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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진, 긴 시간의 뒤안길을 걷다.
여행작가 김강수
방어진, 긴 시간의 뒤안길을 걷다.
거센 파도가 감기에 걸려 콜록거리는 사람을 위한 쓴 가루약 같이 매섭다. 그 파도는 바람에 의지하고 바위에 수 없이 부딪치며 고통과 기쁨을 이야기한다. 바람이 머무를 수 있는 곳은 하얀 등대... ...큰 키를 자랑하는 등대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을 듣고 있다. 이런 풍경이야기가 있는 곳이 방어진에 있다.
슬도.
슬도는 섬 전체에 구멍이 뚫려있는 특이한 지형이다. 파도가 지나칠 때마다 움푹 패인 속살을 보여준다. 남자 주먹 크기부터 더 큰 구멍들이 보인다. 이 구멍으로 바닷물이 드나들 때 거문고를 타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슬도이다.
슬도의 무인등대는 말없이 사람들의 고뇌를 들어준다. 별리의 아픔을 지워버리고 싶은 이에게는 파도 소리를 선물하고 세상에 지친 이에게는 바다가 된다. 때로는 밀물과 썰물이 되어 이야기를 들어준다. 긴 의자에 기대 앉아 등대에게 눈길을 주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모든 것을 감싸 안아준다. 그래야 슬도의 등대고, 그래야만 진정 슬도의 등대가 된다. 언제나 그를 만나러 가고 싶을 때 주저없이 그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위안이었다.
슬도를 떠나며 느끼는 바람 소리가 좋다. 거문고 소리와 어우러져서 일까?
파도의 거셈을 막아주는 콘크리트 장벽 중 몇 개는 색을 입혔다.
불가사리, 소라, 꽃게, 가리비 등등... ...
그 색깔 덕분에 보는 이는 즐겁다.
<보는 풍경에서 듣는 풍경으로>라고 적힌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귀를 열면 풍경 소리가 들리고, 눈을 뜨면 풍경이 그림처럼 지나친다.
못내 아쉬워 뒤돌아본다. 슬도는 그대로 있다.
등대 주변으로는 갯메꽃, 도깨비쇠고비, 갯완두 등 바닷가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꽃을 피우고 있는 계절, 가을을 기다리는 해국도 많이 자라고 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발길을 움직인다.
성끝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마을의 얼굴은 동진항과 그 곁에 있는 노란 대문이다. 작은 항구에는 여러 대의 배들이 밧줄에 묶여있고 낮잠을 졸던 갈매기는 여행객의 발길에 날개를 퍼득인다.
동진항은 배가 드나드는 끝자락에서 바라보면 멋있는 풍경을 그릴 수 있다.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는 작은 포구지만 어느 선술집에서 들려오는 노래 가락이 애처로울 것 같은 포구다. 예전 같았으면 젓가락으로 두드리며 소주를 들이키는 뱃사람들이 이야기들로 가득 찰 것 같지만 지금은 작은 커피집과 구멍가게가 들어서 있다. 그 옆으로 보이는 노란대문. 이곳 해녀들의 보금자리이다. 물질을 끝내고 쉴 수 있는 작은 공간. 노란색의 대문에 발걸음이 멈춘다. 어느 해 겨울, 물질을 하고 육지로 다가오는 해녀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다. 햇살은 해녀의 키를 세 배 쯤 늘려 놓았고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온 몸을 두들릴 때, 그 모습은 아픔이었다.
비릿한 바닷 내음과 파도의 소리들이 갑자기 느껴진다. 삶의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노랑이라는 빛깔은 어느 새 바래지기 시작한다.
계절은 그렇게 소리와 빛을 따라서 변하기 마련이다.
약간 오르막인 마을의 골목을 오른다. 철제 난간이 지붕으로 향해있다. 바닷가 마을에서 볼 수 있는 풍경. 생선을 말리기 위한 계단이다. 무심코 지나치면 알 수 없는 그 계단에 사람들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물고기를 말리기 위해서 오르내린 흔적들이 베어있다. 시간의 지남은 난간의 부서짐으로 대신한다.
