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암집 제50권 / 묘갈명(墓碣銘)
찰방 이공 묘갈명(察訪李公墓碣銘)
공의 휘는 언괄(彦适)이고, 자는 자용(子容)이며, 회재(晦齋) 이 선생(李先生)의 아우이다. 대부인이 현철(賢哲)하다고 이름이 나고 형도 현철하였는데, 공은 효우(孝友)의 본성으로 가정의 감화를 더하고 지행(志行)을 날로 돈독하게 하여, 선생이 공을 손과 발처럼 여겼다.
선생은 중종조(中宗朝)에 사직지신(社稷之臣)으로서 임금이 의지하고 믿는 것이 매우 은근하므로 의리상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공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모친 곁에서 한탄하는 모친을 즐겁게 해 드리며 효성을 다하였다. 조정에서 공이 현철하다는 말을 듣고 침랑 (寢郞), 주부(主簿)에 제수하고, 또한 송라도 찰방(松羅道察訪)에 제수하였는데, 혹은 한번 숙배하고 곧 돌아오고 혹은 잠시 나갔다가 선뜻 관직을 버렸다.
대개 공은 조정에 하루라도 선생이 없어서는 안 되고 선생이 이미 집에 있을 수 없다면 자신이 차마 모친을 떠나 벼슬살이를 하지 못하리라 생각한 것이고, 선생도 공이 모친의 좌우에서 봉양하는 것이 자신과 차이가 없을 줄 알았으므로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았다.
정미년(1547, 명종 2)에 소인배가 죄악을 쌓아 선생을 강계부(江界府)로 귀양 보냈는데, 강계는 아주 멀어 집과의 거리가 수천여 리이다. 공은 애통한 심정으로 밤에는 반드시 향을 사르고 하늘에 빌며 선생이 돌아와 대부인이 살아 계실 때 나란히 색동옷 입고 춤추기를 바랐다.
다음 해에 대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공은 병이 심한데도 오히려 남의 부축을 받으며 친히 염습을 하며 성신(誠信)으로 유감이 없게 하였다. 장사를 지낸 뒤에는 여묘살이를 3년간 했는데, 슬픔으로 건강을 해쳐 거의 지탱하지 못하였다. 상기를 마친 뒤에는 험하고 어려움을 무릅쓰고 죽을 각오로 길을 떠나 선생의 귀양지로 달려가서 부둥켜안고 슬픔을 다하고 여러 달을 머물렀다.
선생이 변방의 추위가 심한 것을 염려하여 공에게 돌아가라고 권하고, 작별할 때 시 5수를 주니, 공도 화답했는데 내용이 너무 처량하여 사람들이 차마 읽지 못하였다. 애초에 공은 선생을 위하여 조정에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했으나 선생이 중지시켰다.
공이 남쪽으로 돌아온 뒤에 석방될 기약이 없는 것을 마음 아파하며 편지로 선생에게 고하여 아뢰기를 “옛날 사람 중에는 형제가 죽음을 다툰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하늘에 호소하여 만에 하나라도 임금을 감동시킨다면 죽음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는데, 선생이 또한 중지시켰다.
공은 몹시 야윈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또한 이로 인해 마음속에 응어리져 마침내 계축년(1553) 1월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0세이다.
선생은 멀리서 선영에 장사 지낼 것을 명하여 혼백으로 하여금 훗날 서로 의지하게 하였다. 흥해군(興海郡) 남쪽 도음산(禱陰山) 묘향(卯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그해 겨울에 선생이 또한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 같은 산기슭에 귀장(歸葬)하니, 유지(遺志)를 따른 것이다. 공이 거상(居喪)한 것으로 보면 공이 살았을 때 조정에서 복호(復戶)를 내렸고, 백성에게 사랑을 남긴 것으로 보면 열 달을 다스렸는데 역졸(驛卒)들이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공을 사모하고 우러르는 자가 이것으로 공을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아니다. 바야흐로 공이 은명에 숙배하고 돌아올 적에 선생이 공에게 준 시에서 이르기를 “그대 같은 효성은 세상에 드물리라.[如君誠孝世無多]”라고 하고, 공이 찰방 관직을 버리고 돌아올 때에도 시를 주어 이르기를 “그대가 사직하고 모친 모셔 기쁘거니.[喜君投紱承親志]”라고 하며, 공이 세상을 떠나자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며 이르기를 “내가 비록 장사 지내고 제사 지내는 일을 직접 행하지 못했지만, 자네가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고 묘소를 지키며 스스로 정성과 예를 다하였으니, 내가 비록 있었다고 한들 어찌 더할 바가 있었겠는가.” 하였다.
