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터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표석문구
1946년 8월 국립 서울대학교로 발족 문리과 대학이 설치되었고 1975년에 관악산 기슭으로 이전되었다.
표석설명
경성제국대학
1920년 6월 10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재단법인 조선교육회를 발기하고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하여 종합대학의 설립을 추진하자, 이에 일제가 한국인의 고등교육기관을 봉쇄할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다.
이 학교에는 조선사람의 독립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다고 판단된 정치·경제·이공 등의 학부는 설치하지 않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법문학부·의학부만 설치하였으며 1941년에 이공학부를 설치하였다.
경성의학교의 초대 교장은 종두법을 최초로 실시한 지석영이 역임하였다.
경성제국대학의 졸업 후 진로는 고등문관시험을 거쳐 관리가 되거나 의사 혹은 은행원이나 회사원이 되어 선망의 직업인 ‘월급쟁이’ 생활을 누리는것이었다. 법학부를 졸업한 이는 판검사가 되거나 변호사로 진출할 수도 있었다.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사회저명인사로는 유진오, 신남철, 이효석, 이희승, 박치우, 전승범이 있다. 이렇게 경성제국대학으로 상징되는 학력우선주의는 식민지 조선을 나타내는 하나의 단면이 되었다.
서울대학교
1945년 11월, 100명의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교육심의회'가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 건물을 활용하여 국립종합대학교를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1946년 8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이 공포되었고, 이어 10월에 국립서울대학교로 개교하였다.
얽힌 이야기
가짜 대학생 사기사건
경성제국대학은 입학만으로도 영광인 여전히 최고의 대학이다. 당시 입학 경쟁률은 매년 8대 1에서 13대 1을 오갔다. 이러한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경성제국대학생은 그야말로 행운아였다. 대학생! 대학생은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다보니 일반인들 중에도 대학생을 흉내내고 싶어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경성에서는 주로 경성제국대학의 제복을 갖추어 입은 가짜 대학생이 심심치 않게 출몰했다.
기생의 집에 수차 놀러오던 한 대학생이 있었다. 그는 항상 대학생의 정복과 정모를 쓰고 오곤 했다. 대학생은 경성제대의 학부학생인데 평양도립의원으로 연구를 하러 왔지만 밥값이 없어 여관에 갈 수 없다고 했다. 기생은 연민을 느껴 자신의 집에서 있으라 권했고 극구 사양하는 그를 붙잡아두고 극진히 대접을 하였고 결국 정까지 통하였다. 그는 이따금 연구하러 간다고 나갔는데 청량음료수를 자기가 연구하여 만들었으나 자금이 없어 만들지 못한다고 하며 기생을 속여 그녀에게 250원을 얻어가지고 달아났다.
참고문헌
1.경성리포트, 최병택, 예지숙 저, 시공사, 2009.08.10
2.동아일보 1933년 8월 26일자, 1938년 6월 5일자, 1938년 12월 11일자
3.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경성제국대학.”
출처:(문화원형백과)
2024-04-19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