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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9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
본문 :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새번역>
예전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웃음이 터진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영화 ‘친구’를 보러 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영화를 보고 너무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말도 거칠고, 내용도 거친 영화인대 대체 어떤 부분에서 은혜를 받았을까 궁금했습니다. 그 분이 은혜를 받은 포인트는 상당히 엉뚱했습니다. 바로 유오성 배우가 장동건 배우에게 하는 대사입니다. 영상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UmUG90XxWw
바로 “죽고 싶나?” 라는 대사입니다. 이 얼마나 무섭고 섬뜩한 대사입니까? 그런데 바로 이 대사에서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은혜를 받았다는 표현으로 부족할 정도였고 집에 돌아가 엉엉 울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자신을 향해 하는 질문 같았다고 합니다. 사실 그 때는 진짜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냥 웃기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여정을 떠나면서, 믿음의 모험을 떠나면서, 자꾸만 그 대사가 떠오르곤 합니다. 자꾸만 누군가 저에게 확인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너 죽고 싶니?” 라며 무섭게 들리기도 하고, “죽었니? 살았니?” 가끔은 약을 올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듯 집요하게 묻곤 합니다. “너 아직도 죽지 않고 그대로 있는 거야? 아니지? 이젠 죽은 거 맞지?”
솔직히 아직 안 죽었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살겠다고 수도 없이 고백했지만 여전히 죽지 않고 있으니 예수로 사는 것은 조금도 와 닿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죽으려고 할 때마다 아까운 생각이 들고, 죽으려고 할 때마다 오히려 나를 더 드러내고 싶은 교만이 차오를 때가 많습니다. 왠지 나를 죽이는 순간 내 삶은 없어지는 것 같고, 내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찾아오곤 합니다. 그래서 죽고 싶지 않기에 죽지 않은 것입니다. 죽어야 한다는 것을 들어 왔지만, 여전히 귀로만 들었을 뿐 삶으로 조금도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금 저를, 우리 모두를 ‘다시 말씀 앞에’ 세우십니다. 다시 말씀 앞에 세우신 후 'Born Again'을 주문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요한복음 12장 24절, 새번역>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는 법! 하지만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 법! 이라고 분명한 기준을 제시해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결정의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제 결정해야 합니다. 죽지 않고 그대로 있을 것인지! 죽어서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인지!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내리겠습니까? 결정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우리’라는 밀알을 떨어뜨리셨습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과 동일합니다. 농부는 씨를 뿌릴 때 그 씨가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조금도 예상하지 않습니다. 몇 갑절의 열매를 수확할 꿈을 꾸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결정의 순간이라고 하지만 ‘답.정.너’입니다. ‘결정’이 아니라 ‘결단’의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렇게 질문 드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결단하시겠습니까? 죽을 결단?! 그래서 오늘은 그 결단을 위한 말씀 3가지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들이 우리의 결단을 ‘기쁨’으로 승화시키길 소망해 봅니다.
첫째, ‘죽음’은 영광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21장 19절, 새번역>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예수님을 부인함으로 씻을 수 없는 불명예와 부끄러움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3년 동안 자신이 했던 모든 말들 앞에서 ‘거짓말쟁이’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다시 찾아 가셨습니다. 사실 이미 베드로의 배신을 예언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충분히 예상하셨던 일이었기에 다시 찾아 가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오늘 밤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마태복음 26장 34절, 새번역>
하지만 베드로는 조금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다시 자신을 찾아온 예수님께 죄송한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손을 내미십니다. 3번 부인하신 것을 치유하시려 듯 3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 15절A / 16절A / 17절A, 새번역>
겨우 겨우 이 질문에 대답을 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아주 심오한 말씀을 전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요한복음 21장 18절, 새번역>
예수님은 다시 베드로를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동역자로 초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어 있던 베드로의 모든 상황을 부활시키심으로 새로운 사역을 맡기십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답게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바라지 않는 곳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실로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상상하지도 못할 이방인 ‘고넬료’와의 만남까지도 하나님은 준비시켜 두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인생의 마지막은 알려진 대로 십자가에서 거꾸로 박혀서 죽음으로 사명을 다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때 베드로는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이 ‘영광’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많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훗날 동역자였던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21장 19절, 새번역>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이 구절은 너무도 중요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할 우리는 먹는 것, 마시는 것, 무엇을 하는 것을 넘어 죽는 것까지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죽음을 죽을 것인가에 따라 비참한 죽음이 아닌, 그저 호흡이 끊어지는 삶의 마감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죽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베드로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2020년 기준으로 전 세계의 카톨릭 신자는 13억 6천명입니다. 바로 그 카톨릭의 시작이 베드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실로 엄청난 열매를 맺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그 열매들은 죽음으로 또 다른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영상 한 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KTvvYGf9Mg
하나님을 위한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영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이 말씀을 재조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이것이 예수를 두고 기록한 것이며, 또 사람들도 그에게 그렇게 대하였다는 것을 회상하였다. <요한복음 12장 16절, 새번역>
