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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이름 ‘東海’를 되찾자
金源模(단국대 교수, 한미관계사)
<머 리 말>
우리 애국가 첫머리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 되어있다. ‘동해’는 한국민족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다. 삼국시대부터 한민족은 ‘동해’라고 표기해 왔기에 애국가에서 ‘동해’를
한민족과 더불어 영원불멸의 바다로 찬미하고 있다. 그런데 19세기 전반기까지는 서구 지도에는 ‘동해’
로 명기되어오다가 19세기 후반기 제국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한국이 일본 제국주의적 침략을
당하면서부터 ‘일본해’로 표기된 것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1868)직후 ‘정한론(征韓論)’
수립으로 한반도침략이 본격화하기 시작하면서 청일전쟁(1894)이후부터 ‘동해’라는 바다이름은
사라지고 ‘일본해’로 둔갑된 것이다.
(1) 한국 역사문헌상의 동해표기
한국 역사문헌에 ‘동해’라는 바다이름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기원전 59년(神爵3)이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부여왕 해부루의 부하 아란불(阿蘭弗)이 말하기를 “어느날 하느님이 내려와 나에게 이르기를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나라를 여기에 세우려하니 너는 여기서 피하라. ‘동해’ 바다가에
가섭원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니 도읍을 정할만하다’”라고
‘동해’라는 바다이름이 고구려 건국과 동시에 나온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 제1, 始祖 東明聖王
條」, “東海之濱有地 號曰 迦葉原土壤膏 宜五穀 可都也”〕. 이와같이 동해는 호국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자연재이(災異)에 대한 자세한 기사가 『삼국사기』에 13회, 『삼국유사』에 14회 나온다.
〔李相泰, 「역사문헌상의 동해 표기에 대하여」(『동해지명에 관한 국제학술세미나』1995), 20-27 쪽〕
고려시대에 이르러 동해는 곧 ‘삼한(三韓)’‘해동(海東)’과 같이 ‘우리나라’를 의미하고 있다.
928(태조 11)년에 “또한 ‘동해〓신라’의 끊어진 전통을 다시 이을수 있을 것이다.”〔『高麗史』권 1,
世家 권 제1 무자 11년조, “抑亦紹東海之絶緖”〕. 이처럼 고려는 신라의 전통을 계승한 정통성 정부임을
강조하고 있다.
조선시대 제향(祭享)에는 대사와 중사가 있는바, 대사(大祀)는 종묘 ·사직단등의 제사이며, 중사(中祀)는
악신(岳神)·해신(海神)·독신(瀆神)을 제사지내는 제향이다. 조선건국 초부터‘동해’는 제사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즉 ‘동해신’을 제사지내는 신성스런 바다로 신앙하고 있다. 강원도 양양(襄陽)에
동해신사를 지어서 제향을 올리고 있다. “동해는 강원도 양주 동쪽에 있고, 남해는 전라도 나주 남쪽에
있고, 서해는 풍해도 풍천 서쪽에 있다.”라고 동·남·서해 세군데에서 ‘方位海神’을 제사지냈다고
밝히고 있다.〔『世宗實錄』권 5, 176 쪽, 吉禮序例 辨祀條, “東海江原道襄州東南海全羅道羅州南 西海豊
海道豊川西 ”〕. 1415(태종 15)년 4월에는 “동해의 물이 넘쳤다. 영일로부터 길주까지의 바닷물이
높이가 5척 또는 13척이나 되었다.〔『太宗實錄』태종 15년 4월 임신(5)조, “東海水溢 自迎日至吉州海水
高五尺或十三尺”〕. 여기서 동해의 범위가 경북 영일(迎日,浦項)에서 함경북도 길주(吉州)까지의 해역이
‘동해’라고 규정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고지도상에 처음으로 ‘동해’가 등재된 것은 양성지(梁誠之)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
國輿地勝覽, 성종 12, 1481)에 첨부된 「八道總圖, 중종 26, 1531)」(李燦 소장)이다. 일명 「동람도(東覽
圖)」라고 일컫는 이 고지도에 강원도 襄陽에‘東海’, 전라남도 海南에 ‘南海’, 황해도 장산곶(長山串)
에 ‘西海’라 표기하고 있다. ‘방위해신(方位海神)’을 제사지내는 곳이다.〔李燦, 「한국의
고지도에서본 동해」(『동해지명에 대한 지리학 세미나』1992), 1-11 쪽〕 규장각 소장 고지도는 총
220여종인데, 이를 분석해보면, 17세기까지의 지도에는 바다이름을 기록하지 않거나 방위명을 기록한
지도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가령 김정호(金正浩)의 「大東輿地圖」(1861)에는 바다이름이
기재되어 있지않다. 대개 ‘동저대해(東抵大海)’‘대해(大海)’‘해(海)’라고 표기하고 있다.
