이조 함포공격은 왜군 조총의 유효사거리보다 유리.
이조 수군은 원거리 선제공격을 통해 일본수군 섬멸.
왜 함대는 충무공 함대와 싸워보기도 전에 무너진다.
전략 4. 화살 유효사거리 안에서 공격한다.
이조 수군은 주무기가 활이라 유효사거리가 짧다.
하여, 갈고리로 왜선을 화살 공격범위로 끌어당긴다.
왜 함대보다 크고 높은 이조 함대는 위에서 아래로 공격.
이조 함대 지붕은 송곳으로 뒤덮혀 왜군이 접근조차 어렵다.
작전5. 사기를 높여라.
이순신은 군사를 사랑한 칭송받는 장군 중 하나.
이순신은 전쟁 승패를 좌우하는 군 사기를 격려.
왜장 함대를 집중공격 그 목을 배어 배위에 걸기.
대장 잃은 왜함대가 우왕좌왕하할 때 승리 굳히기.
명량해전 대패로 정복의지가 한풀 꺽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이순신 가족의 몰살을 은밀히 지시.
와키자카는 충무공과 당당히 맞서고 싶지만 아산으로 간다.
충무공은 막내아들 면을 잃은 슬픔을 난중일기에 기록한다.
............................
와키자카가 본 충무공.
.............................
와키자카 후손들은 매년 충무공 탄생일에 우리나라 방문.
와키자카가 충무공을 알게된 시기는 한산대첩이라고 한다.
와키자카는 전형적인 사무라이 장수로서 명예를 존중했다.
차를 좋아했고 살생보다 덕을 베풀어 적을 수하로 만든 인물,
와키자카는 2천 군사로 이조 육군 5~6만명을 물리친 명장중 명장
와키자카는 한산대첩 패배 이후 6일간 식음을 전폐한 기록이 있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장수 정도
..하지만 내가 겪은 그는 여느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이순신에 대한 두려움에 떨려
몇날 며칠 음식을 먹을 수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써
나의 직무를 다할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
이후에도 와키자카가 남긴 충무공에 관한 기록이 있다.
하여, 그 후손들이 해마다 우리나라를 찾는지도 모른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고
가장 미운 사람도 그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그.
가장 흠숭하는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싶은 사람역시 이순신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이순신."
...................................
명의 사신 '운덕'이 본 충무공.
....................................
"하루는 어두운밤 눈이 몹시 내리고
그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듯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 속을 통제사 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 까닭으로 이 어둡고 추운바람 속으로 거닐까?
궁금하던 차에 한번 따라가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던 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 영감 손에는 한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 중 효행 편을 읽어주고 있는 것...
다음날 알아보니 그 왜군 나이는 15세더라.
..10살 어린 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아이 포로를 딱히 여겨 별도로 감싸준 것..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5년이 지났고
그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간간히 통제사 영감에게도 책을 읽어주었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저 두사람을 어찌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 본 저 두사람은 한 아버지와 그 아들로 보였으니..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무엇으로 나타낼수 있겠는가!"
.........................................
명의 도독 진린이 본 이순신
..........................................
그가 명 황제에게 올린 서신.
"황제 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지략이 매우 튀어날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르 지닌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청國)를 견제할수 있을뿐 아니라,
저 오랑케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수 있을것이옵니다.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 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