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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김소운(金素雲)의 생과 작품
1. 생애와 작품집
*소운(金素雲, 1907~1981) - 수필가 김소운, 그는 처음에 시를 썼고 나중에 주로 그 특유의 시사성이 있는 수필을 쓰면서 인생 체험담을 통한 삶의 애환들을 잘 다듬어 감동을 줬다. 1907년 부산 영도에서 태어나 옥성 보통학교 4년을 중퇴하고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가이세 중등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가 관동 대지진으로 중퇴했다. 해방 직전에 귀국하여 광복동 동장을 지낸 이력도 흥미롭지만 이후로는 부산 동래의 언덕배기에 혼자 전원생활을 하면서 서울 문단을 왕래했다. 1949년에 재산을 처분하고, 문단 선후배로부터 기금을 거두어 대구 달성공원에 이 땅 최초로 이상화 시비를 세웠다. 그러나 일부에서 돈 없는 사람이 무슨 돈으로 버젓한 시비를 세울 세간의 화제의 대상이 되었고, 논란이 일자 몹시 속이 상했다. 그의 독거 생활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본래 애견가였으므로 동네 구멍가게 주인의 개에게 그 구멍가게에서 산 카스텔라를 입에 넣어 주는 일을 날마다 되풀이했다. 그러다 보니 개는 정작 주인보다 그를 더 따랐다.
안식처였던 광복동 '밀다원'에 출입하던 어느 작가가 김소운은 술만 취하면 팬티를 벗는 습성이 있다는 모략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를 시기한 사람이 날조한 것이었다. "어디 이 김소운도 팬티 한번 벗어 보자."고 모략에 못 이겨 허허 웃으며 팬티를 벗은 일도 있었다.
그가 지난날 동래고교의 교가를 작사한 기회에 학생들에게 짤막한 연설을 하면서 그의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여러분의 모표는 벌떼이지만 나의 모표는 이 턱수염"이라고 익살을 부렸다 한다.
미군 사병으로부터 그의 턱수염을 만지작거려 조롱당했다는 얘기를 듣고부터 자신의 턱수염까지 잘라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김 화백도 그 수모를 견디다 못해 수염을 자른 뒤였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동조 삭발이라 할 만하다. 민족적 자존의 심경이 그런 식으로 표출된 셈이다. 아마 그 병사는 선비정신의 상징이기도 한 턱수염의 존엄성을 알 까닭이 없었다 하더라도 주둔군의 오만 방자성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그는 그 어려운 시대에도 정부정책에 대해서도 할 말은 하는 편이었다. 허락되지 않아 일본에 망명하는 몸이 되었다. 그가 일본 도쿄에서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 때 이승만 정권을 비판한 발언이 자유당 정부의 비위에 거슬린 것이다. 일본의 '문예사전'에 등재될 만큼 저작 생활을 했지만 고국에 대한 애국열 정은 남달랐다. 김소운은 망명생활에서 돌아와 서울에서 집필로 생계를 꾸려나갔으며, 1981년 74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그의 문학비가 영도 해안에 세워졌다.
2. 김소운의 대표작
환영할 것이 못되니, 빨리 잊을수록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난하고 어려웠던 생활에도 아침 이슬같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회상(回想)이 있다. 여기에 적는 세 쌍의 가난한 부부 이야기는, 이미 지나간 옛날이야기지만, 내게 언제나 새로운 감동을 안겨다 주는 실화(實話)들이다. 그들은 가난한 신혼부부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남편이 직장으로 나가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하겠지만, 그들은 반대였다. 남편은 실직으로 집안에 있고, 아내는 집에서 가까운 어느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남편은 보이지 않고, 방 안에는 신문지로 덮인 밥상이 놓여 있었다. 아내는 조용히 신문지를 걷었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 쌀은 어떻게 구했지만, 찬까지는 마련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만금(萬金)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그때, 시인의 아내가 쟁반에다 삶은 고구마 몇 개를 담아 들고 들어왔다.
아내를 대접하는 뜻에서 그 중 제일 작은놈을 하나 골라 먹었다. 그리고 쟁반 위에 함께 놓인 홍차를 들었다.
어느새 밖에 나갈 시간이 가까워졌다. 남편은,
있어야 늙어서 얘깃거리가 되잖아요."
