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서흔남(徐欣男) –
임금님 등에 업어 오랑캐 피하였고
근왕병 연통하며 치열히 살았던 삶
碑文은 깨어졌어도 전해오는 傳說들
배달9218/개천5919/단기4354/서기2021/03/19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서흔남(徐欣男)의 흔적을 찾아서(1)
사노(私奴)에서 와장(瓦匠), 대장장이로 전전하다가
병자호란시 한겨울 임금님을 업어서 남한산성에 대피시키고
삼남의 근왕병과의 연통, 그리고 참전(參戰)등의 功으로
천인의 신분을 벗고, 훈련주부(訓鍊主簿, 훈련원에 딸린 종6품)와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上階문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중추부에 소속된 종2품)를 제수 받은
하남 널문리 출신 서흔남(徐欣男).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의 비석이
산성 주차장 한 켠에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다.
검복리 병풍산 기슭에 있던 그의 무덤을 관리들이 지날 때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갔다는데
그 이유는 임금님을 업어서 산성으로 올라온 功으로
하사받은 곤룡포가 그의 유언으로 묻혀있었던 까닭이라는데
그러한 인물의 墓碑를 너무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2)
산성의 비석거리 어디 쯤 공간을 할애하여
그의 비석과 사료들 이야기를 주제로
소공원이라도 만들어 보존하면 어떨까?하는 생각.
노비에서 종2품이라.
봉건시대에 그렇게 치열하게 살다간 인물도 드물텐데
자손들은 빈약했는지
무덤은 흔적 없고 비석은 깨어졌단 말인가?
송파도서관에 그의 동상이 있다 하여
오금근린 공원을 찾았는데
그 드넓은 공원을 뒤진 끝에
송파도서관 앞에 있는 그의 동상을 찾았다.
송파구는 어떠한 인연으로 동상까지 만들 생각을 하였을까?
배달9218/개천5919/단기4354/서기2021/03/19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私奴에서 종2품 동지중추부사가 되기까지 치열한 삶을 살다간 서흔남(徐欣男)의 비문이
관어정 연못가 산성관리사무소 주차장 한켠에 방치되다시피 자리하고 있다.(3/19 15:40)
서흔남 묘비(徐欣南 墓碑)
지정종별 : 광주시 향토문화유산 기념물 제6호
위치 :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24-1
병자호란 당시 수훈을 세운 서흔남( : ?∼1667?)의 묘비이다.
서흔남은 수어청 병사의 사노(私奴)로서 무당, 와장(瓦匠)등의
직업을 전전했다. 1637년(인조15)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외부와 연락이 단절되자 서흔남이 연락업무를 자원하였다.
그는 병자, 불구자, 거지 등으로 변장하고, 때로는 청군병사를 살해하면서
청군진영을 세 번이나 왕복했다. 이러한 공으로 노비 신분에서 면천되고,
당상관이 되었다. 1651년(효종2)에는 남한산성 성벽과 4대문 문루,
동북창사의 보수공사에도 참여해서 목재조달 업무를 관장했다.
후에 정2품 가의대부로 책봉되고 종2품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묘비중 하나는 1667년(현종8)3월13일에 건립했다.
또 하나의 비는 손상이 심해 건립연대를 알 수 없다.
“한씨를 왼쪽에 묻었다(韓氏祔左)”는 문구로 보아 부인이 사망한 후에
다시 세운 것 같다. 이 비들은 남한산성면 검복리 병풍산에 있던 것을
광주시청과 광주문화원에서 발견하여 1998년에 이 위치에 안치하였다.
서흔남 묘비(徐欣南 墓碑) - 위키백과 -
서흔남 묘비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다.
서흔남의 묘비 2기이다. 하나는 온전한 상태이고 하나는 상부가 파괴되어 있다.
원래는 성남시 창곡동 병풍산에 있었으나 후손이 땅을 처분하고 묘를 이장하면서
비석을 버리고 간 것을 광주군청과 문화원에서 수거하여 1998년에 현재 위치에
보존한 것이다. 2008년 4월 21일 광주시의 향토문화유산 제6호로 지정되었다.
서흔남 묘비는 남한산성 역사관 주차장 옆 지수당 연못가에 있다.
