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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여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죽세공품을 경험하고, 대나무의 결과 성질을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터득했다는 장필 장용해(60) 선생. 선생이 살아온 길을 되짚어보고, 지난 30년 동안 대금 만들기 인생 역정을 들어본다. 8세부터 숯방아 찧다가 13세에 가출 "이렇게 살아도 죽는 거고, 저렇게 살아도 죽는 거라고 믿었어. 13살 먹던 해에 숯방아 찧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집을 뛰쳐나왔어. 무조건 걸었지. 2박 3일 동안 삼백 리를 걸었는데, 도착한 곳이 하동이었다네." 선생의 아버지는 방앗간 주인이었다. 숯의 화기를 이용해 제때 발동기를 잘 돌려줘야 가동되는 것이 숯방아였다. 선생의 아버지는 당시 초등학교 2학년 중퇴생인 아들에게 지독하게 일을 시켰다. 숯방아 찧는 일에 소홀하면 망치를 들고 다그치며 위협까지 했다. 선생은 아버지의 체벌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어린 마음에 집을 뛰쳐나왔다. 선생은 '혹독했던 아버지의 가르침이 훗날 약이 될 줄은 몰랐다'며 자신의 대나무 인생을 회고했다. 13세 가출생이 걷고 또 걸어 마음 닿는 곳에 머문 곳은 경남 하동군. 그곳에는 담양만큼 대나무가 무성했다. 어릴 적부터 대를 쪼개보고, 베어보고, 팔아보기도 하며 대나무에 통달했던 가출생은 지역민들에게 다양한 죽세공품을 선보여 천부적인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의 대나무 다루는 솜씨에 탄복한 지역민들은 하동군수에게 죽세공품 센터 건립을 제안했다. 군수는 실업자 구제책을 겸하여 흔쾌히 받아들였고, 선생은 지역민들에게 '대나무 장박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대금과의 첫 인연 하동 죽세공품 센터가 정착하자 그의 역마살은 운명처럼 작용했다. 그는 18세가 될 무렵 전남 여수로 발길을 돌려 해태발 제작에 몰두했다. 해태발이란 김 채취 때 사용하는 것으로 대나무로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종업원이 300명이나 되었던 공장에서 그의 해태발 제작 솜씨는 최고기술을 인정받았다. 시련이 찾아왔다. 그는 한 라디오 방송에서 해태발을 PVC로 대량생산한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했다. 그는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어릴 적 고향 담양에서 어렴풋이 경험했던 '퉁소'를 떠올렸고, 대나무로 만들 수 있는 악기 제작을 다짐했다. 그의 나이 25세. 역마살에 따라 예향 광주로 발길을 돌린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한 악기점에서 대금을 접하게 된다.
음악은 그에게 또 하나의 인생이었다. 어려서부터 손으로 죽세공품을 만들며 귀로는 음악을 들었다. 고전음악이든 대중음악이든 닥치는 대로 들었고, 그의 음악적 감각은 무슨 노래든 한 번만 들어도 따라 부를 만큼 뛰어났다. 그의 기계 제작 능력 또한 탁월했다. 하동에서는 부챗살 깎는 기계를 개발해 죽세공 센터를 운영하고, 여수에서는 해태발 생산 기계를 만들어 특허를 내고 대량생산하는 데 공헌했다.
그렇게 대금 제작과 연주에 몰두하면서 그의 별칭은 피리를 잘 부는 '장필'로 통했다. 그의 대금에는 '남도필이 제작소'라는 특별한 상표가 붙었고, '장필 장용해'는 대금 제작자로서 연주자로서 국악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확고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대금의 다양화를 위한 새로운 시도 "사람은 제각각 목소리마다 높낮이가 다르다. 우리 국악기인 대금이 몇 가지 있지만 사람에 따라 내공이 다 다르기 때문에 일정한 대금으로 연주할 때 한계가 있다. 가령, 어린이와 성인의 목소리(키)가 다르고 소리꾼마다 목청에 차이가 있다. 노래하는 사람에 따라 대금의 종류를 다양화해야 한다. 그래서 3년 넘게 대금의 종류를 다양화하는 데 진력하고 있다." 현재 대금의 종류는 크게 세 가지이다. 정악 대금 하나와 산조 대금 두 종류가 전부다. 그래서 선생은 다양한 연주를 위해 7가지 이상의 대금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선생은 현재 독자적으로 4종류의 대금을 더 제작해 놓고 있다. 선생은 최근 3년 동안 대전에 있는 '진성국악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위 사실을 터득했다고 한다. 어떤 합주를 하더라도 어떤 소리꾼을 만나더라도 그 악단과 소리꾼에 맞게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선생의 커다란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생은 고전음악, 서양음악, 대중음악을 아우르는 대금의 다양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가수 장사익씨가 '천년바위'를 부르는데 기존의 대금으로는 연주가 어렵다. 그의 목소리에 맞는 대금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에 맞는 대금을 만들었는데 지금 장사익씨가 여기 와서 노래를 한다면 그의 목소리에 맞게 그대로 연주해 줄 수 있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 산조 대금의 일인자라고 할 수 있는 이생강 선생은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대금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대금은 모양은 같으나 사람 마음이 다 다르듯이 소리를 내는 것도 그 규격이 일정할 수는 없다. 내가 대금, 피리, 소금, 단소, 퉁소, 태평소, 쌍피리 등 23명의 스승에게 우리의 전통 관악기를 모두 배워 통달한 사람이지만 대금만큼 무한대의 악기가 없다. 다른 악기는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멈추게 되는데, 대금은 터득하면 할수록 그 가락에 끝이 없다. 우리가 쓰는 모든 언어를 대금으로 표현할 수 있다. 대금은 최고의 관악기다." 하늘이 내린 소리를 찾아 오직 한 길 대금 만들기 30년, 장필 장용해 선생은 최근 대전시 지정 지방무형문화재로 추천된 것에 대해 큰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다만 국악 발전을 위해 대금을 만드는 장인으로서 무엇인가 남겨놓아야 한다는 사명감밖에 없다고 한다. '아이엠에프 이후 대금을 찾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줄어 대금제작 전수자인 차남 장동준(34)씨마저 잠시 일손을 놓고 서울에 가서 컴퓨터 관련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는 선생은 '하루라도 빨리 차남이 대금을 만드는 데 뛰어들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취재가 끝나갈 무렵 장필 장용해 선생은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인생 역정을 회고했다. 타고난 역마살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대금제작의 장인으로 정착하기까지 '어릴 적 아버지의 지독한 훈계가 없었더라면 대나무와 결별했을지도 모른다'며 선친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나같이 한 많은 사람도 있을까? 어디 가서 내가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크게 말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내 일을 하고 싶어. 남은 내 생은 몸 아프지 않고 국악 발전을 위해 일할 수 있다면 좋겠어. 그 마음밖에 없어. 내 한 맺힌 삶이 곧 내가 만드는 대금이라고 보면 돼." 선생은 여건만 허락된다면 대금을 만들 수 있는 대밭을 가꾸고 싶어한다. 멀리서 댓잎만 보고도 대금을 만드는 데 최고로 치는 쌍골죽을 가려낼 수 있다는 선생은 좋은 재료 찾기가 너무 어려워진 데다 성장과정에 있는 대나무마저 베어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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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악기를 가까이 하는 사람들의 낭만과 여유가 참 부럽네요.
퉁소와 해금 합주가 좋던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