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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서문
Part 01 지금 세상에서 필요한 것
Part 02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Part 03 예배는 삶이다
Part 04 예배드리기 위해 구원받았다
Part 05 하나님, 그분인가? 그분은 누구인가?
Part 06 변치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
Part 07 어디나 계시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Part 08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Part 09 새로운 시대가 밝아온다
Part 10 여기가 그곳이다
Part 11 아버지께 예배하라
Part 12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Part 13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 영광
Part 14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법
Part 15 예배의 본래 의미
♠부록♠ 마음과 생각과 목소리로 / 찬송가와 가스펠
<서문>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신29:2)”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고, 기뻐하며, 영광 돌리고, 즐거워하는 것은 영원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임무다. 지금 당신이 누구를 어떻게 예배하는지는 당신의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을 나타낸다.
진정한 예배는 주일 오전예배로 국한된 활동이 아니고, 예배는 어느 시간이나 장소에 제한된 것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찬미하는 영혼이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의 본질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진정한 예배는 모든 성도의 끊임없는 활동이어야 하며, 그 행위의 목적은 단순히 예배자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다.
음악은 예배를 위한 훌륭한 매체이다. 그러나 영혼을 뒤흔드는 절정에 이르는 찬양이라고 해도 그것이 예배의 본질은 아니다. 찬양함에 있어 진리가 담긴 노래가사보다 극정인 공연이 부각되어서는 아니된다. 예배의 본질에 더 가까운 다른 영적인 훈련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기도, 헌금, 감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잘 듣는 것 등이다.
이 책은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예배하라는 부름이다. 근본적으로 구별된 성도의 삶을 향한 부름이며, 주일뿐 아니라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삶에 대한 부름이다.
이 책을 통해 당신이 영광 중에 계신 우리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기를 바라고, 순종적인 반응은 당신을 참된 예배자로 변화시킬 것이며, 근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을 행하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하게 만들 것이다.
Part 01 지금 세상에서 필요한 것
_성경에 나오는 예배
‘예배’라는 주제는 성경을 장악하고 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해야 했다. 그런데 이에 실패하면서 인간은 타락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사랑의 하나님 앞에 영원한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 안에서, 모든 역사가 절정에 이르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성경에는 예배가 모든 삶을 포함했다. 성막은 예배의 우선권을 강조하도록 설계되었는데, 천지창조를 묘사한 부분이 31절밖에 되지 않음에 비하여 성막을 묘사한 레위기가 243절이나 되는 것을 대비해 보면 성막은 오직 ‘예배’를 위해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막에서 드리는 번제는 가장 중요한 예배의 실례였다.
_예배가 잘못됐을 때
하나님은 자신에게 제대로 예배드리지 않은 사람들을 거듭 심판하셨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다가 몰살을 당할 뻔 하였으나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셔서 3천명만 죽이셨다. 대제사장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을 담아 분향했다가 즉사를 당했고,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다가 자신이 제사를 인도했다가 후손들이 왕위를 빼앗겼으며, 웃사는 하나님이 정해 주신 방법을 따르지 않고 언약궤를 옮기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즉사를 당했다. 웃사는 분명이 좋은 의도였다. 그러나 자기 방식대로 예배드리는 자들은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
_합당치 않은 예배의 네 종류
첫 번째 ‘거짓 신들에 대한 예배’다. 성경의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다. 그 하나님은 다른 이에게 예배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질투의 하나님이다. 이사야 48장 11절에서 하나님은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셨다.
두 번째 합당치 않은 예배는 ‘잘못된 형식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우상숭배는 조각가의 망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시작된다.
세 번째 잘못된 예배는 ‘자신의 방식대로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나답, 아비후, 사울, 웃사는 모두 하나님의 계시와 상관없이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죄를 범했다.
네 번째 잘못된 예배는 ‘올바른 방식을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나, 잘못된 태도로 예배하는 것’ 이다. 모든 거짓 신과 참되신 하나님의 모든 형상과 자신이 만들어 낸 예배방식을 없앤다 해도, 마음의 태도가 올바르지 않으면 여전히 우리의 예배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당신은 온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가? 당신이 가진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가? 당신의 마음은 경외심과 존경심으로 가득한가?
_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다. 교회가 예배를 올바로 드리지 못하면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교회의 실패로 온 세상이 고통을 받는다.
Part 02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_참된 예배
홍보, 레크리에이션과 사교적인 활동, 출석률을 높이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교회의 궁극적인 우선순위다.
_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 오직 성경
성경의 진리는 죄로 손상된 영혼을 회복시키고, 영적인 지혜를 주며, 우울한 마음에 활력을 주고, 영적인 깨달음을 준다. 성경은 우리가 진리와 의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요약해서 보여준다.
_예배를 규정하는 원칙으로서 성경의 충분성
칼빈 -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
존 후퍼 -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이 뒷받침되지 않는 것, 또는 해도 별 유익이 없고 안 해도 별로 해가 될 것이 없는 그런 것은 교회에서 사용해선 안 된다”
_예배에 솔라 스크립투라 적용하기
말씀을 전하라
공예배에서 반드시 말씀에 대한 설교가 우선시되어야 한다. 설교는 모든 공예배에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 말씀과 예배는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 모든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지적인 반응과 사랑의 반응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떼를 세우라
사역의 목표는 참된 예배를 일으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성도를 바로 세워야 한다. 예배는 열정적이고, 진심에서 우러나며, 감동적이어야 한다. 때로는 음악이 아름다운 소리로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지만, 그 때의 감동은 예배가 아니다. 가사에 담긴 진리와 분리된 음악 자체는 참된 예배의 발판이 될 수 없다. 참된 예배는 거룩한 진리에 대한 반응이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이 말씀에 계시하신 대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행하셨으며, 무엇을 약속하셨는지를 생각하며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계시해 주신 진리에 대한 반응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높이라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히12:28) 공예배는 ‘경건함과 두려움’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높여야 한다. 일주일은 첫날은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 간에 교제를 나누는 날로 구별해야 한다. 예배를 복음전도의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복음전도는 신자들이 복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들은 예배와 교제를 위해 모였고, 복음 전도를 위해 흩어졌다.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3:3) 바리새인의 율법주의를 따르지 말라.
_예배가 최우선이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눅10:41-42) 예수님을 흠모하여 그의 발 앞에 앉아 있던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2) 주님은 예배가 다른 모든 삶의 활동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본질적인 확동임을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 안에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오직 성경만이 우리의 예배를 규정하도록 해야 한다.
Part 03 예배는 삶이다
예배는 한 장소나 시간 또는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고립되거나 밀려나서는 안 된다. 진정한 예배의 행위는 끊임없이 예배하는 삶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하나님께서 의와 사랑으로 마음을 뜨겁게 해주실 때 찬양이 끓어 넘치는 삶이, 가장 참된 예배의 표현인 것이다.
