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연(李子淵)은 인주(仁州)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신라의 대관(大官)으로 사신의 명을 받들고 당(唐)나라에 들어갔을 때, 천자가 그를 가상히 여겨서 이씨 성을 하사하였고, 〈그〉 자손들이 소성현(邵城縣)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그곳이〉 바로 인주이다. 이허겸(李許謙)이라는 자는 소성백(邵城伯)으로 봉해졌으며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이한(李翰)을 낳았다.
이한은 이자연·이자상(李子祥)을 낳았는데, 이자상은 상서우복야로 추증되었다.
이자연은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정종(靖宗) 초에 급사중(給事中)에 보임되고 여러 번 승진하여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 문종(文宗) 때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 叅知政事)에 제수되었고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승진하였다. 왕이 그의 딸을 맞아 비(妃)로 삼으니 〈그에게〉 수태위(守太尉)를 더하여 주고 처인 낙랑군군(樂浪郡君) 김씨(金氏)를 대부인(大夫人)으로 삼았으며 아들 이의(李顗)는 군기주부(軍器主簿)를, 이호(李顥)와 이전(李顓)은 모두 9품직을 제수하였다. 후에 문하시랑평장사 수태부(門下侍郞平章事 守太傅)를 더하여 주고 김씨를 계림국대부인(雞林國大夫人)으로 봉하였으며 의대(衣襨)를 하사하였다. 〈이자연은〉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門下侍中 判尙書吏部事)로 승진하였다.
〈이자연이〉 주문(奏文)을 올려 아뢰기를, “천지의 재앙과 상서로움은 늘 형정(刑政)의 득실과 상응하는 것이므로 상벌을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이 살펴보건대 이부(吏部)·형부(刑部)는 임무에 사리를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한데 날이 가고 달이 가도 계류(稽留)되어 처리되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만약 양부(兩部)의 관원들에게 일의 이치를 정밀하게 조사하고 관리들의 근면과 태만을 살피게 하여 내보내거나 승진시키신다면, 곧 폐하께서 정사에 힘쓰시고 형벌을 너그럽게 하시는 뜻과 맞아서 많은 원통함과 억울함이 해소되어 행운[休祥]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또 주문을 올리기를, “근래 흥왕사(興王寺)를 창건한다고 덕수현(德水縣)을 양천현(楊川縣)으로 옮기게 하였는데, 백성들이 살집을 짓느라 편히 있을 겨를이 없고 남녀가 짐을 지고 가니[男負女戴] 도로에 이어집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시체가 되어〉 골짜기에 버려질까 하는 걱정이 있고 부자들도 편안히 거처할 곳이 없습니다. 청컨대 덕수현의 민(民)에게 한 해의 부역을 면제해주어 소생할 수 있게 하옵소서.”라고 하니, 〈왕이〉 제서를 내려 특별히 〈부역〉 2년을 면제하여 주었다.
왕은 이자연의 공로가 높고 임무가 중하다 하여 다시 의대(衣襨)·은그릇·안장 달린 말(鞍馬)·곡식과 비단을 하사하고 식목도감사(式目都監使)로 삼았다.
〈이때〉 주문을 올려 아뢰기를, “제술업(製述業)〈에 응시한〉 강사후(康師厚)는 10번의 과거시험에서 급제하지 못하였으나, 갑오년(1054) 사면 조서의 예에 의하면 벼슬에 나가야[脫麻] 마땅합니다.
그러나 강사후는 유림랑 당인(儒林郞 堂引)이었던 강상귀(康上貴)의 증손인데, 당인은 곧 구사관(驅史官)입니다. 엎드려 보건대 무자년(1048)에 제서를 내리시어, ‘전리(電吏)·소유(所由)·주선(注膳)·막사(幕士)·구사·문복(門僕)의 자손으로 제술과(製述科)·명경과(明經科)·율업(律業)·서업(書業)·산업(算業)·의업(醫業)·복업(卜業)·지리업(地理業)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였거나, 혹은 전쟁터에서 큰 공을 이룬 사람들은 조정의 벼슬에 오르도록 허용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병신년(1056)의 제서를 보면, ‘위 항목에 〈해당하는〉 사람의 자손으로서 특명으로 관직에 오른 사람들은 조부와 부친의 벼슬길[仕路]을 헤아려 제수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강사후는 벼슬에 나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참지정사(叅知政事) 김현(金顯) 등 5명이 주문을 올려 아뢰기를, “강사후의 증조부 강상귀는 직책이 비록 당인이었으나 유림랑을 겸직하였고, 아버지 강서(康序)는 과거에 10번 응시한 후 벼슬할 수 있었습니다. 강사후의 10년 형설지공(螢雪之功)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역시 벼슬길에 나가도록 허락하옵소서.”라고 하였으나, 왕은 이자연 등의 의논을 따랐다.
후에 〈이자연에게〉 추성좌세보사공신(推誠佐世保社功臣)의 칭호를 하사하고,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중서령 감수국사 상주국 경원군개국공(開府儀同三司 守太師 兼中書令 監修國史 上柱國 慶源郡開國公) 식읍(食邑) 3,000호를 더해주었다. 죽은 후 시호를 장화(章和)라 하고, 문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아들 이호(李顥)는 경원백(慶源伯)을 추증 받았고, 이정(李頲)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으며 죽으니 시호를 정현(貞憲)이라 하였다. 이의(李顗)·이전(李顓)은 모두 재상에까지 올랐다. 〈이자연의〉 세 딸이 모두 문종에게 시집가니 첫째가 인예태후(仁睿太后), 둘째가 인경현비(仁敬賢妃), 셋째가 인절현비(仁節賢妃)이다. 이호의 아들은 이자겸(李資謙)·이자량(李資諒)인데, 이자겸은 「이자겸전(李資謙傳)」에 있다. 이정의 아들은 이자인(李資仁)·이자의(李資義)인데, 이자의는 「이자의전(李資義傳)」에 있으며, 증손은 이혁유(李奕㽔)이다. 이의의 아들은 이자현(李資玄)·이자덕(李資德)이며, 이자상(李子祥)의 아들은 이예(李預)·이오(李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