죽음은 영광입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을 경험할 수 없고, 그 영광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누군가에게 의미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그 인생은 너무도 멋진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죽음이라면, 너무도 큰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둘째, 죽음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6절, 새번역>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까? 아마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동일하게 ‘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는 것이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 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감정과 욕심과 바람을 죽이면서 자녀를 존중하고자 무던히도 애를 쓰는 존재가 부모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자녀를 키우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신 후 바로 ‘가인’이라는 자녀를 허락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인을 키우면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깊게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부모를 위해서 죽을 수는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목숨을 내어줄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런 사랑을 우리 자녀들이 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이 말씀을 경험해 보는 귀한 만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복음 15장 13절, 새번역>
그게 이성이든, 친구이든 이렇게 자기 목숨을 내어 주면서까지 사랑할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특별히 점점 만남이라는 것이 단절되어가고, 두려움이 되어 가는 시대에 이런 만남의 축복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이겠습니까? 그리고 나아가 우리 자녀들의 친구들이 우리 자녀들을 위해 이런 사랑을 실천해 준다면 그 또한 부모의 입장에서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죽음을 뛰어 넘은 사랑! 이 진부하지만 위대한 이야기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끊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독생자 아들을 죽이심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 사랑의 위대함을 깨닫고, 그 사랑을 전하다가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그 사랑으로 스스로를 죽이고,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세상을 섬기는 이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이 사랑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성경은 오히려 ‘생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4절, 새번역>
마지막으로 3번째,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 그 날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 그래서 사도들 이외에는 모두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사도행전 8장 1절, 새번역>
초대 교회 일곱 집사 중 한 명인 스데반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너무도 절망적인 사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도들 이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복음이 더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훗날 예수님의 제자였던 야고보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 이후로 더 널리 복음이 퍼져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죽음이 낳은 가장 결정적인 열매는 바로 ‘바울’이었음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결코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씀 드립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인생이라면, 신앙은 죽음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실을 너무도 명확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모두가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일이 다 되어가자 이젠 모든 것을 포기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제 이 땅에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복음 1장 1절, 개역개정>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결코 끝이 아닙니다.
이 모든 계시를 증언하시는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요한계시록 22장 20절, 새번역>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에 모든 것이 끝날 것입니다. 분명히 끝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끝 날이 오기 전까지 우리 모두의 소망은 이 말씀이어야 합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기를 빕니다. 아멘.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새번역>
모든 사람에게 주 예수의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어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언제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그 은혜를, 그 복음을, 더 많은 사람에게, 가능하다면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을 때 이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끝이 아닌 시작, 바로 죽음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영광이고, 사랑이며, 끝이 아닌 시작입니다. 결코 비참함이 아니고, 슬픔이 아니며, 괴로움이 아니고, 단절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욜로’족이 아닌 ‘영원을 사모하는 이’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 할 수 있는 이유는 죽음을 통할 때 그냥 살아가는 삶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미 있는 죽음이 의미 없는 삶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깊게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제야, 죽기 시작할 때에야 자신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안타깝게도 그 속에 있는 생명을 발견하지 못한 채 그대로 있거나 썩어가게 됩니다.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그 신비의 삶을! 여러분 속에 있는 그 놀라운 생명의 능력을!
그리고 축복의 말씀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미 ‘많은 열매’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이 한 알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저 한 알의 밀알일 뿐 인대 나를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으시겠다고 이미 약속하신 것입니다. 30배! 60배! 100배! 어느 정도일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한 알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그 말씀 앞에 서서 하나님을 기대해 봅니다. 나 같은 사람을 통하여서도 ‘많은 열매’를 맺어 주신다고 하시니 ‘죽음’을 향한 결단 앞에 조금씩 더 다가서 보고자 합니다.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그 죽음을 향한 길에 혼자가 아닙니다. 외롭지 않은 길이 되도록 우리 동역자들이, 예배자들이 함께 손잡고 갈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처음에 나누었던 영화 ‘친구’의 대사로 돌아가 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으로 들어봅시다. “죽고 싶나?”
“네. 죽고 싶습니다. 주님! 여전히 살아 있기에 결단이 부족한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결단 찬양 -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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