_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배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예배를 나타내는 단어 ‘프로스퀴네오(proskuneo)'는 ’입 맞추려고 나아가다‘, ’손에 입 맞추다‘, ’엎드리다‘ 라는 뜻이고, ’라트류오(latreuo)'는 ‘공경하다’, ‘경의를 표하다’ 라는 뜻이다. 진정한 예배의 행위는 끊임없이 예배하는 삶에서 넘쳐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영어 단어 ‘worship'은 ’가치있음‘ 이라는 ’worthiness'와 연관되어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 또는 그분의 최고의 가치를 말로 표현하고 긍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지만, 진정한 믿음과 참된 예배의 본질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과 경배 속에 싸여 있다.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강렬하고 헌신적인 열망이 모든 참된 예배의 결정적인 요소다. 그것은 먼저 우리 자신을 드리고, 우리의 태도를 드리고, 그 다음에 우리가 가진 소유물을 드리는 것이다. 예배가 삶이 될 때까지 말이다.
_세 가지 차원의 예배
모든 예배자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acceptable) 것을 드리기 원한다.
외향적 차원
첫째, 예배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행동에서 나타날 수 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14:18) 우리가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세심하게 대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 행위라는 것이다. “내게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4:18) 그러므로 예배는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사랑을 나누고, 불신자들과 복음을 나누며, 사람들의 육체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는 ‘베푸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것은 나누는 사랑이다.
내향적 차원
예배의 두 번째 범주는 우리의 개인적인 행동을 포함한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8-10) 따라서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 행위이다. 따라서 나눔은 예배의 행위이고, 예배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상향적 차원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16) 예배의 세 번째 본질은 단순히 감사와 찬송임을 알 수 있다. 16절에서 예배의 세 범주를 모두 조합하여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선을 행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은 모두 합당하고 영적인 예배 행위다.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예배라는 주제에 전념하는 것처럼, 신자는 예배의 활동에 전념하여 삶의 매순간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우리의 축복을 이웃과 나누며, 모든 선과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전념하고자 하는 열망이 타올라야 한다.
_모든 삶이 예배다
바울은 모든 삶이 예배라는 개념을 강력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_우선순위
히브리서 11장에는 구약성경의 믿음의 영웅들이 나오는데, 첫 번째 인물이 아벨로서 아벨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예배’로서 그는 참된 예배자였다. 그의 예배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일치했고, 그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으셨다. 두 번째 인물 에녹의 주제는 ‘행함’이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고 경건하고 신실하고 헌신적인 삶을 산 후에 어느 날 땅에서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 세 번째 인물인 노아로서 주제는 ‘노동’이다. 그는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는데 그의 노동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고 믿음의 노동이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연대순을 초월하는 순서가 있는데, 우선순위의 첫 번째가 예배, 그 다음이 행함, 그 다음이 노동이다.
성막을 둘러싼 이스라엘 진영의 배치에서도 그와 똑같은 순서를 볼 수 있는데, 백성을 인도하여 예배드리는 역할을 맡은 제사장들은 성막 주변에 배치되었다. 그 바깥쪽에는 섬기는 역할을 하는 레위인들이 있었다. 그들의 자리는 예배가 가장 중요한 활동이며, 봉사는 부차적인 것임을 보여 준다.
_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우리는 사역을 중시하고 예배는 중시하지 않는다. 요즘 예배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많은 일들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이름에 먹칠하고 있다. 우리는 활동을 많이 하고, 예배는 거의 드리지 않는다. 사역을 중시하고, 예배는 중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실용적이다. 우리 안에는 마르다가 너무 많고 마리아는 너무 적다. 우리는 짜여진 프로그램대로 조직적으로 바삐 움직이고 있을 뿐, 정작 예배는 소홀히 하고 있다.
토저(A. W. Tozer) - "예배는 교회의 잃어버린 보석이다“
♠어느 유명한 탐험가가 아마존 정글을 여행하고 있었다. 원주민들이 그의 많은 짐을 들어주었는데, 그는 빠른 시간에 먼 거리를 가기 위해 억지로 그들을 끌고 가려고 했다. 사흘째 여행을 마치고 휴식을 취한 후 아침이 되어 다시 출발할 시간이 되었는데, 이 원주민들이 짐을 짊어진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탐험가는 어떻게든 그들을 일으키려고 온갖 방법을 써보았으나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추장이 이렇게 말했다. “친구 이들은 자신의 영혼이 몸을 따라 잡을 때까지 쉬고 있는 거라네”
하나님이 말씀하신 예배는 내적이고, 희생적이며,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것이다. 가장 순수한 예배, 즉 감미로운 향처럼 하나님께 올라가는 예배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선을 행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림으로써 우리 삶의 모든 면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예배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이며, 가장 깊고 영적인 의미의 예배다.
Part 04 예배드리기 위해 구원받았다
참된 예배의 기초는 구속이다. 죄인 구원의 최고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히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2:7)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하나님 아버지는 예배하는 자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게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구원받는 주된 이유는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그것은 복된 특전이지만 주된 목적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구원받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이 주시는 여러 가지 영원한 축복을 누리기 위함도 아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이 예배를 받기 위해서이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다.
_예배 태초부터 있던 것
영원 전, 사람이 창조되기 전, 땅이 생겨나기 전에도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다.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9:6)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을 때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아담의 자식 중 가인은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물로 예배를 드렸다.
_구약성경에서의 구원
이스라엘백성들은 애굽에서 해방되었지만 하나님께 제대로 예배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40년간 시내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한 세대가 전부 죽었다. 다음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모세는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들이 참되고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키기 위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지시했다.
_예배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은 모두 참된 예배의 중요성을 가르치시는 교훈이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찬양하는 것이다.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경외하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자 유일하게 올바른 반응은, 진심으로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_영원히 예배하라
신약성경 속에서 ‘예배’에 관한 주제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요한계시록에 이르러 요한계시록 전체에 걸쳐 묘사하는 마지막 때의 환상 속에서, 요한은 거듭 예배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5:13-14)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성경의 주제이고 영원한 주제이며, 구원 역사의 주제다. ‘하나님을 예배하라.' 그것은 영원한 복음이며,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신 메시지다.
_누가 주님의 거룩한 산에 오를까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시24:3-6)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갈 자, 하나님께 가까이 갈 자는 깨끗한 손과 청결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찾는 자들, 즉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다. 예배가 궁극적인 우선순위라면, 예배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인 모욕이다. 사실 하나님께 올바로 예배드리기를 거부하는 마음이 모든 악의 중심에 있다. 이것이 모든 죄의 핵심이다.
_이교도를 예배자로 만들기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드리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처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반대로 참된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을 경험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거짓 예배자가 참된 예배자로 변화하는 것이다. 당신이 참으로 구원받았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자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자라면, 당신은 하나님의 임대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_믿는 자의 표적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우리들이야말로, 참으로 할례받은 사람입니다”(빌3:3 표준새번역)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 달리, 참된 믿음의 표적은 사랑이 아니다. 마치 포괄적인 자비와 친절이 기독교의 특징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참된 표적은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갈5:22-23)를 비롯한 다른 모든 미덕은 예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진실한 사랑은 참되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시작된다.
_당신은 어떠한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다. 그는 자기가 받는 것보다 드리는 것에 몰두한다. 축복만을 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의를 행하고,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예배의 기초, 닫힌 문을 열고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 주는 열쇠, 합당치 못한 예배자를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자로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당신이 구원받았는데 지금 합당한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다면, 당신이 구원받은 목적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내게 예배는 삶인가?’
