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미련
신외숙
버스가 강남역 부근을 지나고 있었다.
각종 모양의 빌딩이 눈을 찌를 듯이 다가왔다. 예전에는 직사각형 빌딩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기하학적 모양의 빌딩이 마치 하나의 예술군락을 나타내 주는 것만 같다.
이제 건물은 예술적 기능마저 감당해 거리를 럭셔리하게 치장하고 있다. 식을 줄 모르는 부의 경쟁과 밀집된 학원가가 여전히 강남역 거리를 차지하고 있다. 수없는 영어간판과 직사각형의 전광판에서 뿜어내는 빛이 행인들의 마음을 쏘고 있었다. 거리를 완전 셋팅한 느낌이었다.
차로에는 신형 에쿠우스와 벤츠가 꽉 메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매체마다 떠들어대는 경제논리가 이곳에서는 완전히 비껴나 있었다. 나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잠시 심호흡을 했다. 15년 전, 나는 이 거리 중간쯤에 있는 유학 센타에서 근무했었다. 강남역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젊음과 유행과 부와 명예가 집합된 곳이었다.
또한 이 강남 거리는 내 소설과 시나리오가 무진장 산재돼 있는 곳이다. 내 최초의 시나리오가 이곳에서 탄생되었고 수많은 중 단편이 이곳에서 태동되었다. 또한 내 과거와 현재가 한데 뭉쳐 내 의식을 여전히 조종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거리는 흡사 외국을 방불케 한다. 머리칼을 노랗게 물들인 젊은이들이 원서를 가슴에 끼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강부자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만하다.
럭셔리(luxury)라는 단어가 이곳에서 출발하지 않았나 싶다. 영상매체에서 미용실간판에서 유행어로 럭셔리라는 단어를 대했을 때 처음에는 신조어인 줄 알았었다. 심지어 젊은 세대들이 꾸며낸 비속어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그 뜻을 알아보았더니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사치 호화롭다는 뜻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이 거리는 럭셔리 그 자체이다. 버스가 뱅뱅사거리를 지나 양재역을 지났다. 시민의 숲을 지나자 차량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건물은 아직도 럭셔리하게 내 눈에 비쳐지고 있었다. 초록을 몰아내고 세워진 건물은 세월의 흐름을 감각적으로 일깨우고 있다. 공허감이 가슴속에 밀려왔다.
나는 조금 전에 생각했던 대사를 다시 한번 끄집어냈다.
"딱 한번만 만나자. 더도 없이 딱 한번만.
"어떡케 만날 건데?"
"무슨 이유로?"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 건데?"
"그보다도 만나주기나 할까?"
의문표가 계속 꼬리표를 달고 마음속에 날아왔다. 불안과 후폭풍으로 예상되는 상처와 후회라는 단어도 연이어 마음 속에 전해졌다. 나는 반복적으로 자문자답하며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후회할 때 하더라도 만나보자. 설사 상처받는 일이 발생한다 할지라도 꼭 만나보고 싶다. 그를 만나지 않으면 아무래도 미칠 것만 같다. 그를 보고서 꼭 묻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이 뭔데?
지금은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를 만나서 할 말이 있다. 가슴속에서 쾅! 하는 굉음이 울리는 것 같다. 창 밖으로 서울 어린이 병원이 지나가고 있었다. 십 년 전, 봉사하는 청년을 만나 저곳에 간 적이 있다. 태어난 지 몇 개월 안 되는 어린아이들이 좁은 침대에 갇혀 누워 있는 병동이다.
선천적 기형으로 태어나 간신히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불쌍한 어린 영혼들이다. 부모에게조차 버림받고 본능은 살아 있으나 제 기능을 못하는 탓에 누워지내다 죽는 가엾은 영혼들이다. 그들도 사랑받고 싶어 몸부림친다는…….
문득 서경숙이 생각난다. 말기암의 통증으로 몸부림치던 그녀는 죽기 직전 내게 말했었다.
"작가님, 난 평생 죽을 생각만 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이제 나이 오십이 넘어 암으로 생명을 마치게 되네요, 내 이 기막힌 이야기를 소설로 써줄 수 있나요?"
그녀를 보면서 죽음이라는 실체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한 생명이 스러져 간다는 것. 병원에서 더 이상 손쓸 수 없으니 죽음을 준비하라는, 당사자의 심정과 상관없이 찾아오는 죽음,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모든 게 힘을 잃는다. 부와 명예도, 미모와 젊음도. 현재도 과거도 미래도.