그러면서도 가슴 속에는 형언 못할 행복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이들 내외는 갑자기 가난 속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한번은, 춘천으로 떠는 남편이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어도 돌아오지를 않았다. 제 날로 돌아오기는 어렵지만, 이틀째에는 틀림없이 돌아오는 남편이었다. 아내는 기다리다 못해 닷새째 되는 날 남편을 찾아 춘천으로 떠났다.
여관을 뒤졌지요. 여관이란 여관은 모조리 다 뒤졌지만, 그이는 없었어요. 하룻밤을 여관에서 뜬눈으로 새웠지요. 이튿날 아침, 문득 그이의 친한 친구 한 분이 도청에 계시다는 것이 생각나서, 그분을 찾아 나섰지요. 가는 길에 혹시나 하고 정거장에 들러 봤더니……." 트럭에다 사과를 싣고 춘천으로 떠난 남편은, 가는 길에 사람을 몇 태웠다고 했다. 그들이 사과 가마니를 깔고 앉는 바람에 사과가 상해서 제값을 받을 수 없었다. 남편은 도저히 손해를 보아서는 안 될 처지였기에 친구의 집에 기숙하면서, 시장 옆에 자리를 구해 사과 소매(小賣)를 시작했다. 그래서 어젯밤 늦게야 겨우 다 팔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보도 옳게 제 구실을 하지 못하던 8·15 직후였으니……. 그때만 해도 세 시간 남아 걸리던 경춘선(京春線), 남편은 한 번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아내는 한 손을 남편에게 맡긴 채 너무도 행복해서 그저 황홀에 잠길 뿐이었다.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여인은 조용히 웃으면서 이렇게 말을 맺었다. 지난날의 가난은 잊지 않는 게 좋겠다. 더구나 그 속에 빛나던 사랑만은 잊지 말아야겠다. '행복은 반드시 부(富)와 일치하진 않는다.'는 말은 결코 진부한 일 편(一 片)의 경구(警句)만은 아니다.
<감상>
“가난한 날의 행복”은 가난 속에서 느끼는 행복감을 주제로 한, 세 편의 이야기를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해 놓은 수필이다. 수필이라기보다 짧은 소설로 느껴질 정도로 잔잔한 감동을 세 편의 이야기를 통해 만날 수 있다. 단순한 흥미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교훈이 너무나 분명하기에 교술 갈래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의미 내지는 가치와 관련된 중요한 철학적 질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쉽사리 단정 지어질 수 없는 대상이기에 아직 누구도 일반론을 찾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시대와 개인, 환경에 따라서 달라지는 미묘함이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모든 것이 급격하게 물질 만능, 확대지향형으로 변해가는 요즘 세대에서는 이러한 내용의 수필이 어떻게 와 닿을지는 의문이다, 분명한 것은 행복은 그리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요, 가까운 곳에서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읽어 낼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물질적 풍요로움, 사회적 지위나 명예, 이런 것들 또한 행복의 요소로 중요한 것이겠지만, 한순간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작품에서 체험할 수 있는 가난함 속에서의 행복은 주어진 환경을 넘어서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 곧 사랑이 그 원인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행복지수는 부(富)가 아님을 이미 알 수 있다.
제목 : 피딴 문답(問答)
나는 그 피딴을 대할 때마다, 모자를 벗고 절이라도 하고 싶거든……." "그건 또 왜?" "내가 존경하는 요리니까……." "존경이라니……, 존경할 요리란 것도 있나?" "있고말고, 내 얘기 들어 보면 자네도 동감일 걸세. 오리 알을 껍질째 진흙으로 싸서 겨 속에 묻어 두거든……. 한 반년쯤 지나고 나서 흙덩이를 부수고, 껍질을 까서 술안주로 내놓는 건데, 속은 굳어져서 마치 삶은 계란 같지만, 흙덩이 자체의 온기 외에 따로 가열을 하는 것은 아니라네." "오리 알에 대한 조예가 아주 소상하신데……." "아니야, 나도 그 이상을 잘 모르지.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야. 