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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 대강좌 1강 - 1
부처님의 경전을 공부한다는 목표 하에
많은 스님들이 모여서 이런 자리를 마련하시느라고
준비하신 분들. 수고 많이 하셨고 고맙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제자들에게 늘 이르기를
“항상 모여서 경전을 독송하라. 경전을 독송하면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우리가 출가 사문으로서 경전공부 하는 것이 특별한 것도 아니고,
자랑할 만한 꺼리도 아닙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참으로 본분이지요.
그런데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관계로 그 동안 별별 일이 있었고,
물론 현재도 앞으로도 그와 같이 우리가 본분에 충실하지 못하면
언제나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강원에서, 또 각자 인연 닿는 데서
그리고 또 개인적으로 경전공부를 많이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함께 모여서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서로 琢磨(탁마)하면서, 서로 의논도 하고 농담도 하면서,
그리고 반가운 얼굴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안부도 나누는
그런 기회를 우리가 이렇게 마련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 있어서는 참으로 고맙고 신기한 일이기도 한 경우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흔히 하는 말로 上求菩提(상구보리) 下化衆生(하화중생)이라고 하듯이,
그 인격이라고 할까? 개인의 실력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격상시켜 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 정도 교육을
적당히 받고는 그만 안주 해버립니다. 그것이 문제지요.
사실 끊임없이 격상시켜야 하는 것이
죽는 순간 까지 우리에게 부여된 임무이고,
살아있는 존재라면 특히 보통 사람보다 한 걸음 앞서간다는
스님들의 입장에서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또 한 가지 공부의 의미는 포교일선에서
모두 열심히 포교 잘 하시고 계시지만,
저도 역시 법회를 하거나 강의를 하다보면,
‘내 공부가 좀 부족하다.’ 솔직하게 ‘실력이 딸린다.’
← 이런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일선에서 주지생활을 한다든지 포교활동에 임하고 있는 분들은
늘 그런 갈증에 시달린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면서 특별히 시간을 내서 공부한다는 것은 손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길이라는 것은 열심히 정진하고,
열심히 전법활동 하는 것. 단 이 두 가지입니다.
이렇게 단순한 두 가지인데 전법활동에 있어서 보다
더 차원 높은 순수불교. 정법불교로서. 좀 더 발전되고
심도 있는 불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자는 의미가
오늘 날 이렇게 모여서 공부하는 하나의 목적이라면 목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고많은 경전 중에서 왜? 법화경인가?
법화경은 경전 안에서도 표현 했듯이 경중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불교에는 기초라든지 중간 과정이라든지
마지막과정이라든지 ← 이런 것이 없습니다.
저 개인의 소견이지만요. 그렇다면 그 중에서 제일 우선 하는 것.
제일 훌륭한 가르침. 최상의 가르침을 제일먼저 접해서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나?
열반경에서 부처님이 유언으로 말씀 하셨습니다만,
了義經(요의경)에 의지하고 不了義經에는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완전한 가르침에 의지하지 불완전한 가르침에는 결코 의지하지 말라는
유언을 열반을 하시면서 하실 정도로 많고 많은 경전 중에서
우리가 가장 훌륭하다는 경전과 어록만을 선배로서
공부해야 한다는 뜻에서 볼 때, 물론 중요한 어록도 있겠습니다만,
일단은 경전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 그 중에서는 근래에 와서는 법화경이 상당히 많이 관심이 있고,
또 여러분들 강원을 나왔다고 하시면, 옛날에 저희 어릴 때는
수의과가 있어서 당연히 법화경. 전등록. 염송. 이 세 가지를
수의과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수의과가 없어진지 오래됐으니까
이제 수십 년 만에 수의과에 진학을 했다는 의미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법화경선택이
아주 잘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 제가 상당히 염려하는 것은
법화경은 공부하면 할수록 어렵고, 미스테리라고 할까?
풀지 못할 문제들이 너무 많은 것이 또한 법화경입니다.