길을 따라 걷는다.
향수바람길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골목길을 따라서 이어지는 벽화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느 이름 모를 등대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기름 보일러의 연통일까? 현실과 그림의 경계에 서 있다.
여정을 이야기 할 때 어디 갔다 왔어요? 라고 묻는다. 지극히 상투적인 언어. 하지만 그 평범한 이야기들을 그림들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돌담의 정겨움이 있다. 돌 하나, 둘을 가져다가 쌓아 올린 것의 투박함이 좋다. 햇살이 비추자 그림자들이 고등어의 몸통보다 두터운 벽을 만들어낸다.
<윗쪽으로 오르시면 에코튜브가 있습니다. 길이 34m의 철로 만들어진 주홍색 관입니다. 어린시절 과학시간에 종이컵에 실을 연결해서 팽팽하게 당겨서 소리를 전달했잖습니까?
그와 같은 이치입니다.>
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 해주는 그 소리에 귀가 울린다.
어릴 때 종이컵으로 실을 묶어서 실험을 했던 일이 떠오른다. 그 때는 정말 소리가 들리는 신비감에 그 날 밤을 온통 종이컵이 구겨질 때 까지 장난을 했던 기억이 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본다. 이 긴 관을 통해서 소리가 들릴까?
웅~하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다. 그 소리의 긴 추억의 소리, 이곳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골목길에서의 비석치기하는 아이들, 여자아이들의 고무줄 뛰는 소리, 딱지치기하는 아이들, 다양한 소리들이 더욱 선명하게 들린다.
이런 소리들이 있는 곳이 <소리체험관>이다.
동구의 소리 9경, 보이는 소리이다.
동축사의 새벽종소리, 마골산의 숲바람소리, 옥류천의 계곡물소리, 현대중공업의 엔진소리, 신조선의 출항뱃고동소리, 울기등대 무산소리, 대왕암공원의 몽돌 물흐르는 소리, 주전해변의 몽돌 파도소리, 슬도명파.
<소리체험관>안으로 들어가시면 제일 인기 있는 게 있다. 가오리에 색칠을 해서 내보내면 바다로 가는 것. 진짜 바다는 아니고 스크린 속의 바다로 간다. 거문고도 칠 수 있다. 모니터 상에 나타나는 현을 건드리면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주전해변 몽돌을 걸어가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일상 속에서의 소리가 이곳에서는 꿈길을 걷는 듯 느껴진다.
바다를 바라보며 아스팔트 길을 걷는다. 지열의 뜨거움이 있는 계절이다. 물 한모금 했으면 하는 그 때에 해당화의 붉은 기운이 여행자의 발길에 힘을 보태준다. 화사하게 핀 꽃 한 송이는 마음까지 설레게 한다. 그게 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매력이다. 마을 버스 한 대가 휭 하고 지나쳐가고 그 뒤로 <방어진항 골목 지도>가 보인다. 어디쯤일까 지도를 보자마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시장이다.
방어진항 어시장.
경매가 끝난 다음에 도착하는 물고기 상자들이 가득하다. 가자미가 금방이라도 바다로 펄쩍 뛰어 들어갈 것 같다. 항구에서는 어선에서 생선을 내리는 힘겨루기가 시작되고, 간밤에 오징어잡이를 했을 수은등들은 낮잠을 곤히 자고 있다. 잠을 깨우려는 걸까? 사람들은 더 큰 소리로 어시장의 흥을 동정한다. 그물에서 말려지는 생선들은 제 몸매 예쁘다고 자랑을 하는게 어시장의 멋드러진 풍경이다. 사람 소리와 비릿한 내음이 있는 곳이라야 방어진항의 진짜 매력이다.
뒷골목으로 길을 재촉한다.
