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
17쪽- ‘분명히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지혜롭지 못하다......나는 내가 모르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보다 더 지혜로운 것이 아닐까?’
20쪽- ‘시민 여러분, 당신들......자기의 지혜가 실제로는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다’
35쪽- “나는 이미 오랜 전부터 나 개인의 일이나 집안 일을 전혀 보살피지 않았습니다.”
·의견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으면서 진정한 무지의 자각이란 무엇인가 나 자신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지혜로운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고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에게 가르침을 배우려고 여기저기 찾아다닌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있어서 인정하지 않고, 소크라테스 자기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기 때문에 자신이 오히려 그들보다 더 지혜로운 자라고 말한다. 과연 그는 자신의 무지에 대해서, 한계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은 창조된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만물에 이름을 정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그때 “전 하지 못해요! 어째서 저에게 그런 것을 시키세요?” 하며 반문하는 아담의 모습은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내 생각엔 아담은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 용납하고 모두 받아들인 상태였던 것 같다. 이름을 정하라는 일이 단지 명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깊은 뜻을 발견할 때 아담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못하는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 했을 때 사물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선악과 사건 이후로 그는 자신의 잘못과 한계를 용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부끄러움을 자기 자신에게서 느끼게 된다. 자신의 모습을 모두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를 보면 본인은 자신의 한계와 무지를 이해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또 자신은 개인의 일이나 집안일을 전혀 보살피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만 있지 그것을 받아들이고 용납하여 나아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진정한 무지의 자각이란, 자신의 한계를 이해하고 용납했기 때문에 더 나아진 모습으로 한계를 고치려 하는 것이 아닐까? ‘난 이런 사람이니까 못해.. 난 원래 이런 놈이야’가 아니라
‘난 이러한 모습이 있으니까 이렇게 고치면 더 좋겠지?’ 하며 자신의 발전 계기로 삼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한계를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 같아서 나는 놀라워했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책을 읽어나갈 때 그가 자기 자신에게서, 또 가정에서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를 보고 진정한 자기 한계의 이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 자신을 가장 먼저 이해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 때. 그때 내가아닌 너를 위해서 더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고 생각 할 수 있을 것 같다.
첫댓글 very 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