사람들은 흔히들 말한다. 죽음을 앞두고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다고. 그 의미를 난 요즘 깨닫고 있다. 그래서 그를 만나려고 하는 것이다. 간암 말기가 내 몸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젠 정말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이다.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 현실은 냉정한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이입시키지 마라. 자아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고에서 탈피하라. 현실은 소설이 아니다. 냉정하게 현실을 분석하고 행동하라. 내 감정보다 상대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라.
지인(知人)들은 내게 점잖게 충고했다. 만일 그들이 내 병 상태를 알았어도 그렇게 말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이란 게 뻔하다. 기껏해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꼭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정도일 것이다. 하긴 죽음을 앞둔 사람의 심경을 누가 알겠는가. 당사자 외엔.
그런데 나는 왜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 그를 먼저 떠올렸던 걸까. 신앙 양심상, 천국을 먼저 떠올렸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어쨌든 그를 만나야 한다. 그를 만나서 꼭 해둘 말이 있다. 이미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있는 남자를 만나 어찌해보겠단 심사는 아니다. 여기서 윤리는 들먹거릴 필요조차 없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딱 한번 만나겠다는데 이것쯤은 눈감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그는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 내 이름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벌써 세월이 십오년이나 흐른 탓이리라. 만일 내가 그에게 "저 영현이에요."했다 치자. 그런데 그가 내 목소리는커녕 이름조차 기억 못하다면, 이런 낭패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나를 기억나게 할 것인가.
만일 옛날 기억을 하나 하나 끄집어냈는데도 그가 계속 모른 척한다면? 설사 알았다고 치자. 만일 못 만나주겠다고 나오면 그땐 어떡한단 말인가. 그러다 마지막 순간, 죽음이라는 카드를 꺼내든다면, 그는 과연 어떤 식으로 나올까. 만나줄까. 만일 끝까지 만남 자체를 거부한다면?
나는 갖가지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구상하면서 극심한 혼미상태에 들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만나줄 것 같지 않다. 그는 감정의 오차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성적이고 냉철한 두뇌는 예외의 법칙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생각할 것이다. 벌써 세월이 15년이나 흘렀는데 홀연히 나타나서는 만나달라니, 그게 어디 될법한 이야긴가.
웬만한 남자 같으면 만나줄 수도 있는 문제지만 그는 다르다.
15년, 전 그와 헤어지고 나서 전화한 적이 있었다. 헤어진 지 두 달쯤 되었을까. 짙은 가을날이었다. 일부러 공중전화 박스에서 걸었는데 처연한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신호음이 가자 여직원이 받았다. 그를 바꿔 달라는 말에 여직원은 누구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기분이 몹시 나빴지만 참았다.
그보다도 가슴이 무진장 뛰고 있었다. 그가 어떡케 나올지 몰라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부정맥(不整脈)을 앓아온 나는 그와 헤어진 후 증세가 심화되고 있었다. 여직원이 전화기를 바닥에 탁!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전선을 타고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전화 바꿨습니다."
두려움으로 가슴이 바작바작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저예요."
"……."
그 잠깐의 침묵이 고문처럼 느껴졌다. 내 정신을 향해 그가 엄청난 핍박을 가하는는 것 같았다. 한편으론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가 누구냐고 물을 줄 알았는데. 가슴 밑바닥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쩐 일로……."
"지난번에 갔었는데 못 뵙고 왔어요."
"언제 왔었는데."
"지난 화요일요."
"그래 요즘 어떡케 지내십니까?"
사무적인 질문에 나는 가슴이 탁 막혔다.
"새로운 직장에 다니고 있어요."
"잘됐군."
"건강은 어떠세요?"
"덕분에, 아직까지 나를 생각해 주니 고맙습니다."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몇 마디 대화가 더 오갔던 것 같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나에 대한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던 것 같다. 추호의 미련도 갖지 말라고 그가 단정적으로 명령하듯 말했었다. 조금치의 여지도 두지 않았다. 말의 요지는 이러했다. 니 마음대로 떠날 때는 언제고 이제와 전화질이냐.
그는 다른 여자들과는 농담이나 여담을 잘했다. 함께 술을 마시고 담배까지 나누어 피우고 자정이 넘은 시각에 여자 후배를 집 앞까지 태워다 준 적도 있다. 호탕하게 웃고 거리낌없이 행동했다. 그러나 내게는 달랐다. 단 한번도 농담을 하거나 지나가는 말로도 허튼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엄격하고 냉정하게 행동했고 말실수 한번 없었다.
그러면서 언제나 내 표정이나 행동을 예의주시했다. 최상의 예의를 갖추는가 하면 어느 부분에 가서는 철저히 무시했다. 여자가 무슨 …… 하는 식이었다. 술을 마시는 건 고사하고 술잔 잡는 것도 싫어했다. 남들에겐 개방적이면서 내게는 봉건적 폐쇄적으로 일관했다.
