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어로는
바실레이오스(Βασιλειοs)라고 표기하는
이 이름은‘왕’을 뜻하는
그리스어 바실레우스(βασιλευs)에서 유래한다.
성 대(大) 바실리오는
4세기 카이사리아의 주교이자
성덕이 뛰어나고 학식이 빼어난 설교가요 학자로서
아리우스주의 이단에 맞서 교회를 수호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교부들 중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이 성인에 힘입어서,
이 이름은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특히 동방교회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어 부르고
동로마제국의 황제들 중
두 사람이나 제호(帝號)로 택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까파도키아의 3대 교부 중 한 분인
성 대 바실리오(329∼379)는
아리우스 이단을 거슬러
니체아공의회 결정 사항을 옹호하고 발전시킨
중요한 신학자로 동방교회 4대 교부 중
첫 번째로 꼽히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 ‘대(Magnus)’ 라는 명칭을 붙여
학자로서의 업적과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성 바실리오는
330년 소아시아의 까파도키아 체사레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바실리우스(5월30일)와
어머니 엠멜리아(5월30일)도 성인이었고,
조부는 순교했으며,
조모 마크리나(1월14일)도
신앙 때문에 추방된 적이 있는 성녀였으며,
큰 누님 마크리나(7월19일)도 성녀이고,
두 동생인 니사의 주교 그레고리우스(3월9일)와
세바스테의 주교 베드로(1월9일)도
성인으로 모범적인 크리스천 가정이었다.
성 바실리오는 아버지에게서 수사학과 일반학문을 배우고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올라가
유명한 학자 리바니오에게 수사학 등을 배웠다,
그리고 그 당시 학문의 서울이라 불리던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 유학했다.
학업을 마친 뒤에는 고향 체사레아에 정착하여
수사학 교사가 되어 교육자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명성은 순식간에 퍼져
그에게 학문을 배우려는 학생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누님인 마크리나는 바실리오가
현세의 명예에 빠져
인생의 참된 목적을 망각하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수도자가 될 것을 열심히 권유했다,
이에 바실리오는 ‘복음 정신에 따라
하느님께 전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하고
이집트, 팔레스티나, 메소포타미아 사막을 탐방하며
수도승들을 만났고 자신도 수행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고향에 돌아와서는
어머니와 누님이 부인들을 모아
기도와 고행의 생활을 하던 여자 수도원 근처인
네오카이사레아의 이리스강 건너 안네시에
남자 수도원을 세우고
은수자들을 모아 수도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수도자들을 위한 영적 지도서를 쓰고,
자신의 수도생활 경험을 통해
‘바실리오 규칙서’라는 수도 규칙서도 써서
수도승 공동체의 일상생활과
조직에 대한 지침을 제시하며
복음적 성격과 형제들의 상호 관계를 중시했다.
이 수도 규칙은 오늘날까지 동방교회의
많은 수도자들이 따르고 있어 성 바실리오는
동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가 집필한 소 수덕집에는
수녀들에 관해 언급된 내용도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은 수도회 역사에서 최초로 명문화된
수녀들에 관한 규정으로 볼 수 있다.
성 바실리오는 수도생활의 목적이
자신의 수덕 외에 다른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이기도 하다고 생각하여
그 수단으로서 수도원 부속학교를 설치해
아동들을 교육하고 병원을 여는 등
사회사업에도 공헌했다.
365년 체사레아 대주교
에우세비오의 설득에 따라
사제로 서품된 후,성 바실리오는
신자들이 복음 정신에 따라 생활할 수 있는
지침으로 80개 항목의 ‘도덕집을 펴내기도 했다.
370년 에우세비오가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대주교직에 오른 성 바실리오는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사목하여
신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한 당시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던
발렌스 황제가 정통 크리스천들을 박해하자
용감히 맞서 싸웠다.
