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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복면가왕의 원조 일본의 복면가왕과 오사카의 백제 흔적들!
특수 제작한 가면을 쓴 스타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 실력을 뽐내는 MBC 음악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그램은 약어인 '복면가왕' 으로 유명한데...... 메인 MC 는 김성주로 2015년
설 특집 파일럿으로 처음 방영되었으며.... 그 원조는 “일본 오사카 복면가왕” 인가 합니다.
설 특집에서 복면가왕은 닐슨 기준 9.8% 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니 그후 2015년 3월 마이 리틀
텔레비전과 함께 정규편성이 확정되었는데, 정규 편성 첫 회의 시청률은 전작인 애니멀즈
의 두 배인 6.1% 를 기록했고...... 프로그램 컨셉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도 긍정적이었습니다.
8명의 참가자들이 가면을 쓰고 등장해 3라운드 서바이벌을 거쳐 우승자를 뽑는데 2인1조로 나뉘어
토너먼트 형식으로 방청객 및 연예인 판정단들의 투표를 통해 승부를 가려 승자는 대기실로
직행하고.... 패자는 가면을 벗어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데 참가자들은 제작진의 섭외로 이루어집니다.
김문성씨의 동아일보 칼럼 “盤세기” 에 보면 “1934년 복면가수 ‘미스코리아 ’깜짝등장”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으니... “가면을 쓰고 노래 실력을 뽐내는 가요 프로그램이 높은 인기를 자랑하고 있는데,
외모나 배경에 대한 편견을 벗고 목소리만으로 평가하고 싶은 대중 심리를 잘 활용한 프로그램이죠"
첫 복면가왕 이후 80여년이 지나고 MBC 방송의 “복면가왕” 이 등장했는데,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에 “편견” 을 갖는지라.... 가수의 노래 실력 보다는 “미모” 를 먼저 보게 되는 것이니 복면가왕은
좋은 발상 이지요? 그럼 대중의 호기심을 단시간에 잡아끄는 티저 효과는 언제 부터 시작 되었을까요?
“1931년 7월. 한 장의 음반 광고 때문에 일본 사회가 발칵 뒤집힙니다...... ‘금색가면
(金色假面)’ 이라는 여가수가 ‘아리랑’ 으로 데뷔한다는 일본 빅타 레코드사의
광고였으니.... 광고 속 여성은 쾌걸 조로를 연상시키는 금빛 마스크 를 쓰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선인이다’ 혹은 ‘얼굴은 박색인데, 목소리가 뛰어나 마스크를
씌운 거다’ 라는 등 온갖 소문이 난무합니다. 순식간에 여가수 ‘금색가면’
은 일본 대중문화계에 실시간 궁금증 1위로 올라서죠. 마스크를 쓴 여성은
22세의 신인 가수로 소문 처럼 조선인은 아니었습니다. 더욱 박색도 아니었습니다.”
“출중한 외모에 명문 동양음대를 나온 신주쿠 물랭루주좌의 명가수 고바야시
지요코(小林千代子) 였으니.... 일본 최초 복면가수 고바야시의 성공은
많은 아류를 만들어 내며.... 일본 대중 문화를 이끌어 갑니다. 경쟁사의
탁월한 마케팅에 자존심을 구긴 콜럼비아 레코드는 벤치마킹을 시도 합니다.”
“때는 1934년. 각 신문에 실린 콜럼비아의 음반광고 때문에 온 나라가 술렁입니다. ‘격찬, 환호,
미스코리아’ 라는 제목을 달고 신곡 ‘마의태자’ 를 홍보하는 광고 속의 여가수의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니...... 우리나라 최초 얼굴 없는 복면 가수는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3년전 일본에서 일어난 대중 반응이 조선에서도 나타납니다. 하지만 일본만큼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고
미스코리아의 정체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1980년 이후 고(古) 음반 연구가 본격화 되고 유성기 음반과
가사지를 정리하고 또 태평레코드의 신민요 음반 ‘궁초댕기’ 가 발견되면서 충격적인 사실들이 밝혀집니다”
“콜럼비아사의 ‘신범벅타령’ 음반 가사지에 ‘김추월(金秋月)’ 이라는 기생의 사진 이 실려
있는데.... 기생의 사진은 ‘마의태자’ 광고에 사용된 사진과 동일했습니다. 미스코리아가
평양 명기 김추월 이라! 비슷한 시기 함경도 민요로 알려진 ‘궁초댕기’ 음반이 발견됩니다.”
