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이 자랑하는 관광코스! 로만틱 가도 -
독일이 자랑하는 관광코스의 하나인 로만틱가도는 간혹 '낭만 가도'라고 불리우기도 하는데 실제 이 길의 어원의 의미는 그 와는 무관하다. 이 길은 예전에 알프스를 넘어 로마에 이르는 통상로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로만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프랑크 프르트 중앙역에서 버스는 출발하지만 뷔르츠브르크에서 시작해 옛중세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로텐브르크와 오랜 성벽이 인상적인 딘켈스뵐, 도나우강을 건너 2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아우그스부르크를 거쳐 독일 알프스의 산기슭에 자리한 퓌센에 이르기까지의 350여키로미터의 길로, 이 길에는 지금도 중세에 번영을 누렸던 당시의 모습이 곳곳에 남아 있다.
▶ 로만틱 가도의 아름다운 마을들 (추천 도시 참고)
- 뷔루츠부르그(WURZBURG)
- 바트메르겐트하임(BAD MERGENTHEIM)
- 바이케르하임(WEIKERSHEIM)
- 뢰팅겐(ROTTINGEN)
- 크레글링겐(CREGLINGEN)
- 로덴부르그(ROTHENBURG)
- 포이흐트방겐(FEUCHTWANGEN)
- 딩켈스부르(DINKELSBUHL)
- 뢰르트링겐(NORDLINGEN)
- 하르부르그(HARBURG)
- 도나우베르트(DONAUWORTH)
- 아우그스부르그(AUGBURG)
- 란츠베르그(LANDSBERG)
- 호엔후르흐(HOENFURCH)
- 로텐부흐(ROTTENBUCH)
- 뷔르트슈타이그(WILDSTEIG)
- 슈타인가텐(STEINGADEN)
- 슈방가우(SCHWANGAU)
- 퓌센(FUSSEN)
▶ 로만틱 가도(Rimantic Route)의 이용
프랑크푸루트에서 뮌헨또는 퓌센까지 가도의 중요한 부분만을 보면서 하루에 돌아 볼수도 있으며 몇개 마을을 경유하면서 숙박을 하며 여행을 할수도 있다. 로만틱 가도의 주요교통은 유로파 버스로서 짐이 있으면 3DM 더 내야 한다. (2001년부터 유레일 패스 소지자는 60% 할인 되며 독일철도 패스 소지자는 75% 할인)
운행은 4월~10월까지만하며 토요일, 일요일 및 경축일에는 운행기간이 단축되므로 확인을 미리 한다
▶ 로만틱 가도(Rimantic Route)로 향하는 유로파 버스 타는 곳
- 프랑크 프르트 중앙역 출발 - - 뮌헨 중앙역 출발 -
▶ 유로파 버스 출발시간 안내
프랑크푸르트 (08:00경 출발)를 출발하여 뷔르츠브르크를 출발하여 로만틱 가도 감상하면서 퓌센까지 가는 여정이다. 퓌센에는 저녁 8시 정도에 도착한다.
교통: 로만틱 루트는 여름철에 (4월-12월초)에 하루 편도 두차례의 장거리 버스가 달리고 있으며, 겨울철에는 오스트리아의 짤츠부르크나 뉘른베르그등 간선 주요역을 기점으로 해서 지선으로 왕복한다. 전에는 전액 무료 혹은 75% 할인이 되었으나 현재 유레일 패스 소지자는 2001년 부터는 60%가 할인된다. 다만 독일 패스 소지자는 75%가 할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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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금보기에서 검정색은 편도 요금이며 푸른색이 왕복요금입니다!
유로파버스의 로만틱 가도의 시간표 보기 - "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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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파 버스는 프랑크프르트에서 출발하여 주요 마을을 경유하여 퓌센까지 가는 일종의 관광버스이다. 이 버스는 중간에 계속하여 정차를 하게 되며 이 때마다 적게는 15-20분 많게는 1시간 30분 정도까지 정차를 한다. 이용시에 잘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유로파버스는 환승을 중간에 할 수가 있는데 딩켈스빌과 아우크스브르크에서 한다.
