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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나폴레옹 시대(1)
1. 통령정부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의 의미를 처음에는 누구도 잘 몰랐다. 브뤼메르파는 앞서 테르미도르파처럼 자기들의 이익에 적합한 공화국을 굳히려고 하였다. 바라스도 시에예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보나파르트에게서 군대의 제공만을 기댛아였다. 바라스의 생각은 쿠데타가 끝나면 보나파르트를 다시 전장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었고, 시에예스의 생각은 보나파르트를 실권없는 최고권자의 자리에 앉히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오산이었다. 이들 브뤼메르파는 자기들의 계급적 특권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정착 자신들이 수립하려던 부르주아 공화국의 그림자는 보나파르트의 개인적 권력과 군사독재 앞에 급속히 흐려져 갔다.
브뤼메르 20일 아침, 임시 통령정부의 포고문은 전날 생클루의 의회에서 권총과 단도로 무장한 의원들이 프랑스의 영웅을 암살하려 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어떤 의원도 권총과 단도를 휘두르지 않았다. 무기를 불법으로 사용한 자는 나폴레옹의 장병들 뿐이었다. 신성한 의사당에서 무기를 휘두르며 불법을 자행했기 때문에 부득이 군사개입을 한 것처럼 되어 있는 포고문은 적반하장이었다. 이처럼 왜곡된 포고문을 읽은 파리의 시민이, 프랑스의 영웅이 폭한들의 마수에서 용케 빠져나올 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면 나폴레옹의 허위 선전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전날 밤 원로원과 500인회는 각각 제헌 위원회를 선출해 두었는데, 나폴레옹은 이 두 위원회와 시에예스에게 새 헌법의 제정을 위임하였다. 시에예스는 프랑스 혁명 초기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팸플릿의 저자로서 스스로 정치 이론가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그를 정치적 야심도 실천력도 없는 하나의 이론가로 평가하고 있었다. 시에예스의 정치 이론은 어디까지나 18세기적인 것이었다. 혁명 과정의 온갖 것을 다 경험한 시에예스가 이제 구상하고 잇엇던 권력 구조는 독재를 방지하고 공화정을 지킬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독재를 방지하려면 상퀼로트를 정치권력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동시에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고 분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구상한 헌법의 기본은 국민을 저변으로 하고 대선거자(Grand Electeur)를 꼭대기로 하는 피라미드형 과두제였다. 그것은 그의 표현을 빌리면 신임은 밑에서 오고 권력은 위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의 구상에 따르면 21세 이상의 남자로서 일정한 주소에 1년 이상 거주한 유권자들이 군청 소재지에 모여서 그중 10분의 1을 뽑아 지방 명단(liste communale)을 작성하면 , 이 명단에 실린 자들이 도를 단위로 모여서 그중 10분의 1을 뽑아 국가 명단(liste nationale)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이 국가 명단에 실린 5,000명 내지 6,000명 중에서 행정부의 요원과 입법부의 의원을 뽑으면 되었다. 그리고 최고 행정권은 세 사람에게 주어지는데, 이들은 외무와 내무를 각각 담당하는 통령 둘과 이 둘을 지명하는 것 말고는 별로 실권이 없는 국가원수로서의 대선거자였다. 대선거자는 베르사유 궁에 살고, 600만 프랑의 세비와 각종 명예가 부여되었다. 시에예스의 이러한 구상은 보통선거제의 형식을 빌리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일반 국민을 정치에서 따돌리려는 생각의 표현이었다. 이 제도는 일반 국민이 지방 명단 선거에 참여함으로써 주권을 행사하느다는 만족감을 느끼게 하고, 프랑스에는 민주주의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끔 되어 있었다. 이러한 선거제도는 나폴레옹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최고 행정권 문제에서 나폴레옹은 시에예스의 생각에 반대하였다.
입법부도 의회 독재를 막도록 만들어졌다. 입법부는 참의원(Conseil d’etat), 호민원(Tribunat), 입법원(Corps legislatif) 및 원로원(Senat conservateur)의 4원으로 구성되고, 참의원만이 법안 발의권을 가지고 법안을 호민원에 상정하면 호민원은 그 법안에 관한 토의만을 하고 입법원에 회부하도록 되어 있었다. 입법원은 호민원에서 토의된 법안을 토론 없이 가부 표결만 행하면 되었다. 그리고 원로원은 호민원이 어떤 법안을 위헌이라고 판단하면 그 위헌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과 함께 호민원과 입법원 의원들 및 통령들과 대선거자를 국가 명단 안에서 선임하는 권한을 가졌다.