Part 05 하나님, 그분인가? 그분은 누구인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이 말씀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_인간이 하나님을 창조했는가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책 「환상의 미래」에서 ‘인간은 안전이 절실히 필요해서, 뿌리 깊은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상황을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위협적인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하나님을 만들어 냈다’ 라고 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1:16) 프로이드의 말은 틀렸다. 죄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원치 않는다. 그들이 제멋대로 행했다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_어떻게 하나님을 확인할 수 있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기보다는 그것을 전제로 한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90:2)
_하나님은 한 인격이시다
아인슈타인은 우주 안에 어마어마한 힘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하나님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우주에 떠다니는 거대한 전기의 흐름으로 생각했다. 하나님은 단지 우주의 힘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 분은 생각하시고, 행동하시고, 느끼시고, 말씀하시며, 소통하시는 한 인격이시다.
_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하나님의 영성은 그분이 육신의 형상이나 신학적인 추상개념으로 축소될 수 없다. 이 세상에서는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빛의 기둥과 불기둥, 성전 안에서 셰키나의 영광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신명기 6장 4절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핵심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예수님도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12:29-30) 라고 하나님의 유일성을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고 말씀하셨고,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성부와 성자의 하나됨과 동등함을 강조했다.
-성부와 성령은 하나다
성령 또한 명확하게 하나님으로 불린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5:3)고 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말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19절)
-하나님은 삼위일체시다
하나님은 하나의 실체 안에 계신 세 인격이다. 이 삼위일체 안에서는 아무도 먼저 되거나 나중 된 자가 없고 더 크거나 작은 자가 없다. 다만 세 위격이 모두 영원히 공존하며 동등하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단어는 ‘엘로힘(Elohim)'인데 이는 복수형이다. 민수기 6장 24_26절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에서 ’여호와‘를 향한 세 번의 간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암시한다. 이사야가 이사야 6장에서 보고 묘사한 스랍들은 이 세 번의 감탄사를 서로 외쳤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3절) 이것 또한 하나님의 삼위일체 속성을 암시하는 것 같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확실하게 삼위일체를 언급한 구절 중 하나가 이사야 48장 16절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적 말씀이다. 하나님의 세 위격을 한 구절에 포함시켜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영을 보내셨느니라” 고 말한다.
신약성경은 여러 차례 성부, 성자, 성령을 같은 구절 안에, 서로 동등하게 언급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면서 세 분이시다.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우리는 그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말씀 속에서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셨다. 그분은 한 인격이시며, 우리는 인격적으로 그분을 알 수 있다. 그분은 삼위일체시며,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다.
Part 06 변치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참된 예배는 의식과 다른 외적인 것(제물, 번제, 형식적인 전례 같은 것)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중요한 문제에 기반을 둔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어떤 외적인 행동이나 우리가 예배로 생각하는 의식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라신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누구도 지혜롭지 않다. 참 하나님을 알 때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에 대한 친밀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어려움
아무도 하나님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어떤 인간의 정으로도 하나님을 제한할 수 없다. 비록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지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 가장 기초적인 것들이다. 하나님을 우리가 아는 것과 너무 비슷하게 만들려고 할 때 우리는 곤경에 빠진다. 하나님의 어떤 속성은 천사보다 우리가 더 이해하기 쉽다. 천사들은 구원의 진리를 알고 싶어하나 알지 못하고, 우리처럼 용서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용서를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타락한 천사들은 저주를 받았고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은 용서가 필요치 않았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지금보다 하나님을 훨씬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102:25-27)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말3:6)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하나님의 불변성은 축복이다
하나님이 변치 않으신다는 사실은 믿은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약속이 모두 영원하시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이 변치 않으신다는 것이 아주 끔찍한 사실일 수 있다. 죄를 범하는 영혼은 죽을 거라고 하신 하나님의 결정이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절대적인 능력 안에 그 능력을 사용할 권한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는 우주를 창조하는 일이 나비를 창조하는 일보다 어렵지 않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해도 힘이 소진되거나 약해지지 않으신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사40:28)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의미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단지 이론적이거나 학문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이해하는 것은 예배의 강한 동기가 된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능력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변치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라
우리는 변함 없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무한하며, 전능하고, 변치 않으시는 영광스러운 분이다.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견고함을 바라보면 불안정한 우리의 삶에 안정감과 평온함이 찾아 온다.
Part 07 어디나 계시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28:9)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늘나라의 궁전 어딘가에 계신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장소에 국한되실 수 없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곳에 계신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이 계시는 특정한 곳에 갈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어디에 거하시는가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할 때는(고전3:16), 구원받은 자들과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관계적 영적인 임재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시지만, 신자들과는 특별한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계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전이며(고전6:19) 이는 우리 몸이 하나님의 장엄한 임재의 거룩한 상징이라는 뜻이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0-22) 하나님은 심판을 위해 지옥에도 계신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신자의 반응
첫째, 그것은 확신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떤 역경이나 감정을 경험하든, 하나님이 거기 계심을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분리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우주에서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제는 모든 신자들이 가진 생득권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또한 신자들을 도와주심을 뜻한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은 그냥 가만이 서서 보고 계신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할 때 하나님이 도와 주신다는 뜻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는 강력한 유혹을 막는 방패이기도 하다. 언제든 사탄이 신자에게 다가오려 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을 거쳐야만 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하나님이 어디나 계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좀더 주의 깊게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우리가 생각으로나 말로 죄를 범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동전의 뒷면
믿는 자들에게 편재성의 교리는 지극히 중요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도망칠 곳도, 탈출구도, 후퇴할 곳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들이 파고 스올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에서 붙잡아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붙잡아 내릴 것이며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뱀을 명령하여 물게 할 것이요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칼을 명령하여 죽이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암9:2-4)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139:7-12)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12:4-5)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 이미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알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참된 동기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자세히 살피시기 때문에, 우리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잘 아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지하심의 진리다.
-하나님은 어디서 정보를 얻으시는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새로운 것을 발견하거나 어떤 것을 더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기도 제목은 하나님께 필요한 정보를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알고 계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65:24) 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다. 우리는 마음의 짐을 덜고 우리의 염려를 털어놓기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전적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이 미치지 않는 지식은 없다. 어떤 은밀한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도 하나님께는 감출 수 없다. 그분은 당신의 머리카락 개수까지도 알고 계신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10:30)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겉모습만 보지 않으신다. 요한계시록 2장 23절에서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그분의 완전한 지혜와 불가분의 관계다. 한없이 섬세한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생객해 보라. 우주의 방대함에서부터 미시세계의 섬세한 조직체들과 원자보다 작은 영역의 아주 미세한 입자들까지, 모든 것이 놀라운 지혜의 증거가 된다. 하나님의 창조는 그분의 지혜를 나타내는 기념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 신자들에게는 큰 위안이 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이름이 쓰여진 책을 갖고 계시며, 누가 거기에 속했는지 잊지 않으신다. 요한계시록 13장 8절에 따르면, 창세 이후로 신자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를 알고, 우리를 언제나 사랑하시는 하나님
고린도후서 5장 10절은 언젠가 우리가 몸으로 행한 모든 일을 설명해야 할 때가 올 거라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5장 4절은 하나님이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하고 말한다. 이는 의롭게 살아야겠다는 강한 동기부여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알고 계신다. 그러나 책망할 때는 언제나 사랑으로 책망하신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주님을 세 번 부인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주님은 베드로를 대면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6절)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확신 있게 말했다. 주님은 다시 물으셨다. 모두 세 번 질문하셨다. 마지막에 베드로는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17절) 하고 말했다. 베드로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자신의 행위보다 예수님의 전지하심에 호소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요일3:19-20)
-하나님의 전시하심과 불신자
하나님의 전지하심의 교리는 불신자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정체를 밝히고 어리석은 위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과 달리 겉모습을 보지 않고 마음을 보신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3:18-20)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또한 불신자에게 정확한 심판의 약속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롬2:2) 예레미야 16장 17절에서 선지자는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기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숨겨지지 못함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다.