황제는 고결한 인격과 학식이 높은 바실리오를
어떻게든지 자신에게 끌어들이려고
총독 모데스토로 하여금 설득하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감언이설에도 동요조차 없자
총독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재산의 몰수나 매질이나 귀양이나 사형이나
그중의 하나는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성 바실리오는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나는 수도자이므로 몰수당할만한 재산도 없고,
고행에 익숙되었기 때문에 매질도 그다지 어려울 것 없고,
참된 고향은 천국 외에 없으므로
어디로 귀양 보내도 별 문제점이 없고,
사형에 처한다면 즉각 천국에 갈 수 있으므로
도리어 그것을 원하는 바입니다”라고 태연히 대답했다.
이에 총독은 “바실리오의 신앙의 견고함에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황제에게 보고했고,
황제도 그 용기와 인내에 감탄하고
그에게 벌을 주기는커녕
그의 자선 사업에 사용하도록
체사레아 부근의 별장지까지 하사했다.
성 바실리오는
곧 그 땅에 병원, 고아원, 양로원 등을 세워
한층 더 큰 자선 사업을 벌였다.
이곳은 하나의 큰 마을처럼 성장하여
사람들에게 바실리아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성 바실리오는
당시 교회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도 했다.
특히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한 배경에는
바실리오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다.
아리우스파 교도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나머지
자꾸 황제에게 그에 대해 무고했고,
황제가 그를 유배에 처하려고 영장에 서명하려 하자
세 번이나 펜이 부러지고
게다가 그날 밤에 황태자가 갑자기 몹시 위독하게 되었다.
황후는 마음이 불안해져
“이것은 죄도 없는 바실리오를
귀양 보낸 천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라고 하자,
귀양 가는 그를 다시 불러들여
황태자를 위해 기도를 청하자
위독하던 병이 깨끗하게 씻은 듯이 완치되었다.
이에 황제는 결국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를 귀양에서 면하게 해 주었다.
수도생활과 관련하여
성 바실리오가 남긴 작품은 서간Ⅱ와 규칙이다.
특히 그가 쓴 규칙은
이후 다른 모든 고대 규칙의 토대가 되었다는 뜻에서
삼대 모(母) 규칙 중 하나로 간주된다.
서간 Ⅱ는 성 바실리오가 안네시에서 은거생활을 할 때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에게 보낸 것으로
수도생활에 관한 그의 첫 작품과도 같다.
이 서간에는 에우스타티우스의
과장된 금욕주의의 영향도 나타나고 있지만
그의 초기 금욕적 이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성 바실리오의 규칙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뉘는데,
곧 윤리 규정집, 소(小) 수덕집, 대(大) 수덕집이다.
80장으로 구성된 윤리 규정집은
성 바실리오가 이집트 여행에서 돌아온 후 쓴 첫 작품으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신약성경에서 찾아 따로 모아 놓은 것이다.
따라서 이 규칙의 대상은
모든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다.
성 바실리오에게는 신약성경만이
그리스도인의 유일하고 참된 규칙이었다.
성 바실리오는
전례에서도 탁월한 유산을 남겼다. ‘
성령론’ 서두에서 새로운 영광송을 제시했으며
서간 207편에서는 새로운 전례 음악을 도입하며
수도원들의 전례기도를 개혁했다.
또 ‘1시경’과 ‘끝기도’를 시간 전례에 처음 시도했다.
그의 전례는 수도원들을 통해
동방교회 및 이탈리아까지 널리 전파됐고
987년에는 블라디미르 대공에 의해
러시아 정교회에도 도입됐다.
비잔틴 예식을 지키는 교회에서는
아직도 바실리오 전례가
사순절과 연중 대축일급 전례에 사용되고 있다.
그는 발렌스 황제가 전투에서 사망한 지 불과 한 달 만인
379년 1월 1일 카이사레아에서
6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월1일은 천주의 모친 대축일인 관계로
그 다음날인 1월 2일에 축일을 지낸다.
천주교부산교구
오늘의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