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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향한 세 편의 동시상영
Ⅰ. 서 론
이 글은 시에 관한 토론이다. 시에 대해 더 무엇을 말하랴! 그렇다. 이 글의 서론은 시에 관해 더 보탤 말이 없음을 보태는 과정이다. 시에 대한 정의가 많지만 여전히 시는 정의되지 않는다. 정의는 거부되고 정의된 시는 금세 낡아버린다. 눈을 퍼다가 우물을 메우는『벽암록』의 고사는 이 에세이의 논지에도 적절히 해당된다. 옷을 다 입고 단추까지 채웠는데 첫단추가 잘못 끼워진 사태를 발견하고 단추를 풀고 첫단추의 없는 구멍을 찾을 때의 손떨림이 이 글의 마음이다. 본론에서 다루어진 세 편의 글은 방향은 다르지만 시를 지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의 글이다.1)
Ⅱ. 시를 향한 세 편의 동시상영
제 1관: 그대의 딸꾹질
몇년 전에 아무개 대학 수학과 교수로부터 들은 얘기가 떠오른다. 강의 중에 한 학생이 ‘교수님, 이 공부하면 취직 됩니까?’라고 물어왔단다. 교수님은 망설이지 않고 ‘물론 취직 안 된다’고 즉답했다. 취직 안 되는 줄 알면서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는 순수학문의 어떤 증상적 모습이다. 그런 질문이 시를 가르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발생한다해도 뾰족한 답은 없겠다. 먹고 사는 데 도움은 물론 안 되겠으나, 사는 데는 약간의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물론 그것도 개인의 골(骨)나름이기는 하겠다.
신은 죽었다. 그러나 신만 그것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시는 죽었다. 그러나 시만 그것을 모른다고 고쳐도 되겠다. 나는 시라는 구식 장르가 자연사했다고 당당하고 담담하게 믿고 애도해왔다. 듣기에 따라서는 웬 자학이냐는 비아냥이 돌아올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 찬찬하게 스스로의 예술적 양식에 질문해보시라. 답은 기다리지 않겠다.
시는 시인이 이상적인 독자 즉 입 안의 혀같거나 ‘내 마음 날 같이 아실’ 그 이를 위해 쓰여진다. 그 가운데에 매파와 같은 미디어가 끼어 있다. 시인과 미디어는 별반 줄어드는 것 같지 않다. 이것만 들여다보면 한국시는 현상을 차분하게 유지하고 있다. 선방이다. 게다가 각종 문학상과 문학프로그램의 활성을 보면 시 혹은 문학은 성업 중인 것으로 착각된다. 그러나 언뜻 보아도 시는 흥행에 실패한 공연장을 닮고 있다. 객석에 지인 몇 사람 모아놓고 진행되는 연주를 생각해 보자. 잘은 모르되 투자비용이라는 측면에서 시와 음악 공연이 직접 비교되어서는 안 될 것이기도 하다. 독자계층은 시들었고 재활되지 않은 지 오래다. 일말의 연민도 삭제하고 등 돌린 연인처럼 독자들은 떠나갔다. 문학 혹은 문단이라는 시스템만 작동하고 있다.
독자계층의 하릴없는 해체의 배경에는 시대의 흐름과 독자의 입맛이 결정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익히 아는 바다. 삐삐, 휴대폰, 스마트폰의 진화과정을 돌아보면 그 변화의 실상과 폭을 짐작할 수 있다. 삐삐는 삐삐문화를 낳고, 휴대폰은 휴대폰 문화를 낳고, 스마트폰은 스마트폰에 맞춤한 문화를 퍼트린다. 말이 변화이지 이는 엄청난 의식의 격차를 낳았다. 바다에서 이전의 뽕나무밭을 가정하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시는 물론 이런 다종다양한 시대적 흐름을 밀고나가거나 종합하는 위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시의 위의에 존경심을 버리지 않고 시에 기대어 왔다. 그것은 미련한 신앙이 아니었다. 인류적 유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자 결코 소멸하지 않을 예술적 가치에 대한 헌신이었다. 시인들은 기꺼운 그 사도였던 셈이다.