-중대한 문제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속성이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더 강하게 해 준다. 큰 위로와 확신과 자신감을 준다. 그러나 하나님께 반항하고 믿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속성은 위협이 되고 두려움을 일으키며 영원한 파멸의 전조가 된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고, 전능하시고, 편재하시며, 전지하시다.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겸손하고 정직한 예배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 초점을 두면 거만해지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기 시작하면 바로 우리의 비천함을 알게 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갈망하게 된다.
Part 08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나님의 변함없음과 편재하심과 전지전능하심 외에 우리로 하여금 예배하게 만드는 요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거룩하심은 그분의 모든 속성을 요약하는 말이기도 하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독립성, 특별함, 그분이 다른 존재와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천사들이 하나님을 높일 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여”(계4:8) 라고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모든 속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15:11)
-절대적인 거룩함의 기준
하나님은 거룩한 기준에 따르지 않으신다. 하나님 자신이 기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는 정도가 없다. 흠이 없고, 오류가 없으며, 죄가 없으시다. 완전히 의로우며, 완전히, 절대적으로, 무한히 거룩하시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으려면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천사들이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을 즉시 그들을 쫓아 내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임재와 분리된 장소를 마련하셨다. 죄를 범한 인간들이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때, 그들의 궁극적인 결말은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장소로 보내지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임재 밖이다.
히브리서 12장 14절은, 거룩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을 뵐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 자신의 흠 없는 거룩함이 궁극적인 기준이며, 그 기준에 따라 우리가 심판을 받는다. 이것은 타락한 인류에게는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보인다. 우리에게는 이미 죄가 있고, 우리 자신의 죄성으로 인해 치명적인 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그 모든 딜레마를 놀랍고 다면적인 방법을 해결해 준다. 하나님 자신의 완전한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죄인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그 값을 치러주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의로 인정과 상급을 받는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따라서 진정한 믿음을 가지려면 우리 자신의 모든 의의 가면을 벗고, 우리가 가망 없는 죄인임을 고백해야 한다. 자신의 독선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의 완전한 의를 전가해 주신다. 그 때문에 우리는 바로 dd지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5:1-2)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를 미워하시는 모습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하나님은 죄를 용인하실 수 없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증거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볼 수 있는데, 먼저 ‘인간창조’에서 나타난다. 전도서 7장 29절은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을 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도록 지으셨다. 죄는 그 목적에 대한 인간의 반항이었다. 그러나 죄가 있음에도 여전히 사람 속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거룩함의 흔적들이 있다. 사람은 옳고 그름에 대한 타고난 감각이 있다. 인간의 양심, 모든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보편적인 윤리 헌장, 인간의 타고난 정의감, 태어날 때부터 불공정보다 공정함과 공평함을 더 좋아하는 특성을 통해 찾아 볼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도덕법칙 안에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율법을 제정하신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거룩함을 증거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이 율법적인 도적의 기준을 정하셨을 때, 그 자신이 의롭고 도덕적이며 거룩한 존재임을 증명하셨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희생제사 율법 속에’ 잘 나타난다. 우리는 짐승을 죽여 희생 제물로 삼고 그 짐승의 피를 사방에 뿌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보면서 죄의 결과가 사망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한다. 그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또한 ‘죄에 대한 심판에서’ 잘 나타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한 사람에게 인간의 죄를 짊어지게 하셨고,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장 잘 보여주었다. 즉,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와 그것을 이기는 능력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버려야 할 정도로 거룩하신 분이다. 그분은 자신의 거룩함을 만족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최고의 대가를 치르셨다. 바로 아들의 죽음이었다.
-거룩한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
예배하는 삶은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하심을 확실히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은 참된 예배의 필수 요소다.
-이사야와 하나님의 만남
웃시야는 52년 동안 유다 왕으로 지내면서 그는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켰고, 통치 기간 동안 평화와 번영을 유지한 유능한 왕이었지만, 그 나라는 내면적으로 부패하고 오염되었으며, 그들의 예배는 악명 높을 정도로 깊이가 없었다. 하나님은 교만한 웃시야 왕을 나병으로 죽게 하였다. 왕이 죽자 나라가 흔들렸고, 아사야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야 할 절실한 필요를 느꼈다. 이사야 6장 1절에서 이사야는 주께서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거기서 이사야는 스랍들이 서로 화답하여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3절). 하나님의 환상을 본 이사야는 5절에서 이렇게 반응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한 환상을 보았고, 그 앞에서 자신의 죄성을 느껴 뼈 속까지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마음은 정결함을 갈망하고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보았을 때 뼛속까지 충격을 받게 된다. 우리의 죄에 대해 깊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전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지 않으면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철저히 깨닫고 그 결과 자신의 불경함을 철저히 느낌으로써, 한없이 의롭고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예배인 것이다.
우리는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환상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누구나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보아야 한다는 교훈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오늘날 예배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많은 일들이 사실은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참된 예배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 기억하기 쉬운 노래를 부르고, 괴로운 감정을 느끼고, 마음에 드는 생각을 하고, 즐거운 기분을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저 예배를 가장한 이기적인 활동일 경우가 많다.
-경건함과 두려움
참된 예배자는 건강하지만 영혼을 뒤흔드는 두려움을 느끼며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간다. 결국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들 안에서도 죄를 벌하시는 분이다. 히브리서 12장 6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상기시킨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히브리서 12장 28절은 계속해서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라고 말한다. 따라서 참된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분명히 깨닫고, 우리의 죄성을 깊이 느끼며, 깨끗해지기를 진심으로 갈망해야 한다.