나는 성격상 남을 쉽게 좋아하지 못한다. 어릴 때부터 잔정이 없고 무엇보다 까다로웠다. 그래서 누구보다 감정조절에 익숙했고 때에 따라선 냉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일단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그땐 문제가 달라진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목숨까지 건다. 그가 그랬다. 어느사이엔가 나는 그의 꼭두각시가 되어 행동하고 있었다.
"어젯밤 너무 과음했나봐, 속이 쓰려."
어느 여름이었던가. 에어컨 바람이 세찬 카페에서 그가 손바닥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며 말했다. 동시에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왜 또 안색이 변하는 건가? 감정이 상했나?"
나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허구헌날 술만 마셔대니 속이 안 쓰리고 배겨? 속으로만 말했다.
"얼굴이 왜 그래? 또 잠 못 잤군?"
"네에."
이번에는 그의 안색이 싸악 변했다. 부담스럽군. 그의 눈빛이 말했다. 뭐가? 내 눈빛이 말했다.
"요즘 너무 바빠서."
"알아요."
그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왼손으로 머리칼을 매만지더니 거리가 보이는 창가로 다가갔다. 일류 모델 못지 않은 훤칠한 남자가 모델 같은 포즈를 하고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카페 안에 있던 여자들이 그를 향해 앞다퉈 시선을 던졌다.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 여전히 머리를 매만졌다.
그의 뒷모습에서 강력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강인함과 빈틈없는 철저함. 아무리 흔들어도 변할 것 같지 않은 요새와 같은 굳건함. 나는 그런 그의 카리스마를 사랑했다. 세상에 태어나 내가 가장 많이 사랑한 사람이었다. 내 감정과 이성을 통틀어 시간과 정성 모든 걸 다 내놓고도 아깝지 않을 그였다. 한마디로 그는 내 전부였다.
또한 나를 지탱해주는 불꽃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나는 지구 밖으로 밀려날 것만 같은 위기감마저 느꼈다. 사랑이 위기감으로 위기감이 집착으로 변해가면서 그의 눈빛이 점점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안정된 기쁨이 끊임없이 내게로 공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긴장된 순간에서 오는 격한 감정의 물결은 사랑에 대한 확고한 의지였다. 시간아 멈추어다오란 유행가 가사가 생각날 정도로 나는 그의 감정에 몰두했다. 아니 아예 목숨을 걸었다. 감성이 최고도로 달하자 영감(靈感)이 폭발적으로 떠올랐다.
아! 그때 분명 신(神)은 내 편이었다. 그를 통해 그렇게 훌륭한 영감(靈感)을 내 글속에 쏟아 부어 주었으니까. 나는 신(神)이 시키는 대로 작품을 완성하는데 힘썼다. 감정에 충실할수록 작품의 완성도는 높아졌고 나는 어느새 작가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의 감정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세월이 가면 다 잊혀진다고. 세월만큼 좋은 치료제는 없다고. 살다보면 또다른 기회가 오기 마련이라고. 그깟 거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환경을 바꾸고 취미생활에 몰두하면 옛일은 어느새 잊혀지기 마련이라고. 사람들은 수시로 내 귀에 대고 말했다. 그러나 내겐 아무 소용없었다. 워낙 집착의 끈이 강했기 때문이다.
나는 수없이 자살사이트를 드나들었다. 도무지 감정조절이 안 돼, 전철 속에 뛰어 들고, 동맥을 끊는 소동을 벌이며 삶과 사투를 벌였다. 죽으면 이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헤어날 것이라는 암시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홀연히 신(神)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 음성을 들음과 동시에 나는 무한의 고통을 신(神)과 창작의지에 쏟아 부었다. 창작에 몰두하느라 시간의 여백이 없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영감을 소설과 시나리오로 완성해 책자와 영상매체에 올렸다. 기자 인터뷰를 하느라 때아닌 골머리를 앓기도 했고 독자라며 다가오는 남자들을 따돌리기도 바빴다.
그러느라 그를 추억할 시간도 없었다. 점차 망각의 세월로 접어들었다. 그도 세월 속에 파묻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15년이란 세월이 인생판도를 완전히 뒤바꿔 논 셈이다. 가끔씩 내 이름 석자가 매체(媒體)에 오르내리던 어느날, 피곤이 강도처럼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글을 쓰느라 피곤이 누적된 줄 알았다.
그런데 피곤이 온몸에서 힘을 빼앗아 가더니 급기야 쓰러지는 사태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내가 졸업한 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가던 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었다. 응급차 사이렌 소리를 시나리오의 한 장면으로 생각한 나는 의사가 하는 말도 대사의 하나로 생각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의사는 내 직업이 작가라는 것을 아는 모양인지 뒷말은 아예 생략했다. 나머지는 알아서 판단하라는 것인지 잠시 말이 없었다.
