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고려일보 한글판 편집장 일을 보던 양원식 옹(74세)이 갑자기 세상을 떴습니다. 부인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던 중 괴한의 습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동란 이후, 북한에서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다가 김일성체제를 비판하는 발언을 한 까닭에 돌아가지 못하고, 1960년 무렵부터 이곳 카자흐스탄에 와서 살게 된 10명의 인사 가운데 한 분인데, 이 분이 돌아감으로 이제 정추 선생을 비롯해 세 분만 생존해 있다고 합니다. 옛날 같았으면 북한의 소행으로 단정하겠지만, 문화부차관까지 지내고 망명한 정상진 같은 분이 멀쩡한 걸로 보아 다른 사람의 짓으로 추정들 하고 있었습니다. 오전 11시에 한국교육원에서 열린다기에 장례식에 당도하니, 본관건물 현관에, 이곳의 관례대로 관뚜껑을 열어놓은 채 고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머리를 다쳐서 그런지 얼굴만 내놓고 나머지 ㅂ부분은 흰천으로 감싸 놓고 있었습니다. 아주 잠자는 듯이 평온한 모습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정추 선생님도 다시 만났고, 전화 통화만 했던 이정희 선생도, 옛날이야기 들려주셨던 한철주 할머니도 보였습니다. 석달간 출입을 못하실 정도로 편찮으시더니 이제 그만해져서 이번 주일에는 교회에도 나오실 수 있다는 고마운 말씀이었습니다. 12시가 되자, 서너명의 취주악대가 부는 장송곡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운동장으로 유해가 운구되었습니다. 그 앞에서 여러 사람이 차례로 나와 고인을 추모하는 인사말을 하다가, 화환을 안은 일행이 앞서고 그 뒤에 여섯 명이 운구하는 유해가 따르고, 가족과 조문객이 정문까지 행진한 다음, 장례차에 실었습니다. 시내 레스끌로바 공동묘지로 간다기에, 나는 박넬리 교수와 외대에 가서 한국유학생 전화번호를 알아보기로 약속하였지만, 박넬리 교수가 안 보여 헤매는데, 한우리 박사장님이 차를 타라기에 집으로 가는 줄 알고, 시인인 리 스타니 슬라브와 러시아 학술원 회원이며 최고의 문학가로 추앙받는 김 아나똘리 선생님(70세)과 함께 탔더니만, 공동묘지행이었습니다. 동승한 또 한 사람은 카작 문인인 쟈나이다로프라고 하는데, 가면서 오면서 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소득이 대단했습니다. 우선 김 아나똘리 선생님이 여러 문인과 함께 작년에 냈다는 책(리 스타니 슬라브가 얘기해 준 적이 있는데 제목을 물으니, 러시아어로 적어주는데 집에 와서 사전을 보니 ‘보이지 않는 섬’이었음)은, 1978년도 봄에, 타슈켄트 황만금농장(김병화농장과 함께 러시아 전역에 소문난 농장)에 가서 고려인 노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세 분의 노인한테서(할머니는 딱 한 분이었는데 집 주인이었으며, ‘개 오리 이야기’를 구술하였다 함) 사흘 동안 저녁마다 들었던 옛날이야기를 러시아로 번역한 것이 들어 있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알마티에서 출판했다는데 본인도 가지고 있지 않다기에 김게르만 교수한테 물어보니, 과학아카데미 구내서점에서 판다고 했습니다. 그 밖에 다른 카작 이야기책도 러시아로 과거에 번역된 적이 있으니, 필요하면 얘기하라는 고마운 얘기였습니다. 아마도 60년대쯤 러시아로 번역되고는 다시는 그런 작업이 진행되지 않아 헌책방에서도 구경하기 힘들게 되었다가, 요즘들어 카작말로 나오기 시작하는 눈치입니다. 카작 문인한테 물으니, 월요일쯤 협회사무실에 오면, 보여주기도 하고 주기도 하겠답니다. 모두 얼마나 되냐니까 500권은 된다니, 아주 풍부한 구비문학 자료를 보유한 나라입니다. 천지창조, 인간창조 신화도 있다고 했습니다. 전통적인 내세관으로는, 이 세상은 신과 새가 사는 곳, 인간이 사는 곳, 도깨비와 귀신이 사는 곳, 이렇게 세 차원으로 나눠지는데, 사람이 죽으면 선인이든 악인이든 구분없이 모두 신과 새가 사는 곳으로 간다고 믿었답니다. 우리 저승관념과 유사해서 흥미 있었습니다. 묘지에서 유족과 조문객들이 흙 한 줌씩을 뿌린 후, 인부들이 무덤 만드는 작업을 하는 동안, 계속해서 김 아나똘리 선생과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러시아말을 고려말보다 편하게 여기는 눈치였으나, 가끔 막히면 리 스타니 슬라브가 거들어서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우즈벡 고려인 구전설화를 어떻게 조사했는지 자세히 물으니, 고려말로 구술하는 것을 들으면서 수첩에 러시아어로 줄거리를 메모한 것을 토대로 책을 냈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70 이상의 고령들이라 지금은 다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한 노인은 이야기하다가 진력이 나자, 이야기 하나만 하고 그만두겠다기에 하라고 하자, 김삿갓이야기를 했답니다. 