만약 뮌헨까지 간다고 한다면 환승이 필요없으나 퓌센까지 간다면 딩켈스빌과 아우크스브르크에서 반드시 환승을 해야 한다. (시간표 참고) 혹은 좀 더 시간적 여유를 두고 여행을 하고 싶다면 중간 경유지에서 숙박을 하며 다음날 버스를 타고 계속 여행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로만틱 가도의 아름다운 마을들 -
▶ 뷔루츠부르그(WURZBURG)
-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차로 1시간 20분, 뮌헨에서는 2시간 20분 소요. 중세도시로 로만틱가도의 기점이다. "피라미드가 고대 이집트왕들의 무덤을 의미하는 것처럼 이곳의 39개의 종류는 이곳이 사제령의 수도였음을 보여준다. 온 시내가 성자나 천사의 상으로 가득차 있어서 거리를 걸으면 마치 신의 왕국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 -1800년 독일의 극작가 클라이스트가 뷔르츠부르크를 찬양한 글이다. 하지만 1945년 3월 폭격으로 90%정도가 파괴되었다.
뷔르츠 부르크 시내는 전차가 다니지만 걸어서도 충분히 여행할수 있다. 호화로운 성 레제덴츠, 11인의 성인상이 있는 바로크 양식의 마인브뤼케, 마리엔 부르크 등의 요새등은 로만틱가도의 절정이다.
▶ 바트메르겐트하임(BAD MERGENTHEIM)
독일 기사단에 의해 건설된 마을로 아름다운 타우버 계곡 사이에 자리한 유명한 온천 휴양지이다. l 바이케르하임(WEIKERSHEIM)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의 건축양식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호엔로에 성이 있다.
바트 메르겐트 하임에서 로만틱가도의 버스로 약 20분 정도면 바이커스하임의 마르크트 광장에 도착한다. 이도시에서 가장 볼만한 것이 바이커스하임 성이 광장 바로 앞에 서있다. 유로버스의 정차 시간이내 견학이 어려울지도 모른다. (뮌헨행은 15분 정차하나. 프랑크 푸르트행은 정차 안함) l 뢰팅겐(ROTTINGEN)
▶ 크레글링겐(CREGLINGEN)
헤르고트 교회에 있는 리멘쉬나이더의 걸작/성모 마리아 승천 제단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 별것도 아니게 보이는 이 헤르고트 교회가 유명한 것은 약 600년 정도 전에 농부가 밭을 갈다 성적을 받은 성체를 땅속에서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것을 기념으로 영주인 호엔로에 백작이 지은 교회이다. 또한 교회 건립 100년후 조각가 리멘슈나이더가 전설에 따라 농부가 성체를 발견했다는 그 장소를 예배하는 주요 제단으로 하여 "성모 마리아의 승천" 의 제단을 제작하였다. 교통: 유로파 버스의 로만틱 가도 버스로 뮌헨행은 15분 동안 정차한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행은 통과 하니 잘 참고 하자.
▶ 로텐부르그(ROTHENBURG O.D.T)
로만틱 가도와 고성가도가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로 해마다 1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온다. 로만틱 가도의 가장 매력적인 도시로 마을 전체가 중세의 박물관과 같다. 구시가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거리와 골목 사이를 걷고 있으면 과거의 중세로 되돌아온 기분이 든다.
교통 : 유로파 버스를 이용하여 하차하거나 철도 이용
기타 : 다른 지역과 달리 1박을 하여도 전혀 후회 없는 곳이다. "아래의 기행문 참고"
▶ 딩켈스뷜(DINKELSBUHL)
로텐부르크와 마찬 가지로 성벽에 들러싸인 주위의 분위기가 나는 작고 아담한 도시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아 중세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조용한 중세도시, 매년 7월에 어른이들의 축제 킨더 체헤가 열린다. 이 도시는 호수에 둘러 싸인 중세도시로서 독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집으로 불리는 '도이치 하우스'가 이곳에 있다.