그러나 시는 더 이상 우리시대의 희노애락을 담는 예술적 매체가 아니다.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당하는 순간이다. 이런 진술의 이면에는 ‘언제 시의 시대가 있었는가’라는 자조적 탄식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하다. 시의 시대라 이를만한 전성기는 없었으되 시를 읽고 시를 통해 세상을 관(觀)해 왔던 시대는 있었다. 그런 시대가 시의 시대였고, 그 시대의 분기점은 20세기까지였다. 어쩌다 1960년대 4.19세대로부터 ‘문장은 역시 상허 이태준’이지 아니면 ‘시는 역시 지용’이야와 같은 회고어린 푸념을 들을 때가 있었다. 그런 문학적 향수는 어떤 문학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었다는 세대론적 속사정의 표백이다. 다시말해 이태준이 황석영이나 김훈으로 대체된다거나 정지용이 김수영이나 황동규로 상속될 수도 있다는 낙관은 그래도 독자인 우리를 안심케 했다. 그리고 이런 낙관이 문학을 밀고나가는 힘이 되기도 했다. 요컨대 이런 낙관이 마감처리되었다는 말이다.
한 말 또 하고 있는데, 시는 그리하여 20세기까지 유의미했던 장르였으나, 21세기는 더 이상 인간과 세상을 위로하거나 새로운 어법으로 시인 밖에 있는 누군가를 놀래킬 자신도 여력도 없다. 시는 언어를 빙자해 갈 길을 다 갔다. 그런데도 시인은 지금 버젓이 시를 쓰고 있다. 이건 또 뭐냐? 내가 알 게 뭐냐? 조심스레 짐작컨대, 이것밖에 익힌 게 없는 사람들은 이것밖에 할 수 없다. 이 판을 떠나 저 판으로 가면 망한다. 송충이가 솔잎 먹는 것은 그가 먹을 게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인이라는 보직의 지속으로 시를 쓴다. 이것이 시가 죽은 시대의 시인의 직업적 진실이다.
시인들은 시가 죽었음을 모르는바 아니고, 기실은 누구보다 본능적으로 잘 알지만, 그냥 ‘모르쇠’하면서 ‘그래도 쓰다 보면’ 혹은 ‘이 짓밖에 없으니’와 같은 자기기만을 통해 존재하고 존속한다. 21세기가 깊어지면서 옛날에는 이런 걸 ‘시’라고 했다. 잘 알다시피 시는 없어진 지 오래됐고 굳이 시 비슷한 걸 꼽으라면 ‘언어의 막춤’ 같은 것이 옛날의 시 비슷한 것이었다고 시인은 생각한다.
요즘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가끔 이상한 사람들이 목격된다. 여러분도 골목길에서 바바리맨 만나는 정도의 빈도로 그런 축들을 만난 적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선 채로 딸꾹 딸꾹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딸꾹질하는 이상한 사람 말이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시티 라이트」에는 실수로 호각을 삼킨 떠돌이가 나온다. 그가 딸꾹질을 할 때마다 뱃속에서 호각소리가 나온다. 떠돌이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의 신체 '안'에서 나는 소리를 감추려고 애쓴다. 지젝은 이것이 '부끄러움'의 가장 순수한 모습이 아닌가라고 말한다. 참을 수도 없고 감출 수도 없는 그 딸꾹질. 그들이 단종된 시를 쓰는 21세기의 시인들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 본다. 다만 그들은 종이나 트위터에 대고 쓰는 것이 아니고, 몸의 한 증상으로 시를 발현시키는 인류들이다. 몸 속의 과잉excess을 밀어내는 딸국질이 아니라, 마음 안의 과잉을 뱉아내는 경련으로서의 시.2) 딸꾹질은 100가지 정도의 원인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가령 위가 팽창하거나 주변 기온의 변화 혹은 지나친 흥분과 같은 것이 원인이 된다. 모든 게 지나치면 전문가를 찾아야 하지만, 자신에게도 그치지 않는 이상한 딸꾹질이 계속되거든 혹 20세기적 시의 잔여 혹은 수습되지 못한 과잉이 아닌가 여겨보시기를. 그걸 시적 징후라고 명명해야 될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서지 않는다.
