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제수(弟嫂) 이 유인(李孺人) 묘지명 병서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 찬(撰)
내 아우 대유(大有)가 배필 이 유인을 사별하였다. 그는 유인이 처음 별세했을 때부터 나에게 묘지명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나는 그 일을 허락하고 나서 3년이 지나도록 쓰지 못하였다. 아, 내가 유인의 묘지를 쓰는 것이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는가.
유인의 현숙함은 기록할 만한 것이 워낙 많아서 그것을 다 기록하면 아마도 너무 번잡할 것이고, 그렇다고 대략 기록한다면 혹 빠뜨리는 것이 있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묘지명을 끝까지 쓰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중에 큰 것만 기록하고 나머지는 그로 인해 추리해서 알 수 있게 한다면 그런대로 옛사람의 뜻에 가까울 것이다.
이 유인이 우리 가문에 들어오자 동서가 다섯 명이 되었는데, 그 다섯 명은 타고난 성품의 완급과 기호가 각기 달랐다. 그러나 유인은 그 사이에서 그들을 한결같이 화순하게 대하였다. 그리하여 다섯 사람으로 하여금 시종 원한이 없게 하였으며 유인의 상에 매우 슬프게 곡하게 하였다.
대유는 어려서 방친(旁親)의 손에서 컸는데, 유인은 그 일을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그 방친의 제사를 받듦에 있어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고, 상자 속의 유물을 모두 기록하여 그의 딸에게 돌려주고 한 가지도 자신이 소유하지 않았다.
나아가 그 딸이 시집갈 때에는 재물을 주어서 보냈고 죽었을 때에는 자신의 재물을 아끼지 않고 부의를 하였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인데 유인은 해내었으니, 시부모와 지아비를 어떻게 섬겼을지 짐작할 수 있다.
유인은 종실의 딸이다. 선조대왕의 4세손이고 선고(先考) 익풍군(益豐君) 휘 속(涑)의 외동딸이었기에 부귀한 환경에서 태어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도 부도(婦道)를 행함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더 조심하고 삼갔으니, 그 때문에 과묵하고 차분하신 우리 선군, 엄중하신 우리 모친, 깐깐하여 좀처럼 남을 인정해 주지 않는 우리 아우마저 유인에 대해서는 모두가 매우 흡족해하였다.
유인은 16세에 시집왔는데, 시집온 지 19년 만에 기사년(1689, 숙종 15)의 화를 만났다. 당시에 우리 형제가 모친을 모시고 영평산(永平山)에 들어가 살면서 형편이 매우 곤궁하였는데, 유인은 마치 평소에 익숙했던 것처럼 편안히 받아들여 매일 제사를 돕고 늙은 모친을 봉양하는 데에 힘을 쏟으며, “이는 내 일이다.” 하였다.
그리고 재산의 유무와 주리고 배부른 것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지내는 4, 5년 동안 들밥을 내가고 채소밭을 가꾸고 소를 먹이고 누에를 치는 등의 일을 한결같이 산골의 늙은 농부 집처럼 하면서도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기색이 없이 그렇게 살다 죽을 것처럼 하였다.
대유가 비록 평소부터 유인을 중시하기는 하였으나 이렇게까지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이러한 모습을 보고는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유인은 결국 그 누적된 피로가 병이 되더니 계유년(1693, 숙종 19) 2월에 아기를 출산하다가 병이 더욱 심해져서 결국 별세하고 말았다.
유인은 병든 때에도 부모 봉양을 염려하여, 집안사람이 생선을 사다 올렸다는 말을 듣고는 희색이 돌기도 하였다. 유인이 별세한 뒤에 옷상자를 보니 겨우 시집올 때 입었던 옷과 평소에 입었던 약간의 옷밖에 없었으니, 사람들은 더욱 유인이 평소에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했음을 알았다. 이해 모월 모일에 양주(楊州) 율북리(栗北里) 모향(某向)의 언덕에 종장(從葬)하였다.
우리 김씨는 안동의 대성(大姓)으로 고려의 태사(太師) 선평(宣平)의 후예이다. 선군(先君) 휘 수항(壽恒)은 영의정을 지냈다. 대유는 이름이 창업(昌業)이다. 신유년(1681, 숙종 7)에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나 결국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으니, 그 또한 유인의 권유가 크게 작용하였다고 한다.
