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점: 유대인들은 율법 시스템을 가져온 모세를 대단히 귀하게 여겼다. 또한 모세 다음으로는 대제사장을 귀하게 여겼다. 이에 바울 사도는 기독교는 유대교의 모세나 대제사장보다 더 뛰어난 분을 창시자로 두고 있음을 보인다(3장부터 4:13까지).
I. 그리스도와 모세의 비교(3:1-6)
II. 그 결과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은 모세를 거역한 것보다 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3:7~4:1-13).
A. 구약시대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강퍅하게 행하면 안 된다(3:7-11).
B. 불신을 주의해야 한다(3:12).
C. 서로 권면해야 한다(3:13).
D. 믿음의 확신을 끝까지 붙잡아야 한다(14).
E. 이집트를 탈출하여 구원받은 자들이 거의 다 불신으로 광야에서 죽었다(15-19)
* 성경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점 중에 하나: ‘수신자가 누구인가?’ (딤후2:15)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여기의 ‘너희’는 누구인가? ‘너희’가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 되면 성경의 다른 말씀과 모순이 된다. 구원은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선물이지 멍에를 지고 일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멍에나 십자가를 져도 구원은 안 이루어진다(롬4:5). 여기서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은 이미 구원받은 자들에게 안식을 주기 위한 것이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여기의 초청은 죄인들을 향한 것이다. 행위로 구원받기 위해 노력하는 죄인들에게 주는 구원과 안식, 이것은 공짜로 얻는다. 이것은 ‘구원의 안식’, 구원받은 이후의 삶에서 승리와 안식을 얻으려면 멍에를 메고 그분께 배우며 수고해야 한다. 28, 29절의 안식은 다른 의미, 28절은 예수님이 주시는 안식, 29절은 우리가 우리 혼을 위해 찾는 안식, 서로 다른 안식이다. 28절의 안식을 얻은 뒤 29절의 안식을 얻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많다.
1절-2절
* 거룩한 형제들 :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 partakers : 동일한 실체. 1)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한 자들(엡 2:6) 2) 성도들의 상속유업에 참여한 자들 (골1:12) 3) 한 빵에 참여한 자들 (고전10:17)
*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 예수님의 3중 직무: 대언자(갈보리 십자가까지), 제사장(재림까지), 왕(1000년 왕국) 이 예수님은 현재 ‘우리’ 즉 믿는 성도들의 대제사장이시다. 죄인들을 위한 예수님의 사역은 갈보리에서 다 끝났다. 지금 하늘의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중보하지 않고 성도들을 위해서만 하신다(요 17:9).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고 그분께 나오지 않으면 그분의 중보를 받을 수 없다. 그분은 그런 자들에게 심판자로만 계신다(히9:27-28)
하나님은 신실하시다(Faithful). 이것은 그분이 자신과 자신의 창조 세계에 보이는 충성을 말한다(신 7:9; 시36:5; 89:1-2; 애3:22-23; 딤후2:13).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여러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
모세는 완전한 자가 아니라 신실한 자였다(고전4:1-2). 그는 죄를 짓고 분노도 내고 못하겠다고 하소연도 하고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지만 신실하였다
3절-6절
‘집’이라는 말이 6번 나옴, 여기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뜻함 모세는 구약의 백성(집), 그리스도는 신약의 백성(집) 그런데 모세는 구약 집에서 종으로 신실하였다(3:5). 반면에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약 집을 다스리는 아들로서 신실하였다(3:6). 비교가 안 된다. 4절: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창2:1; 행17:24
6절 문제 :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집을 다스리는 아들로서 신실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기쁨을 끝까지 굳게 붙들면 우리가 그분의 집이니라.
” 끝까지 굳게 붙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구원을 잃는가? 이 구절은 구원을 다루는 구절이 아니다.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은 구원이 아니라 소망의 확신과 신뢰이 다.
히브리서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동족들에게 왕따. 타협하려는 마음, 성화 포기-->…그러면 소망의 확신 과 기쁨을 잃는다. 벧전4:12-13
어려움이 닥치면 예수님과 함께할 영광을 보고 기뻐해야 한다. 그분은 신실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신실하기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신실함에 달려 있다.
우리의 보상은 우리의 신실함에 달려 있다. 확신을 굳게 붙들고 소망을 기쁨으로 유지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뜻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킹제임스 성경, 바른 교회 기쁨을 잃은 경우, 의심이 생기는 경우, 낙담이 되는 경우 1. 갈보리를 뒤돌아보라: 그리스도의 값진 희생 2. 위를 보라: 하나님의 왕좌에서 중보하시는 주님 3. 앞으로 바라보라: 보상의 시간이 온다(히12:3) 4. 롬8:18을 기억하라 5. 히10:35-37
7절-11절
: 신실하지 않은 자들의 사례, 이 구절은 시편95:6-7,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 그분의 양들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이집트에서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고 속박에서 해방됨 구원받은 자들 가운데도 마음이 딱딱한 자들이 있다. 변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고의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 이런 경우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뜻을 돌리게 함)에 이르게 함이 불가능하다 (히6:6). 계속해서 고의로 불순종하는 경우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와 그리스도의 심판석의 심판
성장하지 않음,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함(히5:12), 이미 얻은 구원을 소홀히 여김(히2:3), 계속해서 거역함, 성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 구체적인 사례(고전10:1-13)
10절-11절
하나님의 근심(엡4:30), 그 결과 가나안의 안식 누리지 못함 여기의 안식은 구원의 안식이 아니라 성화의 안식, 쟁취의 안식, 이들은 땅, 곡식, 포도즙의 보상을 누리지 못한다
12절-13절
엄숙한 경고를 우리에게 준다. 이 말씀은 곧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 구원을 잃는다는 것이 아니다. 영적으로 패배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교제가 끊어진다(요일1:7) 구원받은 이후보다 지금의 상태가 더 나은가? 날이 갈수록 더 나은가? 광야에 쓰러져서 시체가 된 자들, 불순종의 결과 호렙에서 가데스바네아(약속의 땅 입구), 열하루 길(신1:2), 그런데 이들은 불순종하면서 38년을 헤매다가 결국 40년 만에 가나안에 들어감. 그런데 겨우 2명만 가고 나머지는 시체가 됨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해야 한다(히4:1).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있다. 구원이 끝이 아니다. 가나안의 안식을 누려야 한다.
14절-15절
확신의 시작을 끝까지 확고히 붙들어야 된다.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마라.
성경 문제: 히3:16, 18
[개역한글]히 3:16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킹제임스흠정역]히 3:16
이는 어떤 자들이 듣고 격노하게 하였기 때문이라. 그러나 모세로 말미암아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자가 그리하지는
아니하였느니라.
[개역한글]히 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킹제임스흠정역]히 3:18
또 그분께서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들이 자신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셨느냐, 오직 믿지 아니한 자들이 아니냐?
[개역한글]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킹제임스흠정역]요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