이제, 시를 쓰려는 사람들은 생각해야‘만’ 한다. 시쓰는 ‘기술습득’은 새로움에 대한 갈망 혹은 그것의 충족으로서의 학습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의 자기 증상, 삶의 미열같은 것을 다스리는 한 방편으로 정리하면 좋겠다. 옛날 할머니들이 체했을 때마다 ‘활명수가 좋더라’는 식도 있다. 그런데 이제 어디서도 활명수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이 현실적 환영(생산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시는 그런 자리에 있다. 그대가 딸꾹질 할 때마다 뱃속에서 울려오는 호각 소리처럼. 혹은 그때마다 당신을 엄습하는 수줍음과 경련. 참을 수 없는 당신의 딸꾹질을 들려 달라. 나는 그 소리를 당신의 ‘견디기 힘든’ 시로 읽겠다.
제 2관: 삶, 견디기 힘든
--증상적 시쓰기
#1.
시창작 수업이 두 번째 시간을 지나간다. 삶에도 시에도 첫 번 째, 두 번 째와 같은 단위는 없다. 그렇다는 뜻일 뿐이다. 그 자리에 눈금을 긋고 다시 지워나가는 관습. 출발은 했는데 아직 제자리에 있는 듯한 이 실감의 진원도 그와 같다. 가시 없는 장미를 만졌을 때와 같은 섬뜩함이 머리를 뚫고 나간다.
#2.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심정. 집밖을 배회하는 아이의 마음이 지금의 내 마음과 닮았다. 나는 시를 쓰는데 새로운 비의를 뚫고 나가야 한다는 내 식의 같잖은 사명감에 시달리고 있다. 남들은 더 낳은 방법을 알고 그것을 즐길 것이라는 소박한 질투심과 하찮은 자존심은 시쓰기를 토론해야 하는 자리를 늘 버겁게 만든다. 한 편의 시는 이미 뜨거운 요리의 과정을 거쳐 왔고, 요리 그 자체인데 나는 자꾸 요리의 비법이 있다는 듯이 안달한다. 아마도 시를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너무 가까이 대면하고 있다는 점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고, 배우겠다는 사람들의 다중적인 의식에 ‘가르친다는 아상我相’이 포획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회고한다. 분석적으로 봤을 때 ‘가르치는 척’ 하는 나의 증상이 이 부근에서 지체와 정체를 거듭하려고 하는 듯 하다. 말로는 잘 표기할 수 없는, 말로 하고 나면 그것이 그것이 아닌, 여전히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물같은 이 마음의 움직임을 무엇이라 해야 하는지 모를 뿐이다. 이 같은 아름다운 오해는 시를 쓸 때도 그렇지만 시에 대해 아는 척 할 때도 온다. ‘아름다운 영혼’이 그렇듯이 아름다움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3.
이 강의의 벽두는 ‘좋은 말씀’이었다. 좋은 말씀을 써달라며 책을 내민 보살에게 ‘좋은 말씀’ 네 글자를 써주었다는 법정화상의 일화가 전한다. 좋은 말씀이 따로 있다고 믿는 대중을 향한 경책이다. 시쓰기를 위한 좋은 말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시와 시창작에 관한 메뉴어리는 세상에 넘치고 있고, 바로 그 말씀을 조우하지 못해서 여러분이 내 앞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을 애써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 인터넷 두들기세요. 인터넷은 우리가 무지할 자유마저 앗아갔습니다. 자기의 시는 이미 자신의 몸에서, 몸에 세들어 있는 마음에서 싹트고 잎을 틔우고 있는데 불쌍한 시인에게 더 이상 무엇을 바라시나요? 업은 애기 3년 찾는다! 이것은 프롤로그 ‘좋은 말씀’의 도도하고 요염하한 요지였다. 충분히 발화되고 전달받지 못한 아쉬움은 있겠지만. 어쨌든.
#4.
시는, 잘 아시는 대로, 일기도 수기도 아니다. 사실에의 충실이 아니라는 뜻(이지만 이보다 일기적이고 이처럼 순연하기에 날것으로 섬뜩하게 비린 수기는 없다). 언어예술이고자 하는 일념이 시의 변치 않는 궁극이다. 기호이자 언어는 기표다. 좌회전 우회전을 지시하는 도로표지판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그 기호의 예술적 사용이 시와 시인의 직무라는 뜻이고, 시가 시장판이 고향인 소설과 신분을 달리하는 대목이다. 다 아는 얘기지만 그래서 ‘파르라니’ ‘시나브로’ ‘보드레한’과 같은 표기의 세련을 시의 주요 목표인 듯 착각한다. 언어 자체에 관한 용심이라는 측면에서 날 잡아 타박할 일은 아니다. 보디 빌더가 근육을 만드는 일과 시인의 언어에 대한 세련은 비슷하지만, 보디 빌더도 궁극이 근육 생산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조형성의 완성에 있다는 점이 유의되어야 한다.