방어진항과는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집이 있고, 외관이 독특한 이층집들, 울산 최초의 목욕탕은 지금도 문을 열고 있다. 여행을 떠나는 자는 잠시의 시간을 이 목욕탕에 여정을 만들 필요가 있다. 가장 까까이에서 시간 체험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조선 말엽의 방어진은 30여호가 살아가는 작은 어촌마을이었다. 그 마을이 변하기까지는 길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방어진 앞바다의 어업 자원을 탐낸 일제가 일본인 이주어촌으로 개발했고, 일본 자본에 의해 조선, 철강, 양조회사가 들어서고, 1921년 울산 최초로 방어진에 전기가 공급되었다. 이 시기에 정어리, 고등어 등 어획량이 전국 총생산량의 10%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지어진 집들의 흔적들이 이곳에 남아 있다.
2층으로 연이어진 집들의 흔적, 서성거리며 거리를 방황하자 젊은 남자가 집안을 구경시켜 준단다. 아직도 당시의 건축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 이층으로 오르자 넓은 다디미방, 모든 것이 낯설지만 이방인들이 남기고간 쓸쓸한 자취뿐이다. 역사의 한 그림자. 건물들이 나의 그림자인양 뒤쳐져서 따라온다.
1,000년 정도의 나이를 가진 곰솔 한 그루가 있는 용왕사로 간다. 곰솔의 또 다른 이름이 있다. 바닷가에서 모진 바람을 견뎌내면서 자라기 때문에 붙여졌다. 바로 해송이다. 해송은 흑갈색의 껍질을 가지므로 한자 이름은 흑송<黑松>이고, 순우리말로 ‘검솔’인데, 세월이 지나면서 ‘곰솔’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용왕사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높이는 7.5m, 둘레가 4.22m나 되는 굵은 소나무다. 용나무 아래에 천년을 살던 용이 삼월삼진날에 옥황상제에게 여의주를 바쳐, 이를 기특히 여긴 옥황상제가 용이 승천한 곳에 솔씨를 내려 보내 심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전체의 모양을 온전히 보기는 힘들지만 용이 승천하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려는 듯 온 몸이 뒤틀리면서 하늘로 향하고 있다. 소나무 뒤편으로 자그마한 기도처가 있다. 무슨 소원이라도 들어 줄 듯한 공간이다. 믿음으로 소원을 빌어보자. 혹시나 그곳으로부터 깨달음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1923년에는 동해안 최초로 방어진 방파제가 건설 된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비닐로 만들어진 술집들이 길 양편으로 자리하고 있다. 바닷가 쪽으로 만들어진 비닐집은 멋스럽다. 수평선의 짙 푸르름이 있고, 온갖 잡념들을 잊게 만들어주는 자리이다. 그것은 오롯이 바다라는 큰 풍경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풍경을 혼자서 즐기기에 너무나 아까운 곳이다. 이럴 때는 늘상 함께하는 여정을 꿈꿔본다. 혼자만의 여행은 깊은 사색과 관찰의 힘이 배가되지만 새로움을 발견하는 시간은 더디다.
방어진 항의 앞바다가 펼쳐지고 파도를 막아주는 시멘트 덩어리의 곁을 지나서 계단을 오르면 방어진항 방파제와 기념비가 있다. 방파제를 둘러보면 쌓여진 돌들에게 시선이 간다. 10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을 보고, 시대의 증인이 되어 있는 돌들이다. 그 돌들의 한 자락에 흔적을 남겼다. 축조기념비, 방어진 방파제를 만들었다고 얘기하는 돌덩어리이다.
<방어진 방파제 축조 기념비>는 일제강점기 방파제를 축조하였던 것을 기념하는 비로 방파제 입구에 세워졌는데 복원 공사를 하면서 2000년 8월에 이곳에 옮겨 세웠다. 높이 240cm나 되는 큰 키에 넓이 110cm, 두께 90cm인 이 비의 내용은 <방어진 해안은 물이 깊어 항구의 조건은 갖추었으나 파도가 바로 들이치기 때문에 배가 머물기 힘들어 방파제를 쌓았다>는 내용이다. 이 공사는 1923년 3월부터 4년 5개월이 걸렸다. 당시 방파제의 길이는 280m이다.