18세기이후의 지도에는 ‘東海’표기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아국총도(我國總圖)」(18세기말)·
「조선·일본·유구국도(琉球國圖)」(18세기말)·「서북계도(西北界圖)」(1776년 이전추정)등 지도에는
‘동해’라고 명기하고 있다. 私撰지도보다는 官撰지도에 ‘동해’표기가 많다. 대한제국시대의 교과용
「대한제국지도(大韓帝國地圖)」(1908)에는 ‘대한해(大韓海)’라 명기해 놓고 있다. 상기 규장각 소장
고지도에는 ‘일본해’라 표기된 지도는 단 한장도 없다.〔楊普景, 「奎章閣소장 고지도로본 동해지명」
(『동해지명에 관한 국제학술세미나』1995), 132-144 쪽〕
(2) 중국 역사문헌상의 동해표기
『後漢書』에 “읍루는 고대의 숙신국이며 부여의 동북 천여리되는 곳에 있는데, 동쪽은 ‘대해’와
인접하여 있고,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고 있다.”〔『後漢書』권 85, 「東夷列傳」2812 쪽, “ 婁 古肅愼之
國也 在夫余東北千余里 東濱大海南與北沃沮接”〕. 이와같이「동이열전」에서 처음으로 동해를
‘동쪽대해(東濱大海)’라고 표기하고 있다. 『三國志』에도 역시 '大海’또는 ‘동궁대해(東窮大海)’
라고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요(遼)·금(金)·원(元)·명(明)시대에는 ‘대해’라는 표기가 사라지고
일반적으로 통칭 ‘東海’라는 바다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원·명 교체기에는 동해를 '경해(鯨海)’로
표기한 문헌도 있는데, 이는 동해에서 고래가 많이 잡힌다는 뜻에서 이런 바다이름이 생긴 것이다. 상거한
문헌뿐만 아니라 漢唐이래 19세기 중반기까지의 중국역사문헌에서는 ‘일본해’라는 명칭을 기재한
사료를 찾아볼수 없다.〔吳松弟, 「中國歷史文獻的 日本海名稱」(『동해지명에 관한 국제학술세미나』
1995), 2-18 쪽;朱士光, 「從中國歷史文獻論淸末日本海名稱演變」(『동해지명표준화를 위한 국제세미나
논문발표 Ⅰ』1997), 49-53 쪽;陳才·安虎森, 「日本海(東海)地名的溯源-我們的看法」(『동해지명에 관한
국제학술세미나』1995), 111 쪽, “故在歷史文獻中對日本海的名稱歿有記載”〕
중국문헌에 처음으로 ‘日本海’를 사용한 이는 주일 청국참찬관 황준헌(黃遵憲, 1842-1905)이다.
“일본은 서북쪽으로 ‘일본해’를 사이에 두고 조선과 멀리 상대하고 있다.”〔『日本國志地理志』
중권, “日本西北隔日本海遙與朝鮮相對”〕. 황준헌은 1880년 『朝鮮策略』에서“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이어짐으로써 자강을 도모해야한다(親中國結日本聯美國以圖自强而已)”라고
역설하면서 조선에 대미수교(對美修交)를 권고한바 있다. 따라서 황준헌은 일본에서 오랜 기간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일본측 자료를 기본으로 저술했기에 이같이 ‘일본해’라는 바다이름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奚國金, 「歷史上中國東北東部的民族與日本海名稱的演化」(『동해지명에 관한
국제세미나』1995), 146-151 쪽〕
(3) 서양 고지도상의 동해표기
서세동점시대를 맞이하여 동아시아 진출의 선두주자는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포르투갈
기념지도첩(Portugaliae Monumenta Cartographical)」을 제작했는데, 총 37장가운데, 1615년에 에레디아
(Godhino de Eredia)가 제작한 지도에 ‘동해’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이로부터 서양 각국 항해가들은
동양탐험항행끝에 해도를 제작했는데 이를 분석해보면, 일본해표기와 조선해 또는 동해표기로
대별해볼수 있다. 먼저 ‘일본해(Mer du Japon)’라 표기한 지도를 보면, 전체 서양지도중 총 15장 약 25%
를 차지하고 있다.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1602년에 한문으로 제작한 『坤輿萬國全
圖』에 동해를‘日本海’라 명기하고 있다. 이것이 ‘일본해’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이와같이 일본해
호칭은 동양의 지리적 지식을 획득한 예수회 선교사에 의해 생겨나서 보급되었다. 1797년 프랑스
대항해가 라 페루즈(La Perouse, 1741-88)는 그의 해도에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함으로써 1815년 톰슨
(Thomson), 1820년 라피(Lapie), 1857년 코튼(J. H. Cotton)등이 '일본해(Mer de Japon, Sea of Japan)’
로 표기하고 있다. 이에 비해 ‘동해(Ocean Oriental)’또는 ‘조선해(Mer de Coree)’로 표기한
서양지도는 전체중 32장으로서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 대개 17세기에서 19세기 전반기까지의
서양지도에는 일본해보다 동해 또는 조선해 표기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동해표기 주요지도를 보면,
1647년 덧들리(Rbert Dudley, 1574-1649)의 「일본지도」(Carta Particolare della Isola de Giapone)에는