껍질을 깐 알맹이는 멍에 든 것처럼 시퍼런데도, 한 번 맛을 들이면 그 풍미가 기막히거든. 연소나 상어 지느러미처럼 고급 요리 축에는 못 들어가도, 술안주로는 그만이지……." "그래서 존경한다는 건가?" "아니야, 생각을 해 보라고, 날것 째 오리 알을 진흙으로 싸서 반년씩이나 내버려 두면 썩어버리거나, 아니면 부화해서 오리 새끼가 나와야 할 이치가 아닌가 말야……. 그런데 썩지도 않고 오리 새끼가 되지도 않고, 독자의 풍미를 지닌 피딴으로 화생한다는 거, 이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지. 허다한 값나가는 요리를 제쳐 두고, 내가 피딴 앞에 절을 하고 싶다는 연유가 바로 이것일세." "그럴싸한 이야기로구먼, 썩지도 않고, 오리 새끼도 되지 않는다...?" "그저 썩지만 않는다는 게 아니라, 거기서 말 못할 풍미를 볼 수 있다는 거, 그것이 중요한 포인트이지…. 남들은 나를 글줄이나 쓰는 사람으로 치부하지만, 붓 한 자루로 살아 왔다면서, 나는 한 번도 피딴 만한 글을 써 본 일이 없다네. 망건을 10년 뜨면, 문리가 난다는 속담도 있는데, 글 하나 쓸 때마다 입시를 치르는 중학생처럼 긴장을 해야 하다니, 망발도 이만저만이지……." "초심불망이라지 않아……. 늙어 죽도록 중학생일 수만 있다면 오죽 좋아……." "그런 건 좋게 하는 말이고, 잘라 말해서 피딴 만큼도 문리가 나지 않는다는 거야……. 이왕 글이라도 쓰려면 하다못해 피딴 급수는 돼야겠는데……." "썩어야 할 것이 썩어 버리지 않고, 독특한 풍미를 풍긴다는 거, 멋있는 얘기로구먼. 그런 얘기 나도 하나 있지. 피딴의 경우와는 좀 다르지만……." "무슨 얘긴데……?" "해방 전 벌써 오래된 얘기지만, 선배 한 분이 평양 갔다 오는 길에 역두에서 전별로 받은 쇠고기 뭉치를 서울까지 돌아와서도 행장 속에 넣어 둔 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나. 뒤늦게야 생각이 나서 고기 뭉치를 꺼냈는데, 썩으려 드는 직전이라, 하루만 더 두었던들 내버릴밖에 없었던 그 쇠고기 맛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더란 거야. 그 뒤부터 그 댁에서는 쇠고기를 으레 며칠씩 묵혀 두었다가, 상하기 시작할 하루 앞서 장만하는 것이 가풍이 됐다는데, 썩기 직전이 제일 맛이 좋다는 게, 뭔가 인생하고도 상관있는 얘기 같지 않아?……." "썩기 바로 직전이란 그 '타이밍'이 어렵겠군……. 썩는다는 말에 어폐가 있긴 하지만, 이를테면 새우젓이니 멸치젓이니 하는 젓갈 등속도 생짜 제 맛이 아니고, 삭혀서 내는 맛이라고 할 수 있지……. 그건 그렇다 하고 우리 나가서 피딴으로 한 잔 할까? 피딴에 경례도 할 겸……."
<감상>
표현하고 있다. '피딴'은 오랜 시일을 겨 속에 묻혀 있은 뒤에야 좋은 안줏감으로 완성된다. 사람도 많은 수련의 시일을 보내야 자기완성을 이루고 원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며, 일상생활에서 평범하게 보아 넘기기 쉬운 예화를 통하여 인생에 있어서 인간의 노숙미, 또한 잘 삭은 생활의 멋에 대해 예찬하고 있다. 이 글의 뒷부분에는 썩기 직전의 쇠고기 맛과 중용의 도를 지키는 일의 어려움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 글은 오랜 수련을 거쳐야만 인생의 원숙함을 얻을 수 있다는 교훈적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교훈적 수필이자 글을 쓸 때마다 '입시를 치르는 중학생처럼 긴장'하는 자신의 글쓰기 태도를 반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백적 수필이기도 하다. 즉, 도가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무르익었을 때야말로 특유의 멋과 향기를 품을 수 있는 인생을 암시한 것이다.
3. 작품 세계
김소운의 수필은 생활주변의 사물에 대한 관찰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는 수필을 주로 썼다. 수필이 생활 주변의 사소한 체험에서 철학적 의미와 인생의 교훈을 발견하는 문학이라면. 작가의 체험이 제재가 되어 작품의 바탕을 이루고, 이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주제가 되는 것에 충실했다. 삶의 가치관, 행동양식, 내면세계 등을 잘 드러내는 개성의 글을 주로 썼다 궁극적으로는 작가가 자신의 체험에 부여한 의미가 나의 어떤 점을 돌아보게 하며, 어떤 깨달음과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가를 살펴보는 즐거움을 주고 있다.
-대구 문인협회에서 일부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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