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클한 사랑의 연서를 띄운다
<파이란>의 최민식, 장백지
2001.01.02 / 장병원 기자
최민식은 〈파이란〉이 ‘인간의 죄악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그는 “파이란의 헌신과 사랑에 감화받은
강재가 흘리는 눈물은 삶에 대한 자각과 회한이 묻어 있는
눈물”이라고 말했다.
강산이 두 번 변해야 하는 연륜 차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최민식과 장백지는 썩 잘 어울리는 커플 같다. 큰오빠와 응석받이 막내동생쯤으로 보이지만 〈파이란〉에서는 격렬하고 안타까운 사랑의 주인공이
돼야 하는 운명적인 연인이다. 화장을 하고 머리를 올려 성숙해 뵈는
장백지는 가끔씩 스쳐가는 표정을 통해서나 앳된 인상을 줄 뿐 어린
티가 나지 않았다.
〈파이란〉은 뒷골목 삼류 건달 강재와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중국에서 건너온 여인 파이란의 우연한 만남과 운명적 사랑을 그린다. 강재에게 배달된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는 몇 푼의 돈 때문에 무심히 위장결혼을 했던 강재의 과거 기억을 들추어낸다. 구질구질하고
볼품없는 양아치 강재를 인생의 은인으로 여기고 헌신하는 파이란과의 재회는 죄악에 물든 인간 강재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든다. 파이란은 조용하지만 흉포하고 거친 강재의 삶에 구원의 빛을 비추는 에너지를 가진 여인이다.
〈해피 엔드〉 이후 최민식은 3개월간의 ‘백수생활’을 청산하고 장진의 연극 〈박수칠 때 떠나라〉에 출연했지만 지난 1년이 ‘자숙과
자성’의 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백수생활 초기에는 제법 시나리오가 들어오더니 2-3개월이 지나자 그런 소식도 뜸해져 “퍼뜩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비해 장백지는 어린 나이에도 11편의
영화에 출연한 경험이 많은(?) 배우이자 음반도 두 장이나 발표한 가수다. 멜로배우라는 딱지가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묻자 “11편의 출연작 중 멜로는 〈성원〉과 〈십이야〉 두 편뿐”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순백의 얼굴과 가녀린 체구가 멜로에 제격으로 보이기는 해도
정작 본인은 “코미디와 액션, 귀신영화 등 장르를 가리지는 않는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젊음을 무기삼아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어하는 그녀가 한국 영화에 출연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타국에서 외국배우와 공연할 때는 정신 자세부터 달라지기 때문에 색다른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 〈파이란〉에 끌렸던 첫 번째 이유.
그녀의 실제 성격과는 딴판인 성숙한 여인 파이란으로 변신을 앞두고
있는 그녀는 꼬박 한 달여의 시간을 〈파이란〉 촬영에 할애해 1월 말까지 한국 생활을 해야 할 판이다.
국적과 언어, 나이에서 적지 않은 간격이 두 사람 앞에 있기는 해도 〈파이란〉과 연기에 대한 생각만큼은 기묘하게 일치한다. 연기 얘기를
꺼내자 최민식은 깨달음을 얻은 도인처럼 돌변했다. 〈파이란〉을 “단순한 멜로영화로 보지 않는다”는 그는 멜로나 코미디 등의 장르
구분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최민식은 〈파이란〉이 ‘인간의 죄악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그는 “파이란의 헌신과
사랑에 감화받은 강재가 흘리는 눈물은 삶에 대한 자각과 회한이 묻어 있는 눈물”이라고 말했다. 한참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가던 최민식은 장백지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뚱한 표정으로 딴 곳만 보고 있자 통역에게 “세실리아(장백지의 영어 이름)에게 내 말을 통역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부터 인터뷰는 두 사람의 대담으로 바뀌었다.
노래와 연기의 차이에 대해 말하는 장백지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그녀가 호기심이 강한 배우라는 것을 단숨에 알 수 있다. 그녀가 “노래는 자기를 포장해서 표현하는 것. 하지만 연기는 옷을 입히는 것과 같아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연기론을 펼치자
최민식이 배턴을 받아 ‘연기 무당론’을 펼쳤다.
“배우가 다른 사람이 되는 과정이 무당의 굿과 비슷하다”고 운을
뗀 최민식은 “무당이 구천을 떠도는 영혼의 신내림을 받듯이 배우가
연기로 카타르시스를 주는 과정은 지독히 고통스러운 수행과정임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최민식은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삼류 건달 이강재의 영혼을 신내림받고자 요즘 욕을 입에 달고 산다. 주변 사람들이
걸어진 그의 입담에 의아스러워할 정도로 자신도 모르게 쌍욕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억제할 수 없다. 육체뿐 아니라 정신의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연기의 도를 깨쳐가고 있는 최민식은 예전에는 연기하고
인터뷰하는 것이 마냥 좋았지만 이제는 연기가 무서워졌다. 한 번의
살풀이 굿이 끝나고 무당이 탈진 상태가 되는 것처럼 작품 하나를 끝내면 기가 빠져나가 탈진에 빠진다. 파트너의 연기론을 유심히 듣던
장백지도 ‘영혼’이 있는 영화에 대해 제법 그럴듯한 해석을 첨가한다. 배우로서 초등학생에 머물고 있다는 겸손을 보이며 그녀는 입장료 내고 보는 영화가 아니라 ‘영혼과 정신이 살아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불혹을 바라보는 최민식과 약관을 갓 넘긴 장백지가 주고받는 대화는
세대와 국가, 언어를 초월해 훌륭한 파트너가 되려는 두 배우의 공감이 느껴질 때까지 이어졌다. 언어 장애 얘기를 꺼내자 입을 맞춘 듯 똑같은 대답을 내놓는다. “연기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파이란〉이 추구하는 바를 명확히 알고 있으면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것. 두
배우의 일치된 호흡에도 불구하고 〈파이란〉에서 두 사람이 같이 나오는 장면은 많지 않다. 만남보다는 엇갈림 속에서의 인연, 교감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인삼과 김, 감자 조림을 좋아한다는 이 생기 넘치는 홍콩 아가씨와 배우의 경륜이 몸에 배어가는 ‘진짜 배우’ 최민식은 〈파이란〉을 통해 내년 4월 순백의 연서를 공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