-예수님에 대한 반응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신 살아 계신 하나님이었기에 예수님을 대면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위협적이었다. 그로 인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들을 통해서 그분이 하나님에게 왔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사람들은 매우 자주 그분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세상을 거닐며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주신 수동적이고, 상냥하며, 유순한 분인 것으로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거룩하심은 별개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열매를 먹었지만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수백년 동안 살았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보이신 것이다. 율법은 간음한 자, 신성을 모독한 자, 심지어 반항하는 아이들에게도 죽음을 요구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도 율법이 명하는 죽음의 형벌을 당하지 않았다. 다윗은 간음을 저질렀지만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취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모든 죄보다 더 크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이 자비로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를 회개로 인도한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악하고 부패하여, 큰 감사와 두려움과 우리의 죄에 대해 슬퍼하며 뉘우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여야 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시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자비와 은혜에 익숙하여, 하나님은 죄에 대해 분노할 권리가 없으시다고 생각한다. 로마서 3장 18절은 이러한 세상의 태도를 이와 같이 묘사한다.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이 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셨는지 아는가? 그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아서가 아니다. 은혜와 자비의 긴 과정 중 어느 지점에서 사람들을 두렵게 할 본보기를 세우셔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롯의 아내를 소금기둥으로 만드신 것은 그녀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기념비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그러나 그분의 자비와 공의를 혼동하지 말라.
-진짜 문제
문제는 하나님이 몇몇 죄인을 왜 그렇게 극적으로 심판하시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우리를 살려두시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죄를 처벌할 모든 권한이 있다.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3장 22절은 말한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 함이니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를 축복해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우리를 회개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로마서 2장 4절 말씀을 명심하라.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즐거워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진리는 무시해 왔다. 그 불균형이 우리 예배의 심장을 좀먹고 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을 충분히 기쁘시게 하려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거룩하지 않은 모습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경건함과 두려움이 없이는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우리의 예배는 거룩한 아름다움으로 옷 입어야 한다. 참된 예배의 특징인 감사와 겸손으로 가득해지려면,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온전하고 놀라운 거룩하심을 보아야 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계4:8)
Part 09 새로운 시대가 밝아온다
우리는 예배가 단순히 우리의 일정에 간간히 포함된 활동이 아니라 모든 삶을 드리는 것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포괄적인 반응이고, 오직 구원받은 자들만 드릴 수 있는 것이다.
-거룩한 만남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심에 있어서 유대인들이 회피하는 이방 땅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하는 길을 택하셨다. 예수님은 수가라 하는 동네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복음을 전하셨고, 예배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가 아닌가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분열된 이스라엘의 유대인과 바벨론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열족인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영적인 문둥병자 취급을 받았다. 그러니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걸음을 멈추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거셨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셨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예배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사람들은 자기가 보기에 옳은 대로 행했다
유대인의 예배는 너무 의례적이었다. 엄격한 의식을 따라 행해졌다. 언제, 어떻게, 누구와 함께 예배드려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확고한 성경적 전통적인 법칙들이 있었다. 반면 사마리아인의 예배는 그리 정교하거나 화려하거나 복잡하지 않았다. 두 그룹 모두 합당치 못한 예배라는 것을 시사하시는 예수님의 말에 여인은 깜짝 놀랐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하나님의 방식대로 진실하고 영적인 예배를 드리려면 유대인의 예배 방식과 사마리아인의 예배 방식을 다 없애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낡은 것, 새로운 것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옛 언악은 끝났다. 하나님은 결정적인 큰 사건으로 그것을 기가막히게 극적으로 보여주셨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일어난 사건이다. 성막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면서, 하나님이 그 모든 제도를 종결시키셨음을 나타냈다. 지성소가 드러났다. 하나님께 가는 길이 모든 이에게 열렸다.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브리서 10장의 주제는 옛 언약의 체계의 부족함이었다. 4절에서는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고 말하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12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돌아가셨을 때 희생제사 제도는 끝났다.
-안식일은 어떤가
희생제사는 없어졌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한 주의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성경 말씀의 명백한 가르침과 모순된다. 이스라엘의 옛 언약 아래에서는 모든 예배가 안식일을 주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일을 중단하는 것이다.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은 사람들이 매일 하던 노동을 쉬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안식일 절기들은 하나님을 묵상하고 예배드리기 위해 따로 구별해 놓은 특별한 성일이었다. 안식년에는 1년 동안 모든 밭을 쉬게 했다. 그리고 희년에는 노예와 포로를 해방시켜주고 모든 사람이 쉬면서 축하행사를 가졌다. 안실일 제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메시아를 통해 발견하는 참된 안식과 예배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안실일 제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성회로 모이고, 포로에게 영적인 자유를 주고, 노예를 해방시켜주는 때를 나타냈다.
예수님이 그 일이 이루어졌음을 직접 선포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안식일은 단지 그림자일 뿐 실체는 예수님이었다.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6-17절에서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외적인 의례와 형식, 특별한 날들은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대답해 주셨을 때 그 충분한 말씀 속에 이 모든 놀라운 진리가 담겨 있었다.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참된 예배의 새로운 시대를 여셨다. 그 예배는 외적인 것이나 상직적인 것에 치중하지 않고, 내적인 것과 진정한 것에 초점을 둔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예배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합당한 예배가 될 수 없다.
Part 10 여기가 그곳이다
여인은 죄악된 삶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다. 또 여인은 진리, 생명, 의와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마음과 머리로 깨닫기 시작했고, 무거운 죄책감을 느낀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잘못을 바로 잡고 싶은 열망이 생겼는데,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어디서 예를 드려야 하는지, 그리심 산인지 예루살렘인지 말씀해 달라고 했다. 예수님은 곧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예배를 드리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예배는 특정 장소, 시간, 형식에 국한되는 활동이 아니다.
-성전은 어떤가
예배가 한 장소에 국한되지 않아야 한다면, 왜 그렇게 특별한 예배 장소를 지었던 것일까? 그리고 왜 우리는 교회 건물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일까? 성전은 거주의 상징에 불과했으며, 그것의 주된 목적 중 하나는 이스라엘 안에 삶의 약식으로서의 예배를 일으키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성전은 실체가 아니라 상징이다.
-살아 있는 성전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모든 성도는 살아 숨 쉬는 성전이며,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 그것은 신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항상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해변에서, 산에서, 운전 중에, 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숲속을 걸으면서, 시골길을 달리면서, 거실에 앉아서, 교회 건물 안에서,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 예배의 영역은 무한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우리가 지성소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셨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굳이 교회 건물로 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이 있다.
-예배 공동체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 신자로서 우리는 서로 사랑(나눔)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 모여야 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사실상 지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도가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또 어떤 건물을 예배 장소로 특별히 지정할 수 없다는 뜻도 아니다. 사실 새 언약 아래서도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의 몸인 성전과 별도로 또 다른 성전을 갖고 계시며, 거기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신다. 그것은 매우 특별한 건물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살아 있는 모임은 웅장하고 영적인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거기에 성령이 영원히 거하시며,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과 만나신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너희’라는 복수 대명사가 사용되었다. 집단적인 의미로 성도들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처소로 언급한 것이다.
-형식이 아니라 본질
예배는 주로 외적인 활동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예배는 우리가 찬양하고 기도하고 순종하는 대상인 하나님을 경배하고, 설교자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예배는 그런 활동에 대한 올바른 영적 반응이지 활동 그 자체가 아니다.