언어는 삶을 인질로 삼고 있다. 그러니 언어는 언어만이 아니다. 삶이라는 질병이 존재하는 동안 시인의 언어는 항상 하나의 증상으로 존재한다. 혹은 징후로 존재한다. 시가 삶의 너절한 디테일을 변명하고 자신의 구중중한 마음을 세탁하는(혹자는 치유라고 하겠으나) 차원으로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본질적인 궁극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은 삶이 언어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그물에 비유한다면(비유는 언제나 빗나가기에 비유라는 방법 자체가 오류일 것) 그물은 그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물을 건져올리면 거기에는 고기도 있지만 고기 말고도 여러 종류의 해초들도 걸려 있다. 그물만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고기도 해초도 없을 때조차도 그물에는 하다못해 늘 물비늘이 묻어 있다. 좀 멋있게 얘기해서 물의 흔적이 남는다. 이게 언어가 아니고 무엇일까. 언어에는 이미-항상 삶의 여러 징조들이 묻어 있고 배어 있고 긁혀 있다. 무리해서 말했지만, 언어야말로 삶의 뜨거운 증상이라고 나는 명명한다.
#5.
증상의 유의어는 증세다. 증세가 어딘가 육체적 징후를 가리킨다면 증상은 정신적 징후와 관계되는 것으로 읽힌다. 가려움, 기침, 쑤심, 속쓰림과 같은 것이 증세의 계열에 있다면, 외로움, 수치심, 도덕적 열정과 같은 움직임은 증상의 계열에 놓이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뜻은 그렇다는 다소간의 어거지이고, 증세와 증상은 서로 겹치면서 섞여 있을 때 더 증상스럽지 않겠는가. 몸이 아프면서 마음이 아픈 이치가 그것이다. 겉멋스럽게 말하자면, 삶에서 언어를 도려내고 언어에서 삶을 발라내는 일이 시작업이 아니었던가. 그것은 양파껍질을 벗겨내는 일처럼 호기심과 헛수고를 동반하지만 그칠 수 없는 시지프스의 신화와 같다. 삶이 지속되는 한 언어의 그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 언어와 삶은 마치 인질범과 인질의 관계를 닮았다. 인질범으로부터 달아나지 못하는 인질. 이 에세이의 방향과는 좀 다르지만 보편적인 인류의 증상을 확인한다는 입장에서 황인숙의 ‘강’을 읽어 보자.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황인숙,「강」
황인숙은 ‘외로움’과 ‘괴로움’을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며 ‘외로움’의 본질을 뒤집어서 토로한다. 증상의 측면에서 읽자면 외로움은 각자의 것이고 각자의 방식으로 제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로움, 괴로움, 애간장, 어깃장, 치사함, 웃김과 같은 정서적 반응들을 나는 증상으로 읽는다. 다시말해 아주 일반적인 증상들이 나열되어 있다. 첫부분의 시작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는 인류의 본능적 증상이 아니겠는가. 실연, 실직, 실망, 실수, 실물, 실언 등등. 그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애도와 향수. 실은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이자 본래 갖지 않았던 것에 대한 상실임에도 우리는 한없이 외롭고 더없이 괴롭다. 때로 너무 못 가져서 외롭지만 넘치게 가져서 외로울 수도 있다. 요컨대 외로움과 괴로움은 인류가 비켜가지 못하는 근원적 증상이라는 함축이다. 우리 안에 있는 상처가 긁히면서 쓰닥거릴 때마다 아프고 쓰리다. 환부가 어딘지 모르면서 자꾸 긁적거리게 되는 이 난감하고 거북하고 황잡한 움직임을 나는 시라고 하겠다. 내 안에 있는 누군가를 달래는 과정으로서의 글쓰기. 상처를 핥는 의식(儀式/衣食/意識). 혹은 불꺼진 무대 위에서 홀로 연주하는 악보 없는 카덴자. 긴 악장의 끝에서 음악적 충만을 참지 못해 활을 긁어대는 연주자의 즉흥성과 무악보의 탄성. 그것은 기량을 넘어서서 악보에 기표되지 않는 감흥을 지향할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의 제목은 언제나 삶이었고 내용은 삶과 헤어지지 못하는 외로움과 괴로움이고 시는 그것의 ‘쓸쓸하고 높은’ 변주가 된다. 언제나 손이 가서 만져지지만 그것을 발설해서 타자와 공유하기 어려운, 그래서 언어에 기대는 어쩔 수 없는 재난이 시쓰기의 업이다.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
나는 알아들었다
발 사이로 보이는 눈발
새벽 무렵이지만
날은 채 밝지 않았다
시계는 조금씩 가고 있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몽땅,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황동규,「꿈, 견디기 힘든」
황선생의 시는 시의 어떤 정점을 가리키는 시계다.