이상과 같은 헌법 골격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선거제도와 입법부의 구조에 대해서는 만족했으나, 최고 행정권자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시에예스는 독재의 방지를 원했으나, 나폴레옹은 개인적 야심을 위하여 대선거자 제도에 반대한 것이다. 그는 대선거자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력한 왕의 그림자, 더구나 말라빠진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혹평하면서 “그림자가 실물의 대역을 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잘못이다”라고 했다. 시에예스가 나폴레옹을 실권 없는 국가 원수의 자리에 앉히려고 했던 계산은 큰 오산임이 이제 명백해졌다. 나폴레옹과 시에예스는 대립했고, 시에예스의 제헌 작업은 지연되었다. 12월 12일 나폴레옹은 제헌 위원회와 시에예스를 공관으로 소집하여 미완성인 초안을 낭독시킨 후 거기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아직 미완성이라는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헌법의 제정도 쿠데타의 방식이었다. 바로 여기서 나폴레옹의 국가관이 나타난다. 그에게 헌법이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국민을 명령에 따라 재빨리 움직이는 병사들로 여기고 자신을 그 부대장으로 생각하였다. 그러한 통치자와 피통치자로 구성되는 국가에 체계적이고 정교한 헌법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
12월 15일 헌법이 공포되었다. 그 헌법에는 대선거자가 없을 뿐만 아나라 최고 행정권자인 제1통령에게 독재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세 사람의 통령이 있었으나 나머지 둘은 자문역에 불과한 들러리였다. 두 명의 제2통령에는 캉바세레스와 르브룅이 임명되고 시에예스와 뒤코스는 임시정부에서 밀려나 원로원 의원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부뤼메르 쿠데타를 시종 계획하고 추진한 사람들이었으나 사태는 이제 그들의 본래의 목표와는 전혀 다른 데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 공화 8년 헌법은 제95조에 국민투표의 인준을 규정하고 있었지만 국민투표가 실시되기 전에 이미 발포되었다. 국민투표는 이듬해 2월에 실시되었는데, 찬성 300만에 반대는 1,562표밖에 없었다. 국민투표는 기정사실의 추인 절차에 불과햇고, 독재를 국민주권에 입각한 것처럼 위장하는 선전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위장은 헌법 자체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헌법은 얼핏 보기에 국민주권의 원칙에 따른 보통선거제에 의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21세 이상의 모든 남자가 투표에 참가하기는 했으나 위에서 말한 괴상한 선거제도에 의하여 유권자의 투표는 정치적 실효를 나타내지 못하였다. 백 보를 양보하여 그 선거제도를 궁극적으로는 국민주권의 원칙에 의한 것으로 간주해 주더라도, 나폴레옹은 그 제도에 따라 선출된 국가 명단마저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세 통령들과 호민원 의원 및 입법원 의원은 원로원이 국가 명단에서 선임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세 통령은 국가 명단이 작성되기 전에 나폴레옹이 자신을 비롯하여 모두 임명했고, 또 원로원 의원 60명은 그가 임명한 두 통령이 임명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법안 발의권을 독점하고 있는 참의원도 나폴레옹이 임명했고 또 원로원은 호민원과 입법원에 대하여 거부권을 갖고 잇었다. 이런 입법부를 어떻게 국민 주권의 원칙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호민원의 정원은 100명, 입법원은 300명, 참의원은 처음에는 30명이었으나 뒤에는 45명으로 늘어난다. 특기할 만한 것은 참의원이 행정재판소의 기능을 겸했다는 사실이다. 일반국민과 관청의 이해 충돌을 조정해 주는 행정재판의 권한이 참의원에 주어진 것이다. 통령 아래 행정부 각 부서에는 장관(ministre)이 있었으나 각 장관은 개별적으로 통령의 명령을 집행할 뿐이고 장관들 전원으로 구성되는 내각은 없었다. 입법부에 책임을 지는 유일한 관직이 장관들이었는데 그들은 각기 개별적으로 책임을 질 뿐, 내각으로서 책임을 지지는 않았다. 나폴레옹은 장관들의 연합을 막으려고 각 부에 협의회를 만들고 의장에는 참의원 의원을 앉혔다. 통령정부의 모든 기구와 관직은 제1통령의 독재권을 집행하는 손발이었다. 제1통령은 참의원을 통하여 법안을 발의하고, 참의원 의원, 장관, 외교관, 육해군 장교, 입법부의 사무 직원, 도지사, 각급 재판소의 재판관과 직원에 대한 임면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삼부를 통어하는 독재자였다. 그의 행동은 입법부에도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두 사람의 제2통령은 제1통령이 결재하는 문서에 원한다면 의견을 기입할 수 있으나 제1통령은 그 의견을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세 통령은 각각 임기 10년이고 모두 튈르리 궁에 살았다. 그러나 제1통령의 연봉은 50만 프랑이고 제2통령은 각각 16만 6,666프랑이었다. 연봉에서도 현격한 차이가 뚜렷했다. 요컨대 제2통령제는 제1통령의 독재권을 제도적으로 숨겨보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허수아비 제도였다.