지금 이 방파제에 서서 과거로의 길을 걷는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발걸음을 무거워지고 아픈 상처를 보듬어 줄 무언가를 찾는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존재한다는 것은 역사고 그 역사를 올바로 보고 이해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그 흔적들이 있으니까. 아픈 흔적들은 상처를 남긴다. 그 남김을 우린 너무 쉽게 없애려 한다. 하지만 기억할 그 남음은 그 누구도 어찌하지 못한다. 작은 돌덩어리 하나라도 남김이 있다면 오래토록 보관해야 할 일이다. 남아 있다고 해서 정신이 바뀌지는 않는다. 고개를 돌렸다. 방파제 사이로 하얀 민들레가 한 송이 꽃을 피웠다. 땅의 향기를 맡아야 할 그 꽃은 바다바람과 마주하며 꽃을 피웠다.
파도 소리가 변함을 느낀다. 스산한 바람이 불고 바다 빛깔이 달라진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하얀 종이 위에 질경이 보다 가늘고 긴 마침표를 찍는다. 등 뒤에 파도가 밀려온다.
언양,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곳.
여행작가 김강수
언양,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곳
언양은 오래 전의 기억부터 다가오는 곳이다. 검정고무신의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다. 코흘리개 시절, 장날에 어머니를 따라서 장 구경을 하는 게 시골에서는 큰 즐거움이다.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필요한 물건을 사고 파는게 장날의 표정이다. 그 장날의 한 귀퉁이에 고무신을 수리하는 아저씨가 있었다. 찢어진 검정고무신 한 켤레. 접착제를 묻힌 고무를 붙여서 열로 압착을 하는 일이었다. 고무신은 늘상 엄지발가락 옆이 세로로 갈라지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수리 된 검정고무신이 싫어서 언제나 늘 하얀고무신을 사 주기를 바랬던 아련함이 있다.
언양장은 지금 이름이 바뀌었다. 참 이상한 이름이다. 언양알프스시장. 그래도 예전의 정서는 남아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2일과 7일 날에 장이 선다.
가지산에서 흘러 내러온 남천 옆으로 도로가 있고 장 안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신발가게가 있다. 여느 장에서 볼 수 있는 검정고무신, 하얀고무신이며 장화 등 많은 신발들이 손님들을 기다린다. 시골 할머니들이 많이 애용을 하기 때문에 색상도 다양한 신발들이 있다. 이곳 언양장에서 신발을 40년 동안 팔아 오셨다는 분이 계신다.
최경호 할아버지. "청색고무신이 제일 먼저 나왔고, 그 다음이 검정색 고무신, 흰고무신이 연이어서 나왔지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신발의 역사를 이토록 알고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라는 생각이 든다.
"시골에는 꼭 고무신이 있어야 됩니다. 밭에서 일하다가 그냥 흙은 털어버리면 되니까요. 건강에도 좋습니다. 꼭 지압을 하지 않아도 신발을 신고 걸으면 되니까요." 정겨움이 묻어나는 얘기다.
이곳에는 실탄을 보관하는 통이있다. 한국전쟁 때의 유물이다. 직사각형의 긴 통은 안쪽에서의 깊이가 느껴진다. 비바람에 지폐가 날아가는 것을 막아주는데는 이게 최상이라고 말씀하신다. 장터는 자연을 그대로 품고 산다. 비가오면 비오는 대로, 바람 불면 바람부는 대로 세월이 흐르는 법이다.
이곳 신발가게 주변의 가게들은 오래 전 우리네 장터를 닮아 있다. 5일마다 문을 여는 그대로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가게가 연이어 있는 사이로 걸어가보면 그 정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옆 가게 아주머니의 일상들을 그 앞 가게 아주머니와의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곳이다. 막혀 있지 않은 공간의 힘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곳은 꼭 가보아야만이 어떤 구조를 가졌는지 알 수 있는 곳이다.
이 거리감이야말로 우리네 정이라는 흐름의 원천이다.