서흔남(徐欣南: ?~1667)은 광주에 살던 사노(私奴)로, 병자호란을 맞아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후 청군에 포위되자 외부와의 연락을 위해 자원하여
승려 두청(斗淸)과 함께 성 밖의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황해병사 이석달(李碩達),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의 장계를 성안으로 가지고 돌아왔다.
서흔남은 적진도 정확하게 정탐하였는데, 택당 이식(李植)도 그를 통해
가족이 피난했던 지역이 청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서흔남은 공로를 인정받아 면천되고 관직을 제수받았다.
숙종과 정조도 그의공을 기려후손을 등용하는 은혜를 베풀었다.
그의 행적은『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중정남한지』를 비롯한 각종 문집에 실려 있다.
비석은 2기가 있는데,
하나는 1667년 3월 13일에 건립한 것으로 전면에
‘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徐公之墓’라 하였고
후면에는‘康熙年丁未三月十三日立’이라 하였다.
다른 하나는 절단되어 상단이 없는 상태로 전면에
‘……… 大夫同知中樞府事…… 徐欣男之墓…… 韓氏 左’의 비문이 확인되고,
후면에는‘…… 五年八月十五日’의 기록이 있으나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상태이다.
2) 서흔남이 인조임금을 업고 들어온 남문
3) 서흔남의 동상이 송파구 오금동 오금근린공원 송파도서관에 있다고 하여 찾아봄(3/24)
조각 : 한민호(1946-, 신구대학교수)(21/03/24)
서흔남이 지킨 인조와 남한산성
하남시 감이동에서 태어난 서흔남(徐欣男)
경기도 하남시 감이동의 옛 이름이 ‘널무니’이다. 널무니는 남한산성의
서문 밖에 있는 마을이다. 널무니에서 태어난 천민 출신의 ‘서흔남(徐欣男)’이
병자호란 당시에 전령으로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와 관련한 설화가 전한다.
인조를 업어서 남한산성으로 피난시킨 서흔남
조선시대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는 대궐을 떠나 피신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할 것을 결심하고, 대궐을 나섰다.
그러나 이미 청나라 군사들이 한양 근처에 잠복하고 있었다.
인조가 남대문을 벗어나기도 전에 청나라 군사들은 지금의 마포 앞 한강인
양천강(陽川江)을 건넜다. 인조는 피난길이 막혔다는 소식을 듣고,
강화도로 피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가는 도중에도 전세가 불리하다는 소식으로 인해, 겁을 먹은 수행원과 군졸들이
하나 둘씩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인조는 얼마 남지 않은
신하들을 함께 사공도 없는 나룻배로 송파강(松城江)을 건넜다.
송파강은 건넜지만, 인조는 얼마 남지 않은 신하들과 함께 송파강을 겨우 건널 수 있었다.
강은 건넜으나 날은 어두워지고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흩날려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까지 올라 갈 일이 아득했다. 인조는 신하의 등에 번갈아 업혔으나
지친 신하들은 얼마 못 가서 주저 앉기를 거듭했다. 더구나 남한산성으로 가는 산길은
험했고, 때마침 눈이 깊이 쌓여 걸어서 올라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때 한 총각이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나무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인조는 그 총각에게 "나를 좀 업어서 성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에 그 총각은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더니 인조를 업어서 성까지 한숨에 모시고 갔다.
남한산성에 무사히 도착한 인조는 산성으로 들어올 때, 불편하게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은 것이 못내 궁금했다.
그래서 "왜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느냐."고 물었다. 이에 총각은
"당신은 피난민 같은데, 만약 신을 바로 신고 오르게 되면 눈 위에 발자국이 나서
적군에게 들키게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될까봐,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다."고 말했다.
인조는 그 총각이 너무나 신통하고 고마워서, "너의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하였다.
이에 총각은 인조가 입고 있던 곤룡포(袞龍袍)가 너무 좋아 보여서,
"당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달라."고 하였다.
그 옆에 있던 신하들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서흔남을 꾸짖었다.
그러나 인조는 미소를 지으며 곤룡포를 서흔남에게 주었다.