“ 모란봉이라는 실체가 불분명한 가수가 부른 명곡 입니다. 그런데 가수 모란봉의 이름 밑에 ‘구명(舊名)
미스코리아’ 라는 글씨가 씌어 있습니다. 비로소 가수 모란봉의 실체가 확인됩니다. 콜럼비아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한 미스코리아 ‘김추월’ 은 ‘모란봉’ 이라는 새 예명으로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 복면가왕이 처음 등장한 오사카는 우리나라 백제의 흔적이 많은 도시이니 1098년에 그려진 일본
고대 ‘팔랑화도 (八浪華圖) ’ 는 오사카 난바(難波) 를 ‘구다라스 (百濟洲 백제주)’ 로 적었는데.... ‘구다라스’,
‘난바지(難波寺)’, ‘구다라리 (久太郞里 ‘백제리’ 한자 표기)’ 등은 오사카 시내 지명으로 명맥을 이어 옵니다.
예전에 나라 호류지(법륭사) 에 가서 百濟觀音(백제관음) 이라고 적힌 불상을 보고 일부러 일본
고교생에게 일본어로 어찌 발음 하느냐고 물으니...... 학생이 "햐쿠사이간몬“ 이라고 하자
옆에 있던 중년 부인이..... 그건 ”구다라간몬“ 이라고 읽는다고 바로 정정해 주던게 떠오릅니다.
우리나라가 예전 부터 중국을 ‘중국’ 이라는 말 대신에 “대국” 이라고 불렀듯이...
일본에서 백제의 영향력이 커지다 보니 자연히 百濟(백제) 를 소리나는 대로
“햐쿠사이” 라고 하지 않고 ‘대국’ 이라는 뜻으로 “구다라” 라고 불렀는가 합니다.
‘구다라고우리(百濟郡)’ 지역은 오사카 히가시나리구(東成區) 이며 1937년에 편찬된
‘일본고어대사전’ 은 ‘구다라고우리(くだら こうり)’ 의 ‘고우리’ 가 “한국어
고을 에서 파생된 말이다” 라고 밝히고 있는데, 오사카 중심지는 행정구역상
‘기타구다라손 (北百濟村)’ 과 ‘미나미구다라손(南百濟村)’ 으로 분류 되기도 했습니다.
오사카 남쪽 나라현 고료초 廣陵町(광릉정) 구다라무라(百濟村 백제촌) 에는 3층탑이 아름다운 구다라지
(百濟寺 백제사) 라는 절이 있으니..... 서기 572년 아스카에서 왜국왕(천황 )에 등극한 비타쓰왕이
“백제대정궁” 을 세운 오이(大井 대정) 라 보는데..... 현재 ‘구다라 우편국(百濟郵便局)’ 도 영업중 입니다.
또 백제공민관(百濟公民館) 에 백제사 공원과 연못이 있는데 소가가와 (옛 지명은 구다라가와)
건너편에 있었던 백제대정궁 터와 마주 보는데....... 백제 라는 이름은 히가시 오우미시
햐쿠사이지초(東近江市百濟寺町) 에도 전해지니, 비와 호수 동남쪽 히가시 오우미시
스즈카산 (鈴鹿山) 에 유서 깊은 사찰인 “샤카산 햐쿠사이지 (百濟寺 백제사)” 가 있습니다.
여기 고료초 서쪽인 오사카 시내에도 구다라(百濟 백제) 라는 지명을 더 찾아볼수 있으니
오사카 시내 버스 정류장 이름에 구다라(百濟 백제) 라고 표시된 곳은 오사카 북부로
현재 이쿠노구, 덴노지구, 히가시나리구 및 주오구 에 해당하는 지역은 옛날 키타구다라
(北百濟) 라고 불렸다는데....... 옛 백제사는 현재 이름이 바뀌어 샤리소숀지 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오사카 남부 난바 지역 東住吉區 湯里1-15-40 에 미나미구다라 소학교 (大阪市立
南百濟小學校) 가 있는 곳은 옛날 미나미구다라 (南百濟) 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니시무라 치에코 (西村千惠子) 교장 은 “1874년에 세워진 우리 학교
이름에 ‘구다라(백제)' 가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하고도 기쁜 일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고대 백제에서 일본의 남백제(오사카) 로 많은 백제인이 넘어왔으니 이들은 "철" 을 전래하고,
청동을 제조하고 가공하는 기술을 선보였으며.... 도래인 들은 그외에도 도기 그릇과
베틀, 토목 기술, 한자, 불교, 유교 등도 널리 알렸는데, 660년에 백제가 망했을
때는....... 의자왕의 아들인 선광(善光) 일족이 건너와서 백제인들의 거주지역이 확대됐습니다.