이토록 곡진한 일기와 이토록 미세한 자기 전시 앞에서 나는 시가 있어 고맙다. 시는 망했지만, 전쟁이 끝난 줄 모르고 참호 안에서 전투 중인 병사처럼, 시인은 언제나 싸우고 있는 사람이다. 언어의 하청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열망이 시인의 뿌리칠 수 없는 책무다. ‘꿈을 견딘다는 건’ 그래서 삶을 견딘다는 일이다. 외로운 황홀이다. 참 큰 견적이다. 결론적으로 말해(결론은 없다!) 삶이 증상이고 환영이듯이, 삶을 견디는 꿈 또한 증상이자 환영이고, 꿈으로부터 분열되는 모든 부스럭거림은 오늘 내가 견디고 있는 증상이다. 증상 없이 삶을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6
시는 증상의 언어화이다. 문제는 여기 있다. 외롭다고 표기하면 외로움은 사라지는가? 외로움이라는 기표 혹은 표기가 외로움을 쓸어담아주는가? 외롭다고 말하고 나면 우리는 다시 본래 외로움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말에 의지해서만 외로움을 느끼고 살아야 한다. 말은 어긋나고 덧나고 번진다. 언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무엇something이 증상의 핵심이다. ‘시의 궁극은 언어의 순수한 실패를 위한 질주’가 아닐까? 다시말해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러나 표현을 위한 질주 없이는 달래지지 않는 삶의 이(/저) 순간. 견디기 힘든 삶은 누구에게나 있고 또 무시로 온다. 거기에 맞춤한 언어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건물처럼 또 언어의 집을 짓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인은 그 기표를 찾아 헤매는 정신병적 존재들(정신병자가 아니라)이라면 나는 두말없이 동의하겠다. 증상이여, 부르면 내게 오라. 부르지 않아도 내게 찰싹 달라붙어 시시각각으로 나의 전존재를 긁어대는 언어의 혼이여, 그대를 호명할 언어를 다오.
제3관: 농담
#1.
시를 써오라는 숙제를 낼 때마다, 조금은 난감하다. 내게 숙제는 소설을 읽고 줄거리를 요약하거나 수학문제를 풀어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시를 써오라는 주문이 어색스러운 소이는 그것이 시이기 때문이다. 마치 밀린 빨래처럼 ‘밀린’ 삶의 무엇을 보여달라는 사정과 닮는다. 그건 요구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쑥스럽고 또 우습도다. 그래도 어쩌겠나, 시창작도 밀려가면서 지속되어야 하니까.^^
시 써오라는 숙제를 내면, 다들 잘 해 오신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 ‘잘’ 혹은 ‘잘난’ 제출본능에 주목한다. 그것을 고급하게 말해서 표현욕구라고 하겠고, 글쟁이 모두에게 두루 걸쳐 있는 특성이자 인간의 자연스러운 증상인 노출컴플렉스이다. 탓해서 해소될 일이 아니다.
시 숙제를 내면 다들 적당히 잘 써온다. 타자의 담론이 아니라 타자의 시를 베껴 입고 온다. 이웃집 여자의 스커트를 빌려 입고 오는 경우와 비슷하다. 비극은 그것이 원래 제 옷처럼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옷이야 그렇지만, 시가 될 경우는 사정이 만만치 않다. 하기야 우리 모두 제정신으로 사는 게 아니다. 오죽하면 누구는 우리의 욕망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이웃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웃 아줌마의 명품 손가방을 유심히 보면서 탐심을 내는 건 내 탓이 아니다. 저걸 들면 다들 나를 한번 더 쳐다볼 텐데 하는 그 욕망이 당신을 밀고 가는 힘이다. 그래서 질투는 지칠 줄 모르는 나와 당신의 힘이다.
