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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를 두고 도성의 인후지지(咽喉之地)라고 합니다. 수도 한양의 목구멍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를 죄고 있으면 도성이 굶어 죽게 되어 있습니다. 호남 곡창지대에서 올라오는 조운선이 모두 이 강화 앞바다를 통과하여 한강을 거슬러 올라 서울에 도착합니다. 고려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곳을 거쳐서 예성강을 통하여 개경에 닿는 뱃길이 최단거리 길입니다.
이곳에는 외국의 문물이 들어올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어서 최초의 사찰이라는 전등사와 최초의 향교라는 교동향교가 모두 강화에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이 뱃길로 서울을 침입을 할 때도 반드시 이곳을 통과하게 때문에 몽고의 침입 이후 많은 전투가 이 강화해협에서 일어납니다.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사건 전투가 모두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만큼 많은 전적지가 있습니다.
1976년부터 강화전적지정화사업이 추진되면서 그 동안 허물어진 돈대, 보와 진을 보수하고 복원하여 당시의 흔적을 돌아보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둘째 날은 강화 동쪽 해안의 해협를 따라서 당시의 격전지를 둘러보는 코스입니다. 강화나들길 제 2코스 호국돈대의 길입니다.
↑갑곶돈대로 들어가는 입구에 '개국의 성역 강화'라고 새겨진 자연석 비가 있습니다. 아마 단군과 관련된 유적인 참성단과 마니산을 염두에 둔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지금은 차량의 통행이 뜸하지만 강화대교가 건설되기 전 이 곳은 하루에도 수만 대의 차량이 지나다니는 국도였습니다. 연륙교인 강화교를 지나 이곳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강화읍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일종의 표지석인 셈입니다.
↑그 반대편에는 '호국강도'라고 적혀 있습니다. 강화를 들어오면서 '개국의 성역 강화'를 나가면서는 '호국 강화'를 보게 됩니다. '호국 강화'는 수 많은 외침 속에서 우리 역사와 강토를 지켜왔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는 말입니다..
↑갑곶돈대 입구입니다. 언덕 위로 이섭정이 보입니다.
↑세계 금속활자 발상 중흥 기념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은 고려에서 간행된 직지심체요절입니다. 이 책은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발간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1년 승정원일기와 함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보다 몇 년 앞서 조선왕조실록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려 때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에 고종 21년(서기 1234년)에 고금상정예문을 금속활자로 기록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금상정예문은 고려 의종 때에 최윤의가 신라 때부터 고려 때까지의 예문(예에 관한 글)을 모두 모아 간행한 50권의 책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초기까지는 있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개경에서 천도하여 강화에 오니 고금상정예문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우리집에 책이 한 부 있어서 이것을 조정에 보내 주자(활자)로제작하여 모두 28부를 찍었다-동국이상국집
그렇다면 이 강화도에서 최초의 활자본 책이 간행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발상지라고 하면 될 것을 왜 발상중흥지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고금상정예문이 발간되기 전에도 부분적으로 주자(금속활자)가 사용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예가 '남명천화상송증도가'란 책입니다. 송에서 수입한 이 책을 고려에서 금속활자본으로 책을 찍어 유통시켰다는 기록이 있지만 현재 책도 전해지지 않고 활자가 어디서, 언제 주조되었는지 기록에 남지 않아서 다만 개경에서 제작하였을 것이라고 추정만 할 뿐입니다.
↑강화비석군. 강화의 수령들을 칭송하는 공덕비를 모두 한 곳에 모아 놓았습니다.
↑수령의 선정을 고마워하고 덕을 칭송하는 비라 하여 선정비 혹은 송덕비라고 하는데 과연 여기에 쓰인 이름들이 칭송을 받을 만한 사람들인지 살펴 보았습니다.
위의 비는 이안눌이라는 사람의 비입니다. 이안눌은 조선 인조 때 문신으로 병자호란 당시에 병든 몸으로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병자호란이 끝난 그 다음해 1637년에 병이 깊어 세상을 떴습니다. 이안로는 재물에 욕심이 없고 청렴하여 청백리로 선정된 사람인데 정묘호란 직후에 강화유수로 부임하여 4년동안 강화를 다스렸습니다. 선정비를 세울 만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살펴보니 이안눌을 기리는 비가 몇 개 더 있었습니다.
선정비에 '행부윤이안눌청덕선정비'라고 적혀 있습니다. 행이라는 말은 품계는 높은데 품계보다 낮은 직을 수행한 것을 말합니다. 강화부윤직은 종2품에 해당하는데 이안눌의 품계는 정2품이었다는 말입니다.(나중에 강화는 유수부가 되는데 강화유수는 정2품직에 해당됩니다.) 그 반대로 품직을 받는 것은 '수'라고 합니다. 이런 관직 임용법을 행수법이라고 하였습니다.