▶ 아우구스브르크(AUGSBURG)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 줄지어 늘어선 2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도이다. 르네상스시대 세워진 고딕 양식 건축물로는 최대라 일컬어지는 시청사와 구시가의 막시밀리안거리, 대성당, 모자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생가등이 주요 볼거리이다.
▶ 슈방가우(SCHWANGAU) 퓌센(FUSSEN)
디즈니랜드 성의 모델이 된 노이슈반슈타인 성과 호엔슈방가우성이 있다.
퓌센으로 바로 가기 - "CLICK HERE'
- 노이슈반슈타인성(城)과 로텐부르그의 여행기-
싼타루치아역을 떠난 알펜·익스프레스라는 국제열차가 연착되는 바람에 뮌헨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오밤중이었다. 가로등만 정연히 늘어선 시가지를 달리는 차창으로 내다보니 길가에 검불 하나 떨어져 있지 않고 청결하다. 대도시의 심야의 포도는 대개 상당히 지저분하여서, 쓰레기를 담아 내놓은 큰 비닐봉지, 산란한 신문지나 휴지조각, 종이 컵 등으로 아름답지 못한 것이 보통인데. 「과연 위생적인 나라로다.」 독일에 대한 나의 첫 감상은 우선 그렇게 산문적인 것이었다.
호텔에 닿으니까 방은 확보되어 있었지만 식당문은 물론 닫혀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저녁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뭔가 좀 먹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간단한 것이라면 방에 가져다 주겠다고 해서 부탁을 하고 올라갔다. 자기들이 말한대로 정확히 35분 뒤에 노크 소리가 나고 식사가 왔다. 그것은 <간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종 청량한 느낌으로 장식적이기도 하여서 나를 크게 기쁘게 해주었다. 맛도 홀륭하다. 독일요리란 아마 대체로 「별로」겠지, 두꺼운 접시에 모양없이 담아 내놓을테지, 막연히 그런따위 생각을 했던 나는 반성을 하며, 그들의 위생적, 합리적 우수성 위에, 미감각에의 경의도 대폭 보태기로 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노이스봔슈타인성(城)이라는 데를 가보고는 완전히 항복을 하는 심정이 되었다. 아름다움을 추구해 그 극치에 이른 한 창조물을 앞에 하고는 할 말을 잃었던 것이다. 그 성이 있는 퓌센까지 가는 중도에서 조그만 교회 하나를 구경하였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나직한 동산에 서 있는 그 교회는 금빛과 백색, 그리고 연한 분홍으로 어찌나 어여쁘게 만들어져 있는지 꼭 꽃봉오리같은 영상으로 지금도 내 뇌리에 새겨져 있다. 올라가는 길 한켠 목책 아래에 들꽃이 흐트러져 피어 있었다. 독일출생의 위대한 음악가가 얼마나 많았던가. 이민족이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멜로디를 갖고 있던가 하는 사실을 들꽃들을 보면서 홀연 상기하였다.
노이스봔슈타인성(城)은 수목이 울창한 산들과 맑은 호수에 둘러싸인 산정(山頂)에 있어, 한쪽은 깊은 계곡을 내려다 보며 서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이처럼 아름다운 성은 없다고 일컬어지는 그 흰 건축물은, 일별하자 듣던대로 꿈같은 분위기 속에 사람을 끌어들인다는 것을 알았다. 꿈같고 매우 성다운 성이라는 사실은, 월트·디즈니가 이것을 본따 디즈니랜드나 그의 영화에 나오는 성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역시 쉽사리 수긍하게 만들어 주었다.