시장 안으로 들어가는 길 중간을 차지한 사람들은 늘상 5일장을 찾아서 떠다닌다. 이곳 언양장은 풍성한 곳이다. 사람으로 물건으로... ...고소한 참기름 집을 지나면 대장간이 있다. 언양장에서는 이른 아침이면 어김없이 들리던 소리가 있었다.
팅, 탁, 턱...치~~~이...
불에 달구어진 쇠를 모루(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대 역할을 하는 쇳덩이)에 놓고 망치로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불을 지펴 쇠를 달구고 망치로 두드려서 온갖 모양을 만들어 내는 대장간은 서민들의 가슴 속 깊은 향수 샘을 자극 시킨다.
5일장이 서는 것과 상관없이 매일같이 문을 연다는 대장간은 언양장에서는 아직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은 5일장에도 대장간이 사라진 곳이 많다. 고령장, 의성장 등은 아직 대장간이 남아있다. 예전에 이 대장간은 장날이면 꼭 들러야하는 곳이었다. 낫이며, 호미 등 여러 농기구들이 이곳을 거쳐야만 온전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지금은 기계화되어서 경운기, 이양기 등은 농기구 수리센타를 찾아간다. 그래도 대장간의 역할은 남아있다. 대장간은 풀무질이다. 풀무로 바람을 불어 넣어야 대장간이 살아 움직인다. 풀무질도 기계의 힘을 빌리고 두드리는 일도 거대한 기계의 힘을 사용할지라도 모양을 만들어 가는 것은 오롯이 사람의 몫이다.
이곳 언양장에서만 30년을 일하고 50년 동안 대장장이 생활을 해온 박병오 할아버지가 계신다.
쇠를 달구고 두드리면서 형태를 만드는 작업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듯이 할아버지의 열손가락은 모두 지문이 닳아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처음 이곳에 가게를 열었을 때만 해도 사람이 많았서 밀려다닐 정도라 엄청난 부자가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50여 년 전 처음 일을 배울 때만 해도 사는 게 힘들어서 한 가지 기술을 익히려는 마음에 이 길을 택했다. 17살 되던 해에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 두려고 대장간 밖에 나와 앉아 있는데 그의 눈에 보인 건 풀 한포기. 저 풀도 살아가고 있는데 내가 못할 게 없지라고 생각한 이후에 계속해서 이 일을 업으로 살아왔다. 눈대중 하나로 쇠를 달구고 또한 뒤집고 깎아내고 망치질과 담금질을 한다.
낫을 보면 손잡이에 한글로 <오>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데 할아버지 이름의 끝 글자이다. 자신이 손수 만드신 것에는 이렇게 한글 <오>라는 글자가 새겨진다.
장날의 표정 읽기는 하얀 김이 솟아 오르는 가마솥이다. 장터국밥 한 그릇에 시장기를 때우고 막걸리 한 사발에 얘깃 거리가 오간다. 언양장에는 곰탕집이 있다. 50년의 전통을 이어온 곳이다. 30년은 시어머니가 20년은 며느리가 그 맛을 이어 왔다. 지금 주인 김귀자씨는 1992년부터 시어머니에게 일을 배우면서 곰탕을 끓여냈다고 한다. 이 집의 곰탕은 뼈를 7시간 이상 고아서 곰탕을 말아낸다. 주방 안으로 들어가면 가마솥 두 개가 걸려 있다. 펄펄 끓어 오르는 국물의 구수한 향을 느낄 수 있다. 살코기를 뚝배기에 담고, 그 다음으로 뾰얀 국물을 담아 낸다.
언양장 뒷길을 따라가면 <언양읍성마을 골목길 갤러리>가 있다. 골목길이다. 좁다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순이와 영이가 고무줄놀이 하던 그 골목이다. 사람이 지나가면 잠시 뛰던 고무줄놀이가 멈춰지는 그 골목. 그곳에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이 있고, 걸어서 가는 방향을 노란 발자국으로 표현해두고 있다.