↑병자호란 뒤 강화는 유수부가 설치되고 한양 방위의 요충지라서 숙종 때는 진무영이 설치됩니다. 그리고 강화유수는 진무영의 수장인 진무사를 겸하게 됩니다. 그래서 비문에 '유수겸진무사조공병식애민선정비'라고 적혔습니다.
조병식은 1874년(고종 11년)에 강화유수를 지냈습니다. 1876년에 충청도관찰사로 나가서 2년 후인 1878년 전라도 지도라는 작은 섬으로 귀양을 갑니다. 죄명은 탐학이었습니다. 탐학은 욕심이 많고 포악하다는 뜻입니다. 그후 조병식은 해배되어 1889년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합니다. 그 때 흉년이 들자 방곡령을 내려 일본으로 곡식이 유출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조정은 일본에 11만원의 배상금을 내야 했습니다. 당시 조병식은 백성들의 굶주림을 막기 위해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수탈할 양곡이 모자라서 방곡령을 내렸다는 학설이 지배적입니다.
충청감사로 있을 적에 동학교도들을 적극 탄압하여 동학농민전쟁을 유발하였고 그 이후 황국협회라는 어용단체에 들어가 독립협회를 모함하여 해체시키는데 앞장섰습니다. 독립협회가 왕을 폐하고 공화정을 세우려 하고 있다고 무고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선정을 베풀 리가 없습니다. 왜 어린이들의 놀이 비석차기가 생겨났는지 알 듯합니다.
↑삼충사적비. 병자호란 때 청군이 이 강화도를 공격할 때 갑곶나루 앞바다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세 사람을 기려 세운 비석입니다.
여러 곳에서 조선군의 산발적인 저항이 이어졌다. 중군 황선신이 지휘하는 병력은 진해루 아래에서 적 9명을 살해하는 등 분전했다. 하지만 사기가 떨어진 데다 중과부적이었다. 중군(종2품)황선신과 천총(종3품) 강흥업, 초관(종9품) 정재신 등 항전하던 말단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했다. 그럼에도 장신(주사대장)의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초관들은 바라만 볼 뿐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역사평설 병자호란(한명기/ 푸른 역사)
구원일은 강화좌부 천총으로 장신이 싸움을 하지 않고 배를 물려 가리산 앞 바다에 머물자 장신에게 달려가 싸움에 참여하라고 독촉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장신이 배를 돌려 도망을 가자 스스로 물에 몸을 던져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이 때 황선신은 68세의 고령이었고 강흥업은 63세, 구원일은 56세로 모두 강화도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을 '강도 삼충신'이라 부르고 충렬사에 배향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충렬사는 지금 강화 선원면이 있습니다.
↑강화전쟁박물관. 올해 4월 17일에 개관한 박물관으로 선사시대부터 한국전란까지 강화도에서 일어난 전쟁을 모두 기록하여 전시하고 있습니다. 시대별로 사용된 무기며 기타 군복과 갑옷, 그리고 병부와 호패까지 전쟁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신미양요 당시 미 아시아 함대 해군 지휘관들의 작전회의 모습. 오른쪽 두 번째 인물이 로저스 제독입니다. 로저스는 일본의 문호를 연 페리 제독의 포함외교를 본받아 무력으로 조선을 개방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맙니다.
페리는 1854년 2월 13일 7척의 함대를 이끌고 일본 요코하마 항구 앞에 정박하며 무력으로 시위하여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포함외교(砲艦外交)란 이와 같이 대포를 실은 함선을 앞세워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본은 미국에게 당한 똑 같은 방법으로 1876년 조선의 강화도 앞바다에 운요호를 띄워놓고 무력 시위를 하며 조일강화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를 체결하도록 강요를 합니다.
↑어재연 장군 수(帥)자기. 이 기는 어재연 장군의 기로서 1871년 6월 12일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에서 장군이 전사하고 조선이 패망함으로써 미국이 전리품으로 가져가서 해군사관학교에 보관하여 오던 것입니다. 가로 세로 4.5m의 광목에다 장수 수(帥)를 쓴 깃발로 2007년에 반환되었습니다. 13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이 기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두 달 정도 공개되고 난 뒤 2008년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었습니다. 2009년 이후로 이곳 강화역사박물관(강화전쟁박물관 전신)에서 영구 전시하고 있습니다.
↑몽골의 기병과 고려의 보병의 장단점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북방 민족 방어 전술인 청야입보(淸野入堡)는 여기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들을 우선 깨끗이 비워서 적의 양식을 끊고 성이나 섬으로 들어가는 전술을 말하는데 실제로 몽골 침입시 이 전술은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백성들의 궁핍은 상상을 초월하여 외히려 적들에게 투항하거나 조정에 항거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칼과 칼집
↑전통(화살집)
↑무기의 개념을 혁명적으로 바꾼 조총(위). 아래는 고려시대부터 제작하여온 총통. 총통은 화약을 이용하여 쇠구슬이나 화살을 발사하는 무기를 말합니다.