이렇게 인조를 업고 무사히 산성 안으로 피신시킨 총각이 바로 서흔남이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 걸쳐 활약을 펼친 서흔남은, 죽을 때까지 왕에게서 하사 받은
곤룡포를 지극 정성으로 보존했다고 한다. 그리고 죽을 때, 자신이 평생동안
분신처럼 아껴왔던 곤룡포를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서흔남의 가족들은 그와 함께 곤룡포를 중부면 검복리 서남쪽 병풍산에 묻었다고 한다.
걸인으로 행세하며 왕의 유지(諭旨)를 전한 서흔남
서흔남은 노비로 있으면서 기와 잇기와 대장간 일을 하였다고 한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이 청나라 군사들에게 포위되자, 성 밖과 모든 소식이 끊어졌다.
성 안팎 소식을 전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데 아무도 지원을 하지 않았다.
그 때 서흔남이 자청하여 적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허름한 옷을 걸치고,
한자로 쓴 왕의 유지(諭旨: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던 글)를 노끈으로 꼬아 옷으로 얽어매고,
손에는 깨진 쪽박을 들고 적진으로 들어갔다. 일부러 병든 걸인처럼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구걸을 하였다. 또한 청나라 군사들이 먹을 것을 주면,
손을 쓰지 않고 입으로만 먹으며, 그 자리에서 똥을 누어 의심을 피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로 다니며 인조의 유지를 전했다고 한다.
이렇게 서흔남은 전국 각지의 근왕병 진영에 뜻을 전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삼 차 왕래하여 적의 동태를 보고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청과의 전투에도 참여하여 청군 3∼4명을 죽이는 공을 세웠다고도 한다.
천인 신분을 벗고 벼슬을 제수 받은 서흔남
위와 같은 설화를 통해서 서흔남의 임금을 향한 충성심과 병자호란에서의 역할 등을
알 수 있다. 곧 서흔남이 벼슬을 제수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화를 통해서 전승한다.
서흔남은 병자호란에서의 공으로 천인의 신분을 벗고, 훈련주부(訓鍊主簿)와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은 역사적 실존인물이다.
현재 남한산성 관리사무소 앞쪽 화단에는 묘비가 서 있다. 묘비의 위쪽은 깨어져 없어졌고,
남은 묘비마저도 마모되어서 확실한 형체를 알 수 없지만, 남아 있는 묘비명에는
서흔남(徐欣男)이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이 묘비는 동문 밖
검복리 병풍산 묘소에 있었는데, 그 후손이 화장을 하면서 묘역이 없어짐에 따라,
이쪽으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서흔남의 묘비를 이쪽으로 옮긴 까닭은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을 구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쳐 임금의 곤룡포를 하사 받기까지 한
그를 지속적으로 가리고자 함이었다.
서흔남은 병자호란에서의 공으로 천인의 신분을 벗고, 훈련주부(訓鍊主簿)와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은 역사적 실존인물이다.
후세에 말을 탄 벼슬아치들이 서흔남의 무덤 앞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는데,
이는 서흔남과 더불어 왕의 곤룡포가 함께 묻혀있기 때문이라 한다.
한편, 인조를 업어 모신 사람은 서흔남이 아니라 서기남(徐紀男)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서기남은 천하영웅이라 그 후 원두표(元斗杓)의 비장(裨將)이 되어 산성 북문 밖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우고 청나라의 장수 양고리(楊古利)를 붙잡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한미한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인조를 업어 모시 사람이 최모(崔某)라고도 한다.
최모는 그 공으로 인하여 늘문이에 임금이 직접 하사한 땅을 받았다고 한다.
승정원일기 > 인조 14년 병자(1636) 12월 26일(병신) 맑음
수어사 아병의 사노 서흔남의 공로가 가상하므로
면천할 것을 청하는 도체찰사의 계
이경증이 도체찰사(都體察使)의 뜻으로 아뢰기를,
“수어사(守禦使) 아병(牙兵)의 사노(私奴) 서흔남(徐欣男)은 사람됨이
영리하고 건장하고 용맹스러운데, 낮에는 종군하여 출전하고
밤에는 틈을 타서 나가 정탐을 하였으니, 공로가 매우 가상합니다.