"무슨……."
나도 의사처럼 뒷말을 아끼며 물었다.
"여태 건강검진도 안 받고 뭐한 겁니까?"
"네?"
"간암 말기입니다."
"네? 지금 뭐라구?"
나는 잘못 들기라도 한 것처럼 되물었다.
의사는 가운 자락을 한손으로 움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입원수속 하십시오."
"……."
암 말기라며 입원수속을 하란다. 나는 남의 일인 양 헷갈린다. 잠시 후 생각해 보니 의사가 내게 소설을 쓴 게 아닌가 싶다. 저 의사가 왜 하필 내게 소설을 쓰지. 그만큼 죽음이라는 현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죽다니…… 그동안 소설로 시나리오로 실컷 우려먹었던 죽음이 아니었던가. 15년 전, 죽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쓰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 죽음이 실제로 나를 찾아 왔단 말인가. 일주일이 지났다. 병원에서 가망이 없다고 해서 퇴원했다. 다시 열흘이 지났다. 그제서야 조금씩 죽음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몸 전체로 전이된 암이 통증을 호소해 왔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신(神)의 은총을 생각했어야 했다. 그러나 엉뚱하게 그가 먼저 떠올랐다.
그는 이미 결혼해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다. 미모의 아내는 광고업계에서 유망주로 주목받는 위치에 있었고 그는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4-5년 전,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내 입에서 생각지도 않은 말이 튀어 나왔다.
"죽어! 박형태 너 당장 죽어버려. 니 처자식과 함께 죽어 버리라구."
분노로 가슴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내 눈에서 그렇게 많은 눈물을 뽑아내고 죽음 예행 연습까지 시킨 그가 아니었던가. 그런 인간은 죽어야 한다. 이 지구상에 남아 있어선 안 된다.
"박선생이 왜 죽어야 하는데? 무슨 죄가 있어서? 박선생이 죄가 있다면 널 좋아한 죄밖에 더 있니"
친구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난 이러고 있는데 그 인간은 처자식하고 잘사니까 그렇지."
"그럼 니 생각만 하고 박선생이 평생 독신으로 늙어야 한단 말이니?"
나는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부정맥에 난류가 발생한 모양이었다. 심장은 통증을 견디다 못해 마비 증세까지 나타내고 있었다. 이제 겨우 나이 사십을 넘겼을 뿐인데.
막상 죽는다 생각하니까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 사람을 미워한 게 마음에 걸렸다. 진즉 용서했어야 했는데.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엇하겠는가. 그보다도 살아 있는 사람들과 이별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하니 그가 간절히 보고 싶어진 것이다. 마지막이라는 단서를 붙여 나는 그가 몹시도 보고 싶어졌다.
그와 헤어지기 전 하고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 말을 못한 게 너무도 아쉽게 느껴진다. 입안에서만 맴돌던 그 말.
당신은 내게 처음이었어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처음이었다구요,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한…… 정말이지 그 말을 꼭 하고 싶었는데, 세월이 15년 흐르고 나서 이제 말하네요, 아무 소용없는 그 말을. 남의 남자가 되어버린 당신에게 이 말이 무슨 얼토당토한 말인지 잘 알지만,
대학시절 책에서 읽은 내용이 생각나요, 사람이 이 세상을 이별할 때 신(神)은 인간에게 마지막 배려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보여준대요. 이 세상에 살아 있든 아님 이미 죽었든지 상관없이 보고 싶은 사람을 말하면 반드시 보여준대요, 그런데 당신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군요.
세월이 15년이나 흘렀는데. 그를 만나고 싶다는 건 욕심일까. 죽음을 앞두고 벌이는 치기(稚氣)일까. 아니 죽음이라는 핑계로 그에게 나를 각인시키려는 나의 속임수일까. 나는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그를 만나는 상상 시나리오를 쓰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서 시나리오를 완성해야 한다.
손끝에 핸드폰이 만져진다. 숫자를 누르려다 잠이 쏟아진다. 혼곤한 잠 속에 꿈이 출몰한다. 수정 바다가 보이고 열두 진주문이 청옥 벽옥 남보석 녹보석 홍마노 등 각종 보석이 빛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다. 흰옷 입은 천사들이 보인다. 형체는 분명 사람인데 언어가 없고 마음과 마음이 가슴으로 전해져 통한다.
한쪽으로 생명수 강가가 보이고 생명책이 보인다.