-예배는 드리는 것이다
성도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것은 예배의 새로운 살 길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구원받은 자들이 모일 때, 즉 순결하고 합당한 예배의 삶을 통해 찬양이 흘러넘치는 마음들이 모일 때, 온 성도들이 서로 자극받아 하나님께 예배 드리게 된다. 진실한 찬양과 마음에서 우러나는 예배가 그곳에서 터져 나오고 끓어 넘쳐야 한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교회가 우리를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젖어왔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쇠렌 키르케고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설교자가 무대에 선 배우이고 자신들은 그를 비난하거나 칭찬하는 비평가인 줄 안다.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으니, 바로 그들이 무대의 배우라는 것이다. 설교자는 단지 그들이 대사를 잊어버렸을 때 상기시켜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일 뿐인다” 그리고 ‘하나님이 관객’ 이시다!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고, 얼마나 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복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광을 돌리기 위해 교회에 간다.
-공생
신자들이 한결 같은 예배의 삶을 계속 유지라려면, 다른 신자들과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며 서로 교제하고 격려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개인적인 예배와 공동의 예배는 서로 양분을 공급해 준다. 신앙생활에서 생기는 대부분의 문제의 원인은 두 가지와 관련이 있다. 일주일에 6일 동안 삶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거나, 일주일에 하루 성도들과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겐 둘 다 필요하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는 벽돌과 시멘트 건물이 아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바로 교회다. 교회 안에서, 즉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드리는 우리의 예배는 천국의 예배에 가장 가깝다. 누가 그런 예배에 참석하고 싶지 않겠는가? 우리가 넘치는 찬양과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그 사이클이 완전해 진다. 그럴 때 예배가 참으로 삶이 된다. 바로 그것을 위해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다.
Part 11 아버지께 예배하라
예수님은 ‘어디서’ 예배를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어떻게’ 예배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우물가의 여인에게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예배의 대상을 언급하는 데 두 명사를 사용하셨다. 바로 ‘아버지’와 ‘영’이었다. 둘 다 참된 예배의 적절한 대상을 알아보는 데 반드시 필요한 말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영적이시며, 변치 않는 삼위일체시고, 전능하시고, 어디나 계시며, 전지하시고, 거룩하신 속성을 가지고 계시다. 그러나 예배자가 거룩하시고, 전능하시고, 편재하시며, 사랑이 많으시고, 의로우시며, 영이신 하나님의 개념을 알고 있더라도, 여전히 참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못할 수도 있다.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분명하게 구별되는 참 하나님의 특징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언급하실 때 가장 자주 사용하신 호칭 바로 ‘아버지’이다. 참된 예배자는 하나님을 아버지와 성령으로 인지해야 한다.
-아버지께 예배하라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세 번이나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우리는 광대하시고, 편재하시고, 영원하시며, 전지하신 영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할 뿐 아니라, 친밀하시고, 사랑 많으시고, 인격적인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어떻게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인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고 고백하신 것은 자신에게 혈통 또는 족보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후손도 아닌 영원한 존재로서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동일한 본질과 본성을 지니고 계시다. 예수님이 그 호칭을 사용하신 것은 신성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본성과 성품을 갖고 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주 예수님의 아버지로 확실히 밝혀졌다는 것은 중요한 진리이며, 성경에서 자주 강조되고 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바울은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라고 찬양하고 있고, 같은장 17절에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 기도한다. 베드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벧전1:3)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결코 받으실 수 없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예배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5:23) 우리는 성부 하나님을 예배할 뿐만 아니라 성자 하나님도 예배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참된 예배에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께 나아감으로써 그리스도께 나아간다. 아버지를 예배하는 것과 아들을 예배하는 것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 성경에는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예배하라고 말하는 구절이 없다. 그러나 예배는 성령의 사역과 분리될 수 없다. 성령의 능력과 임재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삼위일체 안에서, 세 분은 각각 독특한 사역을 맡으신다. 성령은 우리를 성자 예수님께로 부르시고, 성자는 우리를 성부 하나님께로 부르신다. 또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예배는 삼위일체의 세 분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세 분 모두 예배를 받을 자격이 있으시다.
-참된 예배의 기초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며 본질적으로 예수님과 하나인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성자를 통해,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성부 하나님께 나아간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성령을 통해 성자께 나아갈 수 있고, 따라서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간단한 문장으로 요약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Part 12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우물가의 여인은 올바른 예배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이 알고 있는 것은 두 가지 뿐이었다. 바로 사마리아인의 방식과 유대인의 방식이었다. 예수님은 여인이 알고 있는 두 가지 예배 방식이 모두 합당치 않음을 알려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방법을 받아들이도록 이끄셨다. 그리심 산에서 드린 예배는 열광적인 이단이었다. 예루살렘에서 드린 예배는 메마르고 생명이 없는 정통 신앙이었다. 예루살렘에는 진리는 있었으나 영이 없었다. 그리심 산에는 영은 있었으나 진리가 없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고 말씀하심으로 두 가지를 모두 꾸집으셨다. 참된 예배의 두 가지 적은 그리심 산과 예루살렘이다. 아버지께서는 열정과 정통, 영과 진리를 둘 다 찾으신다.
-영으로 예배하라
예배는 안에서 밖으로 흘러 나오는 것이다. 적절한 장소, 적절한 때, 적절한 말, 적절한 태도, 적절한 옷차림, 적절한 형식과 절차, 적절한 음악, 적절한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에서, 즉 영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5-17) 다윗은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가 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회개 기도를 드릴 때 그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간청하였다. 그의 회개가 진심이라는 증거는 번제가 아니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었다.
마음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다. 그것은 무대극이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도 참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할 수 있지만, 진실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예배하는 영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는 영으로 예배하는 충만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우선 ‘성령’께 ‘복종’해야 한다.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먼저 성령이 계셔서 참된 예배를 이끌어내야만 한다. 고린도전서 2장 11절은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므도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한다. 당신의 마음을 자극하고, 마음에 동기를 부여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가르치는 하나님의 영이 없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할 수 없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둘째, 영으로 예배하려면,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 새로워진 마음이 흘러넘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과정을 묵상이라 부른다. 묵상은 단지 온 마음을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고, 이성과 상상력과 감정을 한 가지 실체에 집중하는 것이다. 텔레비전, 라디오, 인터넷 등 대중매체에 노출된 우리는 이전 세대보다 더 생각할 것이 많기 때문에 한 가지 주제에 주의를 기울이는 시간이 매우 한정적이고, 하나에 오래 집중하기가 어렵다. 묵상은 우리 스스로 해야 할 훈련이다. 묵상의 핵심은 발견이다. 즉,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통찰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한 발견은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에서 나온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며 그 말씀을 묵상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신다.