백제왕족인 선광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사로 모시고 있는 사당도 남백제 소학교 에서
멀지않은 히라카타(枚方) 에 큰 터를 잡고 있으니...... 사당은 ‘백제왕 신사’
(百濟王神社) 이며 그 옆의 터는 고대 ‘백제사’ 라는 사찰 터전이고 2005년 부터
‘백제사 유적 발굴 조사’ 가 계속 이어지는데 인근에는 百濟大橋(백제대교) 가 있습니다.
‘신찬성씨록’ 에서 백제왕족 이라 명기한 비타쓰왕(572~585 재위) 은 백제 성왕의 아들
로 긴메이왕(천황) 이 서거하자 왕위를 계승했다는 설이 있으니, 즉위후 백제인 후예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 를 등용하는데...... 교토부립대학 가도와키 데이지 교수는
우마코가 백제 개로왕의 신하인 ‘백제조신 목만치(木滿致) 의 5대손’ 이라고 밝혔습니다.
비타쓰왕은 576년 3월 18세 이복동생 가시키야 공주를 왕후로 맞아 2남 5녀를 두었으니
그녀는 서기 592년에 일본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하는 제33대 일본 왕인
스이코여왕 (推古· 592~628 재위) 으로...... 36년간 아버지가 포교한 백제 불교
문화를 눈부시게 꽃피웠으니 일본 역사에서 ‘아스카 문화 시대’ (592~645) 라고 부릅니다.
588년 백제 왕실 에서 건너온 건축가 태량미태(太良未太), 문가고자(文賈古子) 등에
의해 일본 최초의 칠당 가람이 아스카에 착공 됐는데...... 14세기 초에
씌어진 일본 불교 왕조사인 ‘부상략기(扶桑略記)’ 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推古天皇元年正月, 蘇我大臣馬子宿. 依合戰願, 於飛鳥地建法興寺,
立刹柱日 島大臣竝百餘人 皆着百濟服, 觀者悉悅, 以佛舍利, 籠置刹柱礎中.”
“스이코 여왕이 등극한 593년 1월 소가노우마코 대신과 만조 백관이 ‘백제옷’ 을 입고
사람들이 기뻐하며 백제에서 보내온 부처님 사리함 을 찰주의 기초속에 안치했다"
만조백관이 ‘백제복’ 을 입었다’스이코 아스카 왕실이 백제계 왕가 임을 말하는데...
하지만 ‘일본서기’ 기록에는 백제복을 입었다는 부상략기의 대목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145년에 삼국사기가 있듯이......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 는
백제의 학자 왕인이 오진왕(應神 응신) 의 초청을 받고 왜 왕실로 건너와
제4왕자 오사사기 왕자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오진왕이 서거한뒤
3년째 되던 해에는 왕인이 오사사기 왕자를 닌토쿠왕 지위에 올려 놓았다고 합니다.
이 기록은 805년에 씌어진 고대 문헌 에 “왕인이 어대에 와카(和歌) ‘나니와쓰노우타
(難波津歌)’ 를 지어 닌토쿠 천황을 왕위에 천거 하였다.” ( 紀貫之 ‘古今集’ )
오사카의 고대 나루터 이름인 ‘나니와쓰’ 는 왕인이 지은 와카에서 유래했으니 지명
은 현 오사카 남부 ‘나니와(難波) ’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니 바로 “난바(남바)” 입니다.
‘風土記’ (8~10C 편찬) 에는 “닌토쿠 천황이 모국 백제로 부터 백제신(百濟神) 신주를 왕실로 모셔왔다”
는데, 이는 오진왕(應神 응신) 이 백제계가 아닌지 하는 설이 있으며..... 고 최인호 씨는 선대인
숭신왕을 가야계 라고 봅니다. 와세다대학교 사학과 미즈노 유 교수는 “오진 천황과 그의 아들 닌토쿠
천황은 구다라국(백제국) 왕가 로 부터 건너와 일본 정복 왕조 를 이루었다” (1978) 고 말한 바 있습니다.
도쿄대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다 교수도 앞서 “백제 사신으로 부터 칠지도 (七支刀)
를 전해 받은 왜왕 오진 천황은 구다라(백제) 왕족이며, 천황씨(天皇氏) 자체가
조선으로 부터 건너온 일본 이주자 였다” (1960) 고 밝혔으며, 일본 고대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의 저서인 ‘구다라에서 건너온 오진 천황’ (2001) 이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오사카부 하비키노시 에 있는 “오진릉(應神陵) 에 매장된 시신은
5세기 후반에 건너온 구다라의 곤지왕자(昆支王子) 이며, 5세기 말에 일본
에서 구다라계 왕조(百濟系王朝) 를 수립했다” 고 주장했는데..... 물론 일본
주류 사학계 에서는 “일본 천황이 한국계” 라는 사실은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1145년 고려 김부식의 ‘삼국사기’ 에 따르면 곤지왕자는 백제 개로왕의 차남으로,
720년 일본서기는 개로왕의 동생이라고 기록하는데.... 479년 백제 삼근왕이
암살되자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란 곤지의 둘째 아들이 귀국하니 동성왕이고,
501년에 동성왕이 암살되자 첫째 아들이 귀국해서 왕위에 오르니 무령왕 입니다.