제1통령의 독재권은 지방행정제도와 사법제도의 개편으로 더 강화되었다. 1800년 2월 17일법은 프랑스 혁명이 제정한 도 단위 행정구역은 그대로 유지했으나 지방자치제도를 전면 폐지하였다. 도지사, 군수, 면장은 물론이고 각급 지방의회 의원들도 선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1통령이 직접 임명하였다. 이 새 행정 제도는 중앙집권과 국가적 통일을 급속히 촉진시켜 앙시앵레짐의 지방성은 물론이고 혁명 과정에서 일어났던 연방제 같은 분권주의를 말끔히 씻어버리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행정제도는 도로, 교량, 운하, 항만 등의 눈부신 건설로 문물의 교류를 신속하게 한 물질적, 경제적 개혁에 병행하여 프랑스의 자본주의와 국민주의를 크게 자극하였다. 사법제도도 중앙집권을 목표로 하여 개혁되었다. 1800년 3월 18일법은 군마다 초급 재판소를, 도마다 형사재판소를 설치하고, 전국에 27개의 공소재판소와 한 개의 대법원을 설치하였다. 초급 재판소의 치안판사와 대법원의 직원들 이외의 모든 각급 재판소 판사는 제1통령이 임명하였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참의원의 재판소의 기능에 맞먹는 행정재판소의 기능이 각 도의회에도 주어졌다. 지방 관서와 일반 국민 사이에 일어나는 이해관계의 충돌을 조정하는 행정재판이 아주 효율적으로 집행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새 사법제도도 지방행정제도와 함께 직접 간접으로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시켜주었다.
세 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재정의 정비이다. 재무 장관에 임명된 고댕(Martin Michel Charles Gaudin)은 비망록에 “브뤼메르 20일, 프랑스에는 사실상 재정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부가 가지고 있었던 통화는 17만 프랑뿐이었다. 그것도 쿠데타 전날 차입한 30만 프랑의 잔금이었다. 정부의 신용은 완전히 추락하여 액면 100프랑의 국채가 1.5프랑에 매매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은행가들에게 1, 200만 프랑의 차관을 요청했으나 300만 프랑밖에 빌리지 못하였다. 거기서 나폴레옹은 권력과 결탁한 은행가들의 부정축재를 환수시키는 한편 징세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혁하고 프랑스 은행(Banque de France)을 설립하여 금융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나폴레옹은 국고의 증수와 통화가치의 안정을 확보하는 한편 프랑스 은행의 운영권을 쥐고 돈줄을 손아귀에 넣었다.
공화 8년 헌법의 발효와 합헌적 통령정부의 수립과 함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나폴레옹의 독재적 권력은 수개월 사이에 프랑스에 질서와 안정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이 첫 성공은 그가 앞으로 성취할 세계사적, 영웅적 업적의 출발에 불과하였다. 그의 성공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미래를 위하여 과거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인사 정책에 잘 나타났다. 그는 인물 등용에서 과거를 묻지 않았다. 능력과 정부에 대한 충성만을 물었다. 그의 정부에는 경험이 풍부한 앙시앵레짐하의 관리에서부터 자코뱅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온갖 빛깔과 종류의 인물들이 들끓었다. 나폴레옹에게는 혁명은 끝났고 따라서 과거도 끝났던 것이다. 그는 지난날에 타오르던 정열의 불꽃을 다시 타오르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과거를 무시하였다. 그에게는 현재와 미래가 있을 뿐이었다.
그의 통령정부의 제2통령 캉바세레스는 시해파의 산악파 의원이고 르브룅은 나폴레옹보다 30세나 연상으로 루이 16세의 관료 출신으로서 왕당파의 혐의마저 받는 인물이었다. 참의원 의원, 장관, 지방 관서의 관리와 각급 지방의회 의원도 과거를 묻지 않고 임명하였다. 예컨대, 경찰 장관 푸셰는 자코뱅 출신이고 외무 장관 탈레랑은 왕당파 출신이었다. 행정부만이 아니라 입법부도 마찬가지였다. 입법부 의원의 3분의 2 이상이 총재정부의 입법부 의원들로 채워졌다.
과거를 묻지 않는 나폴레옹의 정책은 지난날 재판 없이 추방된 자들을 귀국시키고 인질법을 폐지하고 망명 귀족 중 일부를 추방에서 풀었다. 당시 망명 귀족 명부에 실려 있는 자가 10여 만 명에 이르렀는데, 나폴레옹은 혁명이 끝났다는 원칙에 따라 망명자 명부의 작성을 중지시켰다. 이 조처는 왕당파의 조직을 파괴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왕당파에 대한 관용 정책은 공화파의 비난을 야기했다. 나폴레옹이 공화파의 비난을 억압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언론에 탄압을 가하면 되었다. 두 달 사이에 파리의 신문이 73개에서 13개로 줄어들었다. 이 13개의 신문도 엄격한 검열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정책이 반보나프르트 세력을 깨끗이 회유한 것은 아니었다. 왕당파와 공화파의 조직적인 저항의 칼끝을 일단 피한 것일 뿐 힘 자체를 뿌리 뽑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스스로 루이 18세라고 자칭하는 프로방스 백작은 1800년 2월 20일 나폴레옹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기는 자기 국민에게 평화를 주고 싶다고 전하였다. 이 말은 곧 왕위를 어서 돌려달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왕당파의 반격이 언제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인 데다가 브뤼메르파 안에도 나폴레옹의 일인 독재에 불만을 품은 공화파의 공격이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이 좌익의 반항이 일어난 경우 시에예스, 바라스, 포셰가 과연 어떤 역을 할지 예상할 수 없었다. 나폴레옹의 체제는 아직 불안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