영으로 예배드리려면 ‘우리의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아야’ 한다. 하나된 마음이 없으면 예배를 드릴 수 없다. 마음이 나누어진 사람은 선한 의도를 갖고 있다 해도, 앉아서 기도하며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 수만 가지 자른 생각이 마음에 밀려들어 온다. 다윗은 신경 쓸 일이 많은 왕이었다. 그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노력했다. 시편 86편 11절에서 다윗은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다. 시편 57편 7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라고 말했다. 예배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마음,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단호한 마음에서 나온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회개’ 해야 한다. 우리의 죄를 처리해야 한다. 예배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죄 씻음과 정결함과 죄 고백과 회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누구든지 죄를 처리하지 않으면 완전히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우리의 삶 속에 고백해야 할 죄가 있다는 것을 우리도 알고 있을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하나님 보시기에 괜찮을 것라고 우리 스스로 생각할 때가 있다. 시편 139편 23-24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다윗조차도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알 수 없음을 고잭하는 글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만 아시는 약점과 결함을 갖고 있다. 따라서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께 탐조등을 켜서 그늘진 부분을 밝히 비추어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중요한 장애물
궁극적으로 영으로 드리는 예배를 방해하는 중요한 장애물은 단 하나, 바로 나 자신이다. 하나님 보다 자신을, 내 필요와 유익과 축복을 더 중요시하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다른 일로 인하여 집중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소홀히 한다. 육신에 대해 죽기 전에는 아무도 영으로 얘배할 수 없다. 예수님은 그것을 자신을 부인하는 것으로 묘사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진리로 예배하라
예배는 단순이 어떤 감정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말씀 또는 음악과 함께하는 감정적인 활동이 아니다. 예배는 분명 어떤 이성적인 생각이나 성경적인 교훈과 동떨어진 인간의 열정의 신비로운 카타르시스가 아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진리에 경배와 찬양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시편 145편 18절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라고 말한다. 우리가 진리로 예배드려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면, 곧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말씀을 전하라
설교의 목적은 단지 감정적인 경험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의 주요 임무는 청중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말씀을〕권하라”(딤후4:2)는 것이다. 강해설교에 전념하지 않는 젊은 사역자는 자신의 사역을 기만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많은 교회, 즉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이 홍보와 준비 절차에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정작 프로그램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강단에서 설교자가 할 일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자리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말씀과 예배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다. 모든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지적이고 애정어린 반응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가 없으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가 될 수 없다.
-영과 진리가 만나는 곳
모든 진실한 예배는 하나님의 진리와 말씀에 전심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진리는 예배의 객관적인 요소이며 영은 주관적인 요소다. 둘 다 함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삶을 지배할 때, 잘 정돈된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의 기준에 따르는 예배를 드리게 된다. 예배의 본질은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찬양과 기도, 노래, 헌금, 삶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며, 언제나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진리에 기초를 둔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스럽게 헌신해야 한다.
Part 13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 영광
예배는 하나님이 직접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하여, 우리의 태도 · 행동 · 생각 · 말을 통해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찬양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소요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과 답은 이것이다.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은 두 가지 면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타고난 또는 ‘고유의 영광’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영광스러운 하나님일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가 그분을 예배하기 위해 창조되기 전부터 그분은 영광스러운 분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본성에 포함된 본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없앨 수도 없고 더할 수도 없다. 줄어들 수도 없는 온전한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곧 하나님의 존재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는데 있어 무엇을 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존재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든 자신의 영광을 나누어주거나 함께 나누지 않으신다. 이사야 48장 11절에서 하나님은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의 두 번째 면은 ‘주어진 영광’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할 때 뜻하는 것이 바로 그 영광이다. 시편 29편 1-2절에서는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라고 말한다.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가
첫째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마치 우리 자신의 업적 때문에 우리가 칭찬받을 가치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 사도 요한은 스물네 명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면류관을 벗어드릴 때 하늘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4:11)
둘째,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만물을 만드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전반적인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이 의인들에게 받으시는 영광은 특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특별한 소명이다. 이사야 43장 21절에서 하나님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교회에 대해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말한다.
-예배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구원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고 복종할 때, 그로써 참된 예배자가 된다. 빌리보서 2장 9-11절은 주 예수님에 대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예배가 삶의 양식이듯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예배자의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은 좀처럼 실천하기 힘든 구절로, 참된 예배자의 삶의 전략을 제시해 준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먹고 마시는 세속적인 활동부터 시작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삶을 드리고자 할 때는 절대로 우리 자신의 영광을 추구할 수 없다. 당신이 성경을 가르치든, 간증을 하든, 기도를 하든, 헌금을 하든, 죄를 꾸짖든, 다른 어떤 선한 일을 하더라도, 당신의 동기가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켜 개인적으로 칭찬받기 위함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의 노력을 진실로 축복해 주실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은 곧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참된 예배자는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얼마나 돈을 벌게 될지, 얼마나 성공할지, 얼마나 큰 명성을 얻을지, 얼마나 많은 친구를 얻을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영적으로 보일지 등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는 고독한 일이다. 참된 예배는 인기나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과 아무 상관이 없다.
-대가를 지불함
출애굽기 모세는 율법을 받은 후 산에서 내려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바로 시내산 기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훔치고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위태로워지자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이 어려운 일을 수행해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각 사람이 칼을 차고 각 형제를, 각 친구를, 각 이웃을 죽여야만 했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명 가량이 죽임을 당했다.
Part 14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법
예배는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예배는 신중하고, 목적이 있고, 적극적인 것이다. 참된 예배자의 삶은 기쁘고 활기가 넘친다. 즉, 실제적인 면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삶이다.
-하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절대적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는 의심과 염려를 작은 죄로 여기지만, 그리스도인이 불신, 불안, 삶에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스스로 세상을 향해 ‘ 내 하나님은 정말로 믿을 수 없는 분’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무례함은 근본적인 잘못과,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가증스러운 죄를 범하게 된다. 이는 결코 작은 죄가 아니다. 흔들림 없는 믿음의 좋은 예는 다니엘 3장에 나오는 풀무불에 들어간 세 청년의 이야기다.
-입술의 찬양
우리는 또한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시편 50편 23절에서 하나님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라고 말씀하신다. 감사의 찬양은 하나님의 속성과 행위를 고백하고,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신 일들에 감사함으로써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시편 107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라는 구절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현재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공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신실함을 본보기로 보여주셨고, 그 놀라운 행위들은 그분이 언제나 신실하신 분임을 계속해서 상기시켜 준다.
-죄를 자백함
우리는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린다. 요한일서 1장 9절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는 죄 고백을 예배로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도 예배다. 우리의 죄를 자백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을 경험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를 받아들이고, 그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죄 고백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는 그 자체가 예배행위이고, 둘째는 회개하는 죄인이 예배를 드리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풍성한 열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빌립보서 1장 10-11절도 영적인 열매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을 확증한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갈라디아서 5장은, 행동뿐 아니라 태도에서도 열매가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열매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다.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이자 회의론자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당신이 나에게 구원받은 삶을 보여주면 내가 당신의 구원자를 믿겠다”라고 말했다. 영적인 열매는 순종하는 삶의 결과를 세상에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우리가 맺는 열매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준다.
-확신 있는 기도
예배와 기도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다. 요한복음 14장 13절은 기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하되, 우리가 구하는 것이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과 일치해야 한다. 예수님이 원치 않으시는 것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는 없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다. 즉,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의식하며 살고, 그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말하고,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일치시키고, 그 다음에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기꺼이 고난받는 마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은 항상 고난을 수반할 수 있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위해 죽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미가야는 감옥에 갖혔다. 이사야는 톱으로 죽임을 당했다. 바울은 참수형을 당했다. 구전에 의하면 누가는 감람나무에 달려 죽었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순교를 명하실 수도 있다.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이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만족하는 마음
만족은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을 증거하며, 그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상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0-13)
-분명한 증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예배는 예배를 낳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순환 주기는 새 신자의 삶 속에서 다시 시작된다.