"大和(대화)" 라면.... "야마토( やまと)" 로 읽는데, 원래는 4세기에 오사카 인근 나라(奈良) 에 세워졌던
고대 일본국의 이름 입니다. 야마토는 고대에 이두식으로는 和(화), 大和(대화), 倭(왜),
大倭(대왜) 등으로 썼는데 야요이시대 이후 고분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합하여 일컫는 일본 국호 입니다.
여왕 히미코가 다스리는 야마타이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규슈 30여개의 연합국인
"왜국" 시대를 거쳐서 4세기초 긴키에 야마토를 중심으로 통일 국가가 생깁니다.
왜국은 이후 점차 지배권을 넓혀 5세기에는 일본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세습제를
확립해 국호를 “야마토” 로 하고 일명 대군(大君) 으로 불리는 “오키미” 가 군림합니다.
홍윤기씨는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라는 책에서 일본 북규슈 가라쓰의 가카라시마
加唐島(가당도) 에서 탄생한 백제 무령왕 의 성씨가 야마토 라고
말하며...... 이후 일본 국왕(천황) 은 그 아들인 순타태자의 후손들 이라고 주장합니다.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 위험이 임박한 서기 461년 백제 개로왕은 동생 곤지에게 자신의 씨를
잉태한 후궁을 주어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하니...... 일본 규슈 가라쓰 요부코항에
도착할 무렵 산기를 느꼈으니 그 앞 바다 가카라시마 섬의 동굴에서 무령왕을 출산했습니다.
오사카 동쪽 아스카 주민들은 서기 461년에 일본에 건너간 백제 개로왕의 동생이자 동성,
무령왕의 부친인 곤지왕의 제사를 1550 여년간 아스카베 신사에서 지내왔으며.....
2011년 아스카 주민들은 자신들이 모시고 있는 곤지왕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뿌리를
찾으려는 목적으로 방한해 남한산성 숭렬전의 온조왕 위패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001년 아키히토 일왕(천황)은 "속일본기에 무령왕의 장남 순타태자의 8대손인 화을계의
딸 화신립이 일본 간무왕(천황)의 생모라고 실려있는 사실에서 한국과 인연을 느낀다" 라고
고백했는데... 일왕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시에 “과거사와 관련해 통석의
염을 금할 수가 없다”, “한반도에 큰 고난을 안겨준 시기가 있어 슬프다” 라면서 사과를 했습니다.
교토 북부에 히라노진자 平野神社(평야신사)를 찾은적이 있는데 간무천황의 칙명으로 800년 헤이안경(교토)
에 세워져 4명의 백제계 조상신(성왕, 구도왕, 비유왕, 근초고왕)을 모시니.... 5번째인 다카노노 니아카사
高野新笠(고야신립) 는 백제 무령왕 장남 순타태자의 8대손 화을계의 딸 화신립 和新笠 이니 고대 왕실에서
히라노신사에 平野祭 제사를 드려온건 10세기초 제정된 왕실 법도인 ‘연희식(延喜式)’ 에 실려있다고 합니다.
1145년 고려시대에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곤지는 개로왕의 아들이고 무령왕 또한 동성왕의 둘째 아들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 보다 425년이 빠른 서기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 에는 곤지는
개로왕의 동생이며, 무령왕은 동성왕의 이복형으로 나오는데 공주에서 무령왕릉 발굴로 지석이 발견됩니다.
출토된 지석에 무령왕은 462년에 태어나서 40세가 되던 해인 501년에 왕위에 올랐으며
523년 5월에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니 "일본서기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
합니다! 무령왕은 고구려를 공격하고 일본과 매우 친밀한 관계 를 형성하였으며....
중국 남조 양나라의 무제로 부터 “사지절도독 백제군사 영동대장군” 에 책봉 되었습니다.
지석에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으니....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이라!!!
사마 斯麻 는 백제 25대 무령왕의 본명이고, 영동대장군은 무령왕이 521년에 중국 양나라의 임금
무제로 부터 책봉받은 관직이라 무령왕의 무덤이 확실한 것이니 일본서기 기록이 정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