그곳에는 고통도 슬픔도 그리움도 없다. 강 같은 평화만 있을 뿐이다. 세상의 연(連)이 끊겨져 나간 자리에 오직 평강과 기쁨이 있을 뿐이다. 이 세상이 끝나는 날 나는 저 수정 바다와 황금길을 걸으리라. 그와 함께.
꿈에서 깨어난 나는 몸에 날개를 단 듯 가뿐하다. 몸에서 빠져나간 통증이 이젠 환희로 다가온다. 이 세상의 모든 미련이 다 사라진 듯 평화가 내 가슴에 흐른다. 어디선가 유행가 가락이 들려온다.
"사랑해요, 떠나지 말아요, 이별은 정말 싫어요."
15년 전, 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여가수가 대신 호소하고 있다. 그와 헤어지기 6개월 전이었다. 겨울날이었다. 그의 자동차를 타고 논현동을 지날 때였다. 저녁 무렵이었는데 이상하게 차로가 한산했다. "웬일이지"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엑셀을 힘껏 밟았다. 자동차가 언덕을 넘어 내리막길을 폭풍처럼 질주했다.
"오랜만에 시원하게 달려보는 구만."
그래, 더 실컷 밟아라. 너와 함께라면 저 세상인들 못 가랴. 너를 다른 여자에게 보내느니 차라리 같이 죽는 게 낫다. 그의 감정에 변수가 생길 때마다 생각한 말이었다. 나는 속으로 탄원했다. 그때였다. 일제 신형 오토바이가 우리가 탄 자동차 앞을 빙글빙글 돌며 새치기하는 것이었다. 속도를 한껏 높이며 위험천만한 경쟁을 하고 있었다.
"야! 이 망할 자식아 죽으려고 환장을 했냐?"
그가 자동차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그러자 오토바이가 지그재그로 곡예 운전을 하더니 계속 옆에서 맴돌았다. 그러더니 쌩! 하고 사거리 쪽으로 달려갔다.
"망할 자식."
그는 한바탕 욕설을 내뱉더니 말했다.
"괜찮아? 놀라지 않았어?"
"괜찮아요."
"보기보단 담대하군."
그는 속도를 줄이더니 자동차를 우회전해 동호대교 쪽으로 들어섰다. 자동차가 한강을 지나자 그가 스테레오 볼륨을 높였다. 그때 양하영이 부르는 노래가 들려왔다.
"사랑해요, 떠나지 말아요, 이별은 정말 싫어요."
그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어깨를 움직였다. 손으로 핸들을 탁탁 치며 박수까지 맞춰 가면서. 그때 예감했다. 그와의 이별을. 운명으로 다가오는 전주곡을 들으며 가슴에 엄청난 통증이 전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 그리움이 마지막 그리움이 미련을 당긴다.
"한번만 한번만 저를 만나 주세요, 부탁이에요."
"……."
"마지막 부탁이에요, 이제는 부탁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 이 세상에서의 내 삶이 다 했으니까,"
"……."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이 있어요, 그러니 한번만 만나주세요 꼭 당신을 만나 할 이야기가 있어요."
곧바로 숨이 멎을 것만 같다.
"내 생명이 2-3개월도 남지 않았대요, 곧 숨이 멎을 것만 같아요, 시간이 없어요, 당신 아무리 바쁘더라도 날 만나주세요, 마지막 제 부탁이에요."
"……."
"거짓말이 아니에요, 의사가 그랬어요, 이제 마지막으로 삶을 정리하라고, 재산정
리는 다 해놓았어요, 유고집도 다 탈고해 놓았구요, 이젠 마음 정리만 하면 돼요, 마지막으로 당신만 만나면 ……."
"정말 숨쉬기가 힘들군요, 암세포가 뇌로 전이됐는지 정신이 혼미해요, 더 이상 말할 기운도 없어요, 너무 힘드니까 웃음이 나오네요, 당신 당신 말예요. 하아 하아."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는 것 같아요, 이젠 끝이에요. 꼭 당신을 만나고 싶었는데 하지만 걱정은 안 해요, 이 다음에 천국에서 만나면 되니까요. 그 전에 꼭 하고싶은 말이 있어요, 당신을 당신을……."
"당신으로 인해 나는 원없이 행복한 인생이었어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이 말을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신(神)을 배반하는 그 말을 마치자 내 몸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 이젠 정말 마지막이구나. 어디선가 양하영의 노래가 들려온다.
"사랑해요 떠나지 말아요, 이별은 정말 싫어요."
"우리가 탄 자동차가 동호대교를 건널 때 저 노랫소리가 들려왔었는데. 난 죽어도 후회는 없어요, 나의 삶에 최선을 다했고 당신이 내 마음속에 항상 있었으니까."
