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브> 이 침묵을 반드시 들으라
숨조차 내쉴 수 없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안다면 <트라이브>는 아마 견디기 힘든 영화일지 모른다. 기숙학교에 들어간 농아 소년(그리고리브 페센코)가 교내 폭력 조직(Tribe, 트라이브)에 휘말리면서 서서히 파멸해가는 이야기다. 그러나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까지 우리는 그의 이름이 ‘세르게이’라는 것조차 알 수가 없다. 모든 대사는 수화이고 영화에는 일체의 자막도 없기 때문이다. 악(惡)이 악을 낳고, 순진했던 소년이 타락한다는 성장 영화의 닳고 닳은 클리셰가 <트라이브>에선 아주 가느다란 단서가 된다. 세르게이가 입학 첫날부터 폭력 학생에 의해 발가벗겨지고 그의 똘마니가 되어가는 과정을 멀찍이 선 카메라 뒤에서 그저 관찰하는 수밖에 없다.
음악도 없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침묵하는, 심지어는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이 영화에는 세찬 바람소리, 매정하게 뒤를 보이는 자동차 소음, 손과 손이 격렬하게 부딪히는 마찰음뿐이다. 그러나 <트라이브>의 침묵은 결코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감히 지루하다는 표현조차 허락될까. 감옥처럼 쇠창살이 쳐진 기숙학교에서 매춘과 강도를 일삼는 아이들과 그 비열한 배후가 드러나는 동안 우리는 점점 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다. 서로를 온몸으로 부닥치며 치열하게 손짓하는 아이들의 분노와 격앙된 몸싸움에 점점 더 몸을 스크린 쪽으로 기울이면서. 늘 도로나 문간 뒤에서 참혹한 현장을 지나치리만큼 찬찬히 내비치는 카메라가 야속하다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뭔가를 더 들어야 할 것만 같이.
소리 대신 숨결과 몸짓에 농축된 성장의 악다구니는 뒤로 갈수록 강도를 더해간다. 더 갈 수 없으리라 생각한 지점에서 두어 걸음 더 암흑 속에 잠긴다. 그건 소리를 듣는 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참혹한 결말이다. 엑셀러레이터라도 밟은 듯이 가파르게 몰락으로 내달리던 세르게이가 (몰락의) 방향을 달리하게 되는 건 한 여자애(야나 노비코바) 때문이고 말하자면 그건 첫사랑 같은 것이었을 테다. 사춘기의 꽃핀 육체로 나누는 호기심어린 체위들은 철저한 계약 관계고 그래서 서글프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진 날 애처롭게 여자애의 젖무덤에 매달리는 세르게이는 그녀에게서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가 아는 진실은 사랑이 늘 구원이 되어주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적막한 밤,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새로 생긴 눈밭처럼 영화는 세르게이의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지만 절망적인 침묵은 어느새 스크린 밖까지 침퉇ㄴ다. 더 이상 무엇을 꿈꿀 수 있을까. 아니, 그 소년은 살아갈 수조차 있을까. 지난해 동구권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우크라이나 출신 미로슬라브 슬라보슈비츠키 감독의 이 놀라운 장편 데뷔작을 한 마디로 설명할 길은 존재하는 않는다. 다만 적나라한 현실의 잔혹한 반영을 그저 목격해낼 뿐이다. 그러나 그 혹독한 체험만으로도 <트라이브>는 봐야만 하는 영화가 된다. <트라이브>에 출연한 모든 배우는 연기 경험이 없는 실제 청각장애인다. 알면 알수록 무섭도록 놀라운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