3남 중에 맏이는 우겸(祐謙)으로 사인(士人) 신숙(申潚)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차남은 언겸(彦謙)이다. 막내는 아직 이름이 없는데 그 아이는 바로 유인이 별세한 해에 낳은 아이이다. 딸은 조문명(趙文命)에게 시집갔다. 유인이 운명을 앞두고 대유를 돌아보며 울면서 말하기를, “제가 죽는 것은 한스럽지 않으나 대인(大人 김수항)의 억울함이 씻기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였다.
그 이듬해에 간흉이 원찬(遠竄)되거나 사형에 처해지고 폐비 민씨(閔氏)가 복위되었으며 선군도 복관(復官)됨과 동시에 제사가 하사되었다. 아, 유인이 이것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살아서 본 사람들일망정 과연 충분히 위로가 되겠는가.
그저 애통하고 한스러운 마음만 더할 뿐이었으니 차라리 일찌감치 선군을 따라 지하로 들어가는 편이 오히려 즐겁지 않았겠는가. 슬프다, 슬프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무명치마에 거친 밥 먹으며 / 裙布飯蔬
지아비 따라 농사지었네 / 從夫于農
하늘이여, 그게 어찌 분수에 넘쳐 / 何侈於分
장수를 누리지 못하게 했나 / 不俾其終
아, 아름다운 덕이여 / 嗚呼令德
무궁히 밝게 빛날지니 / 尙昭無窮
<끝>
ⓒ 한국고전번역원 | 송기채 (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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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四嫂李孺人墓誌銘 幷序
吾弟大有。喪其配李孺人。自始卒。卽屬余爲誌。余旣許之而三年不成。嗚呼。以余而誌孺人。豈有愛哉。孺人之賢。其可書者多矣。悉書之則疑於已繁。略書之則懼其或遺。余於是乎未有以處也。然誌之終可已也。則唯書其大者。而其他因亦可見。尙庶幾古人之意也歟。蓋孺人入吾門。而其爲娣姒者五人。五人者。其資性緩急。氣味酸鹹。各不同。然孺人處其間。壹以和順。能使五人者。終始無怨恨。而哭之皆甚哀。大有幼養於旁親。孺人蓋未之逮也。然奉其祀。極其誠敬。悉籍其箱篋遺物。歸之孤女。而不一自私。至其嫁而資送供給。死而含斂賻襚。無少愛於己財。二者皆人所難能。而孺人能之。其於事舅姑事夫。固可知也。然孺人。宗室女也。於宣祖大王。實爲四世孫。而於其考益豐君諱涑。爲獨女。生富貴嬌愛甚。而及其執婦道。小心畏謹。甚於他人。是以吾先君之簡穆。吾母之嚴重。與吾弟之狷介少可。而於孺人。皆甚宜焉。孺人年十六而嫁。嫁十九年而遭己巳之禍。方吾兄弟奉母入永平山中。其窮約已甚。而孺人安之若素習。唯日致力於助祭養老曰。是吾事也。至於其有無飢飽。則不以其家。而以兄弟家而已。蓋居之四五歲。而其饁田治圃。飯牛養蠶。一如山谷老農家。將用以終身而無怨悔色。大有雖素重孺人。亦不意其能如此也。於是益加重焉。而孺人竟以是。勞瘁成疾。至癸酉二月。免子疾益㞃。遂卒。疾時。猶以親養爲念。已聞家人市鮮魚以進。喜見於色。旣卒。視其篋。唯嫁衣與常所服若干。人益知其平日自奉之儉。是年某月某甲。從葬于楊州栗北里某向之原。我金。安東大姓。高麗太師宣平之後。先君諱壽恒。領議政。大有名昌業。登辛酉司馬。遂不赴擧。亦孺人勸助爲多云。三男。長祐謙。娶士人申潚女。次彥謙。其季未名。卽生於孺人卒年者也。一女。適趙文命。始孺人將死。顧大有而泣曰。吾死無恨。恨不得見大人雪冤耳。明年。奸凶竄殛。坤位再正。而先君亦復官賜祭。嗚呼。是亦何及矣。而生而得見者。其果足爲慰乎。其亦秪益哀痛憤懣。而無寧早從地下。爲猶足樂也。悲夫悲夫。銘曰。
裙布飯蔬。從夫于農。何侈於分。不俾其終。嗚呼令德。尙昭無窮。<끝>
농암집 제27권 / 묘지명(墓誌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