아, 선생은 형이고 공은 아우이다. 지극히 정겨운 말을 문장으로 표현하지 않았으나 선생이 시나 문으로 공을 가상하게 여기고 장려하거나 공에게 감동하고 탄복한 것을 모두 나열하며 그칠 줄 모른 것이 이와 같았다. 사람들이 선생을 존경할 줄 안다면 그 말씀을 반드시 믿을 만하다고 여기지 않겠으며, 선생의 말씀을 믿는다면 공의 효우와 지극한 품행이 세상의 모범이 될 수 있음을 알지 못하겠는가.
공은 본래 여주(驪州) 사람인데 중간에 선조가 영남의 연일(延日)로 이주했다가 나중에 경주(慶州)로 옮겨서 지금은 경주 사람이 되었다. 증조 휘 숭례(崇禮)는 참판에 증직되었다. 조부 휘 수회(壽會)는 참군(參軍)을 지냈고 판서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휘 번(蕃)은 생원으로서 문학이 있어서 성묘조(成廟朝)에서 역소(驛召)하여 그의 문학을 시험하고 태학에 머물게 하였으며, 세상을 떠난 뒤에는 좌찬성에 증직하였는데, 이것은 회재 선생의 신분이 고귀해져서이다. 어머니 정경부인 손씨(孫氏)는 계천군(雞川君) 손소(孫昭)의 따님이다.
공은 모두 두 번 장가들었다. 선산 오씨(善山吳氏)는 무공랑(務功郞) 오달민(吳達民)의 따님이자 부윤(府尹) 오식(吳湜)의 증손녀이고, 웅천 주씨(熊川朱氏)는 주수(朱壽)의 따님인데, 모두 자식이 없어서 사촌 동생 도(道)의 아들 응기(應期)를 데려와 후사로 삼았다.
응기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의주(宜澍)이고, 두 사위는 이군빈(李君賓)과 사재감 정(司宰監正) 이득봉(李得鳳)이다. 서자(庶子) 의흡(宜洽)은 무과에 급제하였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재하지 않는다. 공의 7세손 전 현감 헌락(憲洛)이 일찍이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는 지극한 품행으로 사림이 사당을 세워 제향했는데, 갑자기 국가의 금지령으로 인하여 제향이 중지되었습니다.
참으로 선생의 한마디 말을 얻어서 무덤을 빛낸다면 아마도 후손들의 생각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여, 내가 승낙했으나 결행하지 못하였다. 성상(聖上) 8년(1784)에 영남의 선비들이 상소하여 공의 사적을 아뢰자, 상이 특명으로 사헌부 지평에 증직하였다.
많은 선비가 덕을 숭상한 것과 성스러운 군주가 교화를 돈독히 한 것은 모두 글로 쓰지 않아서는 안 되겠기에 드디어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형은 문묘에 종사되고 / 兄祀文廟
아우는 향사에서 제사를 받네 / 弟食鄕祠
사당을 훼철하고 복구하지 않으니 / 祠毁不復
후손이 슬퍼하는 바이네 / 後孫之悲
아, 공의 지극한 품행을 / 嗟公至行
어떻게 빛낼까 / 曷以章之
성조가 교화를 돈독히 하여 / 聖朝敦化
찬란하게 증직하였네 / 煒哉贈誥
내가 무덤길에 명을 지어 / 我銘于隧
먼 후세에 알리노라 / 百世是詔
<끝>
[註解]
[주01] 언괄(彦适) : 이언괄(李彦适, 1494~1553)로,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용, 호는 농재(聾齋)이다. 회재 이언적(李彦迪)의 아우
로 이언적에게 글을 배웠다.
[주02] 회재(晦齋) 이 선생(李先生) : 이언적(1491~1553)으로, 본관은 여주,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ㆍ자계옹(紫溪翁)이다.
[주03] 색동옷 입고 춤추기 :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 노래자(老萊子)가 효성이 지극하여, 70세에 색
동옷을 입고 춤을 추며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떨어 그 어버이의 마음을 즐겁게 한 일이 있다. 《太平御覽 人事》
[주04] 성신(誠信) : 진실되고 정성스러운 마음을 말한다. 《예기(禮記)》 〈제통(祭統)〉에 “이 때문에 현자가 제사를 지낼 때에는 성신
과 충경을 극진히 한다.[是故賢者之祭也, 致其誠信與其忠敬.]”라고 하였다.
[주05] 형제가 …… 경우 : 형제가 서로 대신 죽겠다고 다툰 경우를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강굉열전(姜肱列傳)〉에는 강굉(姜肱)의
형제가 도적을 만나서 서로 자기가 죽겠다고 다투다가 둘 다 풀려난 내용이 있고,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권4 〈조효취팽(趙孝
就烹)〉에는 조효(趙孝)의 아우 조례(趙禮)가 도적에게 잡혀 잡아먹히게 되었을 때 조효가 자신을 묶고 적에게 가서 말하기를 “조
례는 수척하니 살진 나만 못하다.” 하니, 도적이 그 뜻을 깨닫고 모두 놓아준 내용이 있다.