이제 시나리오는 모노드라마로 변신하고 있다. 나는 대사 한마디 한마디를 마지막 숨결을 가다듬으며 써내려 간다.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당신이 근무하는 곳은 지척이었어요, 어둔 밤 형광등이 켜지면 당신이 근무하는 사무실과 우리 사무실이 곧바로 보였죠, 아주 자세히."
"당신은 몰랐겠지만 난 당신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어요. 어떤 여직원과 이야기를 하고 차를 마시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그러다가 호탕하게 웃는 당신을 볼 수 있었어요."
"난 당신의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을 늘 체크해 두었어요, 그래서 우연을 가장해 당신 앞에 나타나곤 했어요, 당신은 몰랐겠지만."
"장맛비가 내리던 날 생각나요, 당신이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어를 변속하는데 난 쏜살같이 내려갔죠, 우산을 들고서. 당신 그때 내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아? 당신 당신이 여길 어떡케."
"그 놀라는 표정이라니, 전 그때 말했죠, 모르셨어요 저 바로 옆 건물 유학센터에 근무하잖아요."
"그랬나? 그렇다면 앞으로 자주 보게 되겠군."
"얼마 안 가 당신은 내 의도를 눈치 채기 시작하더군요, 내가 일부러 당신에게 접근했다는 것까지. 지금 이렇게 말하는 데 무진장 떨려요, 그리고 행복하구요."
"사랑은 그 자체로 만족이에요ㅡ 사랑엔 이유가 없어요, 선택이 아닌 저절로 파생되는 감정의 결과이니까요."
"그러니까 우리 사랑은 순전히 제가 먼저 시작한 거예요, 제가 먼저 당신을 알아 보고 다가갔어요, 당신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이별도 내가 준비한 겁니다, 당신이 이별을 꺼내는 게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그런데 당신이 너무 당황해 하길래 전 순간 당황했어요, 내가 잘못 짚었나."
"당신은 이별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 같았어요, 눈에 띄게 수척해지고 폭음에다 방황까지……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어요, 시간이 흐르자 이번에는 내가 당황하기 시작했어요. 이별이란 사실이 실감나자 곧 쓰러져 죽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전화했던 건데 당신은 이미 감정 정리가 끝나고 주변에 벌써 여자들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난 한동안 유학을 갈까도 생각했었어요, 제가 근무한 직장이 유학센터였잖아요, 그러나 이내 포기했죠, 유학을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리움만 더해질 뿐이죠. 대신 나는 내 본업을 찾았어요, 소설과 시나리오를 썼어요, 내 소설을 시나리오로 각색해 크랭크인 되던 날 영화관 근처에서 당신을 본 적이 있어요, 얼굴이 몹시 야위고 비대칭으로 몸은 어느새 불어 중년이었어요, 당신이 그 영화관 근처에 나타난 이유를 난 아직까지 몰라요, 내 편한 대로 해석하려다 그만 두었어요."
"아무튼 난 몹시 바쁜 나날을 보냈어요, 창작생활을 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온통 작품에 매달리느라 세월 가는 줄도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당신이 다 잊혀진 줄 알았어요."
"작품에 당신 이야기를 쓰지 않았냐고요? 왜 안 썼겠어요, 처음에 주인공은 다 당신이 차지할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얼마 안 가 바닥이 나더군요. 새로운 소스가 필요했어요 참으로 많은 곳을 다녔어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환경과 접촉하고, 그런데 그때마다 당신 생각이 언 듯 언 듯 나는 거예요, 난 다 잊혀진 줄 알았는데."
"그래도 견딜만 했어요, 시나리오가 영화가 내 애인이고 남편이라 생각 들었으니까. 심지어 당신 대신이라 생각했으니까."
"사람은 늘 감정의 속임수 속에 살아가나 봐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속이기고 하고 속기도 하고, 심지어 자기 감정에 자기가 속아요. 그건 생각이 교만할수록 더 그런 것 같아요, 성경에도 나와 있잖아요, 네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꼭 해둘 말이 있어요, 당신을 처음으로 사랑했어요, 당신을 만나 여한 없이 행복했구요, 비록 당신을 다른 여자에게 보내긴 했지만 난 당신의 여자나 마찬가지였어요, 꼭 잠자리를 같이 해야만 그 사람의 소유가 되는 건 아니에요, 정신이 하나로 모아지면 그땐 서로의 끈이 되는 거예요,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끈 말예요."
나는 지금 무한의 절망과 싸우고 있다. 그를 만나야 한다는 절박감과 그리움이 마음을 압박하고 있다. 의식이 점점 혼미해져 간다. 몰핀이 이젠 아무 소용이 없다. 통증을 가라 앉힐만한 마지막 수단까지 바닥났다.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떠날 때는 순서가 없다더라. 누군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이 생각난다.