‘조선해(MARE DI CORAI)’라 표기했고, 18세기 몰(Herman Moll, 1681-1732)의 「일본도」(A Map of
IAPON or NIPHON)에는 ‘조선해(SEA of COREA)’라 명기했고, 1790년 세이어(Robert Sayer, 1725-1794)
의 「일본제국도」(Map of the Empire of Japan)에도 역시 ‘조선해(COREAN SEA)’라 표기해놓고
있다. 이밖에 1650년 상송(N. Sanson), 1715년 페르(N. de Fer), 1829년 델마치(Delmarche)등의 지도에도
‘동해’ 또는 ‘조선해’로 표기하고 있다.〔The Historical Precedent for the "East Sea"(The Society
for East Sea, Department of Geography Education College of Education, Seoul National University, no
date); 서정철, 「서양 고지도에 나타난 동해-일본해의 명칭에 대하여」(『동해지명에 관한
국제학술세미나』1995), 71-84 쪽;이기석, 「발견시대 전후 동해의 인식」(『동해지명에 대한 지리학
세미나』1992), 26-47 쪽;한상복, 「해양학적 측면에서본 동해의 고유명칭」(『동해지명에 대한 지리학
세미나』1992), 18-25 쪽〕일제가 1936년 ‘황도(皇道)사상’ ‘일본정신’을 찬양고무하기 위하여
'도해식(Illustration)’으로 편찬간행한 『歷代文化皇國史大觀』에「元祿時代の日本地圖」가 수록되어
있다.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元祿시대(1688-1703) 한 프랑스 지리학자가 일본에 와서 일본 전국의
지형을 정밀하게 답사·측량하고 일본측 자료를 근거로 「일본열도의 지도(CARTE DES ISLES DU IAPON,
1690)」를 제작한 것이다. 1690년 프랑스에서 제판했는데, 명치초년에 한 독일인이 이 고지도를 휴대하고
일본에 와서 이를 일본정부에 기증했다. 현재 제실(帝室)박물관에 국보처럼 보관되어 있다. 일본은 1609년
화란상관을 개설, 네덜란드와 교역하고 있었다. 이 프랑스 지리학자도 화란상선을 타고 일본에 입국,
일본지도 제작활동을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 서구인이 일본에서 실제 현지답사를 통해 제작한 최초의
「일본지도」이다. 이 지도를 보면, 일본을 ‘야퐁(IAPON)’,‘일본해’라는 바다이름이 없고, ‘동해
(OCEAN ORIENTAL)’라고 명기하고 있다. 일본열도 남쪽 태평양을 ‘남방대해(MER DU SUD)’라고
표기해놓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한반도 근해를 ‘조선해(MER DE COREER)’라 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태평양을‘남방대해’라고 표기하고 있으니 ‘동해’도 단순한 방위를 의미하는 바다이름에
불과하다고 주장할수도 있다. 그러나 굳이 방위론을 제기한다면, 동해는 일본측에서보면 북서쪽에
해당하기 때문에 ‘북해’또는 '서해’라 표기해야한다. 그러므로 이 지도에 표기해놓은 ‘동해’는
단순한 방위를 나타내는 바다이름이 아니다. 이 「일본지도」는 1690년까지 서구 지리학계에서나
일본에서 조차 ‘일본해’라는 바다이름이 없었다는 것, 따라서 ‘동해’라는 바다이름이 고유명사로
정착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歷代文化 皇國史大觀』(朝鮮新聞社, 1936), 349 쪽〕
일본은 일찍이 마르코 폴로의 『東方見聞錄』에서 일본을 ‘황금의 나라 지팡구(Zipangu)’로
알려지면서 항해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은 1609년 화란상관을 개설, 화란과의 교역을 통해
일본정보가 서구 세계로 널리 전파되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일본에 관한 서적이 1천여종 출판되었다.
이같은 일본관련 정보의 전파 결과,‘인지언어학적(Cognitive Linguistics)’으로 ‘일본해’표기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이에 비해 조선은 철저하게도 해금정책(海禁政策)에 의해 중국 일본 이외의
나라와의 교역은 ‘국금(國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조선은 ‘미지의 은둔국’으로 남을수 밖에
없다. 해금정책은 1880년대 조선개항이 단행될때 까지 고수했다. 이와같이 조선에 관한 ‘정보결여’에도
불구하고 서구 지도에 동해 또는 조선해표기가 50%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일본해 표기는 19세기
후반기 제국주의적 침략논리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서정철, 「고지도
동해-일본해명칭에 대한 인지언어학적 고찰」(『동해지명 표준화를 위한 국제학술 논문발표 Ⅰ』1997),
37-47 쪽〕
(4) 일본 고지도상에는 ‘日本海’표기가 없다
일본『國史大辭典』에 「일본도(日本圖)」9장이 총 천연색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를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1) 1671년의 「일본 카르타」:통치자가 행정자료로 이용한 지도이다.
