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이 글을 쓰고 싶었다. 혹은 써야 할 것 같았다. 누가 지운 임무도 아니건만, 그래야만 어떤 매듭이 지어질 것처럼.
영월 글벗문학회 열여섯 번째 문집발간 기념회 겸 시낭송회가 지난 시월의 마지막 날에 열렸다. 글벗 회원이 되어 맞는 두 번째 행사였다. 행사를 마련하는 동안엔 지난해 같은 열정을 느끼지 못했다. 홀로 멀리 떨어져 현장에 함께하지 못한 탓이리라. 변방인의 느낌. 그러니 드는 생각. 어쩌면 지금 난 그 변방인의 한계를 장점으로 바꾸고자 이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허나 행사가 임박해오면서 잔잔한 흥분과 도취를 부르는 풍경들을 만났다. 서울 집근처 공원에서 열린 전국생활문화제 관람객이 글벗 회원의 작품을 종이에 베껴썼고 또 그 모습을 젊은 사진가가 카메라에 담았다. 영월에서 보내온 문집을 지인들에게 보내려 우체국에 갔을 때는 수줍음 많은 우체국 직원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제목이 참 예쁘네요" 했다. 남는 책을 한 권 건네니 마치 황송하다는 몸짓. 제목을 고를 때 내가 최종적으로 민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나온 문집은 꽃다운 감귤빛 표지에 제목과 서체가 맞춤하게 어우러져 조촐한 아름다움을 풍겼다. 문집 제목에 대한 내 생각을 재고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행사 당일엔 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모처럼 사람들 앞에 예쁘게 차려입고 싶은 욕심을 먹었더랬다. 실외행사란 걸 잘 챙겨듣지 못한 탓이었다. 얄궂게도 그사이 따스했던 날씨가 갑자기 매워졌는데 행사를 실내로 옮길 수 없었다. 그래서 당일 집에서 옷을 챙겨입을 때부터 볼이 부어 내려가서는 행사장인 라디오스타박물관에 닿자마자 이런저런 사정도 모른 채 퉁퉁 부은 소리를 해댔다. 젊어 못한 짓 때문에 늙어 주책이라니. 나라면 초가을에나 입을 엄두를 낼 고혹적인 차림으로 등장한 회장님을 보고는 내 소망이 좌절된 이유는 날씨도 장소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달았다. 내겐 추위를 불사할 각오도 열정도 없었던 것이다.
라디오스타박물관에 도착하니 춘미씨랑 미경씨 부군이랑 초대 연주자 유숭일님, 이렇게 세 사람이 안내석을 지키고 있었다. 미경씨 부군은 서울 생활문화제 때도, 29일 라디오스타박물관 시화전시회 시작 때도 나서주었을 뿐 아니라, 당일에도 일찍부터 나와 준비를 돕고 있었다. 글벗의 준회원 자격이라도 부여해야 마땅할 듯 싶다. 현주씨랑 도우미 학생들, 회장님이 이어 도착했고 국밥을 시켜 함께 먹었다. 아쉽게도 순구언니는 귀국하는 따님을 맞으러 시낭송회에 함께하지 못하게 돼 오전 일찍 다녀갔단다. 미리 알면 회원들 기분 가라앉을까 입 다물고 계시다 살짜기 다녀간 게 순구언니답다.
곧 손님들이 당도하기 시작했다. 초대시인 정희성 시인이 먼저 도착하셨다. 내가 손님 맞이 담당 중 하나란 사실을 깜박하고 있었다. 정유경 선배님과 홍정임 선배님이 이 이름 높은 노시인을 맞는 모습을 보고서야 나도 달려갔다. 뒤이어 유승도 김남권 시인이 행사장으로 들어섰다. 홍정임 선배님과 넷이서 담소도 나누고 책도 주고받았다. 속속 닿는 손님들 가운데 아마 7할은 구면이었을 터다. 영월신문 우성희씨는 살뜰한 내 이웃이었는데 내 초대를 받고 와주었다.유숭일님의 부인과는 왠지 서로 끌리는 학습지교사와 학부모 사이였고, 어울맘 서광옥님과 함께 온 봉래중학교 상담실 유수영 선생님은 학습클리닉 교사로 만난 사이다. 엄정미 회원 부군인, 아니 내 '술친구'인 정영주님 말마따나 이제 난 영월의 전국구였다. 그 사이 행사장 한편에서는 유숭일님과 회원들이 리허설을 했고 엄정미 회원의 즉석 연출 하에 간단한 깜짝 퍼포먼스도 준비했다. 그러는 동안 박경장 선생님이 당도했고 이어 문철수 시인도 모습을 보였다. 영월의 대표 시인 고철 시인은 함께하지 못했다. 또 다른 초대시인이신 이상국 시인의 도착은 보지 못해 나중에 자리로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정치인은 군수 말고 아무도 초대하지 않기로 했는데 강명호구의원 모습이 보여 반가웠다. 정작 초대를 받은 박선규 군수는 차례를 지나 당도했다.