Part 15 예배의 본래 의미
윌리엄 템플은 예배를 이렇게 정의했다.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양심을 일깨우고, 하나님의 진리로 마음에 양식을 공급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상상력을 정화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의지를 바치는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모든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것에 올바로 반응하는 것이다.
-예배 준비하기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 의식을 위해 찬양대가 준비하고, 설교자가 준비하고, 오르간 연주자와 다른 음악가들이 준비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준비는 예배드리는 개개인의 준비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것이 가장 등한시 되고 있다. 히브리서 10장 22절은 예배로의 부르심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배자에게 어떤 준비를 기대하시는지에 대해 풍성한 통찰을 준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 구절은 우리의 예배 준비 상태를 점검하는 네 가지 포인트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진실성’이다. 우리는 “참 마음”으로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는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에만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예배를 준비하는 데 있어 두 번째 포인트는 ‘충성’이다.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참된 예배자는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충성이다.
세 번째 포인트는 ‘겸손’이다. 우리가 온전한 믿음으로 확신있게 하나님께 나아가더라도, 우리는 무가치한 존재이므로 반드시 겸손하게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악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0장 22절의 마지막 포인트는 ‘순결함’이다.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그것은 말 그대로 몸을 씻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죄를 다루기 위해 필요한 매일의 죄 고백과 영적인 정화를 뜻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1장 9절은 깨끗하게 해주시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장애물을 극복하는 예배
많은 사람들이 몇 년 동안 교회에 다녀도 진심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다가오시는 것도 잘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개인적인 경건생활에서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난 것 같다. 성경에 그런 장벽을 무너뜨리는 예배의 몇 가지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첫째는 ‘회개의 예배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했고, 그 다음 그녀의 남편을 죽게 만들었다. 밧세바는 죄의 결과로 아이를 임신했고, 그 결합으로 태어난 어린아이는 죽고 말았다. 다윗은 자신의 죄에 대하 하나님이 공정하게 징계하고 계심을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의 예배를 드렸다. 그는 징계받는 중에도 하나님을 예배했다.
장애물을 무너뜨리는 두 번째 예배는 ‘복종의 예배’다. 욥이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 즉의 재산과 가족과 자식들까지 모두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드린 예배가 복종의 예배였다. 욥은 다윗처럼 죄를 짓지 않았다. 하나님이 죄 때문에 징계하신 것이 아니었다. 다만 사탄이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나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도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하고 고백했다.
세 번째로 ‘헌신의 예배’는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목숨을 가져가시리라는 걸 알고도 그것을 예배로 여길 수 있었던 아브라함은 그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예배를 위해 헌신하였다.
-본래 의도된 예배의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예배 드릴 때 몇 가지 결과를 목격할 수 있다. 첫째,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신자들은 정결하게’ 된다.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예배의 또 하나의 특징은 교회가 교회되는 것이다. 즉, 성도들이 세움을 받고 변화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때 ‘잃어버린 자들이 돌아온다’
♠부록♠ 마음과 생각과 목소리로 / 찬송가와 가스펠
가스펠송은 대체로 찬송가보다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 더 많고, 대부분의 가스펠송은 청중을 겨냥한 개인적인 간증의 표현인 반면, 고전적인 찬송가는 대부분 곧바로 하나님께 향하는 찬양의 노래들이다.
-새 노래
가스펠의 스타일과 형식은 19세기 말의 대중음악 스타일을 빌려 온 것이다. 가스펠송의 증가와 더불어 고전적인 찬송가의 작곡이 그쳤는데, 일반적으로 가스펠송의 증가는 객관적인 교리적 진리를 덜 강조하고, 주관적인 개인의 경험을 더 확대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일부 전형적인 가스펠송들이 성경적 신학적인 진리를 너무 가볍게 다루고 있기도 해서 전통주의적 비평가들의 반감을 가져오기도 했다.
가스펠송이 복음전도와 간증에서 중요하고 효과적인 역할을 해 온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나오는 곡들이 모두 가스펠송이었고, 마틴루터 시대와 그보더 훨씬 전부터 번성해 온 기독교 찬송가의 풍요로운 전통이 거의 막을 내렸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고전적인 찬송가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맥락에서 성경적이고 교리적인 개념을 가르치고 강조하기 위해 쓰였다. 그 찬송가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찬미하고 선포하면서 예배자가 진리를 더 깊이 깨닫게 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들은 감정적인 만큼 지적인 예배의 기준을 세웠다. 최초의 계명이자 가장 큰 계명은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다(마22:37).
-합창의 시대
20세기 말에 가스펠송이 새로운 형태, 즉 합창의 형태로 바뀌었다. 합창곡은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가사에 기억하기 쉬운 곡조가 어우러져, 대개 가스펠송보다 가사가 짧고 반복되는 부분이 더 많다. 합창곡은 찬송가처럼 대개 직접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다. 그러나 찬송가와는 달리 합창곡은 일반적으로 교훈적인 목적이 없다. 합창곡은 단순히 개인적인 예배의 표현으로 부르는 곡이고, 찬송가는 대개 어떤 교리적 진리를 강조하고 집단적인 예배의 표현이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기독교 음악에 대한 성경적 처방은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 발견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모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시(psalm)는 악기의 반주에 맞추기 위해 쓰인 거룩한 노래를 말하고, 찬송(hymn)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 종교적인 찬가를 말한다. 한편 노래(song)는 성스러운 음악도 될 수 있고, 세속적인 음악도 될 수 있다. 그래서 사도는 ‘신령한 노래’ 또는 신령한 것들에 대한 노래라고 명시하고 있다.
가스펠송은 교회음악에 적합한 것이었지만, 가스펠송의 선호로 찬송가의 작곡을 멈춤으로서 찬송가의 풍요로은 유산을 버린 것은 잘못이다.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기
우리는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도록” 명령받았다. 현대의 합창 찬양곡은 가르치거나 권면하는 것이 거의 없다. 오직 감정만 자극한다. 신비로운 주문처럼 부르는 경우도 아주 많다. 우리가 불러 온 합창곡들은 명백히 잘못된 부분은 없지만, 대부분의 곡에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다. 그 곡들은 열정을 일으키는 수단으로 쓰였다. 예배의 중심이었던 설교가 이제는 ‘예배’와 별개의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사실상 ‘찬양과 경배의 시간’을 침범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음악의 적절한 기능에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 포함된다면, 그 교회음악은 감정을 자극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해야 한다. 사실 이 말은 음악과 설교가 같은 목적을 지녀야 한다는 뜻이다. 음악은 설교와 마찬가지로 말씀 사역의 한 요소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작곡가는 설교자만큼 성경에 능숙하고 신학적인 정확성에 신경을 써야 한다.
우리가 무슨 노래를 어떻게 부르느냐는 우리의 예배를 평가하는 가장 좋은 지표 중 하나다. 만일 우리가 영과 진리로 성경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진정한 예배자라면, 그것이 우리의 음악에서도 명백히 나타나야 한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