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내사산 이라 함은 왕궁을 에워싸고 있는
목면산(남산),낙산,북악산,인왕산을 일겉는 말이다
따라서 서울도성돌기 란 약 18키로의
내사산을 연결하는 성벽을 따라 걷는 길이다
물론 성벽이 모두 복원되어 연결되어 있지는 못하지만
끊어지며 이어지는 흔적을 찾아서 조상의 숨결을 느껴 보시라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한 우리의 자랑스런 유산이다
장충체육관에서 만나 첫걸음을 시작한다
장충체육관이 6.25참전국인 필리핀에서 그들의 기술로 지어준 선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당시의 건축기술이 필리핀보다도 못했음이 놀라울 따름이다
첫번째 만나는 광희문,
현재의 위치는 최초 건립 당시의 위치가 아니고 도로때문에 조금 옮겼다고 한다
창의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성문이 당시의 자리가 아니고 필요에 따라 약간씩 옮겼다고 한다
광희문은 동쪽에 위치한 관계로 시신을 옮기는 문이라 하여 시구문이라 불렸다고 한다
지금이야 신당동이 떡복이로 유명하지만 이전에는 굿집과 점집이 많았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짓는 문이니 우연의 결과는 아닐 것이다
동대문 운동장은 역사박물관과 디자인센터로 변신을하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조선시대에는 훈련도감의 연병장으로 사용했으나 군대를 강제 해산한 일본이
명목상은 황세자의 식민지 방문을 축하하는 선물로 여기에 운동장을 지었다고 한다
공사 도중에 지하에 묻힌 수로가 발견되어 선조들의 치수기술을 만천하에 드러낸다
평화시장과 동대문시장이 보이는가 싶더니 흥인지문(동대문)을 만난다
4대문 중에 흥인지문 만이 유일하게 한자어 지(之)를 사용하는데 그 이유인즉,
이 부근이 지대가 낮아 우기때가 되면 자주 침수가 되어 이를 막기위한 풍수학적인 의미로
갈 지(之)를 넣었다고 하는데 무식한 놈은 그저 설명을 들어도 갈팡질팡할 뿐이다.
성리학의 나라답게 유교의 근본이 되는 인,의,예,지,신 을 성명,관직명은 물론
성문에까지 인용하여 작명했음을 알 수 있다
흥인지문의 인
돈의문의 의
숭례문의 예
홍지문이 지(세검정에 위치)
보신각의 신
성벽쌓기는 전국에서 차출된 노동력이 동원되었으며 지역별로 공사구간이 정해져서
돗내기로 진행되었으며 시공실명재를 도입하여 하자에 대한 연대책임을 지웠다
전체를 97구간(180메타/1구간)으로 나누고 구간마다 천자문의 한자어로 표기했다고 한다
성곽은 낙산을 따라 쭉~이어지며 계절에 관계없이 덩쿨과 잘 어우러져 아름답다
봉건사회인 유럽의 성지는 자손만대까지 부귀영화를 바라며
쌓았기 때문에 가히 천혜의 요세라 할만하다
태조가 1392년 개국하여 한양에 천도를 결심한게 1394년이다
당시의 한양인구가 5만에 불과했다
농한기에 전국의 인력을 차출하여 11만명이 동원되었다고 하니
군,관,민이 하나가 된 초대형 국가적인 토목사업이었던 것이다
태조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당시에 왕궁터를 놓고
정도전과 무학대사, 두 실세들의 파워게임이 진행된다
지금의 연세대 자리를 왕궁으로 삼자는 무학대사와
현재의 경복궁자리를 주장한 정도전과의 치열한 대립이 있었지만,
당시 실세인 정도전의 안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무학대사가 탄식하며 혼잣말로 이백년 뒤에 큰 화를 입을 거라고 예언했는데
그의 말대로 정확히 이백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어쨌거나 왕궁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좌에 인왕산,우에 낙산을 둔
전형적인 좌청룡 우백호의 형상이다
또한 외사성(북한산,관악산,덕양산,용마산)에 둘러싸여
나름대로 방어하기에 훌륭한 입지적인 조건을 갖추었다
태조때에는 평지에는 주로 흙과 작은 호박돌을 사용하였으며
험지는 대체로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돌로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름 장마가 지나보니 흙으로 쌓은 토성이 쉽사리 무너지는지라
6개월 후 다시 20만명이 동원되어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세종때 돌을 다듬어 보수를 하기 시작했으며 병자호란,임란,이괄의 난등을 거치면서
숙종때 이르러서는 장암쪽에서 운반해 온 큰 화강암을 각지게 다듬어 쌓았다고 한다
따라서 사용한 돌과 축조방식만 보더라도 어느왕 때 공사를 했는지 알수 있다
워낙 막대한 재정적인 부담과 노동력을 요구하는 대규모 공사인지라
절대적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왕들의 시기에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세번의 공사는 태조,세종,숙종 때 이루어졌다
호박돌과 진흙으로 쌓은 성은
세월의 풍파를 버티질 못하니
각지게 다듬어 다시 쌓길 수차례
덧대어 누비고 누빈 민초들의
피땀어린 누더기와 무엇이 다를꼬
수많은 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돌무더기 가득 실은 달구지는
삐걱삐걱 부서질듯 위태롭고