이곳은 그냥 골목이 아니다. 갯마을로 유명한 오영수 작가의 문학세계, 읍성마을의 주민의 역사, 읍성갤러리 등 읍성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벽화골목이다.
고향의 서정을 읊은 한국단편문학의 대표 주자 난계 오영수(1909-1979)선생은 한국적 정서와 심상을 단편소설의 미학에 충실하게 담아낸 서정적 작가이다. 대표작 화산댁이(1952), 갯마을(1953) 이라는 글자들이 적혀있다. 그리고 오영수 작가의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다.
난계 오영수의 문학 세계를 그림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대문과 대문 사이에 <요람기>라는 글의 일부가 적혀 있다.
"기차도 전기도 없었다. 라디오도 영화도 몰랐다. 그래도 소년은 마을 아이들과 함께 마냥 즐겁기만 했다. 성터 돌무더기 밑에 너구리굴이 있었다."
언양읍성 주민들의 사진들도 벽에 있고, 강아지 한마리와 집, 초등학교 앞에서 찍은 것도 있다.
언양읍성 마을의 옛지도도 그려져 있다. 건물의 벽, 환풍기가 있는 곳에 읍성의 북문 쪽이 뚫려있다.
그림도 전체적인 벽의 모양을 생각해서 지도를 그린 것이다. 언양초등학교 아이들의 그림이 타일에 그려져서 붙어 있다. 화사하다. 남문인 영화루를 그렸다. 누각의 지붕으로 새들이 날아가고 아이들이 누마루에서 두 팔을 벌리고 활짝 웃고 있다. 그림을 그린 아이의 표정과 닮아 있는 듯 하다. 그 그림 하나로 여행의 즐거움은 매력으로 다가온다. 읍성 골목길을 환한 웃음으로 걸어간다.
골목길을 나오는가 싶으면 그 옆으로 언양읍성(사적 제153호)이 자리하고 있다.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 및 서부리 일원에 자리하고 있고, 평지에 정사각형으로 쌓은 읍성이다. 15세기말 조선시대 평지 읍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읍성은 군사적인 기능과 행정적인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성을 말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성밖에 있던 주민들이 성안으로 들어와서 적과 싸우게 된다. 언양읍성은 둘레 1,559.7m로 성벽의 현재 남아 있는 최고 높이는 4.85m이다.
삼국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고,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 성벽 둘레 1,427척, 높이 8척 규모의 토성으로 축조하였다. 군창이 있고 웅덩이 4곳과 우물이 2곳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석축성은 연산군 6년(1500년) 당시 현감이었던 이담룡이 석성으로 고쳐 쌓았고 그
과정에서 기존보다 더 넓게 쌓은 것이다. 임진왜란 때 무너진 것을 1612년(광해군 4년)에 새로 쌓았다. 1919년 편찬된 <언양읍지>에 동문은 망월루, 서문은 애일루, 남문은 영화루, 북문은 계건문이 있다는 기록도 보인다.
남문의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남문인 영화루는 성문을 둥글게 감싸 안은 반원형의 옹성을 두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큰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이다. 적이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기에 힘든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옹성의 안쪽 너비는 약15m이고, 동쪽으로 난 옹성 개구부의 폭은 8.3m이다.
옹성의 안쪽으로 영화루가 있다. 1800년대초 진남루에서 영화루로 이름이 바뀌었고, 1900년 전후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복원된 모습을 볼 수 있다.
해자가 설치 되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해자는 성 바깥쪽으로 성벽과 나란히 만든 도랑의 일종으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시설이다. 폭이 3.5~5m, 깊이90cm 정도였다. 북쪽 성벽의 경우 생토층에서 나무 말목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것이 확인되어 성벽의 기초공사를 튼튼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의 전체 구조를 하나 둘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이해하는 작은 앎이 필요하다.
성안에는 관아가 있었다. 동쪽에 동헌이, 서쪽에 객사(옛 언양초등학교 자리)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1년(1411년)의 기록에 의하면 언양 객사가 불에 타 수리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폐교된 언양초등학교도 그 흔적을 아직은 남겨두고 있다.