날은 날 약 올리기라도 하듯 따사롭고 해사했다. 다만 행사 말미 해가 기울면서 쌀쌀해져 연로한 초대시인 두 분 걱정을 잠시 했을 뿐이다. 우리가 두 노시인께 날씨가 쌀쌀하니 먼저 식당으로 옮기시는 게 어떠냐는 말씀을 드렸으나 두 어른은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셨다. 하늘은 늘 글벗 편이라는 말이 맞나보다. 행사가 시작됐다. 두 번째로 시낭송을 한 신현주 회원이 인상에 남았다. 놀랐다. 목소리 파르르 떨던 지난해와 달리 내내 차분했고 인사말이나 시낭송, 소개말이 야물었다. 그간 마음고생만 한 줄 알았더니 단단해지기도 했나보다. 송춘미 회원은 딸을 시집 보낸 마음을 담은 글을 낭송했는데, 행사 전 본인의 예언대로 결국 눈물바람에 군수님이(?) 손수건을 꺼냈다. 이어 송춘미 회원의 애송시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낭송에 맞춰 깜짝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재미있었지만 내 포즈가 젤 볼품없었다고 장담한다. 정유경선배님의 저 여유와 안정감은 언제나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엄정미 신입회원의 끼와 에너지로 가늠하건데, 아마 이건 시작에 불과할 뿐이리라. 회장님 소개를 아무도 안 했다고 자처해 회장님을 소녀로 소개한 홍정임선배님의 능란함을 넘어 능글맞은 센스.
1부와 2부 사이 막간처럼 이어진 유숭일님의 께냐 연주. 내 귀엔 안데스 지방의 관악기인 께냐의 우수어린 소리가 단풍에 곱게 물든 실외 무대와 참 잘 어울렸다. 이어 초대 시인 두 분의 짧은 강연이 있었다. 두 분 모두 글벗이 드린 강연 주제와 시간 제한을 두고 가벼운 농담으로 운을 떼셨다. 먼저 무대에 오르신 정희성 시인은 이육사의 <광야에서>를 들어 시공간적으로 '큰' 시에 대한 그리움을 말씀하셨다. 이상국 시인은 표절 시비에 휘말린 소설가의 태도를 언급하며 시인은 그처럼 치졸하지 않다고 하셨다. 2부를 마무리한 박경장 선생님의 대금 연주. 콧물을 들이켜 한 음을 놓치셨단다. 사실 두 초대연주자의 연주 악기를 놓고 엄정미 회원과 내가 한 분은 피리를, 다른 분은 기타를 연주하기로 조율을 했는데 어쩌다 두 분 다 피리를 불게 되었다. 한데 왠지 늦가을 고즈넉한 시낭송회 분위기엔 젓대 소리가 더 어울리지 않았나 싶다. 한 자락이든 두 자락이든.
첫댓글 ㅎㅎㅎ 늙어 주책이라고요?
아직 늙었다 하기엔 많이 이쁘십니다
재미있고, 즐겁게!
읽습니다.
계속~을 기다립니다. ^^
다음호에 계속~~
잘 봤습니다....
읽는내내 즐거웠어요~
명숙씨도 통통 튀는구만유~~
긴 문장?을 눈알이 빠지도록 뚫어져라 읽었네요~~~
난 뭐 하느라 이제서야 봤다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