(2) 1589년의 「대일본국도(大日本國圖):동남 아시아 항해에 이용된 지도.
(3) 16세기에 제작한 「일본도(日本圖)」:일본 해안선을 상세하게 그렸고, 특히 규슈(九州)의 윤곽을
현실적으로 그린 것은 포르투갈 항해사들의 관측·측량결과를 채용한 것이다.
(4) 1653년 막부찬(幕府撰), 「경장일본총도(慶長日本總圖)」:도쿠가와 막부가 통치하기에 편하게 전국
번주(藩主)의 이름을 첨부하고 있다.
(5) 1670년 막부찬, 「정보일본총도(正保日本總圖):해로와 육로의 이정(里程)을 상세하게 그려놓고 있다.
(6) 1702년 막부찬, 「겐로쿠 일본총도(元祿日本總圖)」:국계(國界)와 해안선의 굴곡을 그려놓고, 특히
일본열도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단에 ‘朝鮮’이라 표기하고, 남·서·북 방위를 명기해놓고 있다.
(7) 1687년 「본조도감강목(本朝圖鑑綱目)」(石川流宣作):숙역(宿驛)관계 기사를 자세하게 그리고, 특히
‘朝鮮國 釜山海’를 명기했다.
(8) 1779년 「개정일본여지로정전도(改正日本輿地路程全圖)」(長久保赤水作): 일본지도로는 최초로
경위선(經緯線)을 그려놓고 있다.
(9) 1821년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圖)」(伊能忠敬作):19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지도이다.
막부 天文臺의 책임자가 전국을 측량하여 이 지도를 완성했다. 〔『國史大辭典』(吉川弘文館, 1995) 권
11, 204 쪽)〕
위에 열거한 일본고지도 아흡장에는 바다이름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일본해’라는 바다이름도 찾아볼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일본에서는 적어도 19세기 후반기 1868년 제국주의적 한반도침략정책 즉
‘정한론(征韓論)’수립할때까지 ‘일본해’라는 바다이름을 사용하지 아니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日本海’라는 바다이름은 예수회 선교사가 일본해를 표기하면서 전파되었고, 이는 일본이 19세기
후반기 서구로부터 수입한 바다이름임을 시사해주고 있다.
(5) ‘일본해’표기는 언제부터인가
일본에서는 19세기 전반기까지 ‘일본해’라는 바다이름을 사용한 문헌이나 고지도가 없다. 19세기
후반기 제국주의적 한반도 침략정책인 ‘정한론’을 구현하기위해 청일전쟁 도발을 계기로 ‘동해’대신
‘일본해’라는 바다이름이 등장한 것이다. 일본학자는 “‘일본해’라는 호칭의 정착시기는 서양에서는
18세기말경, 일본에서는 幕府末期부터 明治초기(1860년대)이다.”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러일전쟁
전승직후부터 ‘일본해’호칭이 정착된 것이다. 〔靑山宏夫, 「古地圖にみる日本海という呼稱」
(『동해지명에 관한 국제학술세미나』1995), 102 쪽〕
일본 도쿠가와 막부시대의 사무라이정신을 찬양한 『사무라이의 딸 고다카(Kotaka)』를 저술한 영국인
모리스(J. Morris)는 아직 전쟁이 진행중인 1894년 『청일전쟁』〔J. Morris, War in Korea, A Brief
Treatise Upon the Campaign in Progress:Its Origin, And Probable Results(Ward, Lock And Bowden,
Limited London:Warwick House, Salisbury Square, E. C. New York and Melbourne, 1894)〕을 저술했다.