↑운요호 사건 당시의 초지진 전투 상상도. 일본의 함포 사격으로 초지진은 신미양요에 이후에 또 다시 초토화됩니다. 사거리가 2km나 되는 일본의 함포와 사거리 400미터의 조선군 화포 불랑기포는 애초에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전쟁박물관을 둘러보고 이어 갑곶돈대로 갑니다. 갑곶돈대 입구의 야경.
↑갑곶돈대. 돈대는 해안이나 접경지대에 평지보다 높게 언덕을 쌓아서 적의 동태를 감시하거나 유사시에 전투를 하는 곳입니다. 적의 동향을 감시하려니 당연히 지대가 높고 경계가 용이한 지역이어야 하고 유사시에는 전투를 하여야 하니 성처럼 방어벽을 쌓아서 진지를 구축하였습니다.
돈대는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통상 원형이나 방형이 많지만 어떤 경우는 삼각형의 형태를 띠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갑곶돈대는 아주 특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돈대라기보다는 치성의 형태에 가깝습니다. 치성이란 성의 튀어나온 부분을 말하는데 성벽을 공격하는 적군들의 측면이나 후방을 공격하기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여기가 원래의 갑곶돈대가 아니고 강화외성의 일부였다는 주장도 제기됩니다.
↑19세기 말의 갑곶나루터. 왼쪽 편에 보이는 것이 진해루입니다. 강화의 관문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후에 이자리에 강화교가 들어서면서 철거됩니다. 갑곶이라는 말은 강화의 옛이름이 갑비고차였는데 여기서 유래된 지명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몇 차례 고려를 침공한 몽고의 군사들은 끝내 이 나루를 건너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들은 항복한 명나라 수군들의 도움을 받아 이 나루를 건너 강화읍성을 파괴하였습니다. 1866년 프랑스 군도 이 나루로 상륙하여 강화읍성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강화유수부에 있는 재산과 서적들을 약탈하여 이 나루를 통하여 본국으로 빼돌렸습니다.
↑나루터에 내려 진해루를 통과하는 행렬. 강화도 행렬도 가운데 갑곶나루터와 진해루 부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헌종의 할머니인 순조비 순원왕후의 분부로 철종을 모시러 강화도에 도착한 관리들의 행렬을 그린 그림입니다. 당시 철종을 서울로 모셔오는 봉영대신은 판중추부사(종1품)인 정원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승지 홍종응이 직접 순원왕후의 교지를 받들고 갔으니 그 행렬이 위세 당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림이 사실적이어서 당시의 강화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 이때가 1459년입니다.
↑돈대에 전시된 불랑기와 소포. 여기에 전시된 포는 실제로 여기서 운용한 것은 아닙니다. 성의 여장을 보면 포혈은 없습니다. 성첩은 근총안과 원총안 2개가 한 타를 이루는 평여장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갑곶은 군사적으로 요충지여서 제물진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아래 갑곶포대와 갑곶돈대가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보다는 진이 규모가 컸으나 보와 진은 상하관계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운용되었습니다. 보와 진에는 하나 이상의 포대나 돈대가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강화외성의 성곽. 이곳 갑곶돈대는 강화외성의 일부로 축조한 것이므로 성곽과 이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외성의 성곽으로 최근에 복원된 것입니다. 강화외성은 몽고 침입 시에 쌓았다가 고려 원종이 환궁을 하면서 무너뜨렸습니다. 그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강화도 방어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숙종 때 다시 쌓았습니다.
고려의 강화 외성과 조선의 강화 외성이 같은 위치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간척사업이 엄청나게 진전되어 강화 해안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곳 갑곶은 해안이 절벽이기 때문에 간척지가 들어설 여지가 없어 아마도 같은 위치에 성을 쌓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제 갑곶돈대를 나와 본격적으로 걷기가 시작됩니다. 저 뒤로 보이는 정자가 이섭정(利涉亭)입니다. 교섭을 이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고려 때 몽고와 화친을 맺으면서 지은 정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다가 허물어져 조선시대에 다시 지었으나 이내 허물어 졌다고 합니다. 원래의 위치는 갑곶나루의 관문인 진해루 옆에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강화전적지정화사업 때 여기에 세워졌습니다. 저 이섭정은 목조 건물이 아니라 콘크리트로 만든 누정입니다.