格外道理(격외도리) 禪道理(선도리)를 거침없이 쏟아놓는 어록은
차라리 쉽습니다. 그런데 경전은, 그 중에서도
특히 법화경은 정말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정말 강의 중에 이곳저곳에서 지적되겠습니다만,
어물쩍 넘어가는 곳도 많을 것입니다.
왜냐? 모르는 것이 더 많기 때문에요.
그런 정도로 법화경은 참 난해한 경전이고, 중요한 경전입니다.
법화경은 宗旨(종지). 그것을 대지라고 하지요?
會三歸一(회삼귀일)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세 가지의 가르침을 한가지의 가르침으로 귀결시킨다고 하는 것이
법화경의 큰 흐름인데, 이 시대의 많고 많은 주의주장들.
불교 안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쳐놓고
우리 좋을 대로, 이 시대의 사람들이 필요로 한 대로,
우리가 좋을 대로 불교를 만들어 가지고,
정말 불교에 있지도 않은 불교를 만들어 가지고
우리가 불교라고 하고 사용하고 있는 불교가 사실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법화경이 결집되게 된 동기도 부파불교가 난무해서
수많은 부파가 각자 자기의 주장을 펴고 있을 때,
그것은 결코 부처님의 진의가 아니다. 부처님의 진의로 돌아가자.
본래의 부처님이 의도한 바대로 돌아가야 된다고 하고
일어난 운동이 대승불교 운동이고,
법화경은 바로 그 대승불교 운동의 선언서와 같은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그런 것을 알게 됩니다.
부파불교의 각양각색의 주의 주장을 통합시키는 의미가 있고,
또 이 시대의 우리도 비불교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은데,
법화경공부를 통해서 정말 순수불교. 올 곧은 불교로
회귀하는 운동의 하나로서 부처님의 참 뜻에 맞는 공부를 함으로서
불교적인 것과 비불교적인 것에 대한 분별 의욕도 생기고,
참다운 불교로, 바람직한 불교로 돌아갈 수 있는 길도 바로
이... 개인의 주장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지요.
경전이 그것을 바로잡아 줬을 때 권위도 있고 우리도 따르고 싶고,
믿을 만 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하나의 통일의 원리로서
법화경이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경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원효스님도 법화경을 공부해서 법화경 宗要(종요)를 쓰면서
비로소 신라통일의 기반을 굳건히 다지게 됐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해 있기도 합니다.
법화경은 정말 그 내용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아주 훌륭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지요.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믿고 실천하는 것에 의해서
우리 각자의 인생사. 또는 세상사에 대해서
수많은 문제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심경을 유지하게 된다면
법화경을 공부하는 보람도 또한 크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법화경은 인간 존중의 가르침입니다.
인간 완성의 가르침입니다. 또 나아가서 인류평화의 가르침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주의 가르침이라고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 존엄이라고 하는 것. 이 시대에 물질이 풍요해지면서
인간 존엄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합니다.
옛날은 정보가 부족하고 지식이 부족하고 어리석어서 그렇다손 치더라도
지금은 너무 그런 것이 홍수처럼 넘쳐나기 때문에 그쪽으로 흘러 버리고,
온갖 이목을 전부 그쪽으로 빼앗기고, 정말 인간 존엄이라고 하는 이,
정말 숭고한 정신을 등한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오늘의 사람들이 이해하게 되고 공감 되어서,
그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첫째 피 와 살이 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우리들에게도 또 여러분들은 모두 포교일선에 있는 분들이니까
오늘 낮에 공부 했다면 저녁에 돌아가서 바로 활용 될 수 있었으면 하는
욕심 내지 기대를 갖습니다.
사실은 스님들이 이렇게 모인데 대한 저의 개인의 생각.
또 서울 경전연구회에서의 초청을 쉽게 받아드린
저의 개인 욕심은 바로 그렇습니다.
스님들은 그야말로 일당백이니까 일반 불자들 100명 1000명
가르치는 것보다도, 여러분들 한 사람의 공부가 두고두고
훨씬 큰 효과를 발휘하게 될 것이라는
저 나름의 큰 기대감을 갖고 있어서 사실은
그런 욕심 아닌 욕심도 다소 숨길 수 없는 입장입니다.