모리스는 장기간 일본에 체재하면서 일본 군부가 제공한 보도자료를 근거로 『청일전쟁』을 집필했는데,
아직 전쟁이 진행중인 시점에서 일본의 전승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일본의 ‘북진정책’을 미화·찬양·
고무하고 있다. 청일전쟁은 청일 양국간에 한반도에 대한 종주권 쟁탈전이었다. 청은 대한 종주권(對韓 宗
主權)유지 강화를 위해, 일본은 청으로부터 종주권 박탈과 '정한론’구현을 위해 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일본은 한반도를 정복지배한후 이를 발판으로하여 장차 대륙침략으로 아시아대륙 제패의 야망을 품고
있었다. 일본의 한반도침략음모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3세기초 진코(神功)여왕은 신라를 정벌·
복속했고, ‘任那日本府’를 두었다는 날조기사가 『日本書紀』에 등장한다. 1592년 진코의 후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한반도 정벌(임진·정유재란)로 6년간 한반도를 정복 지배했다고
상기하면서 이제 明治는 진코와 도요토미의 뜻을 받들어 ‘征韓論’구현을 위해 아시아 침략전쟁을
수행하고 있다고 청일전쟁 도발의 역사적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모리스는 책 첫머리에 「한·일·청 지도」(Map of Korea, Japan And Adjoining Parts of China)를 첨부하고
있다. 이 지도를 보면, 서해를 ‘黃海, (Hwang Hai or Yellow Sea), 동해를‘日本海(Sea of Japan)', 獨島를
'리앙쿠르岩(Liancourt Rocks)’대신‘마쓰시마(Matsusima, 松島)’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는
일본군부가 청일전쟁 발발시기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일으키면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같은 일본해 명칭은 친일 영국인 모리스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기했을뿐, 사실상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일본해’를 사용한 문헌을 찾아볼수 없다.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일본해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러일전쟁에서의 전승을 계기로 동해를 '일본해’로 공식표기화하면서 비롯되고 있다. 따라서
일본해 명칭은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 것과 직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라는
사실은 『삼국사기』 512(지증 13)년에 확인된다. “우산국은 명주의 바로 ‘동쪽바다섬(東海島)’으로서
혹은 울릉도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于山은 독도요, 武陵은 울릉도이다. 독도를 ‘東海
島’라고 표기함으로써 한국의 고유영토임을 밝히고 있다.〔『三國史記』「신라본기」권 4, 지증마립간
13년조, “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或名鬱陵島”;『世宗實錄』권 153, 「地理誌」, 江原道蔚珍縣條〕.
1787년 프랑스 항해가 라 페루즈(La Perouse)는 동해를 탐사, 울릉도를 ‘다줄레島(Dagelet Island)’,
독도를 ‘붓솔(Boussole)’이라 해도에 표기했다. 1849년 프랑스 항해가 리앙쿠르가 동해를 탐사, 독도를
‘리앙쿠르岩(Liancourt Rocks)’이라고 해도에 표기함으로써 독도는 조선의 고유영토임을 국제적으로
공인되고 있다.〔Horace Allen, Korea:Fact And Fancy, Being A Republication of Two Books Entitled
"Korean Tales" And "A Chronological Index"(Methodist Publishing House, Seoul, Korea, 1904), p. 150〕
일본정부는 1870년 4월 15일 “竹島(울릉도)와 松島(독도)가 조선 부속 영토이다.”라고 공식 인정하고
있다. 이와같이 일본 외무성과 太政官(총리대신)은 竹島와 松島를 ‘조선부속’즉 조선의 고유영토임을
명백하게 인정하고 있다. 〔『日本外交文書』권 3, 137 쪽, 「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竹島松島朝鮮附屬
ニ相成候始末”〕. 뿐만아니라 1894년 일본 해군성 수로국이 편찬한『朝鮮水路誌』에서도 “松島
(울릉도)·‘리앙꼬르도 열암(リヤンコ-ルト列岩, 독도)’을 한국 고유영토임을 인정하고 있다.” 〔『朝鮮
水路誌』(일본해군성수로부, 1894), 255-256 쪽;愼鏞廈, 「한국의 독도영유와 일제의 독도침략」
(『한국독립운동사연구』10, 1996), 420 쪽〕1854년 러시아 군함 오리우쓰아호가 동해를 정밀탐사하여
해도를 작성한 것을 일본 해군성 수로국이 작전용으로 이를 번안해서 1876년「朝鮮東海岸圖(EAST
COAST OF KOREA)」를 제작했다. 이 지도에서 일본 해군성은 러시아군함이 해도에 표기한 그대로
울릉도를 ‘다제레다島(タゼレタ島)’라 명기했고, 독도는 동해를 탐사한 러시아군함 이름을 따서 독도의
'東島’를 ‘오리우쓰아島(オリウツア島)’, ‘西島’를 ‘맥코라이초(メ子ライ礁)’라 표기하면서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인정하고 있다. 더군다나 일본은 지도이름을 「조선동해안도」라 표기함으로써
당시 일본은 ‘일본해’라 부르지않고 ‘동해’라고 호칭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와같이 일본은
1876년 조일조규체결때까지 ‘동해’라고 호칭했음을 확인되고 있다.〔「朝鮮東海岸圖(1876)」(서울대
규장각소장, 〈奎〉25317);『朝鮮日報』(1983. 2.24)〕. 일본정부가 ‘獨島’라고 공식 표기한 것은
1904년 9월 25일 新高號의 「동해탐사보고서」에서이다. “리앙꼬르도岩은 한인은 이를 獨島라고 書
하고, 本邦(일본)어부들은 약하여 ‘리앙꼬島’라고 한다.”이처럼 일본은 1904년까지 ‘일본해’라는
바다이름을 사용하지않고 ‘동해’라고 표기하면서 독도를 한국영토임을 시인하고 있다.〔『軍艦新高行