#2.
여시아문: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는 건 유마의 말씀이다. 유마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이다. 수강생의 시에 뜨거움이 없을 때 선생의 마음은 식어버린다. 그것은 꺼진 불에 부채질을 하는 것과 같다. 선생의 시적 부덕은 배우고자 열망하는 사람의 갈망도 갉아먹는 모양이다.
거친 숨소리(호흡기 고장 차원이 아닌), 싱그러운 숨결, 거칠고 솔직한 노래를 들을 때 오는 즉흥적 감흥이 있지 않던가. 귀를 적시는 극치감. 이어가슴eargasm. 이런 시를 써야 한다는 지적이 아니라, 이런 극치감을 영접할 준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시가 지지부진한 장애 지점을 잘 알고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타박하는 지점이 내가 뚫지 못하는 급소다. 오, 나의 사랑스런 급소와 난감한 뇌관.
그림이니 사진이니 하는 건 기초 장비는 구입해야 한다. 시는 필기구만 가지고 영업을 한다는 점에서 수상한 인구가 제일 많다. 그리고 익히는 과정 없이 한글만 떼면 막바로 술술 써제낄 수 있다는 점에서 기특하고, 특기할만한 국민적 기초예술의 분과다. 유니폼도 입지 않고 뛰는 격이다. 사정이 그렇다는 뜻이지 그렇다고 시에 대한 보편적 감식안이나 그들의 손에 의해 창작되는 시의 수준이 장하다는 뜻이 아니다.
농담이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시쓰는 사람’(등단, 비등단 절대 포함) 일괄 의심하는 순간 당신은 하이패스 속도로 (등급 조정 과정 없이) 2급시인의 안목을 갖게 된다. 무슨 말인가? 자칭 타칭 시 쓴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의식은 두루 발달했겠지만, 이렇다할 기본 장비 없이 공사를 벌인 토목공사 노동자와 같다. 언어에 대한 기본기와 자존심이 없는 시는 자해自害가 되기 쉽다. 자기가 주무르고 있는 것이 된장인지 진흙인지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 한번 돌아보시지요. 문법적 사유가 생략된 채 사유의 문법을 찾아 나서는 질병을 누가 말릴 것이냐. 대개는 고쳐지지 않는다. 그냥 살아야 한다. 2급시인의 눈을 가진 사람 눈에는 그것이 보일 테고, 그의 소감은 한 마디다. 딱하구나.
#3.
시는 소설이 아니다. 우리의 언어 뒷면은 늘 뜨거움과 차가움, 화려함과 황폐함, 비바람과 폭풍우가 병존한다. 웃음과 눈물, 시샘과 좌절, 화사함과 더러움, 더럽혀지기 위해 기다리는 순결과 더럽혀지는 순간 완결되는 어떤 마음이 흘러간다. 폭풍 전야와 폭풍이 쓸고 간 뒤가 애첩과 본부인의 위험한 평화처럼 공존한다. 그런데 우리는 돈 안든다는 솔직한 이유 하나로 언어를 거저 쓴다. 고통 없이, 인내도 없이, 짜증도 없이, 눈치도 없이. 그리고 무엇보다 자존심도 없이. 이 대목에서 옆사람과 어제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씹어보시라. 시 쓰겠다고 움직이는 사람들, 시집 낸 사람들이 혹 당신이 아니었던가? 아니, 당신, 말고 그 뒷줄에 서 있는.
나에게 요리는 표현의 수단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이지요. 요리는 조건없이, 아낌없이, 계산되지 않은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준비한다는 것은 사랑의 행위지요. 요리의 세계가 흥미로운 것은 음식 원재료부터 완제품까지 모든 과정이 한 사람 또는 한 팀에 의해 이뤄진다는 뜻입니다. 요리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단계를 한 사람이 간여하는 분야는 지구상에 흔치 않아요.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 기 마르탱의 말이다.