敎相判釋(교상판석). 경전해석법을 보면,
법화경이 藏經(장경)에 있어서 어느 위치에 해당 되는가?
←이것은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서 각각 좀 다르지만,
법화경해석은 자고로 천태지자스님, 小釋迦(소석가).
작은 석가라는 천태지자스님이 제일 깊이 연구하고,
잘 이해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화경을 근거로 한 천태종의 교판은 五時敎(오시교)라고 합니다.
화엄경을 21일간 설한 것으로 되어 있고, (화엄시 21).
아함경을 12년간, (녹원시 12).
방등시 8년간, 소위 “방등경” “방등시”하면 구체적으로 잘 안 떠오르지요?
유마경, 사익경, 금광명경, 승만경 등의 대승경전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승경전은 대승경전인데 독특한 색깔을 띠지 않고,
법화나 화엄이나 반야나 이런 부에 속할 수 없는 대승경전.
이것을 방등부에 삽입을 해서, 방등경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상당히 수준 높은 경전들입니다.
그 다음에 반야부 600권이 21년간 설한 것이고,
법화경과 열반을 8년 간 설한 것입니다.
그런데 열반경을 결집한 분이 하룻밤 하루 낮의 반경을 그린 것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래서 이것을 제가 전통적인 우리 강원에서는,
阿含十二 方等八(아함12 방등8)
二十一載談般若(21재담반야)
終談法華又八年(종담법화우8년)
最初華嚴三七日(최초화엄삼칠일)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화경에 근거를 해서
窮子驚愕華嚴時(궁자경악화엄시)
除糞定價阿含時(제분정가아함시)
出入自在方等時(출입자재방등시)
令知寶物般若時(영지보물반야시)
傳付家業法華時(전부가업법화시)
←이렇게 해서 전체 8만대장경을,
말하자면 못난 자식이 아버지를 떠나서 거지 노릇을 50여 년간 하다가
다시 아버지를 만나서 바로 거부장자의 아들이라고 할 수가 없어서,
아주 막일을 하는 일꾼노릇에서부터 차츰차츰 그 집에 출입을 하게 되고
청소를 하고 재산 상황을 알게 되고, 나중에는 사람들이
다 모인 앞에서 “이 사람은 우리 집 일꾼이 아니라 사실은
나의 아들이었소.”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에 비추어서
부처님의 일생일대의 가르침을 그렇게 배대를 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窮子驚愕華嚴時”라. 못난 아들이 아버지 집에 와서
아버지를 보고 그만 기절을 해버리지요.
아버지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앞에서 기절하게 됩니다.
그것이 화엄경을 설한 때라고 되어있습니다.
화엄경도 사실은 교리발달사적 관점에서 보면,
5~ 6백년 내지 700년 까지 대승경전이 결집되지만
누가 결집을 하든, 어떤 경전을 결집하든,
부처님의 49년의 교화의 생애에 어느 기한에 초점을 맞추어서
결집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화엄경은
사실은 “最初華嚴三七日” 하면 무슨 사리불이나 목건련 같은 분들이
출가하기도 전이지만 거기 목건련과 사리불이 나오거든요.
그러나 그것은 다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
지금 누가 경전을 결집 한다 손치더라도,
바로 부처님의 일생에다 어느 기간에 초점을 맞추어서
바로 깨달았을 때 하든지, 열반하실 때를 하든지, 중간에다 맞추든지,
거기다 맞추어서 상황을 그려가는 것입니다.
경전은 전부 그렇게 구성이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모든 경전이 다 그렇게 된 것으로 이해하면 하등의 문제가 없고,
옛날 이런 열린 생각을 하지 못했을 때, 일본 사람들이
대승비구서를 이야기했는데 전 세계 불교도가 야단법석이었지요.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설법이 아니다.”
그것이 불과 4 ~ 50년 전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 때만 해도
그것이 상당히 큰 문제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경전 저술가. 경전작가. 경전편집자.
경전 결집자들이 다 이런 식으로 마음대로 표현을 합니다.