[주06] 공에게 준 시 : 《회재집(晦齋集)》 권3 〈기사제(寄舍弟)〉이다.
[주07] 시 : 《회재집》 권3 〈재낙기사제(在洛寄舍弟)〉이다.
[주08] 제문 : 《회재집》 권6 〈제망제자용문(祭亡弟子容文)〉이다.
[주09] 수회(壽會) : 이수회(李壽會, 1431~1518)이다. 본관은 여주이다.
[주10] 번(蕃) : 이번(李蕃, 1463~1500)이다. 본관은 여주이다.
[주11] 역소(驛召) : 조정에서 선비를 역마(驛馬)로 불러올리는 것을 이른다.
[주12] 손소(孫昭) : 1433~1484. 본관은 경주, 자는 일장(日章), 시호는 양민(襄敏)이다.
ⓒ한국고전번역원 | 김정기 이유찬 정문채 (공역)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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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察訪李公墓碣銘
公諱彦适。字子容。晦齋李先生之弟也。太夫人以賢哲名。兄又賢。公以孝友之植。加以家庭薰襲。志行日篤。先生視之如手足焉。先生當中宗世。以社稷之臣。倚毗甚殷。義不容退還鄕國。公晨夕於母側。愉惋盡孝。朝廷聞其賢。薦授寢郞主簿。又除松羅察訪。或一肅便歸。或蹔莅旋棄。葢公意以爲朝廷不可一日無先生。先生旣不可以家則身不忍離母宦遊。而雖先生知公之左右就養。無間於己在親側。故不以亂方寸也。丁未。宵小稔惡。竄先生江界府。江界地踔遠。距家數千餘里。公痛心。夜必焚香禱天。冀先生還。及太夫人在世。重聯舞綵。明年。太夫人歿。公病甚。猶且人扶親斂。誠信無憾。及葬。廬墓三年。哀毁幾不支 。喪旣畢。冒險艱生死作行。赴先生謫居。抱持盡哀留數月。先生念塞土寒甚勸之歸。臨別。贈詩五章。公亦和。辭意悽斷。人不忍讀。初。公爲先生欲籲冤于朝。先生止之。及南還。痛賜環無期。書以告曰。古人有兄弟爭死者。今而籲天。萬有一上格。死亦不辭。先生又止 之。公柴毁未復。又因是鬱結。竟以癸丑正月卒。享年六十。先生遙命祔葬先壠。俾魂魄他日相依。葬在興海郡南禱陰山卯向之原。是年冬。先生亦歿于謫舍。歸葬同麓。從遺志也。公以居喪則及其生而朝家賜復。以遺愛則裁旬月而郵卒刻石。然慕仰公者欲以是知公則未也。方公之肅命而還也。先生贈公詩曰。如君誠孝世無多。及公之棄郵而返也。又贈詩曰。喜君投紱承親志。公歿。文以祭之曰。吾雖不能親葬祭之事。汝能三年廬守。自盡誠禮。吾雖在。有何加焉。嗚呼。先生兄也。公弟也。至情言不文。而先生之以詩 以文。嘉奬公感服公。傾倒羅列而不知止如此。人知尊先生。則其有不以其言爲必可信矣乎 。信先生之言。則其有不知公之孝友至行之可以爲世型範矣乎。公本驪州人。中移嶺南之延日。後遷慶州。今爲慶州人也。曾祖諱崇禮贈參判。祖諱壽會參軍贈判書。考諱蕃生貟。有文學。成廟驛召試其文。俾留太學。卒贈左贊成。以晦齋先生貴也。妣貞敬夫人孫氏。雞川君昭女。公凡再娶。善山吳氏。務功郞達民之女。府尹湜之曾孫。熊川朱氏。壽之女。皆無子。取從父弟道子應期爲嗣。應期一子二女。子宜澍。二婿李 君賓,司宰正李得鳳。餘男宜洽武科。曾玄以下多不盡載。七世孫前縣監憲洛。嘗造余言曰。吾先祖以至行。士林立祠以享。旋因邦禁撤。誠得子一言以賁泉隧。庶可慰後孫之思。余諾而未果。聖上八年。嶺之士上言白公事。上特命追爵司憲府持平。多士之尙德。聖主之敦敎。俱不可以不書。遂爲之銘。銘曰。
兄祀文廟。弟食鄕祠。祠毁不復。後孫之悲。嗟公至行。曷以章之。聖朝敦化。煒哉贈誥。我銘于隧。百世是詔。<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