양반들이 모여 ‘이불’이란 글자를 가지고 시 짓는 놀이를 하고 있는 곳에, 김삿갓이 끼어들어, 자기도 시를 짓겠다고 했다지요. 무식한 상놈이 무슨 시냐고 하다가, 자꾸만 껴달라고 하자 마지못해 지어 보라고 하니, 하늘에 떠 있는 해를 바라보며 “이 불 죽이고, 이불 덮고 X을 하자”고 읊고는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자리를 뜨더랍니다. 우리 말 동음이의어의 묘미를 살린 이야기인데, 러시아어로는 옮기기 어려워 그 이야기는 뺐다고 했습니다. 그 책 속에 들어있는 이야기로 <벙어리 며느리>이야기를 하나 해주었습니다. 벙어리지만 귀는 들려 온 동네 소식을 다 알고 있는 며느리였다지요. 외출했다 돌아온 며느리에게, 어느날 시아버지가 밖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고, 말을 못하는 며느리는, 온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지요. 치마를 들썩들썩하자, 시아버지가 알아들고 하는 말, “오! 불이 났구나! 그래, 다 탔니?” 그러자 이 며느리, 한참 생각하다가는, 시아버지의 성기를 가리켰다든가 들먹였다지요. 그러자 시아버지가 하는 말, “옳아, 다 타고 굴뚝만 남았다고? 그래 짐들은 건진 거냐?” 며느리가 다시 시늉하기를, 옷을 홀딱 벗더니만 드러누워서는 시아버지를 안아 자기에게 덮듯이 엎어지게 하더랍니다. 이번에도 시아버지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하는 말, “그래. 덮을 것도 건지지 못하고 다 탔구나. 저런!” 구르만가지 뿌쉬킨 거리에 있다는 아카데먀 나우크(과학아카데미) 구내서점에 내일이라도 당장 가서 그 고려인 구전설화집을 구해야겠습니다. 비록 줄거리 위주지만, 현재 고려인 집단촌이 거의 해체된 상황에서, 그곳에 가도 여기처럼 구전설화 채록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책을 통해 30년 전의 레파토리와 내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가 방학만 되면 침켄트에 가서 우즈벡 출신 고려인 노인들을 만나 설화를 채록해 보려 하는데, 그게 성공하면 두 가지를 비교할 수도 있겠고, 카작스탄에서 내가 채록한 자료들과 합하면 중앙아시아 고려인 구전설화의 판도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소개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묘지에서 모든 일이 끝나자, 도스틱 거리에 있는 쥴름인가 하는 식당으로 가라는 안내가 있어, 모두 그리로 모여 식사를 했습니다. 박사장님 말로는 최고급 식당이라는데 정말 그런 듯했습니다. 외관도 멋졌고 나오는 음식의 종류며 품질이며, 무엇이든 떨어졌다 싶으면 번개같이 갖다가 채웠습니다. 한참 먹고 있으니, 조문객들 중에서 한 사람씩 마이크 앞에 나아가 고인을 추모하는 말을 한마디씩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길게, 어떤 이는 짧게, 어떤 이는 눈물을 훔치며, 대부분은 원고도 없이 편안하게 말하였는데, 어떤 이는 메모를 보아가며 했습니다. 대충 15명 정도가 나가서 추모담을 하는 듯했습니다. 어지간히 마무리되자, 그 아들이 나와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였고, 사회자가 나와 “이것으로 공식적인 모임은 마친다”고 선언하자 슬슬 자리를 뜨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난한 집에서도 비록 허름한 식당일망정 잡아서 정성껏 대접하는 게 이곳 풍습이랍니다. 집에 돌아와 거실 쇼파에 걸터앉아 있노라니, 양 선생님이 내 아들 보라고 건네준, 당신의 손때가 묻은 <러한사전>이 보입니다. 안방에는 그분이 손수 복사해 준 우즈벡판 김선달이야기모음집이라고 할 <알다르코세> 러시아번역본(1959년판)이 있습니다. 그밖에도 옛날이야기와, 북한노래를 비롯한 몇 편의 민요를 구연해 준 게 테이프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녹취 과정에서 확인해 보니 김선달 이야기 몇 편이 녹음이 안돼 있어, 다시 해야지 하고 있었는데, 이제 영영 그분은 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소설 쓰는 것 마무리 단계니 끝나면 문장 검토 해 드리기로 약속했는데, 신문 만드는 일로 시간에 쫓겨 차일피일 미루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더니 그만 가셨습니다. 그래도 남겨준 자료며, 어떻게든 도와주려 하시던 그 인정많은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의 장례식 덕분에 좋은 분들을 한꺼번에 많이 만나는 행운까지 누렸으니 다시금 감사할 일입니다. 평안히 잠드소서. 이제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니, 두고온 북한의 가족들, 생사도 모른 그분들의 소식도 알아보시고, 만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