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6월 20일 미국 극작가 릴리언 헬먼이 출생했다. 그녀는 1934년에 〈어린이의 시간〉, 1939년에 〈새끼 여우들〉, 1946년에 〈숲 저 너머〉, 1960년에 〈골방의 완구〉를 발표했다. 1941년에 내놓은 〈라인 강의 감시〉도 유명하다.
2011년에 번역 출간된 《팍스 아메리카나와 미국 문학》은 릴리언 헬먼을 “투쟁하는 여성 극작가”로 규정한다. 그런 이미지를 그녀에게 부여하는 데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한 작품은 〈라인 강의 감시〉가 아닌가 여겨진다. 발표 연도가 벌써 암시를 준다.
독일 남자 뮐러와 그의 미국인 아내 사라는 지난 17년 동안 유럽에서 평화롭게 살아 왔다. 현재 부부는 세 자녀들과 함께 미국을 여행 중으로, 워싱턴DC에 거주하는 사라의 어머니 패니와 남동생 데이비드, 그리고 친척 패렐리 부부를 방문하고 있다.
마침 루마니아 출신의 가난한 백작 테크도 패럴리의 집에 손님으로 온다. 테크는 뮐러가 머무는 방을 뒤져 굳게 잠겨있는 여행가방 안에서 총 한 자루와 2만3천 달러를 찾아낸다. 본래 뮐러는 독일과 스페인에서 반파시스트 활동에 참여해 왔는데, 무기와 돈은 그 일에 쓰려고 숨겨온 것이었다.
테크가 뮐러에게 1만 달러를 내놓지 않으면 나치에 알리겠다며 협박한다. 결국 뮐러가 테크를 죽인다. 패니와 데이빗은 뮐러가 미국 경찰에 체포되지 않도록 돕는다. 뮐러가 아내와 아이들에게 “자유롭고 더 아름다운 독일에서 우리 모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작별인사를 하는 것으로 연극은 끝난다.
1952년 힐리언 헬먼은 반미(Un-American)활동조사위원회에 출석하였다. 위원회는 헬먼의 연인 해미트가 미국 공산당 조직원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위원회는 그녀에게 아는 공산주의자들의 이름을 실토하라고 요구했다.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알고 지내던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는 행위는 비인간적이고 부도덕하며 명예스럽지 못한 일입니다. 비록 내가 정치적이지 않고, 어떤 정치적 집단과도 편안하게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양심을 잘라내어 시대의 유행에 맞출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답변한 결과 그녀는 ‘블랙 리스트’에 올라 미국 주류 사회의 ‘감시’를 받으며 오랫동안 배척당했다. 독일이라는 파시즘이 자행해오던 행태를 미국이라는 새로운 파시즘이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이다. 미국 영화감독 어윈 윙클러는 이러한 비인간‧반인간적 사회를 1992년 〈Guilty by Suspicion〉이라는 영화로 고발했다.
Guilty는 ‘유죄’, Suspicion는 ‘의심’을 의미하므로 ‘Guilty by Suspicion’은 의심이 되는 것만으로 형벌을 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기원전 450년경에 제정된 것으로 추정되는 12표법 이후 고대로마는 유죄 판결 전에는 모두 무죄이고, 유죄 증명 책임이 기소자에게 있다는 시민법을 발효했다. 그게 언제인가? 2천수백 년 전의 일인데, 아직도 ‘의심을 받는 자체로 유죄’라니?
〈Guilty by Suspicion〉의 주인공 이름이, 〈라인 강의 감시〉의 사라의 남동생과 같은, 데이비드이다. 데이비드는 촉망받는 영화감독이다. 그는 릴리언 헬먼처럼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 불려간다. 동료들 중 공산주의자들을 고발하면 영화 만드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해주겠다는 제의를 받는다. 데이비드는 거부한다.
제작사는 촬영에 들어가려던 영화를 취소한다. 데이비드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사진관에 취직하지만 정보기관이 나서서 쫓겨나게 만든다. 아들은 학교에서 공산주의자의 자식이라며 조롱을 받는다. 아버지가 언젠가 살해될 것이라는 위협은 아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 이때 제작사가 접근해 다시 영화를 만들자면서,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 가서 요구하는 대로 진술하라고 회유한다.
영화를 만들고 싶은 예술가적 충동에 흔들린 데이비드는 반미조사위원회에 출두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는 회오리치는 양심의 분출을 일으키고 조사관들의 요구에 불응한다. 그 바람에 법정 모독죄 처벌까지 가중된다. 고통의 시간은 20년이나 흐른다. 아들이 성인으로 자란 뒤에야 그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Guilty by Suspicion〉이 지금도 ‘청소년 관람 불가’로 내쳐져 있다. 어째서 그런 등급이 내려졌는지 알아보려고 영상물등급위원회 누리집을 뒤져보지만 판정 까닭을 찾을 길이 없다. 어째서 청소년 관람 불가일까? 잠이 오지 않을 만큼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