눈알을 부아리며 거친숨을 토해내는
우마의 고삐를 잡아끄는 고함소리
해머를 하늘로 치켜든 남정네의 근력
쩌렁쩌렁 기합소리에 바위가 쪼개지고
또닥또닥 정소리에 모서리 각이 선다
돗내기를 독려하는 오야지의 일갈
팔도민들의 걸죽한 사투리와
부역의 고달픔을 달래주던 노동가는
골짜기마다 메아리로 울렸으리
화강석은 그자리에 세월을 떠받치고
푸르른 이끼는 세월을 입고 있네
숙청문 이었다가 숙정문으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사람의 왕래가 적은 산속에 위치하였으며 음기가 강하다 하여
평상시에는 닫혀있었다고 한다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의 친필이라고 했던가 가물가물합니다요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다던 김신조 일당 31명을 일망타진 했던 현장이며
우이령으로 이어지는 김신조 루트에 서 있는 총알 맞은 당시의 소나무는
아픈 상흔을 안은 채 36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당시 민가에서 신고를 접수한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의 제지가 없었다면
대통령 피살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고 최규식총경의 동상은 창의문을 내려가면 있다
어쨌거나 이 사건으로 예비군이 창설되고 민방위가 생겨났으며
한적한 실미도에 애꾸즌 영화세트장이 세워졌던 것이다
700여년전에 쌓았던
내사산 성곽길을 걸어본다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후
자자손손 불멸의 왕국을 꿈꾸며
성곽의 반석을 놓았어라
세종,숙종을 거치는 동안
비바람에 허물어지고 다시 쌓아
오백년 도읍지를 한결같이 품었건만
외세의 말발굽이 성문을 넘나드니
오욕의 역사는
힘겹게 산마루를 넘어간다
창의문이다
일명 자하문이라고 하는데 혜화문(홍화문)도 마찬가지로
성문 앞의 지형이 지네를 닮았다 하여그 지세를 누르기 위해
아치형의 성벽천정에 닭의머리를 한 봉황이 그려져 있었다
인조반정의 거사를 치르는 날,
반란군은 세검정에서 칼을 씻고 이 문을 깨부수고 넘어왔다
그 공신들 52명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성루의 천정에 걸려있다 하나 자물통으로 굳게 닫혀있다
묻는다.궁이여
담장밖 세상은
하늘을 찌를듯 변해 가는데
그 많던 식솔과
위엄은 어디 가고
홀로 장승처럼 서 있느냐
묻는다.궁이여
세월에 갖혀 화석처럼 궅은 몸
켜켜이 쌓인 먼지는
눈길 하나 주는 이 없는 전설로
망각의 바람만이 스치며 지나갈 뿐
묻는다.궁이여
긴 세월 조차 홀로 감싸 안은
잊혀졌던 구중심처 혼이
용마루 백자(白磁) 비늘로 일어서는 날
묻는다.궁이여
마침내 역사의 지혜로운 눈을 뜨고
단청의 화려한 날개로
바람처럼 담을 넘을 용트림은
아,그대
잠자는 궁이여
찬란한 침묵의 기다림이여
(진중섭 시인의 궁이여)
인왕산 정상에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이 놈은 덕을 많이 쌓아 이리 장수하나 보다
권율장군의 집터이며 이 은행나무의 수령이 400년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용문사 은행나무는 천수(1000 세)를 누리고 있으니
어디가서 낫살 먹었다고 까불지 마라
3.1만세 의거 등등 굵직한 당시의 사건들을 전세계에 타전한
UPI통신 특파원 힐버트 테일러 가족이 살던 집이다
그는 엔지니어로 조선땅을 밟았지만 프리랜서로 특파원 활동도 했던 모양이다
그의 부인이 권율장군의 집터의 은행나무에 반해서 터를 잡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주변에 인가가 없어 봄이면 온통 이화꽃이 만발하는 언덕이었다고 하니
왕궁을 내려다 보는 풍광이 좋았으리라
장독대 뒤에 1924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고는 하나 확인은 못했다
독립운동가를 도왔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그는 결국 추방당했다고 한다
서울시 교육지원청을 내려오면 큰길을 만나는데 여기가 돈의문 터 였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강북삼성병원 내에 위치한 경교장도 한창 공사중이어서 볼 수가 없다
경교장은 임시정부의 주석이신 김구선생님이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신 집무실이다
화마가 삼킨 숭례문은 한창 공사중이다
이제 남산만 오르면 된다
9시간동안 걸었던 도성의 환둘레길이다
간략한 역사이야기나마 알고 가면 더 깊어진다
어디든 공지가 있으면 꼭 참석하시어
오백년 도읍지를 돌아 보시기를 강추합니다
서울은 거대한 박물관이다
찬찬히 발품을 팔면서
첫댓글 몇년전에 다녀온 서울 내사성 성곽돌기을 이번주에 다시할까 합니다.
벛꽃이 만발해서 멋진 동행길이 될껍니다..
약산회 회원님들고 꼭한번 해보시길 강추 합니다.
사진은 다녀와서 올려드리겠습니다..
참고로 도상거리는 23키로로 천천히 구경하면서 걸어도 9시간이면 충분합니다.
도시락 없이 간식만 지참하고 가볍게 걸으시다 맛집에서 점심식사 하고
여유와 멋을 느끼다 보면 피곤하고 지루한 느낌은 절대 없답니다..
신분증 지참은 필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