그래도 이제는 다 이해하고 설사 그 동안의 기존의 상식 가지고
용납이 안 되든, 되든 한번 여기서 우리가 법화경을 공부하면서
이런 문제도 여기서 깨질 것은 깨져야 되고, 옹호 될 것은 옹호 되어져야 돼서,
바로잡는 방향으로 공부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교리발달사를 제가 대강 간추려 놨는데요.
원시불교. 부파불교. 부파불교라고 하는 것이
상좌부와 대중부를 중심으로 나눠지다가 20개 부파로 나눠지고,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초기대승불교. 중기대승불교.
후기대승불교. ←이렇게 발달을 합니다.
그러면서 비밀불교. 밀교지요. 그 다음에 선불교라고 해서
선정불교. 우리나라에 와서는 당나라에도, 일본에도 있습니다만
호국불교. 기도불교. 절불교. 별별 불교가
지금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창조되어진 불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지만 이제 법화경에 초점을 맞춘다면
부파불교의 지나친 그런 전문가들 중심의 불교.
또 이론불교. 출가중심의 불교. 이것이 큰 폐단이었습니다.
부처님이 출가중심의 사람들만 수행하고 불교 공부하라고 했겠습니까?
부처님 마음이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새롭게 부처님의 본래의 뜻으로 돌아가자고 해서
일어난 운동이 대승불교운동이고, 대승불교운동의 하나로서,
그 대승불교운동의 선언서로서 법화경이 결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부파불교(部派佛敎)--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나고
100여 년이 지나자 교단 내에서는 교리와 계율의 해석 문제를 놓고
논쟁이 일었고,
이에 따라 과거의 계율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보수적인 성향과
시대 변화에 따라 융통성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진보적 성향의
두 입장이 공존하게 되었다.
전자를 上座部, 숫자적으로 우세하였던 후자를 人衆部라 하며
이들의 대립을 근본분열이라 한다.
이후 다시 200~300년에 걸쳐 이들 두 파로부터
다시 분파가 생겨나 기원전 200년경에는 총 2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부파불교는 이시기의 불교를 일컫는 것으로,
각 교단은 저마다 석가의 교리와 계율을 연구·정리하여
방대한 論書를 작성하면서 논쟁을 그치지 않았다.
‘論’이라는 말의 원어가 ’아비다르마(abhidharma)이고
이를 漢譯한 것이 아비달마(阿毘達磨)이므로,
부파불교를 아비달마불교라고도 한다.
당시 교단의 관심은 온통 석가의 가르침에 충실하기 위한
교리의 해석이었으며, 자연히 출가자와 僧院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불교의 성격을 띠어갔다.
따라서 출가를 전제로 하여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수행하고,
또 타인의 구제보다는 자기 수행의 완성을 우선목표로 삼았다.
이로 인해 교단으로부터 멀어진 대중들은 교단에 반발하며
佛塔을 중심으로 석가에게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로써 대승불교가 탄생하였다.
이들은 개인보다는 전체의 완성을 우선한다는 입장에서
스스로를 人乘이라 칭하고,
이에 반해 기존의 부파불교를 小乘이라 낮추어 불렀다.
妙法蓮華經(묘법연화경) 二十八品과 二門 三分으로 되어있지요.
序品(서품)은 그야말로 序分입니다.
28품 전체를 序分(서분) · 正宗分(정종분) ·
流通分(유통분)으로 나누었을 때 서론 본론 결론이 되고,
법화경은 연구가에 의해서 28품을
迹門(적문)과 本門(본문)으로 나누는 것이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적문에서도 서분. 정종분. 유통분이 있고,
본문에서도 서분. 정종분. 유통분이 있습니다.
← 이것이 28품을 3분으로 나누고,
2문을 3분으로 나눈 전반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늘 염두에 두면 법화경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후대의 연구가들에 의해서 파악한 것이지,
꼭 이것을 의지할 것은 아니고, 또 이것이 꼭 맞다는 뜻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법화경을 해설을 하는데
제 해석과 설명이 꼭 맞다고 생각해도 큰 오산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그 동안 공부하고 이해한대로만 이야기할 뿐이지,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안목과 견해대로 모두 주의주장이 있을 것이고,
또 그 나름대로 많은 견해와 안목을 거기에 삽입시켜서 이해한다면
아주 좋은 공부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거 사람들의 해석이라든지,
지금 사람의 해석이라든지,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참고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고,
자기 자신의 주의주장이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法數(법수)로 정리한 법화경.