動日誌』(1904. 9. 25);愼鏞廈, 「한국의 독도영유와 일제의 독도침략」(『한국독립운동사연구』10,
1996), 423 쪽〕 일본은 마한(A. T. Mahan)의 ‘해양세력국화론(Theory of Sea Power)’에 의거 동해를
일본의 ‘內海化’해야만 ‘日本海’명칭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을수 있다. 만약 독도가 한국
영토일 경우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할수 없다. 그러므로 일본해 명칭은 반드시 독도의‘일본영토화’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일본은 독도를 청일전쟁까지 이를 ‘마쓰시마(松島)’로, 러일전쟁 발발까지는
‘리양꼬르도岩’으로 불러오다가 러일전쟁에서의 전승을 계기로 마침내 동해를 일본의 ‘내해화’를
위해 독도를‘다케시마(Takeshima, 竹島)’로 섬이름을 바꾸어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島根縣) 告
示 40號」로 일본영토에 편입했던 것이다.〔宋炳基, 「조선후기·고종조의 울릉도 搜討와 개척」(『崔永禧
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1987), 413 쪽;任德淳, 「정치 지리학적 시각으로본 동해지명」(『동해지명에
대한 지리학 세미나』1992), 12-17 쪽〕. 일본은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 사실을 정식 외교채널을 통해
한국정부에 통고조차 하지아니했다. 한국정부가 일본이‘無主地先占論’에 의해 독도가 강탈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은 그로부터 1년여뒤인 1906년 4월 29일이었다.“독도가 이제 일본영토가 되었다(獨島가
今爲日本領地故로)”라고 독도강탈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各道觀察道案』(의정부외사국) 1
(규장각 소장);宋炳基, 「일본의 ‘량고도(독도)’영토편입과 울릉군수 沈興澤報告書」(『尹炳奭
화갑기념 한국근대사논총』1990), 61 쪽〕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 ‘1905년 2월 22일’일자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러일전쟁을 도발, 초반 승기를 잡은 일본은 재빨리 서울을 점령, 「한일의정서(1904. 2. 23)」
「한일협정(1904. 8. 22)」을 강제로 체결, 사실상 한반도 지배권을 확립했다. 일본군은 승승장구 1905년
1월 1일 旅順함락, 3월 10일 奉天함락, 5월 27일 ‘일본해전’에서의 러시아 발트함대 격파로 전승국으로
부상했다. 이와같이 일본은 한반도 점령과 전승시점에서, 한국정부와 그 어떠한 외교적 협의없이
일방적으로 독도를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일본영토로 편입하면서 일본해전에서의 대승리직후 5월
30일 『관보』에서 “5월 27일부터 28일까지 오키노섬(沖之島)부근부터 鬱陵島부근까지의 해전을
「일본해의 해전」이라 호칭함”이라 공식적으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했던 것이다. 러일전쟁때
일본군부가 작전용으로 작성한 지도 「開戰前日露兩軍ノ配置」에는 '동해’를 ‘일본해’, ‘대한해협
(Korean Strait)’을 ‘쓰시마해협(對馬海峽)’이라 표기함으로써 ‘영토침략성’을 노골화했다. 「日本
海海戰要圖」(1905. 5. 26-28)에는 처음으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 명기함으로써 독도를
일본영토화했음을 확인하고 있다.〔『明治編年史』(명치편년사 편찬회, 1936) 권 12, 424 쪽, 「5. 30. 官
報」;日本外務省, 『小村外交史』(原書房, 1966), 983 쪽, 「機密日露戰史附圖」〕 '일본해’라는
바다이름이 국제적으로 공식 인정되기는 포츠머스강화조약문에서였다. 포츠머스강화조약 제11조에 “露
西亞國은 日本海 오호츠크 해(Okhotsk More) 베링해(Bering)에 瀕하는 로서아국 영지의 연안에 있어서
어업권을 일본국 臣民에 許與하기 위하여 일본국과 협정을 할것을 약함.”이라 명문화하고 있다. 이로써
일본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주재한 포츠머스강화조약에서 동해를 일본해라는 ‘공식호칭’을
국제적으로 공인받게 되었다. 이로부터 모든 세계의 지도에는 ‘동해’라는 바다이름은 사라지고 그대신
‘일본해(Sea of Japan)’라는 바다이름이 정착화된 것이다.〔外務省編, 『日本外交年表 竝 主要文書』
(原書房, 1965) 上, 245-249 쪽,「日露講和條約」(1905. 9. 5);『淸季外交史料:淸宣統朝外交史料』권 191,
「日俄朴司茂斯和約」, “俄國與日本國 商量允準日本國臣民在日本海”〕
<맺는 말>
필자가 『역대문화 황국사대관』에서 발견한 「겐로쿠 시대의 일본지도」(1690)〔「‘東海’표기 日帝
공식지도 발견」(『東亞日報』(1998. 3. 11)〕에는 동해를‘동해(OCEAN ORIENTAL)’, 조선근해를
‘조선해(MER DE COREER)’라고 명기하고 있다.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의 '일본해’표기, 라
페루즈의 「해도」에서의 ‘일본해’표기등은 모두가 일본 현지답사없이 제3국 자료를 근거해서
제작했다는 것과 비교해보면, 프랑스 지리학자가 일본 전국을 답사 측량끝에 일본 도쿠가와막부의
자료제공에 의해 지도를 제작했다는 점에서 이「일본지도」는 가장 권위있는‘오리지날 일본지도’로
공인되고 있다. 더군다나 일제는 일본정신 황도사상을 찬양고무하기 위하여 도해식으로 편찬한
『역대문화 황국사대관』에 이 지도를 게재한 것 자체가 ‘동해’명칭을 국제적으로 통용해왔음을
의미한다. 이같은 사실은 일본해군성 수로국 발행 「조선동해안도(1876)」가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일본은 이 지도에서 ‘일본해’라 하지않고 ‘동해’라고 표기했고, 독도를 한국영토라고 명기해놓고
있다. '동해’는 19세기전반기 까지는 국제적으로 통용되어오다가 19세기 후반기 제국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일본의 한반도침략이 본격화하면서 ‘동해’라는 바다이름은 사라지고 그 대신 '일본해’로
둔갑한 것이다. 이에‘동해’표기의 ‘正統性’을 해명해보고자 한다.
