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
줄(啐)과 탁(啄)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 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으로, 가장 이상적인 사제지간을 비유하거나, 서로 합심하여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출전
‘줄탁동시’는 ‘오이가 익으면 꼭지가 저절로 떨어진다.’라는 뜻의 ‘과숙체락(瓜熟蒂落)’과 쌍을 이루어 ‘때가 성숙하면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며, 기회와 인연이 서로 투합한다.(瓜熟蒂落, 啐啄同時)’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로, 원래 민간에서 쓰던 말인데 송(宋)나라 때 《벽암록(碧巖錄)》에 공안(公案, 화두(話頭))으로 등장하면서 불가(佛家)의 중요한 공안이 되었다.
「경청(鏡淸)은 항상 줄탁지기(啐啄之機)로 후학들을 깨우쳐 주었다. 그는 일찍이 대중들에게 말했다. “행각하는 사람(사방을 떠도는 중)은 반드시 줄탁동시의 눈을 가져야 하고 줄탁동시의 씀을 가져야 비로소 승려라 할 수 있다. 마치 어미가 밖에서 쪼려고 하면 새끼가 안에서 쪼지 않을 수 없고, 새끼가 안에서 쪼려고 하면 어미가 밖에서 쪼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鏡淸常以啐啄之機開示後學. 曾示衆說, 大凡行脚人, 須具啐啄同時眼, 有啐啄同時用, 方稱衲僧. 如母欲啄, 而子不得不啐, 子欲啐, 而母不得不啄.)」
알 속에서 자란 병아리가 때가 되면 알 밖으로 나오기 위해 부리로 껍데기 안쪽을 쪼는데 이를 ‘줄’이라 하며, 어미 닭이 병아리 소리를 듣고 알을 쪼아 새끼가 알을 깨는 행위를 도와주는 것을 ‘탁’이라고 한다. 병아리는 깨달음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수행자요, 어미 닭은 수행자에게 깨우침의 방법을 일러 주는 스승으로 비유할 수 있다. 안과 밖에서 쪼는 행위는 동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스승이 제자를 깨우쳐 주는 것도 이와 같아, 제자는 안에서 수양을 통해 쪼아 나오고 스승은 제자를 잘 보살피고 관찰하다가 시기가 무르익었을 때 깨우침의 길을 열어 주어야 하는데, 이 시점이 일치해야 비로소 진정한 깨달음이 일어난다.
‘啐’은 ‘빠는 소리 줄’, ‘맛볼 쵀’, ‘떠들썩할 잘’ 등의 음을 가지고 있다.
마조도일 선사는 중국 선종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기신 분이다.
어느 날 마조 선사가 열심히 좌선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의 스승인 남악 선사가 “무엇을 하느냐?”라고 묻는다.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라고 대답을 한다.
남악 선사는 조금 후에 벽돌을 들고 와서 마조 선사 앞에서 열심히 갈기 시작한다.
마조 스님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묻자 “거울을 만들려고 벽돌을 갈고 있다.”라고 말한다.
“벽돌을 간다고 거울이 됩니까?”라고 물으니 “좌선을 한다고 부처가 되느냐?”라고 일침을 가한다.
마조 스님은 가르침을 구하고 남악 선사는 “만일 소가 수레를 끌 때, 수레가 움직이지 않으면 수레를 쳐야 하느냐, 소를 쳐야 하느냐”라는 가르침을 전한다.
‘줄탁동시’의 사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이다.