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이씨 족보서(載寧李氏族譜序)
족보는 한 집안의 역사를 돈독하게 하는 기록이다. 우리 족보의 편찬은 숭정 병자년부터 시작되었고, 영조 갑오년에 다시 이루어졌다. 신라 초기에 이씨가 성을 얻게 된 유래와 고려 중기에 본관이 나뉘게 된 사실은 석계와 밀암 두 선생의 서문에 모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종족을 거두어 모으는 범위가 넓지 않아, 구양수와 소순의 족보처럼 가까운 친족의 범위가 다하면 기록을 그치는 정도였다. 철종 경술년에 이르러 석계공의 7대손인 오와공이 호남과 영남의 여러 종인에게 처음으로 대동보 편찬을 논의하였고, 비로소 큰 족보를 완성하였다. 우리 선친 또한 그 일에 참여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온갖 갈래를 모아 하나의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경술년으로부터 지금까지 50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늙은 사람은 무덤의 나무가 이미 한 아름이나 자랐고, 젊었던 사람도 검은 머리가 이미 희어졌으며, 타향에 흩어져 살면서 족보에 이름을 올렸던 사람들도 모두 손자를 안게 되었다. 만일 지금 서둘러 족보를 편찬하지 않는다면 여러 대에 걸쳐 족보를 수찬해 온 공적이 장차 증거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온 문중이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지난해 봄, 오와공의 손자인 수악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 족보 편찬을 재촉하고, 또 안녕에서 가까운 곳과 먼 곳의 여러 종인에게 통문을 보내 단구 충효당에 모이게 하였다. 큰 논의가 한 번 시작되자 모두의 뜻이 같았다. 이듬해 봄에는 독동 사암에 편찬소를 마련하였다.
나는 늙고 쇠약하여 별다른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여러 사람의 권유를 받았고, 또한 선조의 뜻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먼 길을 넘어서 간행하는 일을 함께하였다. 대체로 족보의 체례는 옛 규정을 충실히 따르고, 종족의 차례를 엄격하게 하였다.
항렬자는 온 문중이 하나의 원칙을 따라 정하여 소목의 차례를 분명히 드러냈다. 이에 앞서 세 차례에 걸쳐 족보를 수찬해 온 공적이 오늘날 다시 환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비록 서로 거처가 멀리 떨어져 평소에는 길 가는 사람처럼 서로 낯설었지만, 한 번 계보를 함께 살펴보니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마음과 같은 혈통에서 나온 정이 저절로 생겨났다. 정 선생이 말한 “천하 사람의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데는 종족을 모으고 족보를 밝히는 것만 한 것이 없다”는 말이 참으로 이 때문이었다.
세상이 혼란하고 재정이 어려운 때에 여러 종인이 힘을 다해 이 일을 완성하였으니, 이 또한 우리 이씨가 선조를 추모하고 효를 실천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족보가 거의 완성되었을 때 여러 종인에게 말하였다.
“우리 종족 가운데 서울과 지방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은 모두 사재령의 형제들에게서 나온 후손이다. 사재령으로부터 지금까지 불과
14·15·16세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세대와 항렬의 차례가 손바닥을 보듯 분명하다. 어찌 분양왕과 영호씨의 친목에 견주어 말할 수 있겠는가.
천 갈래의 가지를 가진 나무도 뿌리는 하나이다. 동쪽 가지가 쇠하고 서쪽 가지가 번성하는 것은 일정하지 않고 순환하며 변하는 법이다. 바라건대 우리 여러 종인은 어느 지파가 쇠하거나 번성한다고 하여 서로 사이를 벌리지 말고, 거리가 가깝거나 멀다고 하여 친소를 달리하지 말라.
근심과 즐거움을 서로 나누고, 충실함과 신의를 서로 권면하며, 선조의 덕이 끊어지지 않도록 생각하고 후손들이 그것을 이어가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봄비가 만물을 적시듯 뿌리가 더욱 자라고 싹이 더욱 무성해져, 오래도록 이어질 복이 모두 우리 집안에 모이게 될 것이다. 여러 종인은 어찌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
모두가 말하였다.
“그대의 말이 참으로 좋다.”
그리고 나에게 글을 지어 이 일을 기록해 달라고 청하였다. 나는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며 사양했으나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이에 마음속에 느낀 바를 이와 같이 서술한다.
[부주]
저자 효산(曉山) 이수형(李壽瀅, 1837~1908)은 재령 이씨로, 자는 사징(士澄), 호는 효산(曉山)이다. 초명은 요응(堯應)이다. 장복추(張福樞)와 허전(許傳)의 문인으로, 이종기(李種杞)·허훈(許薰) 등과 교유하였다.