수많은 독자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 문학 강연에 참석했던 후배 동료들과 지난 세월의 흔적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훑고 지나간다.
"우리 천국에서 만나요."
그 순간 나는 기적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 수 없는 힘이 내 몸속에 부어지고 있었다. 정신이 명료해지면서 기운이 샘솟는다. 내 몸에서 악마가 빠져나간 모양이다. 빛이 내 몸과 마음에 부어지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여행을 떠나야겠어요. 한번 가면 다시 못 올 이 세상이 아니던가요? 당신과의 추억이 묻어 있는 그 길을 보고 싶어요, 그동안 창작생활에 몰두하느라 한번도 찾지 못했던 곳이에요, 당신과 함께 걷던 그 거리, 온통 화려함으로 치장한 그곳을 가보고 싶어요,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그 거리를 마지막으로 머릿속에 담고 싶어요."
"방금 내가 근무하던 그 건물을 지났어요. 유학센타가 치과 병원으로 바뀌었군요, 당신이 근무하던 건물은 리모델링을 다시 해 입시학원과 성형외과가 들어섰네요, 이 거리는 정말 럭셔리해요, 이곳에선 고가(高價)가 당연하게 통해요, 럭셔리한 건물, 럭셔리한 여자, 럭셔리한 자동차."
"이 거리 풍경을 마음에 담겠어요, 당신과의 기억도 새롭게 리모델링해 마음 속에 담겠어요, 죽음과 함께 저 천국까지 가지고 갈 거예요, 창 밖의 거리가 너무도 신선하게 느껴져요. 저 푸른 나무 잎사귀 좀 보세요,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나요? 저들은 새파랗게 생명의 축제를 벌이다가 씨앗을 퍼뜨리고 다른 생명체에까지 영향력을 끼쳐요, 공생하면서 대자연의 아름다운 섭리를 사람들에게 일깨워요."
"문득 당신 아이들이 궁금해지는군요, 어떡케 생겼을까. 광고업계에서 능력과 마모를 자랑하는 당신 아내도 보고 싶어져요, 여자라면 당신 아내를 부러워하고도 남죠, 미모에다 역시 외모가 뛰어난 남편을 만나 또 잘생긴 아들 딸을 두었으니까요, 내가 차지하고 싶었던 그 자리를…… 하지만 다행이에요, 당신 수준에 걸맞는 훌륭한 아내를 만났으니 나랑 헤어진 게 오히려 다행이지 뭐예요."
"이미 그렇게 된 걸 알고 신(神)은 가장 공평한 처사를 내리신 거 같아요, 아! 지금 창 밖으로 양재동이 지나고 있어요, 내 영화 속에 나오는 거리예요, 왼쪽으로 교육문화회관이 보이네요, 시민의 숲도 보여요, 내 영화 속의 남녀 주인공이 저 곳에서 만나 데이트하는 장면을 찍은 곳이에요,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에요."
"그 영화가 시내 극장가에서 상영되던 날, 내게 발신번호가 찍히지 않은 문자메시지가 여러통 날아들었어요, 영화 개봉을 축하한다는, 꼭 대히트치라는…… 난 당신이 보낸 메시지로 받아 들였어요. 그리고 나서 충무로 뒷길을 걷는데 당신 모습이 내 눈앞을 언 듯 스쳐 지나는 것이었어요, 처음에는 환상인 줄 알았어요."
"몸집이 몹시 불어나 있는 데다. 얼굴빛이 초췌해서 당신이 아닌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골목길을 돌아서는데 당신의 그 미소가……."
"난 그 순간, 내가 살아 있음에 감사했어요,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까 다 만나게 되는구나. 이제 사실일까 꿈일까. 당신은 내 눈빛을 의식하는지 못하는지 골목길을 돌아 청계천 쪽으로 빠지더군요 아마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었나봐요."
"그날은 영화 시사회도 있었고 영화 관계자들과도 많은 만남이 약속돼 있었어요, 정신없이 바빴지만 나는 핸드폰을 계속 주시했어요, 당신이 꼭 연락을 보내오거나 아님 당장 눈앞에 나타날 것 같았어요, 기적처럼."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요, 내게 다가오는 당신의 눈빛, 언어, 행동 자체가 모두 예술작품이었어요, 나는 속으로 끊임없이 대사를 썼어요, 당신은 물론 내 영화속 주인공이었어요, 나는 가능하면 영화를 해피엔딩으로 끝내고 싶었어요."
