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미 - 한강 (심연옥 1953)
최병호 작사/작곡
팔당대교를 시작으로 일산대교까지 총 31개의 다리가 강북과 강남을 잇고 있는 지금의 한강.
화려하고 멋진 야경을 자랑하는 한강의 1950년대 모습은 어땠을까요?
소수의 부유층이 바다로 피서를 떠나던 시절에
대부분의 서울 시민들은 한강에서 물놀이를 하며 더위를 달래곤 했답니다.
지금에 비해 수질도 깨끗했고 무엇보다 입장료도 없었으니까요.
노량진을 바라보던 제1한강교, 그러니까 지금의 한강대교
근방과 뚝섬, 광나루 등지에 넓은 백사장이 있었지요.
강가에는 황포돛배와 고기잡이 배들이 줄지어 서있고
겨울이 되면 얼음을 채빙하기 위해 소달구지를 끌고 나와
톱으로 얼어붙은 한강물을 쓱쓱 잘라서 싣고 가곤 했지요.
우리 어머님들이 빨래하고 물을 긷던 한강의 모습은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옛 추억이 되었습니다.
수도권의 젖줄로서 지금까지도 우리의 상수원으로 생명을 공급해주는 고마운 한강은
전쟁의 아픔을 겪으며 크고 작은 수난을 치뤄야 했지요.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고 3일 뒤인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최초의 인도교(人道橋)인 제1한강교가 폭파되었습니다.
1917년 10월 7일 세워진 제1한강교가 전쟁으로 무너지면서
수많은 서울 시민들이 이로 인해 희생당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한 많은 강가에 늘어진 버들가지는
어젯밤 이슬비에 목메어 우는구나
떠나간 그 옛님은 언제나 오나
기나긴 한강줄기 끊임없이 흐른다
나루에 뱃사공 흥겨운 그 옛노래는
지금은 어데 갔소 물새만 우는구나
외로운 나그네는 어데로 갔나
못 잊을 한강수야 옛 꿈 싣고 흐른다"
전쟁 중 발표된 '한강'은 슬픈 감정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늘어진 버들가지,
사라진 뱃사공과 같은 메타포를 통해 오히려 전쟁의 아픔을 더 잘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평화롭던 한강변의 풍경이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지고 슬픔만이 가득합니다.
가족과 친구를 잃고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허무해하는 작사가의 마음이 생생하게 전해져 오지요.
이 노래를 만든 최병호 선생님은 사실 시인도 음악가도 아닌 방송국에서 근무하던 기술자였습니다.
한강을 넘어 피난길 행렬에서 느꼈던 감정을 가사로 적어내려갔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곡을 완성하게 된 것이지요.
2011년 1월 1일 사단법인 문공회가 발행하는 문공회보에
'내가 작사 작곡한 한강'이라는 최병호 선생님의 글이 실렸습니다.
이 글을 통해 '한강'의 탄생배경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날 서을 근교에 있는 뚝섬 유원지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넓은 백사장에
수양버들, 버드나무등 많은 수목으로 운치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여름부터 가을까지 수영인파와 노릿배 타기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간혹 땟목이 유유히 흘러가는 것을 볼때면 낭만적인 기분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초유의 비극이 시작되었고
1951년 1. 4후퇴 때는 아름다운 서울 정든 서울을 버리고 떠나야 했습니다.
한강 인도교가 끊겼기 때문에 결빙된 마포강을 건너는 피난행열이 장사진을 이루었습니다.
저는 다행히도 서울 방송국 소속 공무원으로서 한강교 폭파전에
정부에서 마련한 마지막 열차를 타고 부산에 갈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 부산방송국은 지방 방송국 기능으로 천도후 중앙방송국 역할을 하게 되었고
저는 방송국 뒷 마당에 판자집을 마련하여 피난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저런 생각들이 끊이지 않았고 그 와중에
추억속의 아름다운 서울을 자주 떠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1952년 제가 직접 작사 작곡한 '한강' 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서울에서 피난온 방송국 전속 가수들에게 "한강"곡을 주어 방송 출연을 시켜 보았지만
가수들이 그 곡을 적절히 소화하지 못하여 고민 하였습니다.
그 무렵 저는 대구 문화극장에서 방송 실연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날 우연히 심연옥(당시 가협 가수 문화극장에 기거)을 만나
방송 실연 공연에 출연시키자(1953년) 예상했던 대로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반주는 공군 경음악단) 그때부터 한강은 심연옥이 부르게 되었습니다.
대중가요 한강은 발표된지 57년이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 해주고 애창해 주셔서 저로서는 감사 할 따름입니다.
'한강'은 요즈음에도 공중파로 늘 방송되며 노래방에서도 많이 애창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강곡을 담은 CD, TAPE, DVD등이 많이 발매되고 있습니다.
대중가요 한강을 사랑 해 주시는 국민 여러분과 관계기관 담당자분들께 매우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해 3월 23일부터 5월 23일가지 서울시 청계천 문화관 전시실에서 개최된
"서울을 노래하다. 서울 대중가요 기획전"은 나뿐만 아니라 서울을 사랑하는
모든 국민들에게 감명을 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전시회를 개최해 주신관계자들에게 충심으로 사의를 표해 마지 않습니다."
주현미TV에서는 '아내의 노래'를 통해 심연옥(沈蓮玉) 선생님의 노래를 먼저 들려드린 적이 있는데,
'한강'은 원조 꾀꼬리 심연옥 선생님을 국민 가수로 만든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서울을 배경으로 만든 노래 중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노래로
무려 20명에 가까운 가수들이 자신의 음반에 취입했다고 합니다.
'한강'을 소재로 한 노래는 이후에 박재란 선배님의 곡 '한강소야곡'이 발표되었고,
1970년대에는 혜은이 선배님의 '제3한강교'가 큰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여담이지만 한강대교에 이어 1965년 제2한강교인 양화대교가 건립되었고
1969년 제3한강교인 한남대교가 만들어졌답니다.
'한 많은 강가'로 시작하는 '한강'의 가사를 읽어내려가다 보면
'漢江'으로 표기되는 한강이 '恨江'이 되어야 할 것처럼 느껴집니다.
2019년의 서울은 세계 어느 도시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지만
한국 현대사 속 서울은 깊은 상처와 아픔을 간직하고 있지요.
이 노래를 듣는 분들 중에는 그 시절을 직접 몸으로 겪은 분들도 계실거예요.
심연옥 선생님의 '한강'을 함께 나누며 노래 안에 담긴 우리의 아픔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