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수속을 마치고 아랫집친구가 조심스럽게 운전해 주는 덕분에 별다른 문제없이 고창에 도착했다.
애들이 먼저 도착해서 불을 지펴놓았기에 따듯하기도 했지만 오랫만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집에 불이 켜지고 인기척이 있는 걸 알고 이수형님이 다녀가셨고, 조금 있으니 이수형수가 데크에서 빼꼼히 얼굴만 내밀었다가 앙상한 내 몰골을 보고 놀랬는지 서둘러 내려간다.
아마 이수형님이 내려가서 내 얘기를 했을성 싶고 그 얘기를 듣고 확인하러 온 듯 하다.
당분간 여수에는 내려가지 않을 계획이고 시골집에서 몸을 추스른다음 직장에 복귀할 계획이다.
3주의 시간이 흘러 아산병원에 가서 남았던 실을 뽑는 걸 포함해 이틀간 진료받고 여수로 내려와 농원에서 구입했던 자목련은 고창으로 옮겨 큰방옆 화단에 심어졌고, 빨간 꽃잎으로 유일하게 초겨울부터 초봄까지 겨울화단을 지키던 산다화(애기동백)의 꽃이 시들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새싹이 돋고 꽃망울이 채색을 하느라 바쁘다.
연초부터 병원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리느라 눈길을 주지 못했슴에도, 산다화는 저 혼자서 겨울을 지키고 집을 지키느라 피곤했던 생명을 끝을 놓고 있다.
봄을 준비해야 하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 금년은 그럭저럭 넘겨야 할 팔자가 되었슴이 조금은 아쉽지만, 퇴직후의 수많은 날들이 널려있고 억지로라도 여유를 부리고 싶어 마음바닥의 욕망을 지그시 누른다.
변산반도에서 불어오는 삭풍을 막기 위해 길옆화단에 심어진 동백나무를 옮기려다가 마을길을 내려다보니 동백나무 묘목을 실은 1톤차가 지나고 있기에 묘목밭에서 주당 5천원씩에 구입해 20그루를 앞쪽화단을 따라 심고 길가화단의 동백사이에 5그루를 심고 바람에 넘어지지 않도록 말목을 박아 줄로 묶고 전지까지 마치는데 1주일이 걸렸다.
애비가 안쓰러워 작은 눔이 와서 도와주고 큰 눔이 왔다가 갔어도 일이 더디기는 마찬가지였다.
힘이 들기는 했어도 주당 10만원정도의 동백을 싸게 구입했고, 내가 좋아하는 꽃이 붉고 조그마한 재래동백이어서 더욱 흡족하다.
생각해보니 내가 좋아하는 꽃은 대부분이 작고 볼품이 없다.
동백의 경우 큰 겹꽃보다는 홑꽃이면서 앙증맞고 더 피어있어도 좋을 듯한 느낌이 드는데도 툭 툭 떨어져 내리는 붉은 아쉬움이 마음저리게 다가든다.
목련도 마찬가지로 작고 추하지 않은 재래종 자목련이 좋고, 그래서 그런지 아담한 골반바지가 옆지기의 인연으로 내곁을 지키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날이 좋아지는 건강덕분에 퇴원후 악력부족으로 전지가위를 쥘 수 없어서 포기했던 나무의 전지를 마치니 봄비내려 공치는 날까지 합하면 이 것도 일주일이다.
힘이 부족해 엔진톱을 쓸 수 없으니 벽난로용 땔나무는 아랫집 친구가 조달해 준다.
터를 구입한 다음 빈 땅이 보기싫어서 무조건 심었던 나무들을 뽑아 이식하는 것도 만만찮아 골반바지의 힘을 빌려 마치고나니 열흘쯤 흘렀나부다.
그렇다고 흡족하게 옮겨진 바도 아니어서 5그루의 자두와 복숭아나무를 옮기려면 비닐하우스를 두동강내는 날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는데, 하우스작업을 해 준다던 젊은꼴통은 100원짜리 소나무묘목심기에 바빠서 우리집 일은 뒤로 미루기만 하고 있다.