▶ 노이슈반슈타인성에 얽힌 이야기
100년쯤 전에 바이에른의 루드빗히 2세라는 젊은 왕은 미(美)와 진(眞)에 그의 정열을 경 주하여, 이 날아갈 듯 경쾌하고 백조같이 기품이 있는 성을 구축하엿다. 17년의 세월이 걸 렸다. 그의 미의식이 고도의 순수함을 가지고 중세기(中世紀)풍으로 해석한 축성법이었다. 일찍 왕위를 계승한 그는 이상주의에 불타 선정을 베풀려 노력하였으나 가지가지로 장애가 생겨 그를 괴롭혔다. 이상과 현실의 상극이 가져오는 고뇌를 그는, 수도를 멀리 떠난 이 산 중에서의 예술적인 작업으로 해소하려 하였다. 심각한 재정의 문제도 무릅쓰고 강행을 했다. 성이 완성되던 바로 그 해. -왕은 발병하셨다, 정신병이다.- 라는 성명서가 국내에 발표되 고 그는 체포, 감금되었다. 그의 숙부가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3일 후에 광왕(狂王)루 드빗히 2세는 익사체로 스타른베르크의 호수에 떠 있었다...... 세계의 성이라는 성은 모두 그 자체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노이스봔슈타인 도, 화미장려한 성내의 일실에 그 초상화가 남아있는 미목수려한 청년왕의 비화를 딛고 서 있는 셈이다. 내가 늘 이상하게 느끼는 것은 이러한 오래된 성이, 사는 사람은 물론 없고, 관광객이 물밀 듯 닥쳐와 흘러들고 흘러나가, 유적(油滴)은 형태만 남은 듯 싶은데도 불구하고, 매우도 짙게 그 성주들의 인간취를 멈추어 가지고 있다는 일이다. 노이스봔슈타인은 특 히 루드빗히 2세가 스스로 설계하고 스스로 감독하여 정혼을 기울여 이룩한 성이었다. 그리 고 이 성 때문에 그는 죽었다. 자살 혹은 실족사(失足死)일 것이라고 신정부는 말했으나 암살이었을 것은 거의 결정적이다.
성곽 내외의 구석구석에까지 이를테면 그의 정신이 농후하게 배어있어, 바그너의 가극을 사랑한 그가 <로엔그린>의 장면을 디자인하였다는 성내 극장의 무대를 보았을 때, 나는 그의 열광적인 시선과 맞부딪힌 듯한 착각마져 느꼈다. 높은 탑에도 오르고, 지하의 주방에서 꼭대기 방까지 음식이 식지말고 올라가라고 기발한 장치를 해놓은 것도 보고, 두루 성안을 돌아 안마당에 나와, 다시 그 아름다운 물건을 올려 다 보았다. 옛 성들이 가져야 했던 필수조건인 방비의 문제, 요새로서의 기능은 거의 무시되고, 건축공 법상으로도 완전치 못하지 않았던가. 그 방면의 전문가들이 하여간 세계 제일이라고는 하지 않는다는 말은 나도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성이 가장 아름답다는 점에 대해서 는 군말이 없다. 실용성 따위는 일체 초월해서 미에의 꿈만을 추구한 결정체이기에 이 성은 이다지도 동화적이리만치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매우 감격하고 흥분하여서 그날 저녁 홋흐브로이하우스에 맥주를 마시러 가야 한다는 일에 그다지 흥이 돋지 않았다. 백조의 성의 이미지와 더불어 <명상>에나 잠겨 않아 있고 싶었다. 그러나 요즘 세상의 나그네에게는 스케쥴이라는 것이 있고 또 나는 나의 동행인인 남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대목이 하나 더 있었다. 그래서 그 뮌헨 명물인 생맥주집(호프브로이하우스)에 따라간 결과로 나는 그날 지극히 유쾌한 시간을 경험하였던 것이다.
아돌프·히틀러가 창당시절에 연설을 했다던가 당대회를 열었다던가 하는 그 널직한 목조건물 홀은 활기와 생동감에 차, 기쁨과 휴식을 동시에 구하는 시민들의 요망에 답하고 있었다.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소시지, 크기도 커서 나는 두손으로 들어올려야만 했던 생맥주 컵, 악단의 연주, 신명난 사람들의 춤.... 그 합창에 내가 큰소리로 끼어 들어 노래불렀을 리는 만무임에도 어쩐지 함께 그렇게했던 듯한 착각이 지금도 내 머리속에 있다. 이 생맥주집은 그 옆집인 뤠벤브로이와 함께 뮌헨을 즐거운 도시로 만들고 있는 명소임이 틀림없다.