당신에게 언어는 기 마르탱에게 그러하듯이, 표현의 (정확하고 절실하고 아름다운) 수단이 되어야 한다. 수단이자 목적이 되어야 한다. 수단목적이 더 정확하겠다. 내용과 형식의 구분이 없는, 안이 밖이고 밖이 안으로 이어지는 메비우스의 띠처럼 말이다. 내용만 전달하는 소설이 시와 달라지는 지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인에게서 정신분열증적 사유 혹은 착란적 환자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언어의 극점은 사유의 극점이다. 사유가 언어 기표를 만들었고, 이제 사유는 언어 기표를 떠나서 존재하지 못한다. 그러나 언어는 사물에 관한 허구적이고 허술하고 ‘초라한 단서’ 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그것이라 말해서 그것의 본질이 전시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하고’의 수준에서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고 동의하고 교환한다. 칼이라는 말을 가지고 사과를 깎을 수 없는 것처럼 칼은 단지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은 언어를 사용하면서 언어를 통하여 사물(대상, 현상)의 본질에 도착하고자 한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 뗏목이 필요하다. 강을 건넌 뒤에 뗏목은 거추장스럽다. 버려야한다. 그러나 언어도단의 자리는 있겠으나 우리는 언어 없이 그 자리를 경험할 수 있을까? 도사도 아닌 처지에 말이다.
#4.
말씀은 여기까지 왔다. 시작도 끝도 없다. 도정만이 도도하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야? 모르겠다. 어쩔래. 답이 있다고 우기는 제도와 종교와 논리에 반대한다. 답이 없다는 게 답일 뿐이다. 나는 쑥스럽게 시에 답이 있는 듯이, 이 좋은 가을날 한 대목을 날리면서, 시 쓰는 태도의 어떤 지점을 비아냥거렸다. 상식과 도덕과 윤리와 법과 아버지와 정부와 나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수정하고자 한다면 그는 혁명가이거나 시인이다. 혁명가는 타인과 싸우지만 시인은 자신과 싸운다. 자기 안에 도사린 저 상식과 도덕과 윤리와 법과 아버지와 정부와 그것들과 뻔뻔스럽고 외설스럽게 탱고를 추고 있는 또하나의 나를 용서하거나 지탄하기 위해 방구석에 엎드린 사람 그를 시인이라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시인과 광인과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에는 오롯한 자기 질서 말고는 어떤 것도 들어설 공간이 없다는 말인가?
니 눈엔 에미 애비도 안 보이니?
예, 보여요, 근데 내가 알게 뭐에요.
美쳤구나,
네,
Ⅲ. 결 론
이 글은 시에 관한 토론이었다. 시에 대해 더 무엇을 말하랴! 그렇다. 이 글의 서론은 시에 관해 더 보탤 말이 없음을 보태는 과정이었다. 시에 대한 정의가 많지만 여전히 시는 정의되지 않는다. 정의는 거부되고 정의된 시는 금세 낡아버린다. 눈을 퍼다가 우물을 메우는『벽암록』의 고사는 이 에세이의 논지에도 적절히 해당되었다. 옷을 다 입고 단추까지 채웠는데 첫단추가 잘못 끼워진 사태를 발견하고 단추를 풀고 첫단추의 없는 구멍을 찾을 때의 참을 수 없는 손떨림이 이 글의 마음이었다. 본론에서 다루어진 세 편의 글은 방향은 다르지만 시를 지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의 글이었다.
1) 세 편의 글을 통일된 개념으로 묶기 위해 동시상영이라는 제목을 얹어놓았다. 이 병렬적인 논지들은 각각의 위치에서 시를 상영하게 될 것이다.
첫댓글 이 글은, 시창작 수업시간에 기조강의로 발표되었던 짧은 에세이 세 편에 '동시상영'이라는 형태를 부여해본 것이다. 세 편의 글은 어느 글도 메인의 자리에 있기에는 양과 질의 입장에서 겸손하기에 서로가 서로를 붙들고 상생을 도모하고 있는 형편. 일종의 옴니버스 에세이다. 동시상영은 그런 형편에 대한 알리바이. 한꺼번에 두 편도 아닌 세 편을 겪는다고 생각하면 즐겁지 아니할까? 누가? 변두리 극장의 휑한 객석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아무도 앉아주지 않는 의자에 혹 누가 앉아서 관람한다면 그건 큰 연이 되리라.
두편까지는 좋지만 세편은 지루할수도 있지요^ 그런데 서론과 결론이, 같은 듯 다릅니다?- '과정이다,와 과정이었다. 해당된다,와 해당되었다. 마음이다,와 마음이었다. 같은 맥락의 글이다, 와 ~같은 맥락의 글이었다.- 충분히 의도하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