계절만 믿고 터지려는 자두나무의 꽃망울이 원망스럽고... 하우스를 옮기는 기술없슴과... 근육이 풀어지면서 힘이 빠져 흐물흐물하는 내 육신이 보기싫기도 하지만, 가족들을 위해 다시 뛰어야 할 때를 생각해 낚시바늘 눈꼬리를 먼 산으로 돌린다.
일하다가도 시큰둥해지면 삽자루를 팽개치고 산으로 갈 수 있어서 좋고, 주말농부시절에는 꿈도 못 꾸던 여유가 있어서 좋기는 하다.
문수골을 따라 오르다보면 머위가 많은 골짜기가 있어서 쌉쓰름한 머위나물은 실컨 먹을 수 있고, 나물캐기 좋아하는 골반바지의 비위도 맞춰주는 듯 해서 미안함이 덜어진다.
머위나물을 캐는 동안에 나는 화단에 심을 춘란을 채취하며 숲속의 여유로움을 즐긴다.
골짜기마다 지천인 자귀나무를 집안에 심는 게 산골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겠지만, 부부화합에 좋다는 속설과 꽃이 예쁘고 오래간다 며 갖고싶어하는 친구옆지기가 생각나서 화단에 심어주고자 모양좋은 걸 골라서 캤으니 친구가 강의를 끝내고 돌아오면 트럭을 가져와 싣고 내려갈 것이다.
전쟁하듯 살던 시절과 달리 몸아프다는 핑계로 얻은 묘한 여유는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배나무밭 코너는 터를 구입하고 처음으로 쌓아봤던 돌담이어서 지금 보니 조잡하고,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쌓았기에 감나무의 가지가 도로를 넘어나오는 형상으로 보이기도 해서 다시 허물어 버렸다.
대문앞에서 부터 시작되는 조경석의 선을 연장해 예전보다 도로쪽으로 기초를 내서 쌓았는데 아침부터 시작한 일이 해가 질때쯤 끝났다.
가장자리에는 광나무를 옮겨심어 울타리가 되도록 했고, 다음날에는 봄맞이 단장을 겸해서 울타리의 광나무를 적당하게 잘라서 가지런하게 만들었다.
친구와 바람쐬러 외삼촌댁에 갔다가 얻은 나무(단풍, 노아시, 황목련+백목련 하얀+붉은마로니에 등)를 싣고와 심었는데 이제는 아랫집친구의 화단도 모양을 갖춰가고 있다.
다시 외삼촌댁에서 20~30년은 족히 넘었을 자목련을 캐왔고 친구의 도움으로 마당 수돗가에 심어놓으니 제법 모양이 난다.
3년전에 파종했던 도라지를 캐내는데 1주일이 걸렸고 50kg정도 수확했다.
엊그제는 둘째눔의 원룸에 반찬을 가져다 주고 돌아오면서 "강물처럼"님의 터에 들렀다.
터의 옆과 뒷쪽에 자리잡은 산세는 가히 절경이었으나 냇가옆 평평한 땅을 어떻게 가꿔야 예쁘게 될는지 조언(?)하기가 쉽지 않다.
아외나무처럼 쉽게 높은 울타리를 만들고 방풍을 겸하는 나무를 심어 주변과 격리하는 효과를 얻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내 터가 아니고 강물처럼님의 생각도 있을 터이니 다음에 만나면 내 생각을 간단히 얘기해야 겠다.
라일락이 꽃망울을 터트리려는 지금.
3개월여 동안 상상은 물론 겪어보지 못 했던 병치레를 하며 보냈던 좌절의 시간들이 이제 추억처럼 느껴진다.
조금씩 움직이면서 몸을 만들고, 움직이는 듯 아닌 듯 하면서 조금씩 시골일을 추스린다.
터는 적당히 배분되어 크게 할 일도 없게 되었으니 금년은 쉬엄쉬엄 "기어가는 해"로 만들어야 겠다.
시골일기 끝.
첫댓글 내쳐 달려온 세월이 얼마더냐. 그래, 쉬엄쉬엄 가는 때도 있어야지. 마음 끓이지 말고 느려진 시간 만큼 네 마음도 편하게 놔두려무나. 내 한 번 시간 내서 내려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