이것은 대개 기신론을 우리가 법수로 정리하면
一心. 二門. 三大. 四信. 五行. 淨土. 숫자 외우기는 쉬우니까요.
가나다라 외우듯이 1 2 3 4도 다 외우고 있는 것이니까요.
단어도 숫자에 맞춰서 배대 시켜놓고 외우면 좀 쉽잖아요.
법화경이해도, 이것도 하나의 이해의 지름길로서 이렇게 정리를 한 것입니다.
1. 一乘(1승). 2. 二門은 적문본문이고,
3. 三周說法(삼주설법)이 있습니다.
4. 四行
5. 五種法師(5종법사) ←중요한 부분이지요.
6. 六根功德(6근공덕) ←六 功
7. 七種譬喩(7종비유) ←七 譬
8. 八恒河沙菩薩(8항하사보살) ←八 沙. 八 菩.
9. 九種譬喩(9종비유) ←九 喩
10. 十如是(10여시) ←
이렇게 하면 법화경이 거의 그물 같아서 그물의 벼리를 들면,
중심을 들면 그물 전체가 딸려오듯이 딸려올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물론 안 딸려오는 부분도 있어요. 있지만
그래도 상당히 중요한 것은 법수로 정리한 10 가지에서
거의 딸려올 수 있도록 정리가 됐습니다.
공부하는데 상당히 필요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법화경 제목은 아시는 대로 구체적으로 하면
妙法蓮華經이지요. 이것을 다른 분은 번역을 보면
正法화경. 妙자를 正자로 번역한 분도 있습니다.
[샷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 ←이렇게 범어로는 되어있습니다.
[샷트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게 표현하면 正자인데요.
구마라습이 아름다운 妙자로 번역을 했는데 상당히 의미가 있고, 참 좋은 번역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그 후로는 구마라습 번역을 다 따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연꽃처럼 아름답고 미묘한 이치의 가르침.
←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연꽃처럼 아름답고 미묘한 이치의 가르침.
그러니까 “妙 法” 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답고 미묘한 이치입니다.
그 이치를 알고 보면 우리가 “진리” “진리”하니까
조금 거리감이 있는 것 같아서 저는 “이치”라는 말을 잘 씁니다.
진리라는 것이 “참 이치” 아닙니까?
그러니까 바로 “이치”. 두 번 해석할 것 없이요.
아름답고 미묘한 이치. 경은 가르침이니까요.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미묘하냐? 연꽃처럼 아름답고 미묘하다.
연꽃처럼 아름답고 미묘한 이치의 가르침. ←이렇게 저는 경전제목을 번역 했습니다.
우리가 이치를 알고 보면 그렇게 미묘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치를 알고 보면 참 신기한 겁니다. 꽃이 왜 피는가? 꽃이 왜 지는가?
우리가 왜 이렇게 모였는가? 시간되면 왜 흩어지는가?
속속들이 그 이치를 꿰뚫어 보면 참 신기하고 미묘하고,
탐독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이치가 그 속에 잠재되어있습니다.
그것을 법화경이라는 한 권으로서 가르치고,
또 이 경전제목은 [妙 法 蓮 華] ←이 넉자만 가지고
과거의 어떤 주석가는 3권의 책을 저술해서 藏經閣(장경각) 안에 있습니다.
[妙 法 蓮 華] 라는 글자 넉자가
이 법화경보다도 설명이 훨씬 많은 겁니다. 몇 배 많은 겁니다.
그런 정도로 [妙 法 蓮 華] 라는 이 말 속에는 무궁무진한 뜻이 담겨있습니다.
연꽃처럼 아름답고 미묘한 가르침. “연꽃처럼” 했는데 연꽃이 뭐냐?