면천(免賤)시키도록 허락해 주소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 인조 14년 병자(1636) 12월 26일(병신) 맑음
청대한 대신 등이 입시하여 군사들의 출병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신경진(申景禛)이 정병(精兵) 800명을 뽑아 출전하려 합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는데,
헌릉(獻陵)에 다녀온 와장(瓦匠) 서흔남(徐欣男)이란 자가 일찍이 적진(賊陣)에 들어갔다가
장수(將帥)가 있는 곳을 멀리서 보았는데, 밖으로는 견고한 울타리를 두르고
안으로는 유차일(油遮日)을 쳐서 병진(甁陣)을 만들어 거처하고 있었지만
복병(伏兵)은 서너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청컨대, 목숨을 아끼지 않는
군사를 얻어 네 모퉁이로 나누어 가게 한 뒤에 성세(聲勢)를 돕는 군중(軍衆)을 세우고
포성(砲聲)을 내도록 하면 비록 오랑캐의 괴수를 잡지는 못하더라도 주
진(主陣)이 크게 놀랄 것입니다.”
승정원일기 > 인조 15년 정축(1637) 1월 7일(정미) 맑음
서흔남 등에게 과거 응시는 허락하지 말고
6품의 직첩을 만들어 줄 것 등을 청하는 도체부의 계
도체부가 아뢰기를,
“서흔남(徐欣男)과 전생(全生)을 시상하는 일로 올린 초기(草記)와 관련하여,
‘아뢴 대로 하라. 서흔남은 스스로 말한 것으로 인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해 준다면 뒤에 폐단이 있게 될 듯하고,
승려에게 이미 소원대로 시상했던 것을 지금에 와서 다시 고치는 것도 온당치 못할 듯하다.’
고 답하여 전교하셨습니다. 서흔남에게는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6품의 직첩(職帖)을 만들어 주고, 승려들에 대해서는 소원대로 이미 시상한 일이
규례가 되었으니 고치지 말도록 하고, 미처 논상하지 못한 자 가운데
함경 감사 및 도원수가 있는 먼 길을 왕래한 승려는
특별히 당상의 직첩을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7일 정미 2번째기사 1637년 명 숭정(崇禎) 10년
서흔남과 승려 두청이 도원수 김자점 등의 장계를 가지고 오다
성 안에 사는 서흔남(徐欣男)과 승려 두청(斗淸)이 모집에 응하여 나갔다가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황해 병사 이석달(李碩達), 전라 감사 이시방(李時昉)의 장계를 가지고 왔다.
○城中居徐欣男及僧人斗淸, 應募出去, 持都元帥金自點、
黃海兵使李碩達、全羅監司李時昉狀啓而來。
승정원일기 > 인조 15년 정축(1637) 1월 7일(정미) 맑음
서흔남 등에게 과거 응시를 허락해 주고
6품직에 제수할 것 등을 청하는 도체부의 계
또 아뢰기를,
“이런 위급한 때를 당하여 안과 밖이 서로 통하는 것이 가장 절급(切急)한 일인데
지금 본주(本州)의 사람 서흔남은 세 번이나 출입하여 그 공로가 지극히 중하고,
전후로 적을 죽인 것도 3, 4명에 이르렀습니다. 처음 출입했던 공로에 대해서는
이미 면천해 주었으니, 이번에 적병을 죽인 공로에 대해서는 규례대로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해 주고, 또 전라 병사(全羅兵使)에게 왕래한 노고에 대해서는
6품직을 제수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여러 곳에 출입한 승려들에게는
이미 그들의 일족(一族)에게 직책을 제수하기도 하고 군역(軍役)을 면제해 주기도 하여
노고에 보상해 주었는데, 여러 사람들의 논의가 모두
‘일족에게 대신 상을 내리는 것만으로는 미진한 듯하니,
직접 직첩으로 공을 세운 당사자에게 지급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전후로 왕래한 승려에게는 모두 당상의 직첩을 주고,
그 일족에게 대신 상을 내리는 것은 시행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서흔남과 일시에 왕래했던 전생에게도 그의 예에 따라 시상하겠습니다.
감히 이렇게 아울러 여쭙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서흔남은 스스로 말한 것으로 인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해 준다면 뒤에 폐단이 있게 될 듯하고, 승려들에게
소원대로 시상했던 것을 지금에 와서 다시 고치는 것도 온당치 못할 듯하다.”하였다.