▶ 로덴브르그의 여행 이야기
독일여행 중에서 와 보기를 너무너무 잘했다 싶었던 또 하나의 장소는 로텐부르그다. 중세 기의 도시형태가 거의 완전히 남았고, 약간의 파손은 충실히 복원하였다는, 그 성벽에 둘러 싸인 조그만 도시는,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현재도 사람들이 그 안에 살고 있는 탓인지 모 종의 생활감정-낡아서 추상화된 생활감정 같은 것을 짙게 내뿜고 있어, 일개 여행자에게까 지 지금 이 중세기의 도시에 중세기의 인간으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 안겼다.
돌을 접은 좁다란 포도가 골목골목으로 뻗어있고, 생선모양, 양의 머리 등의, 꽤나 미술적 으로 처리된 조그만 상점 간판들은, 벽에 붙여지거나 세워지는 대신 모두 사슬로써 출입문 위에 매달려 있었다. 역시 돌이 깔린 시의 한 가운데 광장에는 노상 멎지않고 샘물이 흘러넘치는 돌과 청동의 물받이가 있고, 시청 청사의 꼭대기 층에서는 예의 유치한 <움직이는 인형> 이 조화를 부 렸다.
하루에 한번 일정한 시각에 부오옹...하고 종이 울리면서 창문들이 열리면, 초기 활동사진 시대의 스크린의 인물같이 끼걱거리는 동작으로 등신대(等身大)의 시장(市長) 인형이 앞으로 밀려 나온다. 그리고 끼걱끼걱 팔을 굽혀 큰 잔의 맥주를 들이키는 것이다. 옛날에 시의 명예를 구하기 위해 그렇게 큰 잔을 비워야 했던 한 시장을 기념해서 만들어 진 것이라 했다.
여행자들이 시작 전부터 광장을 메우고 서서 창문을 쳐다보고 있다. 여러 가지 파(派)의 낡은 교회들이 있고 탑이 있고 성문이 있고, 교수형장으로 통하는 좁고 길다란 길도 있다. 수도원의 지붕이 길 위로 내밀려 있어 그 밑이 매우 어두웠던 고로 <지옥>이라 불렸다는 골목도 있었다.
<국제자유도시>라는 특수한 기구로 형성되었던 이 곳에는 교회와 관청건물 외에도 육류시장, 직공의 집등, 한 나라에 소용되는 모든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지금 어느 골목인가에서 도미니크회나 프란시스코파의 수도승이, 후드 달린 검정 혹은 회색의 느슨한 옷을 입고 허리에 염주를 늘이고 넓은 소매속에 팔짱을 끼고 줄줄이 걸 어나온다 할지라도, 그레고리오 성가(聖歌)가 어디선가 흘러온다 할지라도, 그대로 썩 잘 어 울릴 분위기와 모양으로 로텐부르그는 남아있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생각하게 하고, 문화를 생각하게 하고, 동일선상에서 오늘날의 우리를 생각 하게 하며, 중세기의 어두움도 충분히 간직한 고장이었다. 로만틱 ·슈트라세를 달리는 관광버스 안에서는 내내 비발디의 사계(四季)를 들려주었다. 라인강은 수량도 풍부한 아름다운 강이어서 유역의 산이나 낭떠러지 수목 사이에는 조금조 금한 성-성이라기 보다는 수없이 많은 요새들중에는 산적에게 점거되어 장세월 그 소굴이 었었다는 곳도 있었다.
라인강에는 물론 유람선이 다닌다. 허나 그보다도 물자운송의 역할을 이 강은 아직도 옛과 다름없이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러 나라 사이를 흘러 지나는 강이다. 물자뿐 아니라 문명문화도 사람의 삶, 그것도 서로 짙게 교류되고 있는 곳이 서구(西歐)였다고 새삼 깨달았다. 독일을 독일만으로 잘라내어 생각하는 일은 삼가야 할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