첫째, 한국은 역사문헌에서 삼국시대이전 기원전 59년부터 ‘동해’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고지도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첨부된 「팔도총도(1531)」에서 ‘동해’명칭이 명기되어 있다.
이처럼 한국의 고문헌에서는 삼국시대이래 한결같이 ‘동해’라는 바다이름을 사용해왔다. 한편 일본
고지도「겐로쿠시대의 일본지도」(1690)에서도 ‘동해’로 표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876년 일본
해군성 수로국은 지도이름을 아예 「朝鮮東海岸圖(1876)」라고 표기하면서‘동해’표기를 공인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의 고지도에서도 ‘일본해’라고 표기하지않고 ‘동해’라고 표기했다는 점에서
일본은 1876년까지‘동해’명칭을 인정해왔음을 알수 있다.
둘째, 일본고지도 9장을 분석 검토해보면, 한결같이 바다이름이 없었고,'일본해’라고 표기된 지도가 단
한장도 없다. 그러므로 1821년까지에는 일본에서는 ‘일본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아니했음을
일본고지도는 입증해주고 있다.
셋째, 19세기 전반기까지 서구의 지도상에는 대개 ‘동해’명칭을 사용했다. 1600년에 네덜란드 상선
항해장 영국인 애덤스(William Adams, 三浦按針)가 일본 규슈에 표도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는 과감하게도 애덤스를 외교고문에 기용, 문호개방정책을 단행, 1609년 네덜란드에 통상교역을
허락했다. 마침내 나가사키(長崎)에 和蘭商館을 개설, 서구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일본에 관한 각종 문헌이 서구에서 간행되었다. 특히 18세기 프랑스에만도 1천여종의 일본관계 문헌이
간행되었다. 일본정보의 서구전파로 서양지도상에 언어인지학적으로 자연히 '일본해’라는 명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비해 조선은 철저하게도 해금(海禁)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이외의
서구나라와의 교역은 일체 ‘國禁’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러므로 조선은 ‘미지의 은둔국’으로 남아
있을수 밖에 없다. 이와같이 서구세계에서 폐쇄적 ‘조선정보 결여’에도 불구하고 서양지도상에는
‘일본해’표기가 25%인데 반해 ‘동해’또는 '조선해’ 명칭 표기는 50%에 이르고 있다. 이는
서구세계에서는 19세기 전반기까지 일반적으로 ‘동해’명칭을 통용해왔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넷째, '일본해’명칭은 19세기 후반기 일본의 한반도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제국주의적 침략논리’에
의해 생겨난 바다이름이다. 일본은 1868년 明治維新 직후 '征韓論’을 수립하면서 한반도침략을
감행했다. 친일 영국인 모리스는 1894년 일본군부가 제공한 일본측자료를 근거로 『청일전쟁』을
저술했는데, 이 책 첫머리에 「한·중·일 지도」가 소개되어 있다. 모리스의 지도에 처음으로 동해를 '일본해
(Sea of Japan)’라 명기해 놓고 있다. 그러나 서해는 한국어발음을 충실히 살려 ‘황해(HWANG HAI or
YELLOW SEA)’라 표기하고 있다. 이는 일본이 한반도를 정복지배하려면 한청간의 유대관계를 단절,
한국은 중국의 속방이 아니라 독립국임을 강조하기위하여 서해를 한국어발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한청 양국의 전통적 유대관계를 단절함으로써 청국의 간섭없이 한국을 지배한다는
전략적 의미가 담겨 있다. 모리스가 지도상에 처음으로 ‘일본해’명칭을 사용했다.
'일본해’명칭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으려면, 우선 국제법상 합법적 절차가 선행되어야한다. 동해를 일본의
‘內海化’하려면 우선 독도의 일본영토화가 전제조건이 되고있다. 독도를 한국영토로 존속하는한
동해를 일본의 내해로 표기한다는 것은 ‘영토약탈행위’이기 때문에 국제법상 공인받기가 어렵다.