승정원일기 > 인조 15년 정축(1637) 1월 7일(정미) 맑음
전라 감사 이시방이 광교산에서 영남의 군병과 합세하여
전진하려고 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장계를 올렸다
전라 감사 이시방(李時昉)이 지난달 30일에 수원에 있으면서 성첩한 장계는,
“장차 광교산(光敎山)에 나아가 영남(嶺南)의 군병과 합세하여 전진하려고 합니다. 그
리고 승려 각성(覺性)과 해인(解印)으로 하여금 승군(僧軍)을 모집하여
성세를 돕도록 할 것입니다.……”라는 일이었다.
- 수어사(守禦使)가 보낸 것을 서흔남이 가지고 온 것이다. -
- 신여본에 의거함 -
승정원일기 > 인조 15년 정축(1637) 1월 27일(정묘) 흐리기도 하고 맑기도 함
훈련원 주부 서흔남에게 시상할 것을 청하는 도체찰사의 계
도체찰사가 아뢰기를,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 서흔남(徐欣男)이 세 차례 성을 출입하며
안팎의 소식을 잘 전하였으니 그의 공로가 매우 많습니다.
각별히 논상하여 격려하는 뜻으로 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숙종실록 65권, 숙종 대왕 행장(行狀)숙종 대왕 행장(行狀)국역원문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서장대(西將臺)에 올라가서 오랫동안 슬픔에 잠겨 있다가
전사(戰死)한 신성립(申誠立)과 전공(戰攻)이 있는
서흔남(徐欣男)의 자손을 수용(收用)할 것을 명하였다.
성(城)이 포위되었을 때 관속(官屬)으로서 생존한 자에게는 음식물을 제급하고,
가자(加資)하지 않은 자에게는 특별히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8월 7일 무오 3번째기사 1779년 청 건륭(乾隆) 44년
수어사 서명응에게 남한 산성에 대해 물으시다
행궁(行宮)에 나아가 임금이 수어사(守禦使) 서명응(徐命膺)에게 임금이 말하기를,
"열 집이 있는 고을[十室之邑]에도 또한 충신(忠信) 한 사람이 있는데,
이 고을로 말하면 경내(境內)의 호구를 통틀어 셈하면
1만 호의 고을[萬戶之邑]이라 할 수 있거니와 지령(地靈)·인걸(人傑)에는 본디
고금의 차이가 없으니, 또한 어찌 인재가 없겠는가?
병자란 때로 말하면 서흔남(徐欣男)은 사노(私奴)에 지나지 않는데
노병(虜兵)이 세 겹으로 에워 쌌을 때에 홀몸으로 빠져나가
능히 삼남(三南)의 여러 도(道)에 명을 전하였고,
맹원빈(孟元賓)은 한낱 한산(閑散)일 뿐인데 성조(聖祖)께서 행행(行幸)하셨을 때에
제 말을 바치기를 청하여 무사히 입성(入城)하실 수 있게 하였고,
여조(麗朝)의 김방경(金方慶)·조견(趙狷)이 다 이곳에서 났으니,
광주(廣州) 한 부(府)는 인재의 부고(府庫)라 할 수 있을 만하다.
요즈음에도 향당(鄕黨)에서 이행(異行)·기재(奇才)로 이름난 자가 있는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신이 본주(本州)의 읍지(邑誌)를 보니,
병자란 이전에 노협(魯協)이라는 자가 이곳에서 한 이인(異人)을 만났는데
능히 병자란을 예견하였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세상에서 모른 가운데에 어찌 뛰어난 인재가 없겠습니까?"하였다.
o
o
o
Little Comfort 작은 평온 / The Daydrem
o
o
o
첫댓글 남한산성 역사유물에 대한 높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1. 계획중인 남한산성 박물관 건립이 완성되면 서흔남 묘비 등 여기저기 흩어져 보관 중인 유물들이 잘 보존 전시될 것으로 믿습니다.
2. 옮기신 자료 중에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어 붙입니다.
청나라 장수 양고리가 전사한 곳은 법화사의 유래 설화로 알려져 왔던 남한산성 북문 전투가 아니고 광교산 전투인 것으로 사료를 통해 확인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