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람이 아닌 나로서는 말죽거리라는 지명은 왠지 귀에 익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딜 말하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도다...
왠지 재밌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사는 곳이라는 생각만 든다.
영화 속 '현수'의 내레이션에서 짐작해보면, 말죽거리는 현재의 강남 지역으로 주인공 현수가 살던 무렵에는 다소 낙후된 지역이었던 듯 싶다. 이 거리에서 어떤 잔혹한 일이 벌어지길래...?
(나중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양재동의 옛 이름이 말죽거리란다. 역시 모르긴 마찬가지...)
요즘 영화들을 보면, 주인공이 어떤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시대'라는 느낌을 받곤 한다. 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스캔들'을 위시하여, 70년대 유신 독재 권력이 드러내는 광기의 한 극단을 포착한 '실미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80년대의 타성적이고 무기력한 모습을 포착한 '살인의 추억'을 보라. 이 영화들에서 인물들로 하여금 어떤 특정한 행동을, 어떤 특정한 사고를 하도록 추동하는 데에는 다름 아닌 바로 '시대(혹은, 시대 분위기)'의 역할이 크다.
혹시 유하 감독은 스콜세지를 닮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아니면 우디 알렌 일지도...). 스콜세지가 뉴욕을 배경으로 장르가 다른 많은 영화들을 찍었듯, 그 역시 강남 주변을 배경으로 필모그래피를 채워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대' 못지 않게 '장소' 또한 중요하다! 어느 영화 평론가의 말을 빌리건대, 아무리 뻔한 삼각관계고, 뻔한 서사구조라도 모종의 지정학적, 역사학적인 구체성 속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면 색다른 매력을 발산해낼 수도 있다?!
에... 그런데, <말죽거리 잔혹사>는 감독이 밝히고 있듯, 유하 감독 자신의 경험이 반영된 자전적 영화다. 정말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자기 자신의 치부를 백 퍼센트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므로...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말죽거리>에는 유하 감독의 자전적인 요소가 일부 반영되어 있을 뿐이지 말 그대로의 전기영화는 물론 아닌 것이다. 당연하겠지! 이런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굳이 하는 것은 앞으로 이야기하면서 들춰내어질 이 영화의 단점들, 아니 꼭 단점이라기 보다는 모순되는 점들에 대한 변명을 미리할 요량으로 그런 것이니 그리 생각하고 이해해 주시길...!
<말죽거리>는 말했다시피, 지정학적, 역사학적인 구체성, 즉 디테일이 색다른 매력을 발산해내는 영화다. <스캔들>이 이미 그런 경지를 보여줬거니와, <말죽거리>가 유리한 것은 <스캔들>은 그 시대를 직접 살아본 사람이 없지만, <말죽거리>가 재현하고 있는 과거는 그리 먼 옛날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하 감독과 동기인 김성수 감독이 그와의 인터뷰에서 말하듯, 한남동 가는 76번 버스나 고고장 같은 디테일들은 그 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장치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영화가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그런 디테일의 정확함만으로는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다른 연령대의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가 없다. 뭔가 보편적인 것, 그러니까 앞서도 말했지만, 깡패와 범생이 사이의 우정, 전형적인 삼각관계, 선생님들의 부당한 폭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소룡이라는 인물에 대한 판타지 같은 것들이 전면에 나서 줘야 하는 것이다. 디테일을 보고 추억을 떠올리며 즐거워할 사람들은 어차피 소수일 것이므로.
여기서 문제 삼을 만한 것은 이소룡에 대한 판타지가 부단한 연마를 통해 '실현된다'는 것이다(현실에서 판타지에 대한 동경은 대개 좌절되기 마련인데, 영화에서는 개연성 있어 보이는 노력의 결과로서 실현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러한 판타지의 실현은 특정 배우의 이미지에 의해 정당화 되곤 한다. 이 영화에서는 권상우라는 배우의 출연이 판타지의 실현을 이미 예고하고 있다). 물론 영화 자체가 판타지적 산물이기에 그런 걸 두고 비난의 꼬투리로 삼을 생각은 아니다. 다만 너무 안이한 설정이 아니었나, 그래서 조금은 심심한 꼴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든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선생들의 갖가지 폭력과 그것을 모방하는 학생들, 그 사이의 권력관계가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졌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전형적인 삼각관계나, 최후의 클라이막스 장면인 옥상 결투 장면들은 매우 로망스적(낭만적, 비현실적이란 의미로 썼다)이다. 앞서 말한 뭔가 모순된다는 느낌이 바로 이러한 점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빌미로 감독을 비난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결코 리얼리즘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포스터에서 분명히 '학원 액쑌 로망'이라고 장르를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은가. '학원'의 현실에 대해서는 매우 적나라하게 다루어졌으니 말할 것도 없겠다. 그렇다면 (8대1 옥상 결투 장면으로 대표되는) '액쑌 로망', 바로 이것을 어떻게 보여주었느냐, 그 방식에 대해 관객이 어느 정도 공감하였는가, 이 점이 관건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수를 비롯한 각 등장인물의 캐릭터에 관객이 어느 정도 공감하는지에 달려있다. 현수는 자신감이 없고 마음 약하고 싸우기를 싫어하지만 농구 장면에서 보듯 운동 신경이 뛰어나며 아버지는 태권도장 관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때에 따라서는 불의에 맞설만한 용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물론 불의에 맞서는 방식 역시 그답게 소심하기 짝이 없지만. 현수의 이러한 캐릭터가 최후의 한 마당 '액쑌 로망'을 개연성있는 것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선도부 종훈과 결투를 하러 가는 중에 뒤에서 쌍절곤으로 '비겁하게'(또는, 소심하게) 머리를 내려치는 모습을 보라. 그는 결코 영웅이 아니다.