수십 년 묵은 프로들 앉혀놓고 “연꽃이 뭐냐?”고
새삼스럽게 연꽃이야기 하는 것이 좀 우습지만,
그래도 [妙 法 蓮 華 經]이니까 짚고 넘어간다면
이 연꽃은 첫째, 仁果同時(인과동시). 원인과 결과가 동시다.
둘째, 染淨共存(염정공존)이라. 염과 정이 같이 있습니다.
이 말 속에는 중생이 성불하는 일이라든지,
우리가 현실의 온갖 번뇌를 들쳐 업고 살면서
‘인생이라는 것이 이것뿐인가?’ 아니면 ‘다른 이상적인 삶이 있는가?’
←이런 문제도 연꽃이 다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상과 현실은 하나다 이겁니다.
染淨共存이라.
染은 뭡니까? 현실이지요. 淨. 청정한 세계는 이상입니다.
因果同時라고 하는 것은 현상과 실재.
눈앞에 보이는 것은 현재의 우리의 실정이고,
이상적인 부처의 삶은 우리 꿈속에나 있는 삶입니다.
그것을 生佛同道(생불동도). 중생과 부처가 같은 도다.
因果가 同時다. 그것은 현상과 실재가 동시에 있다.
이런 등등으로, 여러 가지로 표현됩니다.
한 마디로 연꽃은 어떻습니까?
“蓮”하면 사실은 연 씨를 말하는 것이지 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꽃은 “花”라고 해야 꽃입니다.
“蓮 華”하면 연과 꽃입니다. “蓮”은 연 씨를 말하는 것입니다.
연 씨와 꽃을 동시에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因果同時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고,
우리가 진흙 묻은 蓮根(연근)을 볼 때 어떻습니까?
거기에서 그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는 것은 상상 못하지요.
그런데 진흙 묻은 그 연근. 우리가 먹으려고 사다 놓은 것을 보면
생긴 것도 우습지도 않지요.
우리 인간 보통 보면 우습잖아요.
온갖 탐 진 치 번뇌 망상 투성이지요.
연근은 됨됨이가 우습지도 않은 겁니다. 그런데 웬걸,
그 진흙투성이인 연근. 아니면 저 시궁창 연밥.
그것이 그대로 연꽃과 둘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름다운 연꽃과 둘이 아니다.” 그 뿌리 부분을 더럽다고 던져 봐요.
연꽃이 어디 있는가? 그 뿌리가 그대로 연꽃입니다.
연 이고 연꽃입니다. 묻은 진흙이 그대로 연꽃이라고요.
우리가 “진심” “청정심” “불심”
이것이 번뇌 망상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이 망심하고
과연 둘이냐? 아니면 하나냐?
이 망심을 버리고 진심을 쟁취하는 것이냐?
진심과 망심이 따로 있느냐? ←이런 문제들을
이 연꽃이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두고두고 이야기될 것이니까 이쯤으로 하고,
이 연꽃도 경전에 나오는 것이 대개 靑蓮(청련) · 紅蓮(홍련) ·
白蓮(백련). 이렇게 하는데 법화경의 연꽃은 白蓮입니다.
우리가 “옴 마니 반메훔”할 때 “파드메.” “파드마”라고 하는데
그것은 홍련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에서는 靑蓮을 쓸 때도 있고,
白蓮을 쓸 때도 있고, 紅蓮을 쓸 때도 있고,
상황 따라서 연꽃을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합니다.
이렇게 연꽃처럼 아름답고 미묘한 이치니까
그 미묘한 이치는 다 이야기하면 법화경 끝나니까
법화경을 보면서 하나하나 짚을 곳은 짚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법화경을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뜻에서
總(총)69384字, 一文一字是眞佛(일문일자시진불).
글자 수 전체가 69384 자. 一文一字 是眞佛.
한 문장 한 글자 모두가 참 부처다.
이것은 고래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진흙덩어리. 진흙 묻은 연근. 우습게 생긴 연근 그대로가 연꽃이다.”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종이로 된 경책과 거기에 먹물로 써진 글자가 무슨 참 부처냐?
그것이 참 부처라고 우리가 이해해야 되고,
이해할 때까지 공부를 해야 되는 것이지요.
출처 : 연등국제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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