108년의 역사를 가진 학교는 2015년 동부리로 이전했다.
이곳을 지나서 북문으로 갈 수가 있다. 너른 읍성 안의 모습을 걸으면서 볼 수 있다. 길을 걸으며 잠시 과거 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볼 수 있다. 언제 가더라도 이 읍성 안을 걸어가는 풍경은 멈춤이다. 사람을 머물게하는 길. 그 길을 따라서 북문 쪽으로 길을 간다. 북문은 복원이되지 않고 그 입구만 있다. 이곳에서 성벽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벽을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큰돌을 지면에 두고 위로 갈수록 잔돌로 마무리되는 성벽을 볼 수 있다. 오랜 시간의 흐름을 눈으로 확인해 보는 시간이 된다. 아득한 과거로 돌아가는 문은 서있는 그 자리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과거로의 길을 찾아서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치라는 시설을 볼 수 있다. 성벽이 길게 만들어지다가 중간쯤에 돌출된 부분이 있는데 이곳을 치라고 한다.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이곳에서 볼 수 있어서 적이 성벽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고 대처할 수 있는 시설이다.
읍성 뒷쪽의 도로를 따라서 걸어가면 언양성당으로 갈 수 있다.
울주군 언양읍 구교동1길에 위치한 언양성당은 도로에서 오르막으로 걸어가야 한다. 언양성당은 1936년 10월 26일 울산 지역 최초로 건립되었다. 1927년 5월 25일에 보드뱅(Beaudevin, 丁道平, 1897~1976, 에밀) 신부를 초대 본당 주임 신부로 하여 지금의 부산교구에서 두 번째로 본당이 설립되었다.
언양 지역의 교우촌들은 병인박해 때 심한 타격을 입었다. 박해가 끝난 뒤 교우촌이 재건되면서 로베르(Robert, 1853~1922, 바오로) 신부가 1883년에 살티 공소를 설립했고, 이듬해에 언양읍 공소도 만들어졌다. 전국적 성소의 온상지로 70여 명의 성직자(37명)와 수도자(36명), 20여 명의 동정녀를 배출시켰고 교구 내 가장 많은 공소를 둔 본당이다.
언양성당은 입구에 팽나무와 갈참나무가 한그루씩 자라고 있고, 그 뒤를 돌아서면 언양성당의 모습이 나타난다. 본당은 맞배지붕을 하고 고딕양식을 가진 2층 건물이다. 울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건물이기도 하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윗쪽이 둥근 형태고, 그 위로 두개의 창, 그 위에 동그란 창 하나, 그 위에 3개의 창이 있다.
직선으로 뻗어 올라간 본당 입구에 서면 스스로 왜소함을 느끼게 된다. 장엄한 회색빛의 성당 건축이 주는 힘이랄까?
성당 입구 오른쪽에 대한민국 근대 문화유산 표지가 있다.(제103호)
구세주 그리스도 왕이시여 찬미와 영광과 흠숭함이 네게있어지이다..라고 적혀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실내는 둥근 천장을 하고 있고, 측면으로 5개의 기둥에 한 칸 마다 두 개의 창이 있다. 창 위로 동그란 창이 하나씩 더 있고, 공간의 넓음과 성스러움에 잠시 고개를 숙이게 되는 공간이다. 신부님의 목소리에 온 성당안은 정적이다. 작은 소리의 울림이 큰 감사함으로 다가온다.
밖으로 나와서 측면을 돌아 뒤로 가면 건물이 3면은 돌로 만들어졌고 한 면은 붉은 벽돌로 만들어졌다. 성당의 확장을 위해서 만들어진 공간이다. 이렇게 멋있는 본당은 명동성당을 건축한 중국인 기술자들을 데려와서 완공했다. 이 건물이 완공되자 울산사람들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서 <뾰족탑 솟은 돌집>을 구경했다.
에밀 보드뱅 정도평 신부의 흉상이 있다. 근엄함과 인자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신부님의 얼굴.