당시, 수많은 학생들이 억압적인 학교,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소룡을 보며 영웅이 되기를 꿈꾸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판타지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이소룡은, 그리고 이소룡에 대한 열광은 하나의 도피구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 흔히 말하는 디즈니 풍의 '꿈과 희망', 또는 그것을 대변하는 '정의로운 영웅' 따윈 어울리지 않는다. 이소룡은 분명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하나의 도피구로서 기능했지만, 이소룡이 창시한 '절권도'란 게 오직 이기기 위해 만들어진 권법이란 걸 생각하면 뭔가 아이러니하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학생들의 이소룡 흉내내기는 하나의 거대한 억압에 대해 또 다른 (하위) 억압을 만들어 냄으로써 대처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끝없이 반복되는 억압과 폭력의 순환고리. 짱의 자리를 두고 결투와 배신이 거듭되며, (상대적) 강자의 (상대적) 약자에 대한 폭력은 먹이 사슬처럼 이어진다. 그에 따라 중심부와 주변부도 끝없이 재편된다. 마찬가지로 권력의 중심 또한 시간과 장소에 따라 끝없이 이동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폭력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홉스의 세계관이 꼭 들어맞는 우리의 근대사...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란 구호로 대표되는 가치관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 칠십 년 대 말.
그 땐 왜 그랬을까......?
혹은, 우리는 왜 지금도 이 지랄들인가?
그 때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현재에 우리는 살고 있다. '말죽거리의 잔혹한 역사'는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오히려 현재의 폭력은 세계화라는 자못 세련된 가면을 쓰고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 잔혹하다. '경쟁력'을 갖춘 경제적 동물이 되기를 강요받고 있는 우리들...
요즈음 한국 영화를 보면서 우리나라도 결투 장면에 있어서 만큼은 수준급에 도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미 몇 년전 류승완 감독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싸움 장면을 보여준 바 있거니와, 최근의 <올드 보이>나 <말죽거리>가 보여준 싸움 장면들 역시 그 리얼함과 처절함에 있어서 일정한 경지에 도달한 듯한 느낌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장면들이 요즈음 한국 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아니 연이어서 등장하는 이유, 그리고 감독들이 이러한 장면을 찍으면서 의도했던 바는 뭘까? 또한 관객들이 그러한 처절 액션 장면에 적잖은 호응을 보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복수심(또는, 피해의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한계 상황에 내몰렸다면, 그러한 상황에서 가질 수 있는 심정은 바로 복수심이다. 그러나 그런 복수심이 뚜렷한 대상에 집중되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실업이나 가난이 부패한 정치 탓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 생각만으로는 구체적인 복수를 실행하기는 어렵다. 그냥 불평을 하고 짜증을 내기는 쉽지만,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의 진짜 원인을 찾아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수의 복수 역시 정말 복수를 해야 할 대상에 대한 복수는 아니었다. 단지 그가 생각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는 수준에서 구체적인 복수의 대상을 찾아낸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복수를 보고 환호한다. 애초부터 권상우라는 배우가 끝까지 소심하게 가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기대를 가져서일지도 모른다(모 평론가가 말한, <말죽거리>는 현대 강남의 섹슈얼리티를 교묘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는 매우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근자의 처절 액션 장면들을 보면서 어쩐지 화면 위로 '억압된 한국의 남성'들의 모습이, 그들이 대리 만족하고 있는 모습이 겹쳐지는 것 같다. 날이 갈수록 세련되어져 가는 각종 억압들, 이제는 억압인지 아닌지도 모르게 교묘해진 억압들에 대해 날 것 그대로인 몸 하나로 대응하는 원시적인 몸짓들, 그 원초적인 폭력에 대한 향수, 그리고 마음 한 켠에 자리한 매저키즘적 쾌락까지. 그 역시 또 하나의 왜곡된 판타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음은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래도 끌리는 건, 그만큼 나 자신의 복수심이 강하다는 걸까?
아니면, 이 시대가 여전히, 그리도 잔혹한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