이리하여 일제는 러일전쟁에서의 전승을 계기로 한반도를 점령 지배한 상태에서, 한국정부의 항변을 원천
봉쇄한채 1905년 2월 22일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으로 시마네현에 일본영토로 편입했다.
일본군부가 작성한 「일본해해전요도」(1905. 5. 26-28)에서 처음으로 동해를 ‘竹島’라 표기함으로써
독도가 일본영토화했음을 공식 확인하고 있다. 이리하여 일본은 ‘일본해 해전’전승직후 5월 30일 『官
報』에서‘동해’대신‘일본해’를 공식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포츠머스강화회담 주재를 요구했고, 그 결과 포츠머스강화조약 제11조(1905. 9. 5)에서 '일본해’를
명기함으로써 사실상 ‘동해’명칭은 사라지고 ‘일본해’표기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것이다.
미국의 대아시아정책의 기본노선은 러시아의 남침저지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일본 강대화(Strong
Japan)’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은 일본의 강대화를 적극 지원함으로써 일본이 미국 대신 러시아의
남침을 저지하고 그 대가로 한반도의 운명을 일본에 위임한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은 親
日反露정책을 고수하면서 ‘태프트-가쓰라 비밀협정’(1905. 7. 27)에서 일본은 필리핀 불침을 약속하는
대가로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자유행동권(free hands)’을 인정했다. 루스벨트는 포츠머스강화회담을
주재하면서 마침내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정책을 지지한 것이다. 이와같이 일본은 미국의 강력한
지원하에 러일전쟁에서 전승을 거두면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으로 일본영토로 강제
편입함과 동시에 동해를 일본제국의 내해화하였고, 그 결과 동해를 ‘일본해’로 바다이름을 변경하여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것이다.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것은 청일전쟁에서의 전승을 계기로하여 표기하기 시작했고, 이를
공식적으로 일본정부에서 사용한 것은 러일전쟁에서의 전승부터이다. 일본은 독도를 일본영토로 강제
편입함과 동시에 바다이름을 ‘동해’대신 ‘일본해’로 표기함으로써 바다이름을 일방적으로 변경한
것이기에 이는 엄연한 영토강탈행위가 아닐수 없다. 국제법상 불법성을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청일전쟁때 일본은 모리스라는 친일 영국인을 앞세워 『청일전쟁』 책머리에 첨부된 지도에서
독도를 ‘마쓰시마(Matsusima)’, 동해를 ‘일본해(Sea of Japan)’라 표기했다. 일본은 러일전쟁
전승을 계기로 서울을 무력적으로 점령, 한국의 저항을 봉쇄한 상태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 동해를
일본제국의 ‘내해화’로 한후 ‘일본해’로 공식 표기했고, 포츠머스강화조약에서 미국의 지원하에
‘일본해’를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것이다.
둘째,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으로 일본영토로 편입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러일전쟁때까지는 일본은 독도를 한국고유영토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사실상 일본은 1904년 9월 25일
「新高號 동해탐사보고서」에서도 독도를 ‘리앙꼬르도 암(リヤンコ-ルト岩)’이라 표기하면서
한국영토임을 인정하고 있다. 동해를 일본의 내해화, ‘일본해’로 표기화하려면 독도의 일본영토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분명 영토강탈행위이다.
셋째, 일제는 러시아에 선전포고한지 불과 10여일만에 서울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상태에서, 한국정부의
항변을 원천 봉쇄한채, 독도를 강탈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했다는 사실을 공식
외교채널을 통하여 한국정부에 통고조차 아니했다. 한국정부가 영토강탈사실을 알게된 것은 1년여뒤인
1906년 4월 29일이었다. 뿐만아니라 일제는 한국정부와 하등의 협의나 양해각서없이 일방적으로 독도를
제국주의 침략논리에 의해 일본영토로 편입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동해’라는 바다이름은 이렇게
‘물리적 힘’에 의해 강탈된 것이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일본해’명칭은 제국주의적 영토팽창주의적 ‘물리적 힘’의 원리에서 영토강탈로
인해 생겨난 바다이름이기에 역사적 정통성이 결여되고 있다. ‘동해’라는 역사적 정통성을 회복하려면
당연히 ‘동해’명칭을 되찾아야한다. ‘일본해’라는 명칭은 다분히 ‘소속개념’이 강하기 때문에
한국측 입장에서보면 거부반응이 생길수 밖에 없다. 이에 비해 '동해’를 영문으로 ‘Ocean Oriental’
이라 표기할 경우 ‘동양해’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고 ‘소속개념’마져 없기 때문에 일본측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거부감이 있을수 없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정부는 세계지도에 ‘동해’표기를 회복하기위해
외교적 교섭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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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진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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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관련!!!
이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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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2.09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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