"운명적인 사랑을 그렸는데 결론은 비극으로 끝났어요, 관객들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갑자기 반전을 시도한 거예요. 비극적인 장면 앞에 관객들이 손수건을 적시며 우는 장면을 상상했죠. 그런데 그 마지막 장면이 내 이야기가 될 줄이야, 이렇게나마 마음을 털어 놓고 나니까 참 홀가분하네요."
"참 아까 여한이 없다고 말씀 드렸었죠, 그 점 당신께 감사해요, 세상에 태어나 목숨 건 사랑 한번 못해보고 떠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러고 보면 난 참 행운이에요. 비록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지만요. 이젠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 마지막 감정 정리를 끝낼 때가 된 거 같아요."
"살면서 죄를 안 지을 수는 없겠죠, 그리고 서로 원수 맺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발생해요, 용서라는 단어를 사용하긴 하지만 제일 하기 힘든 게 용서예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용서에 서툴렀어요 한번 원수 지면 그걸로 끝일 때가 많았거든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풀지 못하고 지낸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결과를 따지고 보면 모두 내 잘못인데 난 모두 상대방에게 전가해버렸죠, 일부러 친구에게 생채기 준 적도 많았어요, 약점을 들추어 내 망신 준 적도 있었고 끝끝내 내가 잘했다고 우긴 적도 있었어요, 나중에 신(神)앞에 나갔을 때 제일 먼저 회개했지만 친구는 이미 소식이 끊긴 뒤였어요."
"이제라도 만나면 간절히 용서를 빌고 싶어져요, 의도적으로 지은 죄를 고범죄라 하더군요. 실수로 지은 죄와는 확연히 구분되죠, 그러고 보니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죄를 지은 것 같아요, 아무리 회개해도 끝이 없군요."
"이제 버스가 막 분당을 지났어요, 버스가 회차 지점이라 다시 서울로 간답니다. 들판에 꽃나무가 아름다워요, 개나리와 진달래 목련이 한창이군요, 화려한 색채가 거리 전체를 뒤덮고 있네요. 고속도로에는 떠나는 차량들이 전 속력을 올리고 그 주변에 핀 꽃나무가 너무도 화려해 어지러울 정도예요, 다시는 못 볼 지상의 아름다운 모습이에요,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처음 느껴요."
"어린 아기들도 마찬가지예요. 아기들은 천진난만 순진무구 그 자체예요 행복의 요람 같은 느낌을 줘요, 이제 떠나기 전 모든 이들과 화해하고 용서하고 축복하고 싶어요 이 땅에서 맺힌 것 모두 풀어 버리고 하늘의 평강을 빌고 싶어요 그래서 내 남은 재산을 장애자와 고통 받는 이들에게 희사했어요."
"아! 벌써 서울로 들어섰네요. 분명 밤인데 온통 환한 빛이 내 마음 속에 쏟아지고 있어요, 환희의 음악이 내 안에서 들려오고 있어요, 지금이 부활절인가? 칸타타 음악 같기도 해요."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어요, 죽음은 끝이 아니래요, 죽음 뒤에는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영생의 부활이 나는 믿어져요, 이제 비로소 알았어요, 왜 죽음에 소망이 있는지. 이제 내가 사는 동리 앞이에요. 그런데 그런데."
"거기 내 집 앞에 서 있는 사람, 당신 아닌가요? 환상인가? 아! 잠시 착각했었나 봐요, 가족들이에요, 내 마지막을 지켜 줄, 내 몸이 침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에요. 아! 너무도 편안해요."
"귓가에서 음악이 들려오는군요. 천국 음악 같아요. 당신 모습도 보이네요. 그런데 당신 울고 있네요, 울지 말아요, 우린 곧 천국에서 만날 거잖아요, 흰옷 입은 천사가 내려오고 있어요, 너무도 평안해요, 아! 저기 요단강이 보이네요."
"이젠 삶의 모든 미련을 접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아요, 당신 사랑해요, 모두 다 사랑해요, 내게 상처와 아픔을 주었던 사람들까지 모두 다, 가장 후회되는 것은 그동안 살면서 사랑하지 못한 거예요, 좀 더 열심히 살고 사랑했더라면 덜 후회할 텐데."
"C S 루이스란 학자가 말했대요, 고통이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원치 않는 경험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제 모든 고통이 끝나는 순간이에요, 죽음 뒤의 소망이 보여요, 얼마나 감사한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만나는 죽음이란 이별 속에 소망이 있다니, 당신도 이 소망 잊지 마세요. 그리고 지상에서의 아름다운 삶을 신(神)과 함께 하세요. 아! 정말 마음이 편해요, 빛이 빛이 점점 내 마음 속에 다가오고 있어요."
미련이 모든 미련이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