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27.월요일
산하
1980년 5월 24일. 고립된 광주 앞에서 마지막 피바람이 호흡을 고르고 있던 즈음, 그리고 광주 인근 마을에서 미역 감던 어린이들이 계엄군의 총에 맞아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바로 그 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던" 김재규 이하 공모자들이 전격 사형됐다. 대법원 항소 기각 3일만이었다. 사형 판결 다음날 인혁당 관련자들의 목을 매달아 버린 박정희보다는 관대했다고 해야 할까.
물론 그들도 유신의 수족이고, 정권의 앞잡이들이었지만 그날 그들은 수천 명의 목숨을 건졌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그 시점의 박정희는 심신이 피폐하고 이성을 상실해가는 독재자였고, 차지철이 "캄보디아에서는 수백만이 죽어도 괜찮았는데...."를 뇌까릴 때 고개를 끄덕이는 예비 살인마였다. 그
리고 거사에 가담했던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서 한석규의 직함이 의전과장이었다) 이 "자식 둔 아버지로서 도무지 못할 짓"을 해 가며 여자를 갖다 바쳐야 했던 호색한이기도 했다. 기쁨조의 원조는 김정일이 아니라 박정희일 것이다. '배꼽 아래 인격 없던' 일본 제국군 최후의 사무라이는 거리낌없이 그 호연지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현역 대령으로서 육사 18기의 선두 주자로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가 다시 날려 보내는 권세를 누린 중앙정보부장의 비서관이었던 박흥주 대령 (현역 군인이라 단심제가 적용, 일찍 총살됐다)은 그 위세에 비해 놀랄 만큼 청빈했다고 한다. 중정 요원이 수배자 놓쳤다고 파출소장 이마에 권총 들이대기 일쑤고, 겁많은 사람들은 남산타워도 쳐다보지 못하던 시절의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라면 하느님과 동기동창은 몰라도 몇 회 후배는 되는 권력이었다. 하지만 박흥주 대령은 행당동의 산동네 열 두 평짜리 집에 살았다. 군법회의 재판정에서 그의 청빈이 화제가 되었을 정도였다.
박흥주 대령
항소심도 없는 총살 판결이 내려진 후, 그 형편이 너무 안타까왔는지 바늘로 찔러도 피도 안나올 것 같은 장세동이 전두환에게 "유족들에게 연금은 주자"고 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전두환은 "국가원수를 시해한 놈에게 무슨 연금!"이라며 퇴짜를 놨다고 한다. 전두환은 이래저래 '인간이 안될 새끼'였다.
박흥주 대령. 동기생 가운데 진급이 가장 빨랐으며 참모총장을 언제고 해먹을 것이라는 정평이 있던 육군 대령 박흥주는 총살 전 아내에게 이런 유언을 남긴다.
"애들에겐 이 아빠가 당연한 일을 했으며, 그때 조건도 그러했다는 점을 잘 이해시켜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긍지를 불어넣어 주시오. 앞으로 살아갈 식구들을 위해 할 말을 못하고 살았지만, 세상이 다 알게 될 겁니다.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을 도와 줄 겁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신군부 시절에는 그들의 유족에게 험악한 감시와 모멸의 눈길을, 그리고 그 후에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이른바 민주화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재야 운동권의 마당발이라 할 김정남씨는 이런 회고를 한다.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이 박흥주 대령의 딸들을 위해서 얼마간의 금액을 은행에 넣어 두었고, 1986년 그 딸이 대학에 가게 되었을 때쯤, 김정남씨는 그 돈을 들고 행당동의 고인의 집을 찾았다. 부인은 한사코 안받으려고 했지만 떠맡기듯이 돈을 두고 나와서는 웬지 보람있는 일을 한 기분에 으쓱했다고 한다. 하지만 며칠 뒤 위에 인용한 박흥주 대령의 유서를 보고는 다음과 같이 통석해 했다.
"특히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을 그대로 놔두지는 않을 거요”하는 대목이 목에 걸리는 것이었다. 그는 그래도 남아 있는 우리 사회와 사람들을 믿고 떠났는데, 남아 있는 우리 사회와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그의 남겨진 가족을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 그 말이 내 가슴을 칠 때, 나는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그 이후 10.26사태를 생각할 때, 그 사람들을 떠올릴 때 나는 차마 부끄러움 없이는 그들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신군부 시절 그들의 유족에게 가해진 것은 당연히 험악한 감시와 모멸의 눈길이었다. 연금은 커녕 재산까지 몰수당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와 대중들 또한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아니 철저하기까지 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이른바 민주화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랬을까. 물론 김대중 대통령의 말처럼 "민중으로부터 유신 체제를 스스로 끝장낼 기회를 빼앗았다."는 해석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토록 완벽하고도 차가운 무관심의 이유가 설명될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이렇게 의심해 본다. 혹여 '국가 원수 시해'라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는 우리 안에 내재된 무엇인가의 발동은 아니었을까. '왕의 목을 쳐 본 역사가 없는' 내력을 가진 백성으로서 '그래도 국가원수인데' 하는 봉건적이고 굴종적인 사고의 소산은 아니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단지 그들이 "정권의 하수인으로서 기능하다 정권의 위기를 맞아 그로부터 탈출하려 했던" 이유만으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을 쏘고", "그래도 나는 옳은 일을 했다"고 자식들에게 '당당하라'던 그들을 이렇게 완벽하게 잊을 수 있을까.
사진은 박흥주 대령의 두 딸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후 행당동 산동네의 집에 몰려든 카메라 앞에 딸들은 저렇게 울부짖었다.
출처:한토마의 은파님의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