프랑스 하돌에서 출생했고, 1922년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1927. 5~1939. 3월 까지 언양 본당 초대 주임을 지낸 신부님이다.
뒷편으로 종탑이 하나 서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기둥에 스레트 지붕이고, 그 아래에 종이 달려 있다. 언제라도 종소리를 듣는 자들에게 평화의 메세지를 전달 할 것 같다.
종탑 옆으로 옛 사제관이 있다. 옛 사제관은 본당을 건축하면서 같은 형태로 지은 석조 슬레이트 건물로 경사지에 지어져서 반지하층을 가지게 되었는데 지금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지붕에는 3개의 돌출 창과 2개의 굴뚝이 있고, 내부는 건축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독특한 외관이 강하게 와닿는 건물이다. 지금은 신앙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990년 12월 4일 개관된 전시관은 신앙 유물과 민속 유물 등 총 696점이 전시되어 있다. 본당 단체들이 남긴 기록, 초기 교회 교우들이 사용하던 각종 기도서, 교리서 등도 있다. 그리고 미사와 전례에 사용했던 제의와 제구들도 전시되어 있다. 입구로 들어가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성 요셉의 상이다. 아기 예수를 왼손으로 감싸안고 오른손에는 꽃을 들고 있는 석고상으로 표정이 참 밝다.
언양성당 90주년 기념 성경 필사본이 있다. 2017년 8월 1일 부터 11월 25일 까지...
성경을 일일히 손으로 적은 종교적인 감성이 묻어나 있다.
참나무로 만들어진 십자가, 제의(사제가 미사를 집행할 때 교회 규정에 따라서 장백의 위에 입는 겉옷)도 있다. 사랑의 옷, 그리스도의 멍에, 순결의 옷, 작은 집이라고 불려왔다.
천주교인이 사용하던 옹기, 놋그릇, 주병, 주판, 참빗 등도 있다.
모든 유물들에 시간의 흔적들이 저장되어 있다. 그 저장되어 있는 것들을 알아가는 것이 여행의 또 다른 참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당 마당을 가로 질러서 계단을 오르면 (옛)예수성심전교수녀회 수련소가 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이다. 이 수녀회는후베르트 린켄스 신부에 의해서 1900년 독일 뮌스터에서 창설된 국제 수녀회이다. 1974년부터 언양성당에 수녀들이 파견되어서 본당 사목을 돕고 있다. 이 수녀원 건물은 1976년에 건립했고, 2007년 10월까지 언양성당 전교 수녀들의 수녀원으로 사용되었다. 독일식으로 지어진 수녀원의 구조와 생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2층 경당자리에 약간의 소박한 흔적인 스테인드글라스도 그대로 남아 있다.
언양 성당 본관 뒤편에는 십자가의 길과 성모동굴이 있다. 십자가의 길(라틴어: Via Crucis)은 고통 의 길이라고도 한다. 십자가의 길은 총 14처로, 각 처에서 바치는 기도문이 정해져 있다. 각 처마다 돌에 조각된 모습을 볼 수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숙연함이 앞서서 다가온다. 고통속에서의 길을 가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해서 마음을 달래려고 먼 산을 바라본다. 왼쪽으로 멀리 보이는 산은 신불산이다. 그 아득한 산의 연한 청보라 빛깔이 수채화로 채색된 것 같다.
숨이 가빠지고 긴 호흡을 할 때 쯤에 십자가의 길 끝에 도착을 한다. 그리고 거대한 암반층 아래로 너른 공간이 있다. 성모동굴이다. 늘 물이 흐르고 있는 곳이다. 동굴이라기 보다 너른 광장 앞에서 연주를 하는 음악당 같은 분위기다. 이곳에서 고개를 돌려서 멀리 언양읍 쪽을 바라 본다. 언양읍성의 너른 사각형 성곽의 모습 주변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여행은 기억을 하는 일이다. 그 기억은 추억의 사진을 한 장 남기게 된다. 사진들이 모여서 한권의 사진첩이 내 가슴으로 들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