이 글은 재령 이씨 족보가 여러 차례에 걸쳐 수찬되어 온 경위와 19세기 후반 대동보 편찬의 의미를 설명한 서문이다. 글의 첫머리에서 족보를「一家之敦史」, 곧 ‘한 집안의 역사를 돈독하게 하는 기록’이라고 정의한 것이 핵심이다. 이는 족보를 단순한 혈통의 계보가 아니라 선조와 후손을 연결하고 종족의 의리를 보존하는 역사적 장치로 이해한 것이다.
특히「會萬殊而致一本」이라는 표현은 이 글의 사상적 중심을 이룬다. 각지에 흩어져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종인을 하나의 근본으로 모으는 것이 족보 편찬의 목적이라는 뜻이다. 뒤의「千枝之木,根本於一」이라는 비유 역시 같은 논리를 반복한다. 수많은 지파가 서로 다른 흥쇠를 겪더라도 근본은 하나이므로, 그 차이가 종족 간의 친소와 단절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 글에서는 족보의 기능을 世次·行序·昭穆의 명확화와 孝弟之心의 발현으로 연결한다. 즉 계보를 확인하는 지적 행위가 곧 친족 의식을 환기하는 윤리적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서로 낯선 사람처럼 지내던 종인들도 계보를 함께 확인하는 순간 자신들이 동일한 근원에서 나온 존재임을 깨닫고 자연스럽게 효제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族譜序」는 앞서의 석계 이시명의「族譜序」및 밀암 이재의「族譜重修序」와 긴밀하게 이어진다. 석계가 흩어진 계통을 확인하고 선조의 유업을 보존하는 일을 강조하였다면, 밀암은 이를 더욱 확장하여 종족을 수렴하고 풍속을 두텁게 하며 국가의 교화에도 도움이 되는 일로 논하였다. 효산 이수형은 다시 그 전통을 이어받아「一本」에서 출발하여「收族」으로 나아가고, 그것을 다시 「孝弟」와 문중의 장구한 번영으로 연결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족보는 과거를 보존하는 정적인 기록에 머물지 않는다. 과거의 계통을 밝혀 현재의 종족 의식을 회복하고, 그 의식을 다시 후손에게 전승하는 매개적 역사 장치로 기능한다. 마지막의「本滋而苗益勃」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사유를 가장 간결하게 압축한다. 뿌리를 깊고 튼튼하게 하면 가지와 잎이 더욱 무성해진다는 비유를 통해, 선조를 추모하고 종족의 근본을 보존하는 일이 곧 후손의 지속적인 번영을 위한 기반임을 말하고 있다.
출처>전통의명문 경주이씨종친회 카페 ㅣ 이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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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族譜序
譜,一家之敦史也。吾譜之作,昉於崇禎丙子,再於英廟甲午。羅初得姓之由、麗中分貫之實,石密兩先生序盡之矣。然其時收族未廣,如歐蘇譜之纔親盡而止。至哲廟庚戌,石溪公之七代孫梧窩公刱論於湖嶺諸宗,始成大譜,而吾先君亦預其役。此所謂會萬殊而致一本者也。雖然,庚戌之迄于今,爲五十餘年之久,則老者墓木已拱,少者鬒髮已皤,羈貫而錄者,亦皆抱孫矣。若不及此纂修,則屢世修譜之功,將歸於無徵矣。全宗以是爲慨然。去年春,梧窩公之孫壽岳甫貽書速壽瀅,又自安寧通諭於遠近諸宗,會于丹邱之忠孝堂。大論一發,僉意是同。翌年春,設所于篤洞思庵。壽瀅以衰廢一物,旣爲衆所勸,且欲不負吾先志,重涉長關,以相剞劂之役。蓋譜例之克遵舊規,謹嚴其倫序也 行字之全門從一,明著其昭穆也。於是乎嚮之三度修譜之功,煥然復明於今日。雖所居隔絶,素昧若路人,一講系牒,孝弟之心、氣脈之感,油然而生。程夫子所謂「管攝天下人心,莫如收宗族、明譜牒」者,良以此也。當此世淆財弊之時,僉宗之𨃃蹶成是役,抑亦吾李追孝之驗歟。譜幾成,告于諸宗曰「吾宗之散處京外者,皆是司宰令昆季之后也。司宰令之距今,不過是十四五六世,則世次行序之明,歷歷如指掌,不可與汾陽之拜令狐之睦,同日而言也。千枝之木,根本於一,東顇西榮,循環無常。願吾諸宗不以衰旺而間之,不以近遠而異之,憂樂相憐,忠信相勉,思先德之勿墜,念後昆之繼承,則將見春雨潤物,本滋而苗益勃,綿遠之福,畢萃於吾門矣。諸宗盍相勔諸」僉曰「善哉君言。」請爲文以敍其事。余以僭越辭不獲,遂述其所感於心如此云。<끝>
曉山文集卷之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