↑해안으로는 철책이 둘러쳐져 있습니다. 이곳 강화해협은 임진강과 예성강의 물길이 흘러드는 곳이어서 해안의 경계가 삼엄합니다. 이곳 길이 이렇게 넓은 것은 여기가 강화외성터이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의 외성은 이보다 안쪽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여기는 외성을 쌓고난 후에 간척을 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길이 깔끔하고 아름답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를 한 것은 1232년입니다. 천도 후 2~3년에 걸쳐 궁궐을 짓고 외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군량미 때문에 간척사업에 힘을 쏟은 것은 고종 말년인 1250년대였습니다. 군량을 마련하기 위한 논밭을 둔전이라고 하는데 그 당시에 마련한 둔전이 연미정 부근과 이곳 갑곶부근이었습니다.
↑길을 가다보면 '심도기행'의 저자인 화남 고재형의 시가 곳곳에 게시되어 있습니다. 고재형은 심도 즉 강화를 돌아보고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나 혹은 강화의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등을 시로 읊었습니다. 심도기행에는 모두 256수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20세기 초반의강화를 이해하는데 아주 귀중한 자료입니다.
↑용진진. 조선 효종 때 설치된 진으로 책임자는 종 4품의 만호가 임명되었습니다. 가리산돈대, 용진돈대(좌강돈대), 용당돈대를 관할하였습니다. 진의 문루는 참경루(斬鯨樓)로 최근에 복원이 되었습니다.
↑좌강돈대(용진돈대) 내부 모습
↑돈대에서 바라본 문수산. 문수산은 강화 갑곶마루 맞은 편 통진나루에서 시작하는 산입니다. 여기는 서울을 방어하는데 아주 중요한 곳으로 문수산성이 있습니다.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이 문수산성에 올라가 적진의 동향을 파악하여 작전을 세웠습니다. 프랑스 군은 문수산성으로 진군을 하다 조선의 매복병을 만나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3명이 죽고 2명이 부상을 당합니다만 끝내 문수산성을 점령합니다. 비록 화력에 밀려 퇴각을 하였지만 프랑스 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첫 승리였습니다.
↑좌강돈대에서 본 강화해협
↑참경루 오른편의 성곽은 흔적이 없이 사라졌습니다. 길을 따라 가다 고개마루 왼쪽 산등성이에 용당돈대가 있습니다.
↑용당돈대. 타원형의 돈대입니다. 최근에 복원된 돈대라서 아직 생소한 느낌입니다.
↑화도돈대. 여장(성가퀴)가 없습니다. 돈대 안에는 풀이 잔뜩 우거져 있습니다.
↑화도돈대는 정방형에 가까운 돈대입니다. 돈대도 높지 않고 야트막합니다. 이름으로 보아 처음에는 섬이었던 것 같고 후에 간척을 하여 본섬의 일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두돈대와 광성돈대 그리고 광성포대 등과 함께 광성보의 지휘를 받습니다.
↑화도돈대를 지나 오두돈대로 가는 길목에 휴식할 수 있는 쉼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오두돈대로 올라가는 길. 오두돈대는 자라목처럼 생겼다고 오두라고 불렀습니다.
↑낮은 여장을 둘렀지만 총안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타의 길이가 짧고 타간만 있는 구조입니다. 성벽에는 포혈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오두돈대 내부. 오두돈대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예가 거의 없습니다. 여기서 화도돈대을 보면서 과거의 강화의 모습을 상상하여 볼 수 있습니다. 오두라는 말이 자라의 머리라는 뜻이니 여기도 곶이였을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저기 화도까지 제방을 쌓아 농경지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한 뒤 갑자기 많은 인원이 섬 안으로 들어오면서 식량과 물자가 풍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족한 식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간척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날카롭던 해안들이 점점 둥글어져 갑니다.
고려가 개경으로 환궁을 한 뒤 한 동안 강화는 조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병자호란 이후 강화도는 전시 행궁으로서 중요성이 부각됩니다. 효종과 숙종을 거치면서 해안 방어선이 정비되어 5진 7보 53돈대의 체제가 확립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이었습니다. 그 때도 해결 방안으로 나온 것이 해안 간척사업이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선두포와 가릉포에 제방을 쌓아 가거도(마니산)를 강화도와 이은 것입니다. 선두포축언시말비는 이 간척사업의 내역을 적은 비석입니다.
↑오두돈대에서 본 강화해협. 오른쪽 길게 나온 곶이 광성보이고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경기도 김포시 대곶마을입니다. 저기서부터 물길이 크게 휘면서 유속이 엄청나게 빨라집니다.
썰물 때는 시속 6노트정도 라고 합니다. 1노트는 한 시간에 1해리를 가는 속도. 1해리는 1852m입니다. 그러니까 시속 10km가 넘는 물살입니다. 밤에 들으면 조류가 흐르는 소리가 급류가 흐르는 소리와 같았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보아도 저기 광성보가 방어의 요지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돈대에서 내려가는 길입니